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8화 (8/656)

제 008화

아이 어머니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맛보면 제가 사가야 하잖아요.”

“괜찮습니다.”

진혁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장식장 안에 들어 있던 케이크를 하나 꺼내 접시 위에 올려놓고 아주 얇게 잘랐다. 신용카드처럼 얇게 잘린 케이크가 층층이 쌓였다.

“칼을 기가 막히게 쓰시네.”

아이 어머니가 감탄하며 풀어진 듯이 웃었다.

짝짝짝.

뒤늦게 아이가 박수를 쳤다.

“엄마, 나 이 케이크 사 줘!”

“기다려 봐, 엄마 좀 먹어보고.”

풍겨 나오는 향내부터 범상치 않다. 아이 어머니는 플라스틱 포크를 손에 받고 두근거리며 기다렸다.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는데, 안에 있던 케이크를 꺼내니까 향부터 다르잖아?’

냄새를 맡자 입에 침이 고인다. 진혁이 천천히 얇게 썬 케이크 조각을 종이컵에 담아 건넸다. 아이 어머니는 카드처럼 얇은 케이크를 포크 끝에 조금 찍어 입에 넣으려 했다.

“엄마, 나부터!”

아이가 입을 벌리며 졸랐다. 아이 어머니는 홀린 듯이 자신의 입에 케이크를 넣었다. 얇게 썬 케이크 조각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입술에 주홍빛 크림을 묻힌 채 아이 어머니가 부끄럽게 웃었다.

“어머, 어머, 어머. 저 이거 세 조각 주세요.”

옆에서 소년이 부러 울상을 지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울먹 양 뺨을 떤다.

“엄마! 나는!”

“……죄송하지만 아이한테도 샘플을 좀 주실 수 있을까요?”

“네, 바로 드리죠.”

모자가 벌이는 촌극을 구경하고 있던 진혁이 싱긋 웃었다.

“전 단 건 정말 못 먹고 치즈도 향이 너무 진한 건 싫어하는데. 이건 향이 깊으면서도 맛이 담백하고 폭신폭신하고…… 하여튼 너무 맛있네요! 예쁘기까지 하고!”

“아까는 예쁜 것은 맛있기 쉽지 않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러게요, 여기에 예외가 있네요.”

아이 어머니가 얼굴을 확 붉혔다. 아까와는 자못 다른 태도였다.

“제가 막말을 해서 죄송했어요.”

진혁이 아무렇지 않게 케이크 세 개를 포장해서 건넸다. 아이에게 따로 샘플을 챙겨 준 것은 물론이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로는 막말이라고 할 수도 없지.’

중원이라면 부모의 안부를 물어보는 고풍스럽고 거창한 인사부터 시작해서 바로 칼부림이 날아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런 가벼운 말 몇 마디에 분노를 격하게 쏟아내기에는 진혁은 너무 오래 살았고 많은 것을 겪었다.

아이 어머니가 빵을 받아들며 다시 말했다.

“제가 여기 산목 아파트 부녀회장이에요. 이번에 부녀회 할 때 여기 빵이 맛있다고 소문을 잔뜩 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진혁의 감사합니다에 좀 더 감정이 섞였다. 아이 어머니가 픽 웃었다.

“많이 파세요.”

아이는 그새 입안에 케이크를 전부 넣어버렸는지 입가에 크림을 잔뜩 묻히고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저 샘플 조금만 더 주세요.”

진혁은 아이 어머니를 곁눈질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집에 가서 먹어라.”

아이 어머니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저도 혹시 샘플 한 조각만 더 먹을 수 있을까요?”

진혁은 잠깐 생각했다.

“……샘플은 샘플이라…… 죄송합니다.”

밖에서 손님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있었다. 둘만 있었다면 넌지시 챙겨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다른 손님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이 모자에게만 빵을 더 챙겨 주면 곤란하다.

“여기 시식도 해요? 저도 먹어볼래요.”

“저도요!”

투명한 유리창 바깥에서 신기한 케이크를 보고 어슬렁거리던 이들이 시식하는 광경을 보고 하나둘씩 무리 지어 들어온 것이다.

‘좋아, 시식만 하게 하면 되는군!’

◈          ◈          ◈

햇살경로당.

60세 이상의 노인들이 열둘, 자원봉사자가 셋. 이곳에 평소에 있는 인원수다. 사람 수에 맞춰 케이크를 사 온 금천복 할매는 자랑스레 모임에 케이크를 내놓았다.

