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신미약 상태 >
서연이의 미친 활약으로 인해 3곡이 하루아침에 추가되었지만.
타이틀 곡은 여전히 그 곡이었다.
서연이가 진작에 만들었던 곡, 가제 ‘우리가 걸그룹이라면’.
‘가제 하나 기깔나게 잘 지었지.’
우린 이 가제에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만날 수 없는 4명의 여자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것.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물론 가사에 계절 관련해서 나오진 않지만, 뮤비는 확실히 볼 거리 풍성하게 잘 나올 것이다.
“내가 여름 하고 싶었는데.”
입술을 댓발 내밀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서연이.
그녀의 시선 끝에는 유진이가 있었다.
노출은 그렇게 없지만, 시원시원하면서도 섹시한 착장을 걸친 이유진.
김별은 서연과 마찬가지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서연이에게 말했다.
“네가 저 옷 입으면 우리 뮤비 이상해져.”
“···무슨 뜻이야 그게?”
“별 뜻 아니야.”
“별 뜻 맞잖아!”
넷이서 뮤직 비디오를 찍는 건 이번이 처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이미 진작부터 서로 얼굴을 맞대며 많은 시간을 보낸 덕분이겠지.
나는 유진이를 보며 말했다.
“잘 어울리네. 의상이 이래서 그런가? 머리 땋은 것도 되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유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씩 웃었다.
“그쵸? 야성의 매력이 팍팍 느껴지죠? 팬들이 그러더라고요. 클레이 뮤비에서 날것의 매력이 느껴지고, 야성의 미가 느껴진다고. 이 컨셉 진짜 저랑 찰떡이라니까요?”
자랑하듯이 슬쩍슬쩍 여러 포즈를 잡는데, 눈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난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세트장을 눈에 담았다.
해변가의 밀림으로 꾸민 세트장. 유진이의 테마 세트였다.
바다는 CG로 할 예정이라서 현장에 물은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지만, 충분히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쯧. 쪼잔하게 이게 뭐야. 난 해외 로케라도 갈 줄 알았는데, 하여간.”
정아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계절도 하필 애매하게 가을이고. 여름은 해변이나 밀림이라도 하고, 겨울도 설산이나 빙하로 하면 되는데 난 뭐냐고. 의상도 애매하고.”
그녀가 맡은 계절은 가을.
배경도 그렇고 그녀의 말대로 가을을 컨셉으로 잡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긴 했다.
유진이가 맡은 여름과, 별이가 맡은 겨울에 비하면.
그러나 이런 정아의 말에, 다른 멤버들의 반응은 영 시원치 않았다.
나도 애들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난 그녀들의 마음을 대변해 말했다.
“그래서 네가 제일 세련돼 보이잖아. 딱 너랑 잘 어울리게.”
“뭐··· 세련미 하면 또 내가 빠질 수 없긴 하지···. 찬란하고 화려하고 고급스럽고 왠지 분위기 있고. 그래도 애매하지 않나?”
“···.”
“···.”
“···.”
잠깐의 침묵 끝에 서연이가 입을 열었다.
“가을을 보통 찬란하고 화려하고 고급스럽다고 하나요?”
“내가 찬란하고 화려하고 고급스럽다고, 내가. 그리고 가을도 좋은 계절이야. 왜 이래? 계절 차별하니?”
“방금 전까지 언니가 애매하다고-“
“좋다고.”
“···넵.”
아무튼 다들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봄을 배경으로 꾸민 서연이도 러블리하게 나왔고.
이 정도면 팬들이 적어도 실망은 하지 않으리라.
오히려 엄청 좋아하겠지.
누가 스타들 아니랄까 봐, 우리의 첫 뮤직 비디오 촬영은 그렇게 잔잔하고 순탄하게 흘러갔다.
물론, 뮤비를 보는 팬들의 마음은 미친듯이 요동치겠지만.
***
뮤비를 찍었어도 연습은 이어진다.
데뷔가 임박하며 여러 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밀기 전이다.
이제 ‘비포 앤 애프터’의 첫 촬영날까지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
그래서 이 시기가 굉장히 중요했다.
오롯이 연습에만 집중할 수 있는 날들이었으니.
그래서일까?
정아는 예전의 그 행동이 또 다시 튀어나왔다.
“너희 먼저 가도 돼. 난 좀 더 하고 갈게.”
연습실에서 정아는 눈빛을 활활 불태우며 말했고.
애들은 내 눈치를 봤다.
난 쩝,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래, 너희 먼저 들어가 봐. 오늘 수고했어.”
별이와 유진이, 서연이는 쭈뼛거리다가 인사하며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애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런 정아를 뜯어 말릴 수는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다.
