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마지막 스케줄 >
콘서트는 3주간 진행됐는데.
우리 애들의 인기는 그동안에도 전혀 식지 않았다.
‘비포 앤 애프터’와 ‘일도 잘하는 밴드’는 매주 방송되며 화제가 끊이지 않았으며, 해외에서의 인기도 차츰차츰 올라갈 뿐이었다.
빌보드 순위는 이제 11위.
유진이 때와 비슷하다.
미국을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순위가 이렇게까지 올라왔다.
그뿐이랴? 일반적인 대중들은 그리 관심을 가지지 않는 콘서트 후기 또한 화제였다.
얼마나 좋았는지, 그녀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대중들은 계속 그녀들에 대해 알고자 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해외 활동뿐.
그 첫 발은 미국이었다.
우리에게 남은 국내 스케줄은 오늘이 마지막.
우리는 ‘히어로 & 빌런’ 컨텐츠를 찍기 위해 촬영장에 와 있었다.
‘이번엔 아예 실제 호프집을 빌려버렸어.’
그런데 왜 하필 호프집일까.
대마왕 혹은 대마녀 혹은 대빌런과 히어로의 싸움을 보는 건데.
나는 미팅을 통해 이를 다 알고 있었으나, 애들의 얼굴엔 이런 의문이 그대로 떠올라 있었다.
김송송송의 컨텐츠를 찍을 때마다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찍었던 이진국 감독.
이번엔 의문을 해소시켜줄 필요성을 느꼈는지, 이례적으로 입을 열어 설명했다.
“그냥 초능력 있는 빌런이랑 히어로 컨텐츠면 할 게 뻔해요. 대중들이 공감도 가지 않고, 재미도 없죠. 그럼 대중들이 쉽게 공감하고 푹 빠져들 만한 빌런은 어떤 게 있겠습니까? 바로 현실에 있는 빌런들입니다. 여긴 호프집이니까 대충 감이 오시죠? 별 씨랑 유진 씨, 그리고 서연 씨는 여기 직원들입니다.”
“그럼···.”
서연이 말을 흐리며 정아를 쳐다봤고.
이진국 감독은 정아에게 물었다.
“정아 씨, 어떤 역할 하고 싶으세요? 사장도 괜찮고, 짬 찬 선배 알바도 괜찮고, 사장이랑 베스트 프렌드 손님도 괜찮습니다. 이 외에도 생각나는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뭐든 괜찮으니까요.”
정아는 나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띠웠다.
마치, ‘뭐? 빌런의 위험성? 하! 내가 어떻게 하나 잘 봐.’라고 말하는 듯했다.
“으음. 뭐가 좋을까.”
정아가 신난 목소리로 고민하고 있는 사이.
유진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항의했다.
“이, 이런 게 어딨어요? 컨텐츠 목적이 이게 맞아요? 이건 그냥 언니가 깽판 치는 그림이잖아요!”
“그러니까 히어로들인 겁니다. 어려운 상황을 슬기롭게 잘 극복하셔야죠.”
“···말도 안 돼.”
서연이는 날 노려보며 씩씩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우리 당하는 모습 찍으려는 거였어요!?”
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정곡을 찔린 탓이다.
‘재미가 제일 중요하니까···.’
난 일찌감치 이진국 감독에게 설득되었다.
‘취지가 뭐였든 간에 결국 팬들이 재밌게 볼 수 있는 걸 원하는 거 아니냐’, ‘그럼 이런 그림이 가장 좋지 않겠냐’라며 말하는 그에게 홀라당 넘어가버렸다.
상당히 논리적이고 묘하게 합리적이었으니.
“어? 오케이. 유진이랑 서연이는 아주 불만이 많은가 보구나?”
“···!”
“···!”
“감독님, 저 정했어요. 정경유착 끈끈한 대한민국 최고 재벌 3세, 그리고 여기 사장한테 가게 투자금 다 빌려준 엄청 친한 친구, 마지막으로 삼촌이 검찰총장인 금지옥엽 외동딸 역할 할게요.”