“내가 오늘은 빵을 사 왔소.”

“거. 께이끼 아뇨, 께이끼! 요 앞에 오던 길에 께이끼를 천 원에 팔더만.”

눈치 없는 홍 노인이 가격부터 말한다. 먹물깨나 먹으며 나이 든, 훈장 출신 감 노인이 아는 척을 했다.

“께이끼는 빵이 아니요. 이스트인가 뭔가를 써서 발효를 시켜야 빵이우. 께끼는 과자라고.”

“흥! 과자는 건빵이나 비스켓처럼 돌같이 단단한 걸 말하는 거지. 할배가 빵을 사 왔으면 고맙다고 닥치고 먹지를 않고 구시렁구시렁 말이 많아.”

“내가 맞는데…….”

감 노인은 입안으로 말을 웅크리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월 이십만 원 나오는 연금 받아 간신히 입에 풀칠하며 먹고사는 감 노인은 입장이 약했다. 홍 노인은 아들이 매달 오십만 원은 부쳐 준다고 유세를 떨었다. 자기 고물상이 있으면서 꾸준히 폐지 줍기도 하는 금천복 할매처럼 유능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맛난 간식거리를 사 올 때 무어라 토 달만 한 입장은 아니다.

바스락.

금천복 할매가 봉지에서 황금 버터 앙금 소보루를 꺼냈다. 지켜보던 다른 할매, 할배들이 감탄사를 토했다. 노르스름한 빵은 복스럽게도 주먹보다 한참 크기가 크고 강한 버터 향을 풍겼다. 코가 한참 둔한 막할매도 코를 킁킁대며 가까이 다가왔다.

“우와!”

“이 빵은 값이 좀 나가겠는걸.”

“노랭이 할매가 큰돈을 썼네!”

감 노인이 박수를 쳤다. 보통 사오는 간식거리라야 천 원에 세 개인 붕어빵, 두 개인 아이스께끼 같은 것이지 이렇게 고가로 보이는 빵을 사 오는 경우는 드물다.

“개당 천 원이나 줬어. 넉넉히 가져왔으니 하나씩 드시고 하나는 집에 가져가시라.”

“곳간이 넉넉한데 인심이 난다고, 역시 금천복 할매여!”

감 노인이 슬그머니 손을 뻗어 빵을 집었다. 입가에 저절로 침이 고인다. 틀니 없이 잇몸으로 먹어야 하는 감 노인이 조심스레 빵을 찢어 부드러운 부분만 더듬는 사이 다른 할매 할배들은 이미 입에 빵을 욱여넣었다. 주름 어린 조그만 입들이 고물고물 순식간에 빵 하나를 목구멍 너머로 삼킨다.

“하이구마, 이거 아주 쭉쭉 들어가네! 막걸리같이 수월혀!”

“단감보다 더 달어!”

홍시에 환장하는 홍 노인이 허벅지를 철썩철썩 치며 기뻐했다.

“하이고, 어마 맛있능거.”

게걸스레 빵에 달려드는 노인들. 그 와중에 감 노인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할매 맘씨가 참 고와서 그놈이 참 복이 많았소…….”

이 감 노인은 다 좋은데, 눈치가 없다. 금천복 할매가 뭐라 말하려던 찰나 홍 노인이 호통을 쳤다.

“금씨 할매가 맘씨가 좋건 말건 영감이 뭔 상관이래? 이미 묻은 지 육십 년이 넘었는데 왜 자꾸 죽은 영감 얘기를 꺼내? 감 노인은 거 입만 조심하면 되는 것을 함부로 어디서 입을 놀리나!”

금천복 할매는 이마를 찌푸렸다. 본인이 말하기도 우습지만 남이 말해주니 더 불편하다. 홍 노인과 감 노인은 유일한 남자로 이 무리 속에서 서로 금천복 할매의 옆자리를 차지하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다. 감 노인이 떨떠름하니 대답했다.

“아니 홍 씨는 지금 뭐라고 우리 금 씨 할매 대변인을 혀? 대체 뭔 상관이라고.”

할아버지 둘이 티격태격한다. 매일 있는 일이다. 금천복 할매는 곧 관심을 끊고 조심스레 입안에 빵을 넣으며 딴생각을 했다.

