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02화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혼자 끙끙댈 필요가 없다. 여기는 무림이 아니다. 혼자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하는 세계, 배신을 걱정해야 하는 곳이 아니다. 여기에는 가족이 있다. 도움을 요청해도 된다.
“엄마! 제빵복 어디 있어요!”
“제빵복 같은 소리! 네 조리복은 빵집에 있다!”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비로소 안심한 임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조리복은 거기에 있었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현란한 색깔의 옷가지를 바라보던 임진혁은 개중 천잠의(天蠶衣)를 제일 닮은 검은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옷이 찢어질까 걱정되어 검은색 티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주워 입으면서 세심하게 힘을 조절했다.
무사히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가 물었다.
“너 양말은 안 신니?”
“양말. 네.”
아버지는 대단히 바보를 바라보는 것처럼 진혁을 응시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했다. 양말, 양말이 뭐더라?
“버선이 아니고 양말이죠. 네.”
“이거 신어라.”
벌써 창밖에 해가 뜨고 있다. 아버지가 급하게 양말 한 켤레를 던져 주었다. 회색과 붉은색, 노란색과 갈색이 섞인 알 수 없는 무늬의 두꺼운 양말이다. 겨울에나 신을 것 같다. 지금은 분명히 여름, 그것도 한여름일 텐데.
수십 년 전의 일이라 깜빡깜빡하지만 군대 제대하던 날. 여름 한가운데 미치도록 울던 매미 소리는 지금도 귀에 선명하다.
“두꺼운데요.”
“조리화 신을 때 발 아프다고 두꺼운 양말이 좋다고 했잖아.”
내가 그랬던가. 그랬나 보다.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신발 앞코에 있는 쇠 빼버리고 싶다고 했잖아. 기억 안 나냐.”
“네.”
“싱거운 녀석.”
주방에서 신는 조리용 안전화는 칼이 떨어지거나 해서 발가락을 다치지 않게 앞부분에 두꺼운 쇠판을 박아넣는다. 그래서 양말을 신지 않으면 쇠판에 발톱이 쓸린다. 그랬다. 그래서 아버지 몰래 몇 번 스니커즈를 신고 일해보려고 하다가 또 걸리면 혼나고 그랬다. 아버지는 항상 진혁의 안전을 챙겼다. 무겁고 불편한 안전을.
그래서 진혁이용 두꺼운 양말을 항상 챙겨 주셨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권위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살갑게 챙기는, 옛날 사람이었다. 진혁이 미친 듯이 그리워하던 아버지였다.
“고맙습니다.”
“고맙긴.”
눈가가 조금 부예지는 것 같다. 진혁은 눈가를 손으로 쓸었다.
아버지와 함께 집을 나섰다. 함께 길을 걸었다. 시커먼 하늘에는 몇몇 인공위성만이 희미한 빛을 냈다. 24시간 편의점 간판이 반짝거렸다. 진혁은 그리웠던 도시를 살피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인도, 인도 블록만을 꼼꼼히 살폈다.
“누가 만 원짜리라도 떨어뜨렸을 것 같아? 바닥만 보지 말고 앞을 좀 보고 걸어.”
“예.”
아버지가 핀잔을 주었다. 진혁은 앞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굳이 눈을 사용할 이유도 없다. 그는 희미하게 옅은 기를 퍼트려 주변 1m의 도로와 인도의 표면을 살폈다. 본래 그의 경지라면 서울 전체를 살필 수 있을 테지만 지금 이곳에서 이 육체로는 이 정도가 한계다.
‘제일 속도가 빠른 심법이라면 역시 그건가.’
정파의 심법을 포함해 수백, 수천 개의 심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정한 속도에 안정성을 갖춘 것을 꼽자면 오직 교주의 수제자에게만 전해지는 직전 심법이 있다.
