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투, 뜨리? >
이틀간 방영된 ‘아이돌 체육 대회’.
이 프로그램은 처음 몇 회를 빼고는 신선도가 떨어져 시청률이 떨어졌었다.
지금까지의 최고 시청률은 18.7%.
추이를 보면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은 기록이었는데.
그 기록은 이번 설 특집 방송에 의해 깨져버렸다.
마의 20%를 가뿐히 넘긴 25%.
무려 이런 시청률을 기록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별이가 최진솔을 구해준 것에 대한 화제성, 그리고 도저히 채널을 돌릴 수 없게 만드는 정아의 해설.
이 두 가지가 이번 시청률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런데 이런 은혜를 원수로 갚네?”
설마설마 했다. ‘설마 그러려고’ 하는 안일한 마음을 품었다.
그리고 이게 방심에 대한 대가였다.
[아이돌 체육 대회 유정아 독설 모음집]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
24시간이 지난 이때, 벌써 200만 회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게 뮤비야 뭐야.”
내가 애들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잘 모르고 있었나 보다.
조회수가 천장을 뚫고 있다.
“하! 참나···.”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반응이 좋았다.
대중들 뿐만 아니라, 각 팬덤에게도.
참 의외지. 아마 다른 아이돌이 이런 독설을 내뱉었으면 눈동자에 쌍심지를 켜고 물어뜯었을 텐데, 정아라서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나 보다.
-우리 선호가 좀 프로페셔널해요;;; (링크) 여기 보시면 숨 엄청 헐떡이는데도 윙크 장인···ㅋㅋㅋ
-ㅋㅋㅋㅋㅋ우리 애 저렇게 자리 피한 다음에 엄청 미안해하고 난리임. 방금 라방에서도 굽신굽신ㅋㅋㅋ 애들 라방 보면 완전 콩트임. 귀여워ㅋㅋ
-지니 울음 터뜨릴 때 해설 보고 굴러다녔음ㅋㅋㅋ 그래서 친척들한테 덕밍아웃됐다···. 유정아님 어떻게 책임지실 거예요?ㅠㅠㅠㅠ
정아한테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말했던 거랑 다르지 않냐’ 라며 따져 물었을 때.
그녀는 ‘그게 뭐? 아직도 대중들을 몰라? 참 오빠도 멀었다.’라며 혀를 찼다.
그런데 이런 반응들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나 능력 좋은데.”
억울하네.
확 그냥 나중에 본때를 보여주든가 해야지.
‘빌런 역할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줘야겠어.’
물론 당장은 힘들었다.
이건 나중에 데뷔할 때, 우리 자체 컨텐츠로 써먹으면 될 터.
이를 테면.
‘빌런 대 히어로 컨텐츠.’
정아가 혼자 대마왕 역할을 하고, 별이랑 서연이랑 유진이가 히어로 역할을 하면 되겠다.
“아주 악랄하고 악독하게 만들어야지.”
각오해라 유정아.
***
‘김송송송의 래퍼 도전기’의 마지막회가 올라왔다.
3편인 뮤직 비디오까지.
“1위 했네.”
서연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차트 1위, 이건 아무리 많이 해도 절대 질리지 않을 것 같다.
김송송송의 노래였지만 자신이 비트를 만들었으며, 피처링까지 했으니 자신의 곡이기도 했다.
서연은 컴퓨터로 인터넷을 켜 반응들을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수많은 댓글들 중에는 완전히 같은 댓글과 비슷한 댓글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즐거웠다.
-구서연 왤케 웃기냐 진짴ㅋㅋㅋㅋㅋ 존재감 확실하네.
-동글동글하게 귀엽고 순둥순둥하게 애가 이것만 하면 날뛰어ㅋㅋ
-‘아체대’ 투구 때도 혼자 조용히 몰입하더니ㅋㅋ 진짜 연기에 날이 섰네.
이렇게 음악 외적인 것에 대한 댓글도 좋았고.
-비트 진짜 장난 아니다ㅋㅋㅋ 힙합 처음 만드는 거 맞음?
-와 구서연 습득력 봐라. 아니 그냥 재능이 미쳤어.
-벅스가 “네가 하던 거에 비하면 별거 아니다”라고 말했을 때 살짝 의문이었는데 이걸 이렇게 증명해버리네···.
운이 좋았다.
옆에 벅스가 없었다면 이렇게 될 대로 되란 마인드로 만들지는 못했을 테니까.
이 컨텐츠가 없었으면 힙합을 시도할 생각조차 안 해봤겠지.
‘좋은 기회였어.’
음악에 대한 스펙트럼이 더 넓어졌으니, 많은 걸 얻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칭찬 중에는 보컬과 랩에 대한 것도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역시 서연이 목소리가 힙합에서 진짜 개사기라니까?
