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들과 함께하는 연예계 생활-124화 (완결) (124/124)

< 인복이 미친듯이 좋은 사람(完) >

해태영화상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길.

아니, 여우주연상을 받으러 가는 길이라 해도 좋았다.

‘이걸 정아가 안 받으면 누가 받아?’

영화, ‘스타는 다시 무대로’.

근래에 이만큼 성공한 영화는 없었다.

전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켰으며, 국내에서만 해도 1500만에 가까운 관객들을 동원했으니.

“선배, 저는 신인상 못 받겠죠?”

우리에게는 정아 말고 또 한 명의 영화 출연자가 있었다.

유진이.

같이 차에 타고 있던 그녀가 내게 물었다.

“글쎄? 그런데 못 받으면 또 어때? 이걸로 가수로서 얼마나 많은 이득을 얻었는데.”

“맞네···. 이미 이득 엄청 많이 봤었지?”

신인상은 잘 모르겠지만, 우린 이미 이 영화로 인해 웬만한 대상보다 더한 이득을 얻었다.

물론 이 영화가 나오기 전부터 화제에 올라서, 유진이의 성공을 오로지 이 영화 덕분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었으나.

분명 엄청난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근데 언니는 기분 엄청 좋아 보이네요? 언니, 이제 연기로 상 받는 거 무뎌질 때 되지 않았어요?”

아까부터 부드러운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정아.

유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정아에게 물었다.

정아가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난 유진이의 물음에 대신 답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아의 마음이 충분히 짐작이 가거든.

그래서 피식 웃으며 정아 대신 입을 열어 말했다.

“이하영이 주는 상이라서 그래. 작년에 걔가 정아 대기실에 들어와서 헛소리 늘어놓고 갔거든. 가수로서 망하고 가는 거면 또 모를까, 가수로서도 배우로서도 대성공한 뒤에 나타나는 건데 기분 좋을 만도 하지. 게다가 같은 시기에 개봉해서 경쟁했는데 압도적으로 눌렀잖아.”

정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거짓을 입에 담았다.

“그냥 날씨가 좋아서 기분 좋은 거야. 난 그런 애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무슨.”

유진이와 내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난 실소를 터뜨렸다.

“네가 퍽이나 그러겠다.”

***

정아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대기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 당시, 이하영이 했던 것처럼 정아 또한 똑같이 했다.

지금의 정아는 노크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 살짝 달랐지만.

“안녕?”

이미 냉랭했던 것 같은 대기실의 온도가 더 바닥으로 처박혔다.

정아가 나타나자, 그 뻔뻔했던 이하영의 표정도 제대로 관리가 되질 않는다.

정아는 생글생글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영화 잘 봤어. 박범준 감독님 스릴러, 엄청 재밌더라. 그··· 제목이 뭐였더라? 아무튼, 너라면 이번에도 여우주연상 받을 수 있을 거야. 2년 연속 여우주연상 받을 땐 MC가 트로피 전해주는 거 알고 있지? 아, 모르나?”

“···.”

“난 아무래도 가수 활동에 좀 많이 열중하느라, 영화 촬영에도 제대로 집중을 못했었거든. 아, 작년에 네가 말했었지? 가수 활동 준비하러 유민 오빠한테 갔냐고. 맞아. 그때 좀 찔렸어. 비밀이었는데 어떻게 알았니?”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려 하는데 맘 같이 되지 않는 듯했다.

이하영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어휴, 이번엔 드라마 들어가는데 잘될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내가 가수 활동하느라 좀 바빴잖아. 연기에 감이 떨어졌을 수도 있어. 아, 그런데 혹시 우리 그룹 이름은 들어봤어? 아일랜드라고, 그렇게 막 엄청 미치도록 유명하지는 않아서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알아?”

“···너 원래 이렇게 유치했니? 말이 좀 쓸데없이 많아진 것 같은데?”

이하영의 말에 큭큭큭, 웃던 정아가 하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배를 움켜잡고, 입을 손으로 가리지도 않은 채, 고개를 젖히면서 웃는다.