‘암천심법(巖天心法)’
군대를 제대한 직후 튼튼했다고 생각하던 육체지만 내공은 단 한 줌도 없이 단전이 텅 비어있다. 눈으로는 길가를 살피며 피부로는 주변의 기(氣)를 받아들여 호흡한다. 걸어가면서 기호흡을 멈추지 않아 단전의 기틀을 닦았다.
새벽 출근하는 이들이 고단한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걸었다. 누군가 씹다가 뱉어놓은 껌, 취객이 흘리고 간 토사물. 그 곁에는 크다 만 민들레가 이제 뒤늦은 꽃봉오리를 수줍게 피웠다. 새끼손톱만 한 그리마가 바쁘게 보도블록 사이로 기어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진혁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돌부리. 톡 튀어나온 돌부리가 어디에 있을 것이다. 집안을 망하게 한 돌부리. 아버지의 원수! 죽여버릴 놈의 돌부리! 반드시 부숴 버리리라. 감도는 기운이 맹렬하게 치솟아 주변을 덮쳐갔다. 미세한 기파가 흘러가 도로 위에 있는 모든 솟아 나온 돌기를 전부 파괴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산산이 조각난 돌가루가 바람에 흩날렸다. 이름조차 붙일 필요가 없는 잡기술이다.
“진혁아. 갑자기 오싹오싹하고 춥구나.”
진혁은 기운을 조심스레 거둬들였다. 내기라고는 손톱만치도 없으나 살기만으로도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줄 몰랐다. 아버지가 웃었다.
“여름인데 갑자기 이상하지?”
아직어린 아버지다. 젊다고 하기도 우습다. 무림인이 어느정도 실력을 발휘하여 경지에 오르는 것은 마흔 이후의 이야기, 그리고 진혁은 그 이후에 수십 년을 더 살았다. 지금의 아버지는 너무 어려 보여서 기분이 이상했다.
“예, 이상합니다.”
“이상하긴 니가 이상하다. 머리 굵어졌다고 그렇게 대들더니 갑자기 왜 이렇게 고분고분해?”
아버지는 바보가 아니다. 앳되다고 할 정도로 어린 아버지가 깊은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진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무슨 꿈?”
“아버지가 다치고 어머니가 아프신 꿈이요. 그래서 제가 아주 아주 많이 후회하는 꿈이요.”
“자식, 싱겁긴.”
아버지가 픽 웃었다. 160여 년 만에 보는, 한 점 그늘 없는 미소였다. 한쪽 팔을 못 쓰는 제빵사 아버지는 웃지 못했다. 그 모습이 겹쳐 보인다.
“다 왔네. 셔터 좀 들어라.”
“!”
벌써 빵집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넘어지지 않았다. 돌부리는 전부 파괴했다. 미래를 바꾸었다. 흐뭇함이 터져 나올 듯 심장을 두들겼다. 진혁이 씨익 웃었다.
“예!”
아버지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식, 군대 갔다 오더니 사람이 됐어.”
‘아뇨. 무림을 다녀왔습니다.’
1장
아버지는 매장 진열대를 둘러보았다. 아침 여섯 시. 전날 팔고 남은 빵의 양을 살펴보고 오늘 무엇을 얼마나 구울지 그날그날 바로 결정한다.
반죽도 제빵도 전부 직접 한다. 아들에게도 아내에게도 맡기지 않는 1인 제빵 시스템이다.
‘맛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아버지가 아플 때는 정말 도움이 안 됐지.’
임진혁은 가게 바닥을 쓸었다. 전에는 그렇게 하기 싫던 이 일이 반가웠다. 바닥을 쓸면서 힐끔 아버지를 살폈다.
인근의 농장에서 직접 공수해온 신선한 유기농 달걀이 한쪽에 쌓여 있다. 아버지는 달걀을 여덟 개, 순식간에 깨서 노른자를 분리한다. 노랗고 탱글탱글한 신선한 노른자를 방금 만든 둥그런 반죽에 바르고 판대에 올린다. 마치 춤추는 것처럼 리듬을 타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데 동작이 한순간도 끊기지 않는다.