그동안 열심히 해오며 발전한 덕분에 지금 그리 부족한 점은 없지만, 그래도 스스로 더 발전하겠다고 열심히 하는데.
이걸 어떻게 뜯어말리겠나.
“오빠는?”
“난 좀 더 있을게. 딱히 할 것도 없고.”
“···그러든가.”
딱히 할 건 없었지만 결정해야 할 건 있었다.
바로 숙소.
매번 차량을 네 대나 끌고 다니며 이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 대로 픽업한다 하더라도 매번 그녀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가며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도 없다.
스케줄이 널널하다면 모를까, 우리는 절대 그렇지 않을 테니까.
당연히, 미리 알아놓은 숙소들이 몇 있긴 하다만.
보안 문제도 그렇고, 위치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썩 그리 마음에 차지는 않았다.
보통 대형 기획사에서 그룹을 만들 땐 보안 문제를 신경 쓰며 충분한 시간을 들이는데, 우린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한 그룹이 아니었으니까.
애매한 계약 기간 때문에 선택의 폭이 좁기도 하고.
멤버들이 연습실을 빠져나간 뒤부터 정아가 내는 소리만 울려 퍼지기 시작한 연습실.
나는 정아가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계속 고민에 잠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아가 바닥에 몸을 눕히고 거칠게 숨을 헐떡거렸다.
“하아! 하아!”
난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그러다 숨 넘어가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더 이상 하면 정말 지장 생길 거야. 이것도 살짝 무리한 거고.”
서서히 숨이 가라앉을 무렵.
내가 수건을 건네자, 그녀는 상체를 일으키며 땀을 닦았다.
그리고 완전히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빠는?”
“내가 데려다줄게. 퇴근도 할 겸.”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나란히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차에 올라 조용히 운전을 하던 중.
많이 피곤한지, 정아가 나른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까 말이야. 뭘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있었어?”
“응? 아, 연습실에서?”
“어.”
“숙소. 어떻게 할까 하고.”
“숙소?”
“어.”
나는 아까 고민했던 문제들을 입밖으로 꺼냈다.
그룹의 리더이기도 하니, 못 할 얘기는 아니다.
혹여나 숙소 문제로 인해 회사에 대한 불만이 생길 수도 있고, 신뢰의 문제도 있으니.
이런 커뮤니케이션도 상당히 중요한 법이거든.
그런데.
정아는 나른한 목소리 그대로 툭, 말했다.
“그럼 우리 집으로 하든가.”
“···어?”
놀라운 말을 들어서, 눈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나 보지 말고 앞에 봐야지, 운전하는 사람이.”
“아, 어어.”
“집 넓어. 어쩌다 보니까 걸그룹을 하게 돼서 나까지 숙소에 들어가야 하는데, 다른 데 가면 나도 불편할 것 같아. 그럴 바엔 차라리 애들을 우리 집에 들이는 게 편하지.”
“정말··· 그래도 돼?”
보안 좋지, 공간 충분하지, 위치 좋지, 계약 문제도 자유롭지.
사실 그녀의 집이라면 정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그래도 된다고. 오빠가 이렇게 고민하는 거 보면 안 봐도 뻔해. 나도 오빠랑 똑같은 점 때문에 불만스러울 거야. 그리고 나 까다로운 거 알잖아. 오빠가 괜찮게 본 것도 내 눈에는 아닐지도 몰라.”
이렇게 근거를 들며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나는 안다.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음을.
아무리 서연이와 별이, 유진이가 정아의 마음에 들었어도, 집에 들이는 건 별개의 일.
나는 그녀가 많이 바뀌었음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워. 비용은 치를게.”
“그래, 그렇게 해. 안 그럼 팬들한테 손가락질 당해. 그런 건 누가 불 붙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말해야 돼.”
정아가 가수를 본격적으로 준비할 때부터 지금까지 실력을 포함하여 많은 부분이 바뀌었지만.
그녀를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언제나 열심히 한다는 점과, 한 번 멋질 때는 정말 엄청나게 멋지다는 점.
그렇게 내 골머리를 썩였던 숙소 문제는 정아에 의해 아주 멋지게 해결되었다.
“고맙다, 정아야. 진짜로.”
“됐어. 뭘 두 번씩이나.”
***
드디어 촬영을 시작한 ‘비포 앤 애프터’.
첫 촬영 장소는 유정아의 집, 그리고 첫 촬영날은 바로 멤버들의 입주일이었다.
나는 스탭들은 없고 카메라만 있는 정아의 집 안 곳곳을 둘러봤다.
