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들과 함께하는 연예계 생활-105화 (105/124)

< Hot And Wild >

클레이의 담당 에이전트, 로버트.

예전에 그는 클레이에게 제의도, 설득도 많이 했었다.

'다른 작곡가들의 곡을 불러보자', '지금 곡이 나오지 않으니 투어라도 다녀보자', '기분 전환도 할 겸 라디오라도 맡아서 해보자'.

모두 통하지 않았다.

다들 그랬듯이, 로버트도 클레이의 이러한 모습이 선뜻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옆에서 지켜봤다고는 하나, 영감을 잃는 게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깊이 이해할 수는 없어서.

하지만 로버트는 언젠간 그녀가 반드시 재기할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비록 클레이가 활동을 멈춘 지 3년이 지났으나, 바로 옆에서 지켜본 클레이의 재능은 진짜였으니까.

에이전시도 그렇고, 주변에서도, 인터넷에서도, 모두 클레이는 끝났다고 떠들어댔으나, 로버트만은 달랐다.

그는 클레이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난 믿고 있었어.'

로버트는 클레이의 대저택을 찬찬히 훑어봤다.

남다른 감회가 느껴졌다.

로버트가 클레이의 집에 방문하는 것은 그리 오래간만의 일은 아니었다.

물론 어떠한 설득과 제의도 통하지 않아서, 최근에는 그녀가 스스로 일어서기를 바라며 식사나 하는 정도였지만.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로버트는 환하게 웃으며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자주 왔던 저택이건만 걸음에 담긴 감정은 평소에 비할 수 없다.

손바닥에 땀이 나서 축축하기까지 하다.

-로버트! 우리 집으로 와. 나 곡 썼어.

흥분과 기대 어린 목소리였다.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뭐라고?

-곡 썼다고! 스케치는 다섯 곡이고, 완성된 곡은 하나야. 피처링 한 명 필요해. 이유진이라고 K팝 싱어야. 혹시 모르는 건 아니지? 엄청 유명한데.

모를 리가 없지.

잘나가는 에이전시의 잘나가는 에이전트인데 설마 이유진을 모르려고.

"로버트! 왔어?"

로버트는 그녀의 밝은 얼굴을 바라보다가, 어깨 너머로 집안을 둘러봤다.

"집이 좋아졌네. 따뜻해."

"집은 그대론데? 그리고 히터 틀었으니까 당연히 따뜻하지."

로버트는 씨익 웃었다.

그녀는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집은 분명히 따뜻해졌다.

이곳에 살고 있는 주인의 온도가 달라졌기 때문에.

아직 곡을 들어보지 않았으나, 믿음이 배신당하지 않았다는 게 기쁘다.

곡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그녀가 곡을 쓰지 못했던 게 문제지, 썼다 하면 무조건 좋을 테니까.

클레이가 괜히 빌보드 슈퍼스타가 된 게 아니다.

"로버트, 오래 기다렸지?"

"오래 기다렸지."

"커피 줄까?"

"아니, 곡부터 듣고 싶어. 네가 3년 만에 만든 곡이잖아. 이제 1초도 못 참겠어."

오랜만에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니, 기대감은 최대치에 달했다.

더 이상은 조금도 못 기다린다.

"하하! 알겠어. 바로 들려줄게."

로버트는 소파에 앉았다.

소파를 중심으로 배치된 스피커 시스템.

곡을 듣기 위해 앉은 적이 많기에 익숙했지만, 너무 오랜만이라서 묘한 감상이 올라왔다.

지그시 눈을 감고 설렘을 만끽하고 있는 도중, 클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완성곡부터 들을래?"

"...아무거나 먼저 틀어줘."

"그럼 스케치만 끝난 것부터 틀어줄게."

눈을 뜨고 그녀를 보니, 장난기 어린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로버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음악.

로버트의 미간은 감탄으로 인해 좁혀졌고, 입꼬리는 기쁨으로 인해 끝까지 말려 올라갔다.

'역시 클레이는 천재야!'

이게 클레이다.

1집부터 대중들을 매료시키며 메가 히트를 시킨 천재 싱어송라이터.

데뷔부터 전세계를 그녀의 색으로 물들였던 때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번에 역시 그때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날 것 같아서.

5개의 곡은 3년의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완성된 곡이 나올 차례.

로버트는 클레이와 이유진을 함께 떠올리며 음악에 집중했다.