그녀의 웃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

어찌나 웃었는지 정아는 손가락으로 물기 어린 눈을 콕 찍으며 말했다.

“우리 급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버려서 그런 것 같아. 무게도 적당한 사람한테나 잡는 거지. 동네 꼬맹이한테 무게 잡아야 무슨 소용이겠어? 사실 내가 이렇게 찾아온 것만으로도 넌 고마워해야 돼. 남들이 볼 때 고만고만해 보일까 봐, 여기 안 올까도 생각했는데··· 그냥 내 성격이 꼬여서 찾아온 거야.”

“···!”

정아는 씨익 웃더니, 그냥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대화의 흐름상 마무리 멘트가 나올 타이밍이었건만.

그녀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지금 했던 말마따나,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이.

어쩌면 이하영의 입장에선, 이게 더 깊게 여운을 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해태영화상 영예의 대상! ‘스타는 다시 무대로’의 유정아! 축하드립니다!”

설마설마 했는데 여우주연상에 이어 대상까지 받아버렸다.

유진이도 신인상을 받았으니, 겹경사였다.

정아는 무대 위로 올라가 우아한 미소와 함께 수상소감을 말했다.

“대상까지 받을 줄은 몰랐는데··· 정말,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언제나 겸손하게, 그리고 언제나 성실하게-“

그녀가 입에 올린 ‘겸손’이라는 단어에, 장내에 별안간 웃음이 터졌다.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단어라는 걸 모두 알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정아는 꿋꿋하게 소감을 이어갔다.

“최근까지 가수로서 열심히 활동했지만, 배우로서도 항상 열심히, 진심으로 즐겁게 연기하고 있습니다. 과분한 사랑을 제게 주신 팬분들과 대중분들께 조금이라도 더 보답할 수 있도록,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 더 좋은 연기로-“

장내에 흐르는 웃음 소리가 커져만 간다.

분명히 정상적인 수상소감인데, 그녀가 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내 입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왜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분명히 가식 같은데 가식의 말이라도 해주는 게 장하다.

뻔뻔한 듯한데 밉지 않고 예뻐 보인다.

아무튼, 딱 네티즌들이 좋아할 만한 장면이 탄생했음은 틀림없었다.

***

해태영화상이 있던 날로부터 며칠 뒤에 열린 ‘AMAM’.

가요 시상식이었다.

해태영화상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상을 휩쓸 게 빤히 보였다.

이제는 와인드업도 우리의 상대가 안 되지.

하지만.

와인드업의 태도는 여전히 한결 같았다.

이번에 상을 별로 못 건질 게 확실했음에도.

“형! 얼마 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저희 재계약했어요. 하하. 원래 형한테 가볼까도 생각해봤는데, 여기가 우리한테는 잘해주거든요. 그래서 그냥 남아 있기로 했어요.”

“맞아요. 익숙한 것도 있고. 비즈니스적인 이유죠 뭐.”

와인드업은 GO엔터와 재계약을 했다.

비록 그들이 우리 애들에게 밀리게 됐을 지언정, 그들의 급은 떨어지지 않았다.

GO엔터로서는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거지.

“그래, 잘했어. 너희는 잘 지냈고?”

“에이, 아쉬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네요. 근데 솔직히 형이 제안이라도 슬쩍 했으면 넘어갔을지도 몰라요.”

“하하!”

웃으며 말을 건넸지만 마냥 농담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우리 쪽에선 제안이 없었고, GO엔터 쪽에선 간절히 재계약을 원하고 있었으니, 대우를 생각해서라도 GO엔터를 택한 거겠지.

만약 우리가 제안을 던졌다면 우리 쪽으로 왔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옆에서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김별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미리 축하드려요.”

가볍게 서로 인사를 나눈 뒤, 별이가 내 팔 위에 손을 얹었다.

“오빠, 저···.”

말끝을 흐린다.

표정과 어조로 미루어 보아, 뭔가 대놓고 말 못할 것이 있다는 것처럼 보인다.

와인드업도 이를 눈치 챘는지, 덕담 한마디씩을 던지며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갔다.

