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01화
프롤로그
“이 옷은···….”
선명한 붉은색 바탕에 검은색 악마 모양의 티셔츠.
진혁이 지금 입고 있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붉은색 티셔츠였다. 기억에 있었다. 옛날에 한창 팔리던 것을 어머니가 뒤늦게 박스째 구매해 잠옷으로 입으라며 주었다. 쉰 벌이 넘는 똑같은 티셔츠, 그것도 밖에 입고 나가면 바로 패션 테러리스트로 등극할 그런 쓸데없는 옷.
2002년에 한국에 월드컵이 있었고, 붉은 악마 티셔츠가 유행했고, 그 티셔츠를 어머니가 박스째 사 왔다. 무슨 옷인지 모르고 싸다길래 상자 안도 뜯지 않고 왕창 사오셨다. 그래서 한참 동안 아버지가 어머니를 놀리시곤 했다.
백 수십여 년 전의 기억. 희미한 기억을 되새기며 임진혁은 서 있었다. 그는 눈을 껌뻑이며 눈앞의 현실이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려 했다.
벌컥.
아버지는 노크도 없이 그대로 문을 열어버렸다. 문 앞에 선 아버지가 버럭 화를 냈다. 주름진 얼굴에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오늘부터 빵집에 같이 나가자고 했잖아!”
눈썹도 머리카락도 희었다. 덩치가 있고 배가 나온 아버지 역시 붉은악마 티셔츠를 걸치고 있어 머리 짧은 산타클로스처럼 보였다.
“아버지?”
임진혁은 황급히 기억을 더듬었다. 다시 한 번 거울을 보았다. 머리카락이 대단히 짧았다. 군대에서 갓 제대한 말년 병장의 머리다.
이날은 기억에 있다.
기억 속에서 몇 번이나 돌이켜 보며 후회했던 날이다. 군대에서 제대한 다음 날 아버지는 빵집에 나오라고 했다.
‘그날 엄청 싸웠지.’
임진혁은 빵집에 나가지 않았다. 군대에서 현역으로 2년 동안 뺑뺑이를 쳤는데 하루 정도야 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야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는 혼자 나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크게 다쳤다. 인대가 끊어져 일 년간은 오른팔을 완전히 쓸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빵집에는 어머니와 자신이 나가야 했다. 아버지가 구워오던 그 빵 맛을 재현할 수가 없었다. 손님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빵집 맞은편에 프랜차이즈 빵집이 들어왔다. 아버지의 빵집은 매출이 줄어들어 임대료도 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아버지는 인대가 낫게 되면 전부 해결할 수 있다며 집까지 보증금으로 걸고 사채를 썼다. 결국, 가게는 물론이고 집까지 빚쟁이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제대한 지 일 년, 아버지의 팔은 낫지 않았다. 매일같이 아버지를 간병하던 어머니는 간간이 피가 섞인 가래를 토했으나 병원비가 아깝다며 병원에 가길 거절했다. 아버지 외래 진료를 보는 날 어머니도 함께 모셔 간단한 검사를 부탁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암이라는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횡단보도에서 균형을 잃으며 넘어졌다. 임진혁은 아버지를 밀쳐내며 대신 트럭에 치였다.
‘설마. 그때 아예 다른 세계로 가게 될 줄은 몰랐었는데…….’
트럭에 치인 후 식물인간 상태로 삼 년을 누워 있었다. 차라리 죽고 싶었으나 죽지 않았다. 그가 병원에 누워 집안의 모든 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동안 집안은 폭삭 망했다. 영겁 같이 느껴지던 그 지옥 속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의 영혼은 강호 무림의 세계로 옮겨졌다. 지금도 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강호에서도 전설적인 경지라는 마선의 경지에 이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 영혼의 차원 이동. 거기에 시간 회귀까지. 대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있는 거지? 일월신교 훈련생의 몸에 들어간 것만 해도 수십 년 전 일이거늘.’
그는 강호로 영혼이 이동한 후, 일월신교 훈련생의 몸에 깃들어 버렸다. 그곳에서 그는 죽음을 곁에 둔 지옥 훈련을 겪어야 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 이후에는 도산검림이란 이름을 받고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생활을 해야 했다.
수십 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그는 일월신교의 교주가 된다. 그리고 천마라고 불리게 된 것이 또다시 수십 년.
비록 마선의 경지라는 탈마의 경지에 들지는 못했지만, 초마의 경지에 들어 천하제일마라는 말까지 들었다.
임진혁은 그런 과거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저쪽 세계의 일이다. 심지어는 이쪽 본래 그가 태어난 세계에서는 과거로 회귀까지 한 상태다.
‘거대한 섭리가 나에게 기회를 준 건가…… 왜지?’
일월신교는 보통의 무림 단체가 아니다. 종교집단이며, 주술과 사술과 선술을 아우르는 거대한 술법사들도 부리고 있다.
그런 단체의 교주가 되었던 임진혁은 일반인들은 모르는 여러 가지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거대한 ‘섭리’의 존재다.
흔히 말하는 절대신이라는 존재. 그것의 실존에 대해서 그는 강호 무림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어차피. 탈마의 경지가 아니면 그 비밀의 일부도 알 수 없지. 그리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임진혁은 크게 숨을 내쉬고 잡념을 털어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사실. 수십 년간 강호에서 지내면서도 그는 잊지 않았다. 아니. 더욱 애타게 생각해 왔다.
가족!
그리고 그런 가족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버지. 돌아가시지 않은, 살아 계신 아버지.
사실은 아버지가 다쳤어도 자신이 미리 빵집에서 아버지를 도우며 일을 배워놓았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의 빵 굽기는 제과학교에서 배운 이론과 많이 달랐다. 학교에서 교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이 더 낫다고 으스대도 아버지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주시곤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학교에서 배운 이론들은 쓸모가 없었다. 아버지의 빵 맛을 재현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함께 갈 것을 그랬다.
