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들과 함께하는 연예계 생활-108화 (108/124)

< 그냥 몸이 움직였어요. >

“자, 이 선수는 투구 자세가 독특하기로 유명하죠? 왠지 MLB에서 마무리 투수로 엄청난 활약을 펼칠 것만 같은 투구폼을 갖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화제의 그 선수, 구브렐! 구서연입니다!”

서연은 숨을 깊이 골랐다.

“하아···. 하아···.”

숨이 차지도 않는데, 마치 9회말 2아웃 풀카운트에 임하는 투수처럼 모든 것을 내던질 기세로 임전태세였다.

강렬한 눈빛. 서연의 자세가 서서히 낮아졌고, 팔이 직각으로 벌어졌다.

“오! 독수리 자세 떴어요! 구브렐의 출현입니다!”

“관객들의 함성 소리 들어보세요! 모두가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선수의 표정엔 미동도 없습니다!”

정아가 피식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언제나 가지가지 잘하는 선수입니다. 쟤 완전히 몰입했어요. 눈빛 보면 알아요. 근데 이럴 때만 참 몰입이 좋다는 게 문제인 선수입니다. 쟤는 연기 시키면 안 돼요. 지 하고 싶은 대로만 해서.”

쓸데없는 말까지 덧붙였지만 아무도 뭐라 하는 이가 없다.

서연은 독수리 자세를 풀고, 와인드업을 했다.

“던집니다! 던져요!”

“과연!”

휙-! 시구 때의 모습이 재연됐다.

궤적이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으로 향한다.

실제 게임의 투구였으면 무조건 실투였겠으나, 여기서는 만점 짜리 코스.

“우오오오! 해냈어요! 기어이 해내고 맙니다!”

“정확한 자세! 나쁘지 않은 속도! 아주 좋아요! 제구가 완벽했어요!”

나머지 MC들이 호들갑을 떨고, 서연은 매서운 눈빛을 유지하며 그저 씩 웃었다.

이에, 정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

구브렐의 완벽한 부활!

제작진들은 응원했다. 부디 김별과 서연이 모두 양궁과 이스포츠에서도 대활약하길!

그래서 1초라도 더 오래오래 방송에 내보낼 수 있기를.

그러나 김별과 서연 둘 다 죽을 쒔다.

양궁과 이스포츠 광탈. 김별은 투구에서마저도 죽을 쒔다.

그녀들의 분량이 적어졌기에, 제작진들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뱉었다.

이는 팬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래도 현장에 온 팬들은 아쉬움이 덜했다.

김별과 서연의 실물을 오랫동안 두 눈에 담을 수도 있고, 그녀들이 직접 도시락을 나눠주기도 했으니까.

“식사하세요! 많이 배고프시죠?”

“맛있게 드세요. 떨어져서 죄송해요.”

점심시간.

언젠가부터 역조공은 필수가 되었고, 올라오는 사진과 후기에 비교질이 심했다.

그래서 이 시간은 기획사와 아이돌, 그리고 팬들의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다.

누구는 고급 도시락에 플러스 알파를 주고, 누구는 맛없는 도시락을 주고.

누구는 직접 팬들에게 애교를 부리며 직접 도시락을 나눠주고, 누구는 동태 눈으로 억지로 웃어주고.

“악습이야, 악습. 철폐해야 돼.”

“사실 프로그램에서 사는 게 맞는 거 아니야? 왜 이걸 기획사 책임으로, 아이돌 책임으로 돌려야 되냐고.”

서연과 김별의 팬들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게 퍼져 있었다.

도시락의 퀄리티가 좋기도 한데, 그보다는 그녀들의 저 진심 어린 미소가 보기 좋아서.

팬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대면했을 때, 팬들을 대하는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

물론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오해하고 몰라보는 게 사람 감정이기에,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다. 아이돌도 사람이라서, 너무 피곤하고 그 전에 힘든 일이 있었을 수도 있고.

하지만 당장 팬들의 눈에 보이고 있는 김별과 서연의 모습은 오해의 여지조차 없었다.

그저 해맑은 미소를 보이고 있었으며, 김별은 너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자제하고 있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이러니까 좋아할 수밖에 없지.”

“광탈이면 어때. 여기 나와준 것만으로도 너무 기특하고 고맙다.”

김별의 팬이 된 이유, 그리고 서연의 팬이 된 이유는 여러 가지다.

실력과 재능, 노력도 크다. 하지만 그건 이곳에 직접 올 정도로 팬이 된 이유가 될 수 없다.

저 마음씨와 성격.

그녀들이 가진 이 커다란 가치는 그녀들이 가진 비주얼 만큼이나 빛나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스타의 모습만으로 사람의 모든 걸 볼 수 없긴 하다만.