난 목소리를 낮추며 별이에게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별이가 내 넥타이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넥타이가 살짝 삐뚤어졌어요. 이런 데서 흐트러진 모습 보이면 오빠 체면 상할까 봐서요.”

“···아, 그래? 고맙다.”

방금 화장실에서 나올 때, 난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제대로 고쳐 맸었는데.

얘가 그걸 알려나 모르겠다.

“됐어요. 이제 가요.”

시상식에선 언제나 그렇다.

복도가 그리 길지도 않은데, 만날 사람을 다 만나고 만다.

레모네이드.

와인드업과 일별하고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그녀들과 우리가 정면에서 마주쳤다.

다만, 예전과는 달라진 게 있었다.

“안녕.”

최진솔이 별이에게 손을 흔들며 제대로 인사했다.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안녕.”

심지어 그 이수진마저도 인사를 건넨다.

비록 퉁명스러운 목소리에다가,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있었지만.

“응, 안녕.”

별이도 그녀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띠우면서.

별이가 체육대회에서 몸을 던져 부상을 면하게 해줬다는 이유가 있긴 한데.

부정적으로 보자면 얼마든지 부정적으로 볼 수 있었다.

별이가 이만큼 성공하지 않았더라면, 레모네이드가 대성공을 했더라면, 과연 이런 장면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그러나 뭐든 부정적으로 보자면 한도 끝도 없다.

나마저 와인드업과 제대로 인사도 못했겠지.

레모네이드와 별이는 얘기까지는 나누지 않았다.

그저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며 약간의 호의를 내비쳤을 뿐이었다.

레모네이드가 우리를 스쳐 지나가고, 우리도 그녀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별이는 나만 들릴 수 있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레모네이드가 지금보다 더 잘됐으면 좋겠어요.”

“···그럴 수 있을 거야.”

다만 나는 레모네이드가 잘되길 빌어주지 않았다.

그녀들이 여전히 미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내 바람이 정말 미신적인 이유로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면, 난 이 효력을 모두 우리 애들에게 쓰고 싶었다.

사장인 내 입장에선 응당 그래야만 했다.

‘제발 우리 애들 더 잘되게 해주세요. 내년 그래미도 다 쓸어버릴 수 있게 해주세요.’

올해 말에 노미네이트될 그래미 어워드.

상을 받을 수 있는 건 내년이었다.

오늘의 시상식은 뭐, 안 봐도 뻔한 거라 내 바람까진 필요도 없을 테고.

***

해외 활동을 끝내고 돌아온 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으나.

아일랜드로 국내 무대에 서는 건 오랜만이긴 했다.

덕분에, 대상을 비롯한 상들을 우리가 휩쓸었음에도 인터넷에서는 내내 무대에 관해서만 열정적으로 떠들어댈 뿐이었다.

하긴, 이제 우리의 스케일은 국내의 상으로는 특별할 것도 없다는 걸 대중들도 모두 아는 것이다.

이러한 열기는 K-POP Concert까지 이어졌다.

거기에서도 우리 애들의 무대가 있었으니까.

우리 애들이 빠지면 단번에 흥행 참패라나 뭐라나.

하도 간곡히 요청하고 사정사정하는 덕에, 해외 활동하고 있을 때 미리 섭외에 응했줬었다.

서로 관계가 좋아서 나쁠 것도 없고, 이런 잠깐의 무대가 팬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알기 때문에 응한 거기도 했다.

내가 사정사정한다고 다 들어주는 사람이면, 우리 애들은 지금쯤 과로로 쓰러졌겠지.

“선배, 심사위원 이거 진짜 보통 힘든 게 아닌데요? 활동보다 더 힘든 것 같아요.”

“맞아요! 진짜 부담스러워요. 애들 못하면 다 제 탓인 것 같고.”

K-POP Concert의 대기실.

무대가 코앞인데, 유진이와 서연이는 이런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자기들 무대는 그만큼 자신 있다 이거지.

물론 합당한 자신감이기에, 난 그녀들의 하소연에 대한 대답을 해주기로 했다.

