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10화
‘나는 수만금 앞에서도 돈에 연연하지 않았어.’
아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진기를 순환하는데 뇌 한구석에서 음침한 기운이 솟아나 깨끗한 기운을 더럽혔다. 금을 수천 냥, 수만 냥 쌓아놓고서도 진짜 돈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 그곳에서의 삶을 자신이 진실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은 과연 그들에게 진실했는가. 명문혈에서 허리를 따라 빙 돌아간 양기가 다시 명문혈로 돌아갔다.
‘게임머니가 진짜 돈으로 보이지 않는 것처럼. 게임 NPC들을 진짜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처럼. 나는 그들에게 진실했나.’
그 돈이 진짜 돈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건 그 사람들도 진짜 사람으로 보지 않았던 게 아닐까.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던 그 부하들… 꺼림칙함, 불편함. 마음 한구석의 죄책감.
심마가 찾아왔다.
이 꺼림칙함과 불편함은 비단 무림에서의 부하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과 누나가 보는 것을 속인다는 것은 사실…… 그저 그들을 속이는 것이 아닐까.’
그들을 정말로 사랑하고 믿는다면 자신이 겪어온 아수라장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전부 솔직히 털어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왜 자신이 이렇게 변했는지 알려드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중원에서 아무에게도 자신이 한국에서,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약점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여기서 자신이 왜 이전과 다른지 부모님께 알려드리고 납득하게 해드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명문에서 대추혈로, 그리고 다시 양팔을 지난 진기는 손바닥의 노궁혈을 통과하여 다시 돌아왔다. 단단한 기맥을 차오르는 진기가 온몸을 쑤신다. 이 고민이 더 무겁고 아팠다.
“……!”
울컥, 하고 검은 피를 토해냈다. 온몸의 근육과 뼈가 뒤틀리며 내장이 찢어지는 격통이 엄습해 왔다.
우두둑, 우두둑.
몸이 완전히 다시 만들어진다. 현재까지의 육체를 벗고 무공을 익히기에 완전한 신체로 거듭난다. 하나 본래 천무지체를 타고난 진혁의 환골탈태는 그 이상.
바닥에 검은색 찌꺼기가 가득 고였다. 퀴퀴하고 지독한 냄새가 난다.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찌꺼기들을 허공으로 떠올려 그대로 불태워버렸다. 삼매진화를 부르는 데에 진기를 끌어올릴 필요가 없다. 대자연의 기운, 그 자체의 힘을 빌렸다.
“이제 부모님도 환골탈태를 하실 때가 됐지.”
거울 맞은편에 보이는 자신은 이전보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다. 꽉 조인 마른 근육이 팔부터 다리, 배까지 선명하게 드러났다. 무공을 한창 익힐 때의, 최적화된 신체다.
거울을 본 진혁이 섬뜩하게 웃었다.
◈ ◈ ◈
다음날 늦은 오후.
끊임없이 손님이 몰려들다가 잠시 한가해졌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늦은 오후, 점심시간이 지나고 저녁 시간은 오기 전 잠시 여유 있을 때다.
아버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진혁이 물었다.
“아버지, 오늘은 김치찌개를 시킬까요?”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아버지는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망설이고 계셨다. 진혁이 힐끔 아버지 핸드폰을 보았다. 어머니의 문자다.
[오늘 점심은 내가 해 가지고 갈게요. 새벽에 매일 나가는데 아침도 못 챙겨서 미안하네요]
‘어머니께서 오시는구나.’
진혁은 곧 대주천을 시작했다.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진혁의 얼굴에 훨씬 더 민감하다. 피부 결이 조금만 좋아져도 금방 눈치챈다.
잠시 기다리자 곧 얼굴이 발개진 어머니가 반합 도시락을 들고 들어오셨다.
“여보! 어머. 우리 귀한 아들 얼굴 오랜만에 보네.”
오랜만에 마스크를 벗고 일하고 있는 진혁이다. 그 얼굴을 보며 어머니가 반가워했다.
‘두 명까지는 괜찮군.’
한여름. 한창 더운 날인데 어머니께서 검은 비닐봉지에서 보온병을 꺼내셨다. 아버지가 입맛을 다시는데 어머니는 진혁에게만 한 잔을 따라 내놓았다.
