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뭐야! 미국에 와 있다고!? >
마지막 연말 무대, MBS의 가요대제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KBC, SBC, AKM 시상식에 이어, 마지막 무대도 우리 애들이 화려하게 장식했다.
“와아. 힘들었다.”
“이제 좀 편하네요.”
무대가 모두 끝난 뒤의 대기실.
그동안 쌓인 피로에 다들 축 늘어져 있으면서도, 무대의 여운에 취해 얼굴엔 짙은 미소를 띠고 있다.
그런데 끝난 건 딱 연말 무대뿐이다.
서연이와 별이는 당장 내일 바로 ‘일도 잘하는 밴드’의 촬영에 들어가야 했다.
정아도 영화 일정으로 찾는 데가 많았고.
이뿐이랴? 애들에 대한 화제가 최상을 달리고 있는 지금.
광고와 인터뷰, 화보, 행사, 각종 예능에서도 그녀들을 섭외하려고 아주 혈안이 된 상태였다.
정아를 섭외하려는 영화와 드라마는 뭐 언제나 포화 상태고.
난 유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진아, 이제 미국 갈 준비하자. 거기도 이제 스케줄이 쭉쭉 들어오고 있어.”
“진짜요?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당연하지, 빌보드 20윈데. 그리고 오히려 빌보드에 들자마자 미국에 가지 않고 계속 여기 있었던 게 잘 먹혔나 봐. 미국이 그렇잖아. 비싸게 굴어야 정말로 더 비싸게 여기는 거.”
국내에서 레전드 무대를 한 주마다 뽑아내고, 영화가 세계적으로 흥행하고 있다.
이런 게 모두 화제가 되고 있어 빌보드 순위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무튼 이로 말미암아, 유진이의 몸값은 더 뛰어올라버렸다.
이제는 거의 모셔가려는 모양새.
“가자마자 라디오 스케줄이랑 토크쇼 잡혀 있어.”
가만히 듣고 있던 서연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언니 잘나가네.”
“서연아, 너도 할 거 있는 거 알지?”
“네? 뭐요?”
“우리 곡, 아직 미완성이잖아. 그거 완성시켜야지.”
“아.”
별이가 라이브 방송으로 스포일러했던 곡, 그리고 우리 애들이 프로젝트 걸그룹으로 데뷔할 곡.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초대박의 향기가 풀풀 풍겼던 그 곡을 완성시켜야 했다.
서연이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요. 새로 쓰라면 자신 없는데 그건 그냥 살만 보태면 돼서요.”
순간, 대기실에 있던 모두가 그녀를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서연이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왜요? 진짜 다 들어봤잖아요. 핵심은 다 들어있는데···?”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새로 쓰라면 자신 없다는 말 때문에 그렇지.”
그녀는 곡을 쓰는 족족 대박이 터뜨렸다.
그런데 자신이 없다고 하니 어이가 없는 거지.
정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재수없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이러니 내가 재수없다는 말을 안 하고 배겨?”
“그러니까요.”
“이유진 너도 똑같아!”
“···.”
“김별 넌 뭘 끄덕거리고 있어! 너도 마찬가지야!”
“···.”
이상하다. 분명히 이브때는 그렇게 훈훈할 수가 없었는데.
그리고 방금 전까지도 분명 그랬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서연이를 보니, 정아를 조금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긴 방금 건 좀 심한 망언이었지.
‘그런 곡을 단순히 재미로 썼으니···.’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의 성공의 가장 일등공신은 서연이였다.
세상에 이런 천재가 또 어디 있을까?
난 그녀의 천재성에 기대어, 한 번 말이라도 던져보기로 했다.
“서연아, 혹시 말이야. 혹시 여유 되면 곡 좀 더 써도 돼.”
“어떤 곡이요? 우리 곡이요?”
“그래, 우리 네 명이서 활동할 곡. 꼭 싱글 앨범을 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서연이는 엄살을 부리려다가, 눈을 부라리고 있는 정아를 보고는 볼을 긁적거렸다.
“알겠어요. 여유 되면 써볼게요. 너무 기대하진 마시고요.”
“그래.”
당분간 많이 바쁘겠지만 혹시 또 모르지 않은가.
