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11화 (11/656)

제 011화

“네가 이렇게 잘 클 줄은 몰랐다.”

“그렇죠.”

“오후 2시에 케이크가 다 팔려 버려서 가게 문을 닫게 될 줄도 몰랐고.”

“음… 그거는 사실 좀 일부러 맞추는 것도 있어요, 아버지.”

“어? 일부러 하루에 백 개씩만 만들고 있는 거야?”

“당연하지요.”

“안 팔릴까 봐 걱정되어서가 아니고?”

“여기가 번화가도 아니고… 솔직히 이 빵이나 케이크가 사람들이 매일 매일 사가서 먹는 종류의 음식은 아니지 않나, 라고 생각해서요.”

“뭐 경로당 금 씨 할매야 매일 사가시지만.”

“그 할머니는 그냥 치즈 케이크가 좋으신 것 같고요.”

항상 씩씩하게 케이크를 매일같이 사 가시는 고물상 금 할머니를 생각하며 부자가 동시에 웃었다.

“건강도 좋으시죠.”

“요즘 더 기운이 펄펄 나시더라. 역시 사람은 늙어도 일을 해야 해. 일을 하지 않는 사람하고 하는 사람하고 늙는 속도가 달라. 일을 해야 안 늙더라고.”

“음.”

‘일찍 은퇴하시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하시는 게 아니었구나. 아버지는 평생 일하실 셈인가?’

내일 구울 반죽들도 전부 냉장고에 들어가서 숙성되는 중이다. 먼저 넣어놓은 케이크 숙성은 다 끝났다.

“그런데 어떤 색깔로 프로스팅하시려고요?”

“음, 네가 황혼을 했잖으냐.”

“그렇죠.”

“황혼이 지나면 밤이 오고.”

“밤…… 나이트 케이크? 새까맣게요? 오징어 먹물을 사용해서 데코레이션을 해볼까요?”

진혁이 검은색 식용색소를 집어 들었다.

“아니, 아니. 검은색은 음식에 쓰는 게 아니야. 짜장면 빼고는 잘 안 먹지 않나? 그건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색깔이 아니지.”

아버지는 잠시 창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금빛 태양이 떠오르는 새벽. 그 새벽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니 어미와 함께 황혼을 보내고 있으니까 새벽을 함께 보내고 싶구나.”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럼 남색하고 푸른색, 흰색이랑 노란색을 섞으면 되겠어요.”

“그래, 그래서 푸르스름한 하늘에 금색 원을 그리려고 하는데. 노란색을 따로 분리해서 얹는 게 어려워서 말이다.”

“음….”

진혁은 주홍색과 금빛을 분리할 때 보통 세밀한 강기의 그물을 짜서 색깔을 나누었다. 지금은 그 방법을 쓸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그럼 노란색은 아예 크림으로 얹을까요?”

“그래, 그럼 좋겠다.”

아버지가 웃었다.

딸그랑.

이미 ‘Closed’ 즉 가게를 닫았다는 명판이 내걸려 있는데도 바깥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지?”

아버지가 일어나려고 하는 찰나 진혁이 먼저 나섰다.

“누구십니까. 영업이 끝났습니다만.”

“흠흠, 흠. 운정이 아저씨를 찾아왔는데요.”

아버지 이름을 말하며 들어오는 비쩍 마른 사내는 진혁보다 3, 4살 많아 보였다. 눈썹이 특히 가늘고 수염 깎은 자국이 지저분하게 보였다. 진혁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맞은편 가게 주인인 김찬일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 그래. 진수냐?”

찬일이 아무렇지 않게 문을 밀고 가게로 들어오려 했다. 진혁은 꼼짝하지 않는 힘으로 맞섰다.

“…진수가 아니고 진혁이입니다.”

“그래, 그래.”

뒤에서 아버지가 나왔다.

“찬일이, 무슨 일인가?”

“인사를 좀 드리려고….”