그녀들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겠지만.

“이제 내 마음을 좀 알겠어? 내가 항상 그런 마음이야. 난 너희들이 지금 느끼는 부담감보다 얼마나 더 심하겠어.”

유진이는 콧방귀를 뀌며 반박했다.

“저희가 언제 못한 적 있어요?”

“···없긴 하지.”

여기에 서연이도 덧붙였다.

“확 그냥 더 잘해버려서 바로 아일랜드 정규 1집 곡들 쫘악 만들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이걸 협박이라고 하는 건가?

어리둥절했다.

아무튼 아직 방송이 되질 않아서 전달받은 거 외에 아주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그녀들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다.

“정확히 뭐가 문젠데?”

유진이와 서연이가 차례대로 답했다.

“전 진짜 하나도 안 아끼고 모든 노하우를 다 쏟아내는데, 애들이 피드백이 잘 안 먹혀요. 댄스가 늘지를 않는다니까요? 제가 경력이 짧아서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저도요! 작곡한 애 한참 피드백해주다가 표정 살펴보면 멍때리고 있어요. 제가 뭐라고 했는지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도 못한다니까요? 애초에 제 말에 귀도 안 기울였던 것 같아요.”

나 왜 그 이유를 알 것 같지?

유진이의 열정적인 댄스 피드백과 서연이의 열정적인 작곡 피드백.

이걸 곧이곧대로 흡수할 수 있는 애면, 걘 천하에 둘도 없는 천재겠지.

나와 함께 듣고 있던 정아는 이제 ‘재수없다’고 말하기도 지쳤다는 듯, 고개만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말했다.

“그래···. 많이 힘들었겠네.”

“그쵸!”

“역시 사장님이라면 이해하실 줄 알았어요!”

정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퍽이나.”

***

유진이와 서연이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아이돌 오디션이 아주 여러 가지의 이유로 화제에 오르며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녀들의 기만 아닌 기만으로, 시청자들의 웃음 버튼이 몇 장면이나 탄생하기도 했지.

화제를 다 잡아먹는 대호황 오디션 프로그램이 늘 그렇듯, 주옥 같은 음악은 몇 개나 쏟아져 나왔는데.

그들은 단 한 번도 1위를 차지한 적이 없었다.

별이가 다 쓸어버려서.

OST와 피처링.

아무리 아이돌 프로그램 팬덤이 뜨거워봐야 별이 팬덤에 못했고, 화제에 따른 대중성이 커봐야 별이의 인기에 못 미쳤다.

텀을 두고 나오는 OST와 피처링 곡에, 그녀는 자신의 1위 곡을 스스로 갈아치울 뿐이었다.

이렇게 밖에서 별이, 서연이, 유진이가 개인 활동으로 끊임없이 화제에 오르며 인기를 이어가고 있을 때.

정아는 드디어 첫 번째 촬영을 시작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우리 회사 인턴이 심상치 않아’.

단지 태생이 기품 있고, 까칠하며, 매사에 당당한 건데.

몇 가지 오해로 인해, 주변 모두가 어마어마한 뒷배가 있다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내용의 드라마였다.

“딱 너를 주연으로 정해두고 대본 쓴 것 같더라고.”

“오빠, 우리가 단지 그것 때문에 이걸 고른 건 아니잖아. 그런 대본이 어디 한둘이야?”

“···그치. 대본이 좋아서 고른 거긴 하지.”

촬영장은 단지 정아가 여기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활기가 넘치는 듯했다.

제 할 것만 똑바로 하면 성공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는데.

그러한 기대는 아마 정확하게 들어맞을 거다.

‘성공의 여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그녀는 연예계 전부로 놓고 봐도 탑스타 중에 탑스타였지만.

영화, 드라마 업계에선 훨씬 더 특별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최고의 자리에 있던 배우가 대뜸 가수로도 이렇게 최고의 자리에 오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는 이제 거의 이 업계에서 성공의 토템이나 마찬가지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하아. 이번에도 기강 좀 잡아야겠네. 분위기 좋은 것도 적당해야지, 내가 있다고 이렇게 방심해버리면 큰일 날 수도 있어. 사람들은 이런 내 고충을 아나 몰라. 내 까칠한 이미지가 다 이렇게 작품을 위한 마음 때문에 만들어진 거잖아.”