덜컥 몇 개의 곡이 더 튀어나올지.
일말의 기대감 정도는 가져도 좋을 듯 싶었다.
***
유진이의 국내 활동은 아주 짧고, 또 아주 굵었다.
기간만으로 보자면 아직 제대로 활동했다고 할 수도 없는 수준.
그런데, 우리는 이 짧은 기간의 활동만으로 빌보드 20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지금, 세계 최고, 최대의 음악 시장인 미국에 와 있었다.
“선배···.”
“응?”
“저 왜 아직도 실감이 안 나죠? 내가 미국? 차라리 한국에서 빌보드 오르는 거 봤을 때가 더 실감났던 것 같아요.”
어쩌면 괴리감 때문일 수도 있다.
연습생을 시작했던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간은 매니저로 일했을 때보다 짧다.
그러니 미국에서 활동’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 수밖에.
이렇게 짧은 기간 만에 미국에 진출한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를 잘 아는 거지.
그것도 스스로는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진출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 거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누구보다 미국에 잘 적응하고, 잘 즐기고 있는 것 같은데···.’
유진이는 한 손에는 도넛을, 다른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있었다.
라디오에 들어가기 직전인데도 참 태평한 얼굴로 도넛을 먹고 있다.
“···오히려 잘된 거지. 긴장하는 것보단 실감 안 나서 안 떠는 게 백 번 낫잖아. 좋게 생각해.”
“그렇겠죠?”
그렇게 잠시 후.
“저 이제 들어갈게요.”
“그래, 잘하고 와.”
“네.”
그녀는 긴장도 설렘도 없는, 안방에 있는 듯 태연하고도 편안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
.
.
통역사의 도움으로 소통하던 라디오 부스 안.
DJ가 물었다.
“지금이 미국 와서 첫 스케줄인데 좀 어때요?”
“당연히 좋죠. 제가 영어를 잘 못해서 답답한 것 빼고는 한국이랑 크게 다를 게 없어서 더 좋고요.”
“하하! 그렇죠? 미국이나 한국이나 라디오가 뭐 라디오지.”
“아뇨, 라디오라서 그런 건 아니고, 지금 느낌으로는 미국에서 뭘 하든 긴장이 안 될 것 같아요. 눈앞에 어셔나 크리스 브라운, 비욘세가 있다면 모를까.”
“그건 누구나 다 그래요! 눈앞에 걔네가 있으면 다 떨리지! 하하! 그런데 역시 데뷔부터 슈퍼스타가 돼서 그런가? 좀 다르네요. 그거 알아요? 제가 지금까지 본 K팝 스타 중에 당신이 가장 쿨해요!”
DJ는 내내 ‘Cool’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남발했다.
단지 유진이 내뱉는 말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 시선 처리와 제스쳐, 옅게 지어진 미소와 편안한 자세, 대화 사이의 짧은 공백과 말의 속도 등등.
모든 것이 더해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방금 먹었던 커피와 도넛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누가 보면 뉴욕의 성공한 CEO인 줄 알겠다.
“이거··· 이대로 괜찮겠지?”
그래, 이쯤이면 우리나라에서도 노엘 갤러거나 에미넴 같은 캐릭터가 나올 때가 됐다.
아니, 그건 너무 갔나?
아무튼.
이따가 그녀에게 조언을 좀 해줄까 했던 생각이 살짝 들었었는데.
덩치가 자동차 만한 저 흑인 DJ에게서 저렇게 좋은 반응이 나오는 걸 보니, 그냥 내버려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
LA의 대저택.
클레이는 그날 이후, 정신없이 곡을 써내려갔다.
밤낮을 잊고, 규칙적인 생활은 아예 땅바닥에 내던진 채로, 오로지 곡 작업만 하며 며칠을 보냈다.
그러나 그렇게 쉴 틈 없이 작업한 것 치고는 스케치가 된 곡이 좀 적었다.
미니 앨범 하나 낼 수 있을 정도?
일반적으로 따지면 그것도 아주 많은 양이긴 했으나, 쉼 없이 써내려간 것 치고는 적은 것도 맞다.
그러나 그 이유는 명확했다.