-훅쟁이 삘 풀풀 풍기는 거 뭔데?ㅋㅋㅋ 귀에 착 감기네?
-아니 훅도 훅인데 랩도 좋음. 구서연은 그냥 음악을 잘해.
-ㅇㅇ처음 하는 랩이 저 정도면 나쁘지 않은 거임. 스킬은 부족한 게 당연한데 자기가 비트를 만들어서 그런가 삘을 확실히 엄청 잘 잡네. 무엇보다 플로우 타는 게 지림;;
서연은 한 시간이 넘도록 댓글들을 살폈다.
처음 도전하는 장르여서 그런지, 자극도 새로워서 재밌었다.
“흐음···.”
김유민과 최근에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서연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또 곡 쓴 거 없지?’
‘네, 없어요.’
‘그래? 알겠어. 그럼 싱글 앨범으로 활동하자. 이제 바로 작업 들어갈 거야.’
서연은 핸드폰에 적힌 스케줄표를 살폈다.
내일은 스케줄이 없다.
“지금 만들어도 되려나?”
만들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마침 심심하던 차.
서연은 인터넷을 끄고는 작곡 프로그램을 틀었다.
“한 번 해보면 알겠지.”
애초에 벅스의 작업실에서 비트를 만들 때도 그랬다.
현장에서 별 생각 없이 그냥 만들었지 않은가.
그렇게 만든 곡에 이렇게 좋은 반응이 터지고 있으니, 자신감과 흥미가 샘솟는 느낌이 들었다.
‘랩이 없어도 그냥 힙합 색깔만 살짝 넣어봐도 재밌을 것 같은데.’
설령 이렇게 만든 곡을 활용하지 못해도 상관 없었다.
활동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더 가벼운 마음으로 작업할 수 있었다.
가제, ‘우리가 걸그룹이라면’을 만들었을 때는 자신들 네 명의 색깔을 모두 섞었었다.
그리고 서연은 여기에 이번에 겪었던 경험까지 살짝 끼얹어봤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뭐가 메인이 되고 어떤 경험이 베이스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손이 가네.’
살짝 웃음이 터졌다.
문득 김별이 체육 대회 때 일을 벌이고 대기실에서 했던 말이 떠올라서.
‘몰라요. 그냥 몸이 움직였어요.’
김별은 그냥 몸이 움직였다고 말했다.
이거랑 비슷한 건가?
진지한 듯, 즐기는 듯, 장난 치는 듯, 딴생각을 하는 듯, 집중하는 듯.
시간이 흘러갈수록 늘어나는 트랙 수.
어느 순간 보니, 곡이 완성되어 있었다.
“으음. 하나 더 만들어볼까?”
어쩐지 느낌이 좋다.
서연은 ‘김송송송의 래퍼 도전기’ 1편에서 봤던 김별의 말이 떠올랐다.
‘예. 다섯 살 때부터 저는 피아노를 쳤어요. 영재였죠.’
‘네?’
‘트로트가 1악장, 헤비메탈이 2악장이었다면, 힙합은 3악장이에요. 이번엔 무조건 성공해 보일 거예요.’
‘···예, 파이팅하시고.’
“1악장 하니까 그것도 생각나네.”
배우 이하영은 관찰 예능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을 들었었다.
그때 소파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커피향을 맡으며 말했었다.
‘역시 1악장이 잔잔해서 마음이 편해져.’
베토벤,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던 영재, 1악장, 2악장, 3악장, 커피, 잔잔함, 트로트, 헤비메탈, 힙합···.
서연의 머릿속으로 불쑬불쑥 자잘한 단어들이 떠올랐고.
톡! 톡! 비눗방울 터지듯이, 필요할 때마다 악상이 떠올랐다.
그렇게 또 하나의 곡이 완성됐다.
하지만.
“한 곡 더.”
한창 집중하던 서연의 뒤로 잠시 인기척이 났다가 사라졌다.
아빠가 들어왔다가 나간 모양.
‘아빠 곡은 포크송.’
기타가 일품인 곡이다.
공포증을 극복하고 처음 버스킹했을 때 기타를 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밤을 새도록 인터넷의 반응을 살피곤 했지.
이제는 그때보다는 덜하다.
인터넷의 반응을 살피는 시간도, 그로 인해 오는 감흥의 크기도.
하지만 대중들의 좋은 반응이 여전히 기쁘게 다가오는 건 똑같다.
‘통기타. 기쁨. 추억.’
단어마다 피부를 간질이는 느낌을 그대로 음악에 담아보기로 했다.
‘참고하는 정도지. 내가 뭐 천재도 아닌데.’
어떻게 단어를 악상에 담겠나.
단어와 기억에서 대충 느껴지는 분위기를 참고해보는 거다.
.
.
.
그렇게 새벽 4시.
“···뭐야.”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다.