맞은편에 있는 스위트 바게트는 며칠째 손님이 적어 곤란을 겪고 있다. 진혁도, 진혁의 아버지도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사실이다. 그곳의 알바생 일봉이는 곧잘 와서 빵을 몇 개씩 사 가곤 했지만 찬일은 단 한 번도 들르지 않았다. 가게를 오픈할 때에도 다른 가게에는 떡을 돌렸지만 이곳에는 걸음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왜 여기에 왔단 말인가.

“일 없습니다.”

문을 닫고 밀어내려 하는 진혁의 어깨에 아버지가 손을 얹었다.

“그냥 들어오게 해라. 내가 할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는 주방에 찬일을 불러들이고서 진혁에게 눈짓을 했다. 진혁은 소스 팬과 식용색소를 잽싸게 낚아채서 밖으로 나갔다.

달칵.

아버지가 주방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진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 들린다.’

그는 원한다면 5리 밖의 가정집에서 나는 소리까지 직접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청력이 뛰어났다. 이곳은 좁고 시끄러워서 넓은 초원에서 특정한 소리를 분석하는 것보다는 번거롭다. 하지만 최소한 스위트 바게트 안에서 들리는 소리 정도는 노력 없이 바로 구분해서 들을 수 있다. 천안투마공의 공능에 청력이 뛰어나게 하는 능력은 없지만 그의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보조하는 것이다.

주방 안에서 털썩, 하고 바닥에 무거운 것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무릎이라도 꿇었나 보군.’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런 솜씨를 숨기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사부님.”

“내가 왜 니 사부냐? 노예처럼 부려먹는다고 뛰쳐나가더니 남의 가게 바로 앞에 프랜차이즈를 차려놓고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진혁은 묵묵히 소스 팬에 있는 녹은 젤라틴을 흔들었다. 사기그릇에 각각 나누어 다섯 가지 종류의 색깔을 섞었다.

‘초콜릿 판을 대신할 노란색, 밤을 표현할 쪽빛, 그리고 흰색과 하늘색.’

“내가 네 형편을 안타깝게 봐서 일을 배우라 했는데, 중간에 그만두고 간 놈이 뭐가 아쉽다고 지금 와서 무릎을 꿇어?”

진혁이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처음에 데려와서 일을 시킨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어? 그렇다면 아버지가 더 크게 실망했던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향은 좋지 않다. 이렇게 구박한다는 건 조금 후에 아버지가 용서를 할지도 모른다는 거다.

‘회귀 전, 저놈은 마지막까지 아버지에게 인사 한 번 하러 오지 않았다. 우리 가게가 완전히 망할 때까지…….’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도 말라 했다. 진혁은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저한테는 아무것도 안 가르쳐 주셨잖아요! 돈도 한 푼 안 주시고!”

갑자기 빼액하고 찬일이 소리를 질렀다.

“지금 아들이 와서 일을 배우니까, 걔한테는 온갖 기술을 다 알려 줘서 지금 가게가 잘 되고 있지 않습니까. 저한테는 가장 기본적인 빵 반죽만 삼 개월을 시키고……가게 청소하고 밀가루 포대 나르는 잡일만 시키고.”

‘그런 잡일부터 하면서 일을 배워나가는 게 당연하지.’

아버지가 죽고 갈 데가 없다고, 친구 부인이 부탁해서 어려운 가게 형편에 억지로 맡았다.

“돈도 한 달에 십만 원이나 줄까 말까 하는데, 친구들이 그게 바로 사람 착취하는 거라고.”

진혁은 팔짱을 끼고 잘 섞여 선명한 색이 드러난 젤라틴 접시를 바라보았다.

“네 어머니에게 송금하고 있는 걸 몰랐냐?”

아버지가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네가 낭비벽이 있다며 네 돈은 자기가 모아서 한꺼번에 줄 테니까 직접 달라고 하셨어. 그래서 네 어머니에게 드렸다고.”

“뭐라고요? 그럼 제가 이번에 가게 만든다고 어머니에게 받은 돈이…….”