보여지는 모습이 너무나도 좋았기에, 팬들은 기꺼이 그녀들을 위해 커다란 응원을 보냈다.

광탈해버리는 바람에 응원할 종목이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

경기는 계속 치뤄졌고, 이제 여자 계주 400m.

유정아는 여기서도 입으로 활약을 펼쳤다.

“레모네이드, 세 명이 전부 다 느리네요. 현재 꼴등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출전할 걸 그랬어요. 저 정도는 나도 뛰는데. 어떻게 세 명이 다··· 그럼 출전하지 않은 두 명은 대체 얼마나 느릴까요? 개인적으로 무척 보고 싶네요.”

한 명당 100m씩, 4명이서 뛰는 계주.

이수진을 포함한 3명의 멤버는 모두 역전의 여지조차 없는 꼴등을 달렸고.

이제 남은 멤버는 한 명.

라디오 방송에서 실수로 김별에 대한 언급을 하여 사고를 터뜨렸던 그룹의 맏이, 최진솔이었다.

바톤을 받은 그녀는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아이돌의 인기와 위치는 이런 체육 대회에서 결정나는 게 아니지만, 그냥 지기가 싫었다.

김별이 보고 있다는 것도 진솔의 힘을 끌어올리는 데 일조가 됐다.

그런데 욕심이 너무 앞섰던 탓일까.

“음?”

“어!”

“조심!”

중심을 잃었다.

휘청휘청 앞으로 쓰러질 듯, 두 팔을 허우적대며 다리를 겨우 한 발씩 내딛고 있다.

곧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양새. 그녀의 얼굴에선 무서워하고 당황스러워하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

그때, 최진솔과 김별의 눈이 마주쳤다.

트랙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출연진들.

최진솔의 머릿속엔 김별의 바로 앞에서 우당탕탕 쓰러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하필이면, 김별의 바로 앞에서.

그러나.

이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몸을 벌떡 일으키며 번개처럼 튀어나가는 김별.

“어어!”

“안 돼!”

“꺄아!”

관중들과 스탭들, 출연진들 모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달려가고 있는 김별과 최진솔의 눈이 찰나에 또 마주쳤고.

김별은 결국에 엎어지려는 최진솔의 어깨를 휙 잡아 돌렸다.

그리고, 최진솔을 끌어안은 김별의 등이 바닥에 닿았다. 쿵.

***

사색이 된 제작진들은 발빠르게 대처했다.

김별과 최진솔 모두 의사의 진찰을 받은 뒤, 각자의 대기실로 들어갔다.

“야! 너 왜 그랬어!”

유정아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김별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몰라요. 그냥 몸이 움직였어요.”

“···다친 데는?”

“없어요. 까지지도 않았어요.”

그녀의 대답에 매니저들과 스탭들, 서연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유정아도 작게 안도하며 코웃음을 쳤다.

“하! 너 엄청 빠르더라? 난 너 국가대표인 줄 알았어. 그런 운동신경 있었으면 진작에 써먹지, 광탈은 왜 해?”

“양궁이랑 게임이랑 투구에는 안 맞는 운동신경인가 봐요.”

“얼씨구? 말은 잘하지. 그래도 화제는 되겠네. 넌 스타성 하나는 정말 타고났구나? 그것도 재능이다. 라이브 방송 실수도 연달아서 하고, 이런 사건도 만들고.”

“사건까지는 아니에요. 안 다쳤잖아요.“

“다쳤으면 사고고! 이건 사건이지!”

김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유정아뿐만 아니라, 모두가 질책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어서.

“다음부터는 조심해. 아니, 아예 여길 나오지 말자. 여기 피디님 얼굴이 거무죽죽해져서 아주 죽을라 그러더라. 가뜩이나 말 많은 프로그램인데, 하필이면 사건이 터진 게 너야. 얼마나 심란하겠어. 억울하기도 할 거야. 또 엄청 허탈할걸? 우리 나와서 좋아했을 텐데, 복이 똥으로 변한 거니까. 안 다쳐서 망정이지.”

정아의 말에, 정실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얼마나 포장하기 좋은 일인데. 당연히 욕은 먹겠지만 무조건 덮일 거야. 화제가 워낙 클 테니까. 오히려 프로그램이나 방송국 입장에선 엄청난 호재가 터진 거지. 이거 편집도 안 할 거야.”

.

.

.

한편, 레모네이드의 대기실은 비교적 조용했다.

오히려 불편한 침묵이 간간이 흐르고 있었다.

하필이면, 도움을 준 사람이 김별이었으니까.

욕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서 마냥 고마워하기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안 아픈 거예요, 언니?”

“어···. 정말 하나도 안 아파. 난··· 푹신했어. 바닥에 안 깔렸잖아.”

“아···.”

“그리고 별이도 정말 괜찮다고 하더라고. 직접 말했어. 거짓말 아니었어.”