거짓말도 적당히 해야지.

어디, 내가 이렇게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너 성공하기 전이나 분위기 나쁠 때도 똑같이 까칠하··· 아니다. 맞지. 사람들이 네 고충을 잘 모르는 면이 있는 것 같아. 동의해.“

“그치? 동의하지?”

“그럼!”

사람들이 과연 내 고충을 알기나 할까?

이렇게 독보적인 기획사의 전설적인 사장이 되었다고, 다들 위엄 있고 떵떵거리며 지낼 줄 아는데.

실상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비포 앤 애프터’에서 나왔던 그 모습엔 정말 과장 하나 없었노라고.

그리고 그 모습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노라고.

***

서연은 자신의 앞에 놓인 그릇을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김이 모락모락 나며,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뜨끈한 국물.

“이놈의 추어탕은 진짜.”

입에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유정아가 도끼눈으로 째려보며 말했다.

“너도 추어탕 자주 먹자고 했었잖아.”

“···좋아서 그렇죠. 좋아서.”

전엔 선뜻 먼저 먹자고 하기도 했는데, 너무 먹다 보니 이제 지겨울 따름이었다.

서연은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뱉으며, 한 술 떠서 입에 넣었다.

‘맛이 전혀 없진 않긴 하고 맛있는 것 같은 느낌이 혀 끝을 자극시키면서 미각적인 흥분을 주는 것도 딱히 틀리지 않긴 하네.’

맛있다는 뜻이었다.

서연은 후루룩 입속으로 추어탕을 넣으며, 눈으로 주변을 훑어봤다.

유정아의 집.

김별, 이유진, 김유민, 유정아, 그리고 자신까지 다섯 명이서 또 다시 한 곳에 모여 추어탕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우리 회사 인턴이 심상치 않아’ 시즌1은 전세계적으로 센세이셔널한 성공을 거두었다.

오늘 함께 모인 이유는 바로 시즌2를 보기 위함.

오늘은 시즌2 공개일이었다.

서연은 추어탕을 바쁘게 먹으면서도 귀를 활짝 열었다.

“오빠, 유진 언니 뮤비는 완성됐어요?”

김별의 물음에 김유민이 답했다.

“응, 완성됐어. 정규 1집이라 힘 좀 주긴 했는데··· 유진이 댄스가 훨씬 더 힘 들어갔어. 진짜··· 충격적이야.”

“언니 댄스는 항상 그렇잖아요. 영화 촬영장에서 몸 푸는 장면으로도 그렇게 화제 됐는데.”

이유진의 1집이 이제 곧 발매된다.

타이틀 곡을 자신이 작곡했기 때문에, 서연은 이 앨범의 진행 상황에 대해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저 언니는 진짜 신기해···.’

가뜩이나 불가해의 영역에서 노닐고 있던 저 댄스 괴물은 믿기지 않게도 또 성장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제 얼마 뒤면 우화등선을 해버릴지도 모른다.

“우리 예쁘고 귀여운 서연아, 내 곡은 또 언제쯤 써줄 수 있겠니?”

앨범 얘기가 나와서일까?

갑자기 유정아가 몹시도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연이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네? 언니, 일주일 전에 미니 앨범 활동 끝났잖아요.”

“그렇다고 가수 은퇴하는 건 아니잖아. 일주일 전에 활동 끝났다고 너무 뜸 들일 필요는 없어. 왠지 영감이 온다 싶으면, 바로 곡 쓰러 가도 괜찮아. 정말이야. 오늘 드라마 보다가도 영감 떠오르면 그냥 아무 말도 없이 자리 박차고 작업실 가도 돼.”

“···네.”

김별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히트곡 부자의 여유 같아 보였다.

‘쟤는 이제 잠꼬대로도 히트 칠 것 같아···.’

뭘 불러도 죄다 히트를 시키니까.