유진이와 서연이가 입을 쩍 벌렸는데, 정아의 설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늘 사장은 출근 안 했고, 저 셋은 절대 이 가게를 그만둘 수 없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는 걸로 하죠.”
“이 악마!”
“진짜 빌런이네···.”
유진이와 서연이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데, 별이는 최대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언니.”
“···야!”
“별아!”
이진국 감독의 얼굴에 함박 미소가 번졌고.
촬영 컨셉은 그렇게 확정됐다.
***
유튜브 예능 컨텐츠 감독으로 업계에서 유명했던 이진국 감독은 이제 뛰어난 뮤직 비디오 감독으로 자리 잡았다.
모두 김송송송 시리즈를 독점한 덕분.
이진국 감독에게 있어, 뮤직 비디오 감독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면.
예능 컨텐츠는 그에게 지루한 일에 불과했다.
허나, 김별을 만나고 난 뒤엔 달라졌다.
“크하하!”
대중들에게 아무리 재밌는 장면이 나와도 소리 내어 웃지 않던 그가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실소도 아니고, 헛웃음도 아니고, 작은 미소도 아니다.
김송송송 컨텐츠를 시작으로 꿈을 펼친 자신이 지금은 아일랜드의 컨텐츠 촬영을 하고 있었다.
요즘,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그녀들을.
유튜브나 TV, OTT를 막론하고 모두가 찍고 싶어하는 그녀들을 말이다.
이번 컨텐츠에선 김송송송 컨텐츠와는 달리, 뮤직 비디오 촬영이 예정되어 있진 않았으나.
그래도 좋았다.
그녀들의 유명세도 유명세지만, 자신을 뮤비 감독으로 만들어준 김별이 여기에 있었고.
그 또한 아일랜드의 팬이었으니까.
“어? 여기 서비스가 왜 이래? 대답 똑바로 안 해!?”
“저··· 손님, 마음에 안 들면 나가시는 게-“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정아가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하는 시늉을 한다.
“어, 여보세요? 유민아, 내가 지금 너네 가게거든? 근데 알바가 왜 이 모양이냐? 이름이 이유진이라고 하는데, 손님을 아주 호구로 아는 것 같은데? 아, 바꿔달라고?”
갑자기 김유민 사장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진국은 곧장 한 카메라를 그에게 돌리게 했고.
김유민은 헛웃음을 터뜨리면서도 마지못해 통화하는 시늉을 한다.
“유진아. 파이팅. 열심히 해.”
“아니! 잠깐! 오빠, 지금 컨셉 몰라? 몰입해야 할 거 아니야!”
유정아가 김유민을 혼내던 바로 그때.
언제나 제멋대로 컨셉을 뒤바꿔버리는 콩트의 천재, 김송송송 컨텐츠에서 늘 ‘프리 롤’을 맡곤 했던 구서연이 튀어나왔다.
“거, 이제 그만 좀 하쇼!”
“···뭐?”
“나 사실 미국 대통령 아들인데, 당신 이러는 거 아뇨.”
스탭들과 이진국 감독의 입에서 또 다시 박장대소가 터졌다.
유정아가 헛웃음을 내뱉으며 황당해하고 있다.
‘천하의 유정아도 콩트에선 서연이한테 밀려버리네.’
하지만 서연의 폭주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별, 자네 그렇게 계속 보고만 있을 건가? NASA 총장의 외동딸로서 한마디 하시게.”
“···갑자기 나사? 그리고 나사 총장은 또 뭐야. 구서연 너 아주 막 하는구나?”
“어허! 조용히 하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소!”
흐름이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이진국 감독의 입에선 연신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하하하!”
예상대로 되지 않으면 또 어떠한가.
이런 콩트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재미.
다른 건 몰라도 재미 하나만큼은 확 잡고 있었다.