그렇게 완성곡까지 총 6개의 곡이 모두 끝났을 때.

로버트의 눈동자는 격렬한 환희로 번들거렸다.

클레이는 팔짱을 끼며 씩 웃음 지었다.

"어때? 괜찮지?"

"...내 예상을 깨버렸어. 사실 2집 때처럼 음울함을 풀어내거나 3집 때처럼 희망찬 앨범, 둘 중 하나일 줄 알았거든."

"이건 어떤데?"

"뜨겁고 거칠어. 엄청. 번개가 쉴 새 없이 내리치는 것 같기도 하고, 태양이 작열하는 걸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해."

"'Hot And Wild'라.... 괜찮은데? 앨범명으로 해야겠어."

클레이에게는 이렇게 즉흥적인 면도 있었다.

3년 동안 못 봤던 모습을 한꺼번에 보고 있으니, 지난 3년이 마치 거짓말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설득을 시도해볼 수도 있는 거지.'

지금의 그녀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렇기에 시도해볼 수 있었다.

"클레이."

"왜?"

"앨범은 더 말할 것도 없어. 감탄스럽도록 놀라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지."

클레이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다시 되물었다.

"그런데?"

"무려 3년이야. 이 시간은 너한테는 그 누구보다 훨씬 길었겠지만 팬들도 길게 느껴졌을 거야. 그런데 3년의 공백을 깨고 컴백하는 곡이... 피처링 곡이면 어떨 것 같아?"

로버트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살금살금 걷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벽을 깨고 나온 그녀의 앞에 레드 카펫을 깔아줘도 모자란데, 앞을 가로막는 일일 수도 있으니.

클레이의 눈썹이 좁혀졌다.

"무슨 뜻이야? 컴백 곡에 피처링을 쓰는 게 뭐가 문제라고."

"오해하지 마, 클레이. 나는 피처링이 문제라고 말하는 게 아니야. 단지 그보다 더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개인적인 의견을 보태본 거지."

클레이는 단정하게 빗었던 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리며 말했다.

"의견 바꿀 생각 없어. 이 곡이, 이 피처링이, 이유진이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이 앨범이 뜨겁고 거칠다고 했지? 왜 그런 걸까? 이유진 때문이야. 나도 다음 앨범은 2집처럼 음울하거나 3집처럼 희망찰 줄 알았지. 그런데 그 무엇도 나한테 영감이 되지 않았어. 이유진 빼고. 그녀가 없었으면 이 앨범은 탄생하지도 않았을 거고, 난 여전히 독방의 죄수처럼 침울하게 처박혀서 지내고 있었을 거야. 그거 알아? 이 집이 나한텐 감옥 같았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이게 다 이유진 덕분이라고."

"클레이, 진정해.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어. 내가 사과할게. 미안해."

로버트는 당황했다. 이렇게나 확고한 의견을 가지고 단호하게 대답하는 그녀가 낯설어서.

이건 오랜만에 보는 모습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지.

'이유진....'

그녀는 아무래도 클레이에게 대단한 의미가 된 모양이다.

영감을 갈망하던 클레이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켜준 뮤즈가 됐으니 당연한 거겠지.

당황하던 것도 잠시.

로버트는 클레이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느끼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훌륭한 열정이 서서히 자신에게도 퍼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 번 멋지게 해봐. 네 의견에 따라서 뭐든지 서포트해줄 테니까."

그제서야 클레이의 입가에도 진한 미소가 맺혔다.

"커피 마실 거지?"

***

기업의 행사 무대.

유진의 등장만으로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

그들은 유진이의 무대가 시작되자마자 미친듯이 열광했다.

난 그 광경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매일매일이 새롭고,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서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이게 한 곡 가진 가수가 이룰 수 있는 일인가?”

유진이의 곡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I Am Addicted’. 이 하나의 곡으로 그녀는 미국을 뒤흔들고 있었다.

빌보드 최상위권에 오르지 못한 선에서지만, 이 정도가 어디인가.

‘제이슨 쇼’가 방송된 날을 기점으로, 유진이의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었다.

댄스를 어떻게 저렇게 추는지, 저렇게 추면서도 어떻게 라이브가 저렇게 탄탄한지.

내가 이 광경과 상황을 놀라워하고 있는 것처럼, 미국인들 또한 유진이를 놀라워하고 있었다.