미리 아버지의 기술을 배워둘 것을 그랬다.
어머니 암 보험을 들어 놓을 것을 그랬다.
형편이 나빠지면서 보험 따위는 전부 해지해서 빚 갚는 데 썼다.
후회는 언제나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날 아버지와 함께 돌아갈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아버릴 수 있다고. 사람의 마음을 깎는 악독한 수련 속에서 그리운 것은 오직 가족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버텨서 부모님께 돌아가리라고 생각하며 견뎠다.
이십여 년 만에 보는 아버지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임진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몇십 년 묵은 사과였다. 임진혁은 눈을 비볐다.
“준비하겠습니다. 빵집, 지금 바로 같이 가요.”
“짜식이 군대 갔다 오더니 사람이 됐구나!”
진혁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뇨, 군대는 아니구요. 무림요.’
임진혁은 아버지를 따라서 방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아버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너 그대로 나갈 셈이냐?”
“바로 나가자고 하셨으니까요.”
“옷은 입어야지!”
아하. 옷. 옷은 중요하다. 지금 입고 있는 것은 촌스러운 빨간 티셔츠에 트렁크 팬티. 속옷이나 마찬가지다. 임진혁은 맨다리를 내려다보고 뒤늦게 미간을 찌푸렸다. 군대를 다녀온 덕에 어느 정도는 근육이 붙어 있지만, 생사경의 경지에 도달했던 무인이 보기에는 형편없는 몸이다.
‘이게 내 몸이라니.’
임진혁은 쓰게 웃었다. 스물두 살, 갓 제대했던 애송이 시절이 생각난다. 보잘것없는 몸이라고 생각하던 그 몸. 사실은 임진혁의 스물여섯 살 짧은 인생 중에서 제일 몸 상태가 최고였던 때다. 군대를 갓 제대한 후,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으로 인해서 제일 컨디션이 좋았다. 그때는 그걸 몰랐다.
방으로 돌아가 옷을 고른다. 방금 본 아버지의 얼굴을 생각한다. 참 어리다.
‘아버지가 나이 들어서 나를 이해 못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광폭대주 혈와수보다도 어리다. 자신보다도 어릴지도 모른다. 스물여섯 살에 무림 세계에 내팽개쳐져서 수십 년을 살았다.
‘넓은 마음으로 아버지를 이해해 줘야지.’
그는 서랍을 하나 열었다. 너무 앞으로 당겨 서랍이 아예 확 빠져 버렸다. 안에 들어 있던 케이블과 코드, 어댑터가 튀어나오며 흩어졌다.
임진혁은 빠르게 오른손을 내밀어 튀어나온 물건들을 전부 받아냈다.
‘이 정도는 우습지.’
회귀 전에는 할 수 없던 재주다. 육체는 스물여섯 임진혁 그대로지만 그가 수십 년간 수련한 기술은 남아 있는 것이다. 임진혁은 서랍 아래를 살펴보았다. 밑편의 양쪽에 레일에서 매끄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양철판이 평행하게 덧대어 있었다.
‘서랍 레일. 이 시대에는 서랍장 안에 레일을 만들어서 서랍이 잘 열리게 했지.’
그가 쓰던 자개장은 최고의 목수가 직접 지은 것이었지만 이렇게 부드럽게 열리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힘을 주어야 서랍이 열리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서랍을 내려놓고 다시 다른 서랍을 열어 보았다.
CD와 DVD, 오래된 카세트테이프가 가득 들어 있었다. 퍽 오랫동안 살펴보지 않은 듯 먼지가 가득했다. 그는 찡그린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옷. 옷을 찾아야 한다.’
항상 입던 것은 교주의 제례의. 천잠의를 안에 걸치고 겉에는 여덟 겹의 비단옷을 걸친다. 옷에는 특정한 주술을 띄는 문양을 겹겹이 수놓기 때문에 한 벌도 빼놓을 수 없다. 교주가 된 이후에는 가벼운 무복을 입고 외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옷 입는 것을 그리워했지.’
두리번거리다가 거울을 마주 보았다. 거울 옆에 작게 도드라진 손잡이가 보였다. 거울 속의 임진혁이 미소 지었다.
“여기 있었군.”
손잡이를 당기자 스르륵, 거울 문이 열렸다. 옷장 안에는 티셔츠와 바지가 걸려 있었다. 무슨 옷을 입는 것이 좋을까.
“으음.”
최근 수십 년간 스스로 옷을 골라본 적이 없다.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그는 교주였다. 의복을 담당하는 조가 따로 있었다. 아침마다 신발과 관, 조대와 호복을 포함하여 모든 의복을 비단 보료에 받쳐 가져오는 여자들. 그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무거나 입으면 되지.”
남궁소천과의 생사결을 가르는 비무 자리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교주로 즉위하는 자리도 아니다. 교주의 자리를 물려받을 후계자를 선정하는 자리도 아니다. 군대에 가기 전에는 매일같이 가서 일을 도왔던 아버지의 빵집에 가는 것일 뿐이다.
‘빵집?’
빵집에서 분명히 그는 하얀 옷을 입어야 했다. 아무거나 입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 옷을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얀 것. 하얀 손. 소수마공. 이건 아니야.”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던 임진혁은 옷장을 뒤졌다. 군복, 붉은 티셔츠, 또 붉은 티셔츠, 과 잠바, 형광 노란색 바람막이, 검은색 트레이닝복. 하지만 그 어디에도 하얀 옷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바깥에서 아버지가 소리쳤다.
“언제까지 옷 입고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