***
“역시 너무 강적이야. 이거 우리보다 저 컨텐츠가 훨씬 더 화제될 수도 있겠어.”
유튜브 컨텐츠의 촬영장을 찍었던 ‘비포 앤 애프터’의 장동준 피디.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미간을 좁혔다.
메인 작가 최영희는 혀를 차며 답했다.
“저게 잘되면 우리 프로도 잘되는 거죠. 어차피 저게 먼저 업로드될 텐데.”
방송을 통해 저 영상이 한 번 더 주목받겠지만, 저 영상이 먼저 주목을 받으면 방송 또한 주목을 받게 된다.
완전한 Win-Win의 관계.
허나 장동준 피디는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같은 촬영이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오늘은 자신들도 개입을 적극적으로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장피디는 기도하듯이 손을 모으며 말했다.
“제발 잘 뽑혀라! 제발! 믿습니다, 아일랜드!”
폐쇄적인 곳에서 촬영했던 유튜브 컨텐츠와는 달리, 지금은 한껏 개방된 공간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의 방송국 VBC가 위치한 일산.
방송국 바로 옆에 있는 호수공원이었다.
“와! 대박! 아일랜드야!”
“우와아아! 저 진짜 팬이에요! 와! 진짜 엄청 이쁘다!”
“헐! 여보세요? 야! 여기 빨리 와! 아일랜드 떴어! 구라 아니고 진짜라니까!”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스탭들은 적당한 선에서만 일반인들을 통제했다.
구경과 촬영은 마음껏 하되, 너무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도록.
함성과 소리 또한 마음껏 지르되, 촬영에 지장을 주지는 못하도록.
스탭들은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긴장을 유지하는 반면.
아일랜드와 그녀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저 즐거워하고 있었다.
“드디어 배우네.”
자전거를 응시하며 기대 어린 미소를 짓는 유정아.
김유민은 그녀와 반대로 영 꺼림칙한 얼굴로 자전거를 쏘아봤다.
마치 좋지 않은 미래를 예견한 듯이.
장동준 피디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원래 끼어드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오늘은 평소와 완전히 다르게 가기로 했으니까.
“여러분, 곧 식사 내드릴 테니까 편하게 드세요. 바로 식사하실 분들은 하셔도 되고, 다른 거 하시고 싶으면 다른 거 하셔도 됩니다.”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한 건, 리얼리티를 지키는 최소한의 선이었다.
그 때문일까?
돗자리에 앉은 건 김별 뿐이었다.
아직 올려진 식사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녀는 벌써부터 목울대를 꿀렁이며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오빠, 밥은 이따 먹고 자전거부터 타자.”
“···그래.”
유정아가 이제 막 자전거를 배우려 했고.
구서연과 이유진은 장소와 각도를 바꿔가며 서로 셀카를 찍기에 바빴다.
아직까지는 심심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니까.’
장피디는 주먹을 꽉 쥐었다.
***
군중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난 복장이 터질 것 같은데.
“놓지 마! 절대 놓지 마! 놓지 말라고 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핸들.
자전거를 연습 중인 건지, 성량을 키우려는 건지, 목소리 하나만큼은 우렁찼다.
“안 놓는다고. 안 놔. 하늘이 무너져도 절대 안 놔.”
난 정아가 타는 자전거의 뒤를 잡고 뒤뚱뒤뚱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악!”
중심을 잃은 정아가 비명을 내질렀다.
몸에는 온갖 보호대를 다 착용하고 있고, 내가 중심을 잡아줘서 넘어지지도 않았으면서.
그녀는 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내가 놓지 말라고 했잖아! 왜 놔!”
“지금 내 손 안 보여? 잡고 있잖아.”
“거짓말 치지 마! 내가 똑똑히 느꼈어. 놨다가 다시 잡은 거잖아!”
“하아···”
구경하던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또 한 번 귀를 울려댔다.