“감기 기운이 계속 있다 해서 홍삼 꿀차를 타 놨다. 좀 마시고.”
“이런 건 어머니 아버지께서 마시셔야죠.”
홍삼 꿀차! 이건 아버지가 아주 좋아하는 음료다. 옆에서 아버지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말본새가 아주 백년 효자가 간데없네. 먹어, 네가 좀 먹어! 우리 빵집이 그렇게 맛있다고 아파트에 소문이 다 났어. 우리 부녀회에서도 좀 달라고 난리야. 오후 2시에 가면 매진되고 없다며?”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따라주지 않았다.
“아. 일부러 개수 제한을 둬서 만들고 있어요. 너무 많이 만들어서 남으면 곤란하고. 이 동네에 오는 사람 수 자체가 한정되어 있으니까.”
종이컵에 자기가 마실 홍삼 꿀차를 따르던 아버지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그런 거였어?”
“네.”
“나는 니가 나한테 다른 건 다 알려줘도, 요번에 만든 쿠키나 빵은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개수를 조절하는 게…… 네 비법을 아비에게도 알려주기 싫어서 그런가 싶었다.”
‘어라?’
그런 오해를 사고 있었단 말인가? 진혁이 다급하게 양팔을 저으며 설명했다.
“아버지께서 새벽에 일찍 나와서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는 게 어려워서, 그리고 제가 이걸 처음 하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게 어려워서……”
“아이고, 알겠다. 알겠어! 결국 날 생각해서 그랬구만. 하지만 이런 빵을 보면 나도 만들어보고 싶어지지. 나도 빵 만드는 걸 좋아해서 이걸 하고 있잖냐.”
“그럼 지금 바로 알려 드릴게요.”
“호호, 두 사람 점심은 먹고 해야지!”
달걀말이와 된장국, 그리고 하얀 쌀밥에 김치.
마치 집의 밥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밥상이다. 어머니께서 그릇과 수저, 젓가락까지 전부 챙겨 오신 덕에 더욱더 그랬다.
“이거 반상만 가져왔으면 그냥 집 밥상이네.”
“무거운데 밥하고 반찬만 가져오시지.”
“요즘 네가 해주는 마사지가 효과가 있는지 아주 힘이 번쩍번쩍 나. 이 정도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니까?”
‘추궁과혈이 아버지 아니라 어머니께도 효과가 있군……’
어머니가 양팔을 들어 올려 알통을 만들어 보였다.
진혁은 밥을 한 수저 떠서 입안에 가져갔다. 하얀 밥알 하나하나가 입안에 착 달라붙었다. 직접 한 김치를 두 줄기 주욱 찢어 붉은 양념에 버무려 다시 밥수저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다시 된장국 한 입.
‘어머니는 항상 직접 만든 두부를 넣어 아욱 된장국을 끓이시지.’
너무나 그리웠던 집의 맛.
‘하지만 두부를 만드는 능력은 좋지 못하셔서 두부는 단단하고 텁텁해. 맑고 부드러운 두부가 아니라 튀김 두부 같지.’
그 못 만든 두부가 그리웠다.
“어머니, 너무 맛있어요.”
“어머, 뭐야. 너 이거 먹고 지금 우는 거야?”
“울다뇨. 그냥.”
“그런데 왜 눈가가 실룩실룩거려? 얘가 진짜! 그 정도로 맛있어?”
“……네, 그 정도로 맛있네요.”
단단한 두부를 우물거리며 먹고 있던 아버지가 곁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울 정도로 맛없냐?”
속삭이는 소리를 다 들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옆구리를 쏘옥! 검지손가락으로 찔렀다.
“여보! 당신은 진짜!”
‘제가 지금 꿈이 아니라 이곳에, 현실에 있는 게 맞겠죠.’
◈ ◈ ◈
“벌써 빵이 다 떨어졌네. 내일부터는 좀 더 만들어야겠다, 진혁아.”
“네, 매진 팻말 걸어놓을게요.
어머니가 그릇 등을 챙겨 돌아가시고 두 시간 후. 만들어 놓은 빵이 다 팔렸다. 진혁이 바깥에 매진 팻말을 걸었다.
‘이제는 아버지와 케이크 만드는 연습을 할 때도 됐지.’