“이 은혜도 모르는 새끼야.”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고 험악했다.

“네가 김찬욱, 내 불알친구 놈 자식이 아니었으면. 니가 그냥 모르는 일반 제빵사였으면. 우리 가게 맞은편에 가게를 여는 그 순간부터 내가 널 찾아가서 이야기를 했을 거다. 그런데 내가 왜 찾아가지도 않고 너를 그대로 두고 봤다고 생각하냐?”

“어… 제가 금의환향한 걸 싫어하셔서 오시지도 않는다고….”

“아예 이쪽으로 얼굴도 쳐다보지 않은 새끼가 말은 잘하는데,”

아버지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네가 쓰레기 같은 오해를 했다는 것도 알겠고, 이번에 사과하러 온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겠다.”

“네?! 아니… 저…… 그….”

더듬거리는 얼굴이 분명히 새빨개졌을 것이다.

‘흠.’

진혁은 덜어놓은 노란 젤라틴에 흰색 젤라틴을 아주 약간 부었다. 이것은 섞어서 연노랑 색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고, 흰색과 노란색이 아주 조금 섞여 예쁜 무늬를 만들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한 번만 저어주면 된다.

“사과할 놈이었으면 애초에 사과할 짓을 안 했겠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뒤늦게 미안하다는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이미 돌아선 것으로 보였다. 정이 많고 마음이 약한 분이시지만 단호할 때는 단호하다.

“저 이번에 어머니 명의로 빚까지 져서 이번에 이 가게가 망하면 정말로 끝이에요. 그냥 받아서 굽기만 하고 이런 동네면 장사가 잘 될 거라고 해서 믿고 한 건데….”

철썩.

아버지가 어딘가를 쳤다.

‘아마도 뺨.’

헉하고 놀란 소리가 났다.

“사부님!!”

아파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정말로 놀란 목소리를 낸 것은 찬일이었다.

“내가 너를 잘못 가르쳤으니까, 내가 내 뺨을 쳐야지.”

음한지기를 보내어 젤라틴을 식히고 있던 진혁이 순간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노랑 젤라틴은 그대로 접시째 얼어붙었다. 진혁의 손에서 차가운 음기가 살살 흘러나가 바닥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드라이아이스에서 흰 한기가 솟아오르듯 오싹오싹한 기운이다.

‘저 새끼 때문에 아버지가 자기 뺨을 때리셨다고?’

분노가 뭉클하게 솟아오른다.

“아닙니다, 제가 못된 놈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쿠쿵, 쿵.

단단한 것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진혁은 참지 못하고 문에 손을 가져갔다. 고리가 걸려 잠겨 있던 문이다.

빠각.

그대로 고리가 부서져 나가며 열렸다.

“아버지.”

“진혁아.”

찬일의 이마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바닥에 여러 차례 부딪힌 것이다. 바닥에 얼룩진 선명한 붉은색을 보며 진혁은 더 짜증스러워졌다. 오늘 아침에도 조리대부터 바닥까지 일부러 청결하게 닦았던 터다.

“주방 바닥이 더러워졌군요.”

차갑게 말하는 진혁 주변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아버지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됐다, 이제 볼 일 없는 녀석이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그럼 가게를 닫고 여기 막내로 들어오든가!”

아버지가 결심한 듯이 말했다.

“저, 대출금하고 밀린 돈이….”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지.”

“오해가 있었다, 진수, 아니 진혁아.”

황급히 변명하려는 찬일에게 진혁이 말했다.

“오해한 건 당신 잘못입니다.”

진혁은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너무 부드러우세요.”

찬일은 갑자기 온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직 그에게만 집중된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찬일은 갑자기 온몸을 벌벌 떨다가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우웩, 웩!”

놀란 아버지가 찬일을 부축해 일으켰다.

“괜찮냐, 찬일아!”

‘젠장.’

황급히 진혁은 살기를 거두었다. 찬일이 쓰러지는 것을 안아 올린 아버지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이, 이런. 119를 불러라, 진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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