“참한 총각이던데……. 보기만 해도 기운이 펄펄 나는 것이 참…… 빵은 참 달다! 이처럼 인생도 달았으면. 우리 손녀딸이 그 총각이랑 잘 어울리지 않으려나. 내가 육십 살만 젊었어도!”

“오, 오늘 이만큼 벌었다고?”

오만 원, 만 원짜리 지폐가 가득 쌓여 포스기를 꽉꽉 채웠다. 금일은 주방에서 내내 진혁이 알려준 대로 케이크를 만드는 연습만 계속했던 아버지였다. 삼십 년 제빵을 한 내공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라서 진혁이 한 그대로 모든 빵을 재현해낼 수는 있었지만 그 마무리가 어딘가 어설펐다. 맛은 똑같지만 데코레이션이 덜 됐다고나 할까.

“어디 보자, 매출이… 오늘만 팔백만 원.”

“허, 참! 엄청난 매출이야!”

아버지가 가슴을 탕탕 치며 크게 외쳤다.

“진혁이 네가 정말로 복덩이구나! 복덩이야!”

“조금 더 해 보고, 빵의 종류도 늘려 볼게요. 생각해 놓은 게 몇 개 있어요.”

“그래,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          ◈          ◈

한편, 스위트 바게트에서는 정반대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빵집 주인 김찬일은 근심스레 눈썹을 치켜뜨며 포스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려봐도 포스기 안에 담긴 금액은 변하지 않았다.

“이상하다, 오늘 매출이 왜 이렇게 저조하지? 특히 케이크는 하나도 안 팔렸어.”

“그러게요, 사장님.”

굳이 더운 가게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통신사 할인 등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이곳 손님들은 꽉 잡았다고 자부했다. 특히 기존에 있던 빵집 맞은편이라는 점이 좋았다. 빵을 사러 온 손님들은 자연스럽게 스위트 바게트로 향했다.

“손님들은 원래 무조건 싼 거, 더 맛있는 걸 좋아하는데. 박리다매를 하는 우리 가게에 이길 수가 없는데…….”

개업하면서 잠시 고용한 아르바이트, 일봉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 빵집에서 무슨 이벤트라도 하나 본데요? 아까 저 앞에 사람 바글바글했어요.”

“언제?”

“아침부터 한, 1시까진가? 그때까지 많았어요.”

“무슨 행사라도 했나? 아닌데. 저긴 그런 행사를 할 만큼 마케팅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이 없는데.”

“네에, 네에.”

“내가 저기에서 일을 배웠었다고 말했나? 반죽 제대로 못 한다고 매번 몽둥이로 등짝을 두들겨 맞을 뻔했다고. 제대로 가르쳐 주는 건 없이 험한 소리만 하니까 나도 못 그만두고 나왔지 뭐야. 아버지 친구라고 잘해 주겠다고 하더니 그건 흰소리고, 사실은 그냥 노가다로 막 쓸 일꾼이 필요해서 데려간 거지.”

“네에, 네에.”

이미 가게 오픈할 때 들었던 이야기라 일봉은 건성으로 들어 넘겼다. 그러다 문득 가득 쌓인, 금일 구운 빵을 보며 물었다.

“사장님, 저 빵 남은 거 하나만 먹어도 돼요?”

“하루 지난 거는 30% 할인해서 팔 거야. 본사 방침이라 너한테 줄 수가 없다.”

‘본사 방침 같은 소리 하네! 종류별로 스무 개가 넘게 남아 있는데 30% 할인해도 저게 팔리겠어? 노랭이 사장 같으니!’

일봉은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입가를 씰룩거렸다. 그 표정을 본 김찬일이 다시 말했다.

“니가 사면 내가 50% 할인은 해 줄게.”

“아니요, 집에 가서 밥 먹을게요.”

어차피 안 팔릴 빵을 50%에 넘기다니! 일봉은 고개를 저었다. 짐을 챙겨 나오는데 맞은편에 있는 가게에 눈길이 갔다.

‘사장님을 엄청나게 구박하고 고생시켰다는 곳.’

처음에는 아예 쳐다도 보지 않았지만 멋대로인 김찬일과 일한 지 이제 2주일째. 사장을 구박한 원래 사장님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한 일봉이었다.

‘한번 가서 구경이나 해 볼까?’

하지만 이미 문이 닫히고 불이 꺼져 있는 상황.

‘내일 출근하면서 열려 있으면 그때 가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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