제일 처음 만드는 빵은 제일 잘 팔리는 베이글이다. 어제 네 판이 팔린 것을 확인하고 오늘은 다섯 판을 굽는다. 한 판에는 스무 개니까 오늘은 백 개다.
아버지가 반죽을 하고 그것을 잘라내 일일이 성형하여 빵을 만드는 동안 진혁이 하는 일은 간단하다. 청소를 하고 오븐을 예열하고 시간이 된 오븐에서 빵을 꺼내어 진열한다. 꼭 필요한 일이지만 빵을 만드는 것처럼 중심인 일은 아니다.
오븐 안에 든 빵에서 향긋한 향기가 풍겨 나오기 시작한다. 이제 15분 후면 꺼내야 한다. 진혁은 다시 한 번 아버지를 바라본다. 두 번째 후회, 이것도 오늘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뭔가를 발견했다. 진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올 때는 길에만 신경 썼기에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아버지의 어깨가 오른쪽이 기울어 있어.’
빵을 반죽하는 저 자세를 보면 분명히 오른팔에 살짝 힘을 덜 주고 있다. 원래 오른손잡이인데 이상한 일이다. 통증이라도 있는 게 아니면 저렇게 괴상하게 움찔거리면서 반죽을 할 리가 없다.
“오늘부터 저도 반죽하겠습니다.”
진혁이 선언했다. 벌써 세 판째의 베이글 반죽을 둥그렇게 올려놓고 있던 아버지가 눈을 크게 떴다.
“진혁아.”
그리고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 진혁은 안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매일 같은 사람이 만들어도 똑같은 모양이랑 맛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아. 그런데 네가 빵을 만들면 당연히 맛이 달라지지 않겠어?”
“그게 바로 손님을 배신하는 일이다.”
“그게 바로 손님을 배신하는 일이다. 응?”
아버지와 진혁이 동시에 같은 말을 하고,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이 말을 전에 들려줬나?”
“수십 번은 하셨어요, 아버지.”
아버지가 다치신 다음에, 서툴게 빵을 굽는 아들을 보면서 계속하셨던 말이죠. 그러면 아들은 그대로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아들이 아니죠!
진혁이 마저 말을 이었다.
“아버지 어깨 아프시죠?”
“어어? 아니, 아주 조금. 요즘 피곤한가 봐. 빵집이 잘 되니까 좋은데 힘드네.”
“저도 이제 제대하고 제 일을 해야 되는데 아버지 빵집에서 언제까지나 청소만 할 수는 없잖습니까? 슬슬 반죽 가르쳐주시려고 하셨죠?”
“어어? 어떻게 알았냐?”
그야 직접 말해주셨으니까 알았지. 군대 갔다 와서 한두 달은 쉬게 하고 그다음에 가르쳐줄 생각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아침 다섯 시 반에 일어나서 여섯 시에 가게에 도착해서 청소하는 걸 휴식이라고 생각하셨지.’
아들에게 주는 달콤한 휴식! 정식으로 반죽이랑 제빵을 하기 시작하면 힘들어질 테니까 가게 분위기도 익힐 겸 쉬엄쉬엄하라고 한 것이다.
‘사실 그때 내 입장에서는 다섯 시 반에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휴식이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반죽을 구우면 진혁이 정해진 시간과 온도에 맞춰 오븐에서 빵을 꺼낸다. 빵 만드는 건 관찰만 해보고 실제로 구워본 것은 집에서 취미처럼 몇 개밖에 없다. 제과학교를 졸업했다고 해도 매일 매일 대량의 빵을 실전으로 만들어온 아버지와는 경험의 질도 양도 다르다.
“그럼 오늘부터 해볼까?”
아버지는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기도 했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아버지가 좋아하고 있다. 무척 좋아하고 있어.’
마치 어린애가 어린이날에 원하던 장난감을 받은 것처럼, 너무나 즐거워하고 있다. 진혁도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소보루 빵부터 만들어보자. 아버지 하는 걸 잘 봐라.”
진혁은 아버지가 하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