그렇지않아도 진혁은 아버지가 만들기 쉽게 시그니처 메뉴 레시피를 새로이 변형시켜두었다.
‘아버지는 허공섭물도, 삼매진화도 할 수 없으시지.’
아버지께 무공을 가르쳐드리는 것이 옳은가? 그것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필연적으로 어떻게 알게 됐느냐는 이야기를 불러오게 될 것이고….’
진혁은 천천히 손으로 반죽을 시작했다.
“반죽하시는 것은 기존에 하시던 거랑 다르지 않아요. 그냥 여기에 크림치즈가 더 들어갔을 뿐이고요.”
“크림치즈를 세 종류를 넣는구나. 이 넣는 순서도 의미가 있나?”
적어둔 레시피를 살펴보면서도 반죽하는 손은 쉬지 않는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필라델피아가 제일 마지막에 들어가는 게 좋더라구요.”
“이 하얗고 몽글몽글한 건 못 보던 건데?”
“그건 제가 만들어 둔 거예요. 우유로 직접.”
“밤에 늦게까지 가게에 있더니 별걸 다 하는구나!”
“만들고 남은 유청은 따로 모아 놨으니까 필요하면 말씀하시고요.”
“당장은 유청 쓸 데는 없는데…….”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죽에 집중하였다.
“안에는 화이트 커버춰 초콜릿을 쓰고요.”
“아.”
이제 갓 반죽을 다 만든 아버지가 곤란해 하며 고개를 들었다. 진혁이 준비된 트레이를 내밀었다.
“재료는 제가 이쪽에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이거 그대로 쓰시면 돼요.”
설탕과 바닐라 파우더, 슈가 파우더, 식용색소와 분리된 달걀, 노른자와 흰자.
붉은색과 주황색, 노란색과 분홍색 식용색소를 본 아버지가 잠시 눈알을 굴렸다.
“이거 나는 다른 색깔로 해보고 싶은데…….”
혹시 아들놈이 기분 상할까 싶어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아버지였다.
“어떤 색깔로 해보고 싶으세요?”
“네가 황혼을 이미지로 해서, 크림슨 케이크라고 했다며?”
“그렇죠.”
“치즈 케이크도 아주 평이 좋은데, 나는 바닐라 버터 크림 케이크에 겉에만 이 데코레이션을 하면 어떨까 했지. 바닐라 케이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까.”
“아.”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바닐라 케이크를 좋아하신다.
‘아버지께선 어머니께 기념일마다 꼬박꼬박 바닐라 케이크를 구워다 드리셨지.’
“정말 사이가 좋으시네요.”
“흠, 흠. 손님들 말이다, 손님들.”
“그런데 지금 반죽은 어차피 치즈 반죽이니까…… 이건 일단 치즈 케이크로 구우세요. 제가 바닐라 케이크 시트를 따로 구워 놓을게요. 프로스팅을 그때 케이크 두 개분, 그때 같이 하면 되고.”
“오, 그래? 오늘 밤에 바닐라 케이크를 하나 만들어 가지고 가면 아주 기가 막히게 딱 좋을 것 같은데.”
아버지가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에 진혁은 생각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진혁은 오늘 날짜를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달력을 한 장씩 넘겨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새로 바닐라 케이크 시트를 준비하면서 결국 소리 내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요?”
아버지는 치즈 케이크를 다 만들고 냉장고에서 식히는 중이었다. 한숨을 푹 쉬더니 대답해 주셨다.
“결혼기념일이지. 큼.”
“…제가 미리 생각했어야 했는데, 어쩌죠?”
“아냐, 나도 아까 네 엄마가 내 옆구리 찌르면서 알았다. 계속해서 눈치를 주면서 나만 구박하는데, 흠….”
아버지가 어머니를 많이 좋아하시는구나.
전에는 몰랐다.
‘음한지기를 이용해 케이크를 식히면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아버지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드릴 수는 없다. 2시간 동안 냉장고 안에서 케이크가 식기를 기다려야 한다. 진혁은 불려놓은 젤라틴을 녹이고 다른 빵을 위한 반죽을 하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아버지 또한 옆에서 튀김 빵용 반죽을 하고 조그맣게 올리고 굽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