혹시나 카메라의 설치 위치와 각도가 문제가 될 여지가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와! 여기가 우리 방이야? 서연아!”
“별아!”
별이와 서연이는 같이 쓸 방이 마음에 쏙 드는지 서로를 부둥켜 안으며 폴짝폴짝 뛰었다.
정아의 개인 방 다음으로 큰 방.
원래 여기가 두 번째 옷방이었는데, 지금은 첫 번째 옷방으로 다 옮겨버린 상태.
“오! 내 방도 되게 좋다!”
유진이도 감탄했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던 작은 방.
방은 작았지만 혼자 쓰기엔 충분할 정도다.
유진이는 방이 너무 마음에 드는지, 희희낙락 웃으며 카메라에 인사했다.
“안녕! 앞으로 잘 부탁해!”
“유진아, 너무 그렇게 아이돌스럽게 안 해도 돼. 평소대로 해.”
“···티 났어요? 좀 작위적이었나?”
“약간.”
유진이는 크흠, 헛기침을 하며 묵묵히 짐을 풀었다.
그래도 기쁜 건 사실인지 입꼬리는 내려오지 않았다.
나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애들의 짐 정리를 도와주기 바빴다.
쓸모없거나 같이 사용해도 되는 건 다시 집으로 보내라고 말해주고, 필요하지만 없는 건 알려주고.
그동안 듣고 보고, 직접 그룹 숙소에 가본 일이 많아서 이런 자잘한 정보들도 쌓이더라.
‘이게 짬이지. 이게 노하우고.’
애들의 짐정리가 대부분 끝나고, 단순한 정돈만이 남았을 때가 돼서야 나는 거실로 나올 수 있었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정아.
그녀는 나를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터뜨렸다.
“집안이 아주 엉망이 됐어···. 아주 쓰레기장이 따로 없다고.”
난 다시 왔던 길을 돌아봤다.
“음? 나름 깔끔한데? 정돈 끝나면 청소도 할 거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그럼 뭐가 문젠데?”
“세탁소도 아니고 옷방에 발 디딜 틈이 없어. 몇 발 떨어진 곳에서 옷을 봐야 스캔이 되고, 거울 앞에서 포즈도 잡아보고 해야 하는데··· 좁아 터져서 그게 안 돼! 저 잡동사니 방에 있던 건 또 어떻고? 다 베란다에 처박아서 저기 좀 봐! 저게 옳게 된 베란다 뷰야? 어?”
“···.”
“···그 표정 뭐야? 애들 들어오는데 이런 건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하는 듯한 그 표정은? 뭐지?”
“신기한 재주가 생겼네. 어떻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정확히 맞추지?”
난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비포 앤 애프터’의 카메라.
“그리고 정아야. 지금 저기서 다 찍고 있어. 보이지? 인사해. 유진이는 카메라 보면서 인사하더라.”
정아는 카메라를 노려보며 말했다.
“뭘 봐?”
“···너 이제 아이돌이야. 걸그룹이라고.”
“어쩌라고! 지금 그게 문제야? 집이 쓰레기장이 됐는데!?”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아는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집안이 아주 요지경이야. 내가 미쳤지, 왜 그딴 말을 해서는. 내가 아주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땐 심신미약 상태였어. 그냥 애들 연습 끝낼 때 같이 끝낼걸! 괜히 남아서 더 연습해서는!”
그때 참 멋지다고 생각했었는데, 심신미약 상태였구나.
정아를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것들 중에는.
언제나 열심히 한다는 점과, 한 번 멋질 때는 정말 엄청나게 멋지다는 점이 있었는데.
여기에 추가로 몇 가지가 더 있었다.
그중에 하나는,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모습이 아주 가끔은 귀여워 보일 때가 있다는 것.
지금 그녀의 모습이 그랬다.
다행이지, 이런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어서.
“왜 웃어? 내 심정이 어떻든 회사 돈 아끼니까 아주 좋아? 행복해? 만족스러워?”
맞다. 난 요새 아주 행복해 죽겠다. 정말로 너무나.
그게 오직 돈 때문은 아니었지만.
때문에 난 그녀의 물음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으나, 참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몹시도 매운 말들이 튀어나올 테니까.
나는 그녀를 잘 알았기에, 그녀의 관심을 확 돌릴 수 있을 만한 말을 꺼냈다.
“오늘은 추어탕 먹자.”
“팥죽. 오늘은 팥죽이야.”
“···팥죽?”
“그래. 오늘은 무조건 팥죽이니까 그렇게 알아.”
이렇게 제멋대로일 때는.
가끔 꿀밤을 먹여주고 싶기도 했다.
< 심신미약 상태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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