잠깐 불편했던 식사가 끝나고, 거실에서 조촐한 상영회가 시작됐다.

스피커 시스템이 워낙 잘 되어 있어서인지, 별거 아닌 효과음마저도 웅장하게 들렸다.

그런데 서연의 시선은 TV로 향하는 대신,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김유민은 피곤한지, 눈을 무겁게 끔뻑거리고 있었다.

1회를 다 보기 전에 잠에 들 것 같았다.

‘이 다섯 명이서 여기에 모인 게 얼마만이지?’

이 숙소에서 지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데뷔하기 직전에 들어왔기도 했으며, 워낙 바빴고, 또 얼마 안 있다 해외로 나가서 활동했으니까.

‘그래도 여기에 있을 때 진짜 재밌었는데.’

서연의 눈은 다시 TV로 향했다.

하지만 제대로 집중해서 보진 않았다.

지금 주변에 있는 따스하고 편한 사람들, 특별한 의미가 된 이 장소, 지겹지만 맛있었던 추어탕, 그리고 식사를 하며 나누었던 대화들까지.

“···.”

서연의 눈에서 갑자기 초점이 흐려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초점이 돌아왔고.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유정아의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뭐야?”

다들 자신을 쳐다본다.

하지만 서연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정리할 것도 별로 없다.

짐 정리를 재빨리 끝낸 서연은 백을 메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아까는 영감 떠오르면 아무 말도 없이 자리 박차고 작업실 가도 된다면서요.”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서연은 씨익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근데 언니 개인 곡은 아니에요.”

그 묘한 뉘앙스에 모두의 입에서 마찬가지로 묘한 탄성이 튀어나왔다.

“···어!?”

“우리도 이제 정규 1집 내야죠. 아일랜드로.”

한 곡도 아니고, 두 곡도 아니고, 미니 앨범도 아니고.

무려 정규 1집을 입에 담는다.

상영회고 뭐고.

서연이가 내뱉은 말에, 모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엔 우리집 안 돼! 한두 번 활동할 것도 아니잖아? 오빠! 그러지 말고 아예 숙소를 새로 잡아버리자고. 어?”

정아는 내게 고개를 끄덕일 것을 강요하듯 말했고.

“와! 우리 또 뭉치는 거야? 선배! 이번에도 해외 갈 땐 쭉 같이 있는 거죠? 비밀인데요, 사실 아일랜드는 5인 그룹이거든요. 선배까지. 하하! 그러니까 빠지면 안 돼요.”

유진이는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기대로 눈빛을 빛내면서도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다.

“내가 걸그룹이라니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고 있어? 어우, 소름 돋아.”

별이는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덧붙였다.

“오빠, 저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오빠 없으면 어떡해요. 저희 다 오빠가 만들어줬는데. 오빠 없으면 저희도 없어요.”

“···그런 의미라면야.”

어쩜 말도 참 예쁘게 하지.

“크흠.”

난 헛기침을 핑계로 입을 가렸다.

입꼬리가 정신없이 씰룩거리고 있는 걸 보여주기가 좀 민망해서.

난 그녀들과 한 명씩 시선을 마주쳤다.

서연이와 유진이, 정아와 별이.

새삼스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참 인복이 미친듯이 좋은 사람이라고.

어떻게 이렇게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애들과 만나게 됐을까?

그녀들과 함께하는 이 연예계 생활이 언제쯤 막을 내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매 순간 감사한 마음으로 이 행복을 누려야겠다.

“서연아, 근데 떠오른 음악은 대충 어떤 느낌이야?”

“음···. 엄청난 느낌이죠!”

나와 서연이는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집을 나섰다.

“그러니까 그 엄청난 느낌이 대체 어떤 느낌인데?”

“들어보면 알아요, 들어보면. 사장님도 들어보면 엄청나다고 말씀하실걸요?”

우리가 함께하는 이 생활이 언제쯤 막을 내릴지 모르기는 한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그날이 오기까지, 아주 아주 무척이나 긴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

내가 그렇게 만들 거고.

우리 모두가 그렇게 만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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