한때나마 김별과 가깝게 지냈었기에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최진솔은 대기실 바닥에 시선을 던지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후회하지도 않더라. 불편해 하지도 않고, 생색내거나 으스댄 건 당연히 아니고. 나보고 괜찮냐고 물어보던데···.”

다시 묘한 침묵이 흐르고.

이수진이 작은 목소리로,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랬지?”

“···글쎄.”

그녀들의 마음은 복잡하고 미묘했다.

***

[‘아이돌 체육 대회’, 김별 몸 던져 레모네이드 최진솔 구해!]

[최진솔, 함께 연습생 생활하던 김별 덕분에 부상 위험 피해.]

[김별이 최진솔을 구해내는 그 장면, 유튜브서 직캠 줄줄이.]

[네티즌, “김별 용감하다.” “너무 멋지다.” “악연을 구해낸 영웅.”]

바로 보고를 들었었다.

그리고 보고를 듣자마자 바로 별이와 통화도 했었다.

“얘는 왜 이렇게 무모해.”

가슴이 철렁했었다.

결국 화제가 되긴 했는데, 속이 편하지가 않다.

자칫하면 다칠 뻔했으니, 몸이 멀쩡하다 해도 걱정이 될 수밖에.

“이런 화제는 필요 없는데.”

나는 쯧, 혀를 차고는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오빠.

“안 자?”

-네, 집에 지금 들어왔어요. 오빠는 밥 먹었어요?

목소리가 밝다. 아까는 혼나서 그런지 목소리가 기어들어갔었는데.

“밥 먹었지. 그런데 몸은 괜찮은 거 맞지? 뒤늦게 아플 수도 있어서 그래.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정말 괜찮아요.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런데 오빠는 언제 귀국해요?

난 별이의 질문에 시선을 옮겼다.

뮤직 비디오 촬영 준비를 하고 있는 유진이.

유진이가 찍을 파트의 장소는 길바닥이었다.

넓은 미국 땅덩어리 중에 흔히 볼 수 있는, 도로만 있는 황량한 곳.

‘그치. 유진이한테는 이런 게 잘 맞지. 하여간 클레이도 아이디어 좋아.’

유진이의 팬이라서 그런지 유진이가 어떨 때 더 멋지게 보이는지를 안다.

실루엣 댄스처럼, 유진이는 화려한 연출보다는 정적이고 단조로운 연출이 유진이가 추는 댄스의 매력을 잘 살릴 수 있었다.

“지금 뮤비 찍고 있어. 곧 한국에 돌아가려고.”

-벌써 뮤비 촬영이에요? 녹음 끝난지 얼마 안 됐잖아요.

“유진이가 나올 장면만 촬영을 당긴 거야. 준비할 것도 거의 없으니까.”

-근데 너무 일찍 돌아오시는 거 아니에요? 유진 언니 엄청 잘되고 있잖아요.

어느새 통화는 걱정이 아니라 그냥 수다가 되어 있었는데.

끊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직 뭐 할 것도 없고.

“잘되고 있지. 15위까지 끌어올렸으면 엄청 좋은 거지. 그것도 에미넴이랑 에드 시런이 컴백했는데 이 정도면 엄청난 거잖아.”

에미넴과 에드 시런은 앨범을 발매하자마자 바로 다음주에 상위권을 차지해버렸다.

재수가 없어도 더럽게 없지.

저 둘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10위권 안쪽에 들어갔을지도 모르는데.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엄청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상대적 약자의 심정.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는 과정이리라.

“클레이가 컴백하면 유진이도 덩달아 또 엄청 화제 될 거야.”

그리고 우리 애들이 같이 뭉쳤을 때는.

또, 프로젝트 걸그룹 이후의 활동에서는.

우리도 빌보드에서 포식자의 위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첫 술에 이 정도면 배가 터져도 남는 정도지.

이게 유진이의 데뷔곡이니까.

유진이가 한 쪽에서 날 빤히 바라본다.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난 별이에게 말했다.

“이제 끊어봐야겠다. 잘 자고, 조금이라도 아프면 참지 말고. 알았지?”

-네. 그리고 한국 오면 같이 추어탕 먹어요. 요 며칠 동안 좀 생각나더라고요.

“···그래. 먹자, 추어탕.”

하여간 유정아.

어떤 걸로든 영향력이 크다.

‘아, 얘 MC했댔지?’

거기선 대체 뭐라고 했을까?

별이 때문에, 정아에 대해선 귀에 들어온 게 없었다.

그래서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뭐 적당히 잘했겠지.”

평소에 인터뷰도 잘하고, 베테랑인데 별 일 있었으려고.

난 걱정을 지워버리고 유진이에게 달려갔다.

< 그냥 몸이 움직였어요.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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