얘는 사람들이 보고 있든 말든, 핸드폰으로 찍고 있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스탭들의 통제 하에 방해받지 않고 있으니, 그것만으로 모든 게 만사 오케이인 모양이다.
“정아야, 우리 이미지 관리에 조금만 신경 쓸까? 사장으로서의 부탁이다. 제발.”
“뭐래? 이제 와서? 됐으니까 놓지나 마.”
난 이마에 손을 짚고 눈을 돌렸다.
우리와는 반대로, 별이는 돗자리에 앉아 평화롭게 식사에 몰두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거··· 맞나?’
커다란 돗자리가 가득 찰 정도의 밥상.
상에 올려놨으면 상다리가 부러졌을 만큼 많았다.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얼핏 평화로운 듯 보였다.
하지만 식사량은 전혀 평화롭지 않았다.
‘아무리 별이라도 슬슬 말려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시원시원한 명품 먹방 덕분인지 한껏 정적인데도 불구하고, 저쪽에도 구경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언니, 제가 봤는데요. 사장님 손 안 놓으셨어요.”
서연이는 우리의 주변을 얼쩡거리며 이렇게 슬쩍슬쩍 정아의 신경을 긁었다.
“자전거 그렇게 타는 거 아닌데.”
“···야! 너 아까부터 자꾸! 진짜 한 번 혼나볼래!?”
서연이는 냉큼 별이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내뺐다.
저기서 몇 입 주워먹다가 또 여기로 와서 한마디씩 던지겠지.
오늘 정아의 속을 뒤집어놓기로 아주 작정한 모양이다.
‘그럴수록 내가 더 고생하는데···.’
정아의 도끼눈은 유진이에게로 옮겼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며 우리의 주위를 맴돌고, 가끔은 휙 지나치는 유진이.
서연이와 달리 정아에게 입도 뻥긋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묘기를 부리듯 화려한 발재간을 은근슬쩍 자랑하며 군중들의 환호를 자아냈다.
웃음만을 자아내고 있는 정아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광경.
“이유진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네? 뭘요?”
“일부러 그러는 거잖아! 탈 거면 딴 데 가서 타!”
“에이, 그럼 스탭분들 갈라지잖아요. 엄연히 방송인데 효율을 추구해야죠.”
“효율은 개뿔···!”
유진이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다시 휙- 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래서 불똥은 또 다시 내게로 튀었다.
“이번에 또 한 번 손 놓기만 해봐. 진짜 가만 안 둬!”
“나 진짜 억울하거든? 시민분들한테 한 번 물어봐. VAR 해보자.”
“잡고 있는 척 손만 얹어놨나 보지? 손에 힘 다 뺀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애초에 들어먹을 생각이 없구만?”
심력이 아주 쭉쭉 빠진다.
‘국내에서의 마지막 스케줄이 이게 뭐야.’
아주 엉망진창이 따로 없다.
“또 힘 뺐지!?”
“내가 죄인이지.”
몇 번이나 반복되는 상황.
서연이와 유진이는 정말 작정을 한 듯 정아의 주변을 깔짝거리고.
정아는 실력이 늘 기미도 보이지 않고.
별이 쪽에선 이제 시민분들이 경악성까지 토해내고 있었다.
‘별이 쟤 진짜 배 터지는 거 아니야? 이제 정말 말려야 할 것 같은데.’
걱정이 된 나머지,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그래서 정말로 무심코 자전거에서 손을 떼어내고 말았다.
“아악! 이거 봐! 이거! 손 놨잖아!”
“···.”
이번엔 유구무언이었다.
완전히 걸려버렸기에, 정아에게 한 소리 듣고 있는데.
장동준 피디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희미하게 들려왔다.
“와···. 정말 너무 좋다.”
순간 나도 모르게.
장피디님을 향해 눈알을 부라렸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저 입을 아주 그냥.
< 국내 마지막 스케줄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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