재즈, 힙합, 소울, 락, 펑크 등에 사용되며, 또랑또랑 선명한 소리를 내는 전자 피아노, 클라비넷.

요즘 잘 사용되지 않는 악기가 트렌디하고 리드미컬한 멜로디를 만들어내고.

그 위에 유진이가 노래하고 춤을 추며 관객들의 눈과 귀를 만족시키고 있다.

이 짧은 무대를 위해 이동한 긴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다.

아마 관객들도 그렇겠지.

한 곡 뿐라 일찍 무대 아래로 내려가야 해서 아쉽겠지만, 그녀의 무대를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아하고 있었으니.

그녀가 무대를 끝내고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때, 내 핸드폰으로 전화가 울렸다.

미국 활동을 위해 계약한 에이전시의 담당 에이전트.

“김유민입니다.”

그는 흥분하여 말을 쏟아냈다.

난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의 표정이 어떨지 쉽게 짐작이 됐다.

눈을 크게 뜨고, 몸을 가만두지 못하며, 잔뜩 상기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그의 놀라움과 흥분이 핸드폰을 타고 그대로 전해진다.

“네!? 뭐라고요?”

그리고.

나는 그의 흥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도 그랬으니까.

“···하! 당연히 받아야죠! 빨리 스케줄 잡아요! 되도록이면 빨리!”

전화의 내용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눈앞에 유진이의 얼굴이 다가오고 나서야, 그녀가 무대에서 내려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관찰하듯이 나를 바라봤다.

난 내 얼굴을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난 그녀를 바라보며 씩, 웃었고.

바로 통화를 끊었다.

“선배,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좋아해요? 서연이가 또 곡 몇 개 썼대요?”

“···그 소식이어도 엄청 좋았긴 했겠다.”

“아니면요?”

“너 클레이 알아?”

“당연히 알죠. 클레이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근데 클레이가 왜요?”

여기까지 말했는데도 그녀는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에이전트에게 직접 들은 나도 믿기지 않는데, 이걸 어떻게 유추할 수 있겠나.

난 그녀에게도 이 깜짝 소식을 전했다.

“클레이가 3년 만에 곡 썼대. 미니 앨범으로 낸다는데, 벌써 한 곡은 완성했다더라.”

“오! 이제 빌보드에 지각변동 일어나겠네요? 와, 진짜 다행이다. 타이밍 안 겹쳐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하하!”

“선공개로 한 곡 먼저 낼 거래. 피처링도 쓴다고 하더라고.”

“그래요?”

“응. 그래서 방금 에이전시에서 전화 온 거야.”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스케줄을 더 압축하자는 거죠? 클레이 컴백하기 전에 빨리 뽕 뽑으라고. 그럼 엄청 바쁘겠네. 그래서 컴백은 언제라는데요?”

“하하하하!”

난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왜 웃어요? 그거 아니에요?”

“응. 완전히 틀렸어. 네가 피처링해줬으면 좋겠대. 아주 강력하게 원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우리 스케줄에 다 맞추겠다는데?”

“···.”

입을 다물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그리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밥이나 먹으러 가요. 선배, 감 다 떨어졌네. 농담을 뭐 그렇게 재미없게 해요?”

“그래,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이것도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고, 스케줄도 우리한테 맞춰준다는데.”

“···.”

다시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침을 꿀꺽 삼킨다.

그리고 눈동자가 떨리며,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설마··· 진짜예요?”

“진짜야. 우리 대박 터졌어.”

“헐! 진짜라고요!?”

그녀의 목소리가 대번에 커졌다.

“진짜라고. 속고만 살았나.”

“3년만에 내는 곡에 저를 왜요? 왜 그랬지? 어디 아프대요?”

난 말없이 한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유진이도 내 시선을 따라, 관객들을 바라봤다.

그녀가 너무 뜨겁게 달구어 놓은 바람에, 도통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아마 저 관객들은 알지 않을까? 클레이가 왜 너를 원하는 건지. 지금 저 분들한테 물어보면 클레이의 결정을 전부 납득할 수 있을 거야.”

"아...."

관객들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그녀가 시선을 돌려,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좋네. 선배, 저 진짜 선배 없으면 어쩔 뻔했어요?”

“오히려 내가 할 말이야. 정말 너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우리 둘 다 한 인복 하는 모양이다.

< Hot And Wild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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