계속 곡을 썼는데, 써놓고 보면 또 좋은 전개가 생각나고, 그걸 수정하면 또 더 좋은 전개가 생각나서.
이렇게 몇 번이고 뒤엎어버리니 처음 형태가 아예 사라져버렸을 정도였는데.
클레이의 입에선 한숨이 나오는 대신, 웃음만이 만개했다.
이런 감각이 너무나도 반갑고 기꺼워서, 그리고 퀄리티가 더욱 높아지는 게 눈에 확연히 보여서.
클레이는 5개의 스케치와 1개의 완성된 곡을 들으며 개운하게 기지개를 켤 수 있었다.
“이제 딱 하나 남았어.”
1개의 완성된 곡.
이게 바로 미니 앨범의 타이틀이 될 곡이었고, 선공개할 곡이기도 했다.
앨범 전체를 공개했을 땐, 다른 곡까지 더해 더블 타이틀로 만들면 될 터.
“이유진.”
영감의 원천이 된 그녀.
이 곡엔 그녀의 목소리가, 그녀의 캐릭터가, 그녀의 색깔이 필요했다.
이 세상 다른 그 무엇도 주지 못했던 영감을 이렇게 한가득 채워준 것이 바로 그녀이기에.
이 앨범엔 반드시 그녀가 필요했다.
“미국엔 안 오겠지? 내가 한국에 가면 되나?”
클레이는 인터넷으로 이유진에 대해 검색해봤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
작업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뭐야! 미국에 와 있다고!?”
클레이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비명 같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입술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
서연은 12월에 자신의 입지가 얼마나 더 높이 뛰어 올랐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업계에서의 대우가 또 달라졌다.
“정아 언니가 사는 세상이 이런 느낌인가?”
유정아가 계속 받아왔던 탑스타 중의 탑스타 대우를 받는 듯한 느낌.
전에도 부족함 하나 없는 위치였으나, 지금은 또 한 번 달라져 있었다.
1월. 스케줄 표에는 잉크가 마를 틈이 없었다.
그래도 2월 스케줄부터는 최대한으로 받지 않고 있긴 했는데.
이는 유진이 언제 국내로 돌아올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룹 활동을 언제부터 준비하게 될 지 몰랐으니까.
물론 그룹 활동을 위해선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있었다.
미완성된 곡을 완성하는 것.
광고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서연.
그녀는 휴식을 취하는 대신, 유민이 남겨준 과제를 수행하기로 했다.
스케줄도 바쁘고 제대로 휴식을 취할 시간도 없었지만, 그녀는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몸소 느끼고 있었다.
업계의 달라진 대우, 높아진 몸값, 늘어난 팬들, 시들긴커녕 계속해서 높아지고만 있는 대중들의 관심.
이 모든 게 피로 회복으로 작용하고 있으니, 서연은 어깨가 무거운 동시에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에 임할 수 있었다.
물론, 살만 붙이면 되는 쉬운 작업이라서 마음이 가벼운 덕분이기도 했다.
뼈대를 튼튼하게 만들어 놓은 곡.
서연에게 있어, 이 곡을 완성시키는 것은 단순 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흠흠.”
멜로디를 허밍으로 부르며 경쾌하게 손을 움직였다.
가벼운 마음과 달리, 어깨는 무거워서 조금 욕심이 났나 보다.
단순 작업은 세 시간에 걸쳐 끝이 났고.
서연은 완성된 곡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손 댈 곳도 없네.”
후련하다.
그런데 막상 곡 작업이 끝나니, 허전하기도 했다.
한창 노 저어야 할 시기인데, 유진이 돌아오기까지 남아 있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서연은 문득 유민의 말이 떠올랐다.
척 보기에도 그냥 툭 내던졌던 말.
“더 써도 된다고 했지?”
매끈한 턱에 손가락을 올렸다.
“으음.”
신음하며 고민하던 그녀가 턱을 긁적였다.
당장은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었다.
“천천히 생각해봐야겠다.”
아직 남아 있는 시간은 많으니까.
“한 곡 정도만 더 쓸 수 있으면 좋겠네.”
서연이 목표로 한 건, 딱 한 곡을 더 쓰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그랬다.
< 뭐야! 미국에 와 있다고!?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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