아무리 오늘 스케줄이 없어도 그렇지.
정말 푹 자야겠다.
“사장님은··· 당연히 주무시겠지?”
자고 일어나서 느긋하게 톡을 남겨야겠다.
‘세 곡이나 썼다고 하면 좋아하시겠지.’
이 곡을 실제로 활용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하암!”
서연은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고선, 그대로 포근한 침대 위에 누웠다.
***
오전 회의가 끝난 뒤의 점심시간.
나와 정실장님은 둘만 함께 회사에서 나와 인근의 식당으로 향했다.
많은 직원들과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는 건 사장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더라.
아무리 그들의 열정이 충만하더라도, 숨 쉴 틈은 줘야지.
“그런데 왜 맨날 접니까?”
“에이. 왜 그러세요? 정실장님은 제가 편하시면서.”
실장님은 픽, 웃으며 김치찌개를 들었고, 나도 김치찌개를 떠먹었다.
그렇게 한창 식사에 빠져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누구야? 이 소중한 점심시간에 매너 없게.’
서연이였다.
“어, 서연아.”
-사장님, 뭐 해요? 바빠요?
“왜? 할 말 있어?”
다른 사람들이면 몰라도 우리 애들은 언제 통화해도 괜찮다.
얘네들이랑 통화하는 건 일하는 느낌이 전혀 안 들거든.
비단 그녀들의 인기와 외모 때문이 아니다.
팬들이나 대중들이 이쁘고 잘생긴 연예인과 통화하면 늘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겪어보면 그렇지 않다.
내가 우리 애들을 편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녀들이 가진 성격 때문이다.
까다롭지도 않고, 불만 어린 소리도, 배부른 투정도 안 하니까.
물론 정아는 어떨 때 이 셋을 한꺼번에 할 때도 있긴 한데.
정아는 예외지. 정아니까.
걔는 오히려 상냥하면 더 무서울 것 같아.
-으음.
“뭔데 그래? 아무리 너라도 쓸데없는 얘기면 끊을-“
-저 곡 만들었어요.
전화하느라 깨작깨작 젓가락을 움직이던 손이 멈칫했다.
“···곡!?”
-네. 세 곡이요.
“세··· 세 곡? 새 거, 새 신발, 새로운 곡 할 때 그 ‘새’ 말고 뜨리? 하나, 둘, 셋, 할 때 그 세 곡? 곡을 세 개나 썼다는 거 맞지?”
내 말에 정실장님도 손을 멈추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뚫어져라 쳐다봤다.
-와, 노잼.
“그래서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아니, 세 개를 쓴 게 맞아? 언제? 언제 그렇게 썼어?”
-원 투 뜨리 할 때 그 뜨리, 세 개 맞고요. 어제 삘 받아서 썼어요.
“하루만에···!”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나는 참 인복도 좋다.
어떻게 이렇게 매번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는지.
-그런데 그렇게 막 기대하진 마시고요.
어떻게 기대를 안 할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제는 자판기 수준이 아니라 무슨 공장 수준이다.
어떻게 하루 만에 곡을 세 개나 써?
물론 퀄리티를 따지지 않으면 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능하겠지만.
서연이가 언제 허투루 곡을 쓴 적이 있던가.
난 물을 벌컥 들이키며 말했다.
“서연아, 내가 집으로 갈까?”
-아뇨, 제가 회사로 갈게요. 일단 밥 좀 먹고요. 곡 만드느라 늦게 자서 지금 막 일어났어요.
“...그래, 천천히 와. 천천히.”
마음 같아선 당장 튀어오라고 말하고 싶었고, 그냥 클라우드에 바로 올리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 말이 입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기특한 일을 했는데 어떻게 그래?
그래도 직접 얼굴 보고 칭찬해줘야지.
난 전화를 끊고 정실장님에게 말했다.
“저희 지금까지 회의했던 것들 싹 다 엎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오늘 회의는 모두 취소해주세요. 아, 아니다. 한 3시쯤? 네, 세 시쯤 회의해야겠어요.”
“미니 앨범이 되겠네요. 와, 팬들 환호하는 소리가 벌써 들리는 것 같습니다.”
팬들 환호하는 소리?
겨우?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 빌보드 차트 올라가는 소리까지 들리는데요.”
“그건 어떤 소린데요?”
“빌빌보드보드?”
정실장님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밥이나 먹읍시다.”
“···제가 이래서 정실장님이랑 매번 밥을 먹는 거예요. 절 편하게 생각하시니까. 좀 웃어주시지. 사람 민망하게.”
별이와 서연이의 팬들이 이번 힙합 곡으로 깜짝 선물을 받았다고 한 것처럼.
나 또한 깜짝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회의가 물거품이 됐는데도, 입에선 실실 웃음이 나오고 있었다.
< 원, 투, 뜨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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