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들과 함께하는 연예계 생활-99화 (99/124)

< 귀여운 표정 짓기 특훈 >

우리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바로 작업실로 들어갔다.

파블로프의 개가 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서연이가 만든 곡 중에 안 좋은 게 없었거든.

모두의 얼굴에 기대감이 피어오르고 있다.

솔로곡이 아니라 단체곡이다 보니, 느껴지는 감회도 새로운 모양.

다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다.

서연이는 말했다.

“우리가 걸그룹이라면 어떨지 생각하면서 만든 거예요. 러프하게 만든 거라서 아직 디벨롭 할 게 좀 남아 있기는 한데 각자 파트도 다 나뉘어져 있어요. 같이 부르는 부분도 있고요. 아마 들어보면 누가 어떤 파트인지 알걸요?”

“알았으니까 빨리 틀어봐.”

정아가 못 참겠다는 듯이 말하자, 서연이가 새초롬하게 눈을 흘겼다.

“지금 이건 무슨 눈빛이지?”

“···빨리 틀겠다는 눈빛이에요. 오해하지 마요, 언니.”

서연이는 바로 꼬리를 말고 허겁지겁 손을 움직였다.

나와 별이, 유진이의 입에서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곧이어, 서연이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틀게요?”

“그래, 틀라고.”

“···.”

서연이는 소리 없이 궁시렁대며 바로 음악을 틀었고.

스피커의 소리가 작업실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말대로 아직 러프한 버전이라는 게 티가 났다.

하지만 핵심적인 부분은 모두 들어 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도입부는 서연이.’

그녀가 가이드한 목소리가 곡에 찰떡같이 달라붙는다.

다른 누구를 생각할 수도 없다.

이건 서연이가 주인이어야만 하는 파트였다.

‘이번엔 정아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 듯했다.

모두의 시선이 정아에게로 모였다.

자신도 그걸 아는지 곡을 유심히 듣다가 입가에 슬쩍 미소가 머금어진다.

‘이건 유진이.’

유진이에 이어서 후렴의 별이.

우리는 음악을 듣는 내내, 서로를 번갈아 바라봤고.

1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모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와 흥분이 어렸다.

‘역시 명곡 자판기.’

서연이는 이런 우리를 보며 다리를 꼬고 턱을 치켜올렸다.

딱 이 모습만 보자면 그저 귀엽기 그지없었으나, 곡을 함께 듣고 있으니 든든하기 짝이 없었다.

무게감이 느껴져. 이게 거장의 품격인가?

“구센세는 구센세네···.”

별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서연이가 일본에서 호시노 하즈키를 프로듀싱하며 붙었던 별명.

지금 그 별명 값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룹 곡을 작곡하는 건 이번이 처음일 텐데.’

일본 가수를 처음 프로듀싱해서 초대박을 터뜨린 그녀답게.

처음 만드는 그룹의 곡도 메가 히트의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곡이 끝나고, 내게 꽂히는 시선.

그녀들이 나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엄지를 치켜올리며 선선히 입을 열었다.

“이걸로 하자. 우리 그룹의 첫 곡으로 이것보다 어울리는 게 없을 것 같아.”

모두의 표정이 더욱 환하게 펴졌다.

설마 내가 이렇게 좋은 곡을 못 알아보려고.

암만 막귀라도 이게 얼마나 좋은 곡인지는 알 거다.

난 말을 이었다.

“이건 나중에 디벨롭 하기로 하자. 당장은 SBC 가요대전에서 어떤 무대 할 지 정해야지.”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안했다.

“저번엔 카리스마 시크 컨셉으로 했으니까 이번엔 좀 다른 느낌으로 갈까요?”

물론 걸크러쉬 시크 컨셉은 훌륭하게 실패해버리긴 했다.

성과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지만, 애들이 웃음을 못 참아버려서.

하지만 그렇다고 같은 컨셉을 또 할 필요는 없지.

난 화장기 없이도 예쁘고 깨끗한 그녀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청순 컨셉으로 가자. 곡뿐만 아니라 메이크업이랑 스타일링도 대놓고 청순해버리자고.”

걸그룹의 정석, 청순.

우리는 팬들의 심장에 융단폭격을 하기로 했다.

***

KBC 가요대축제로부터 일주일.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다음 무대를 갈망하던 팬들에겐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다.

목 빠져라 기다린 일주일. 드디어 그날이 왔다.

SBC 가요대전.

팬들이고 대중들이고 업계 관계자들이고 할 것 없이.

WE엔터의 무대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과연 이번에도 넷이 함께 무대를 할까?

김별의 근본 팬이었던 직장인 장진영은 컴퓨터로는 레드카펫 생중계를 틀어놓고, 핸드폰으로는 커뮤니티와 SNS를 지속적으로 탐색했다.

하지만.

[속보) WE엔터 애들 같은 차에서 내림!]

-그런데 다른 의상ㅠㅠㅠ 무대의상인데 다 다른 옷임···. 오늘은 합동 무대 안 하나 봄.

“아···.”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짧은 탄식을 터뜨렸다.

아직 실망을 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에 조금 힘이 빠졌다.

“이번엔 안 하는 건가?”

그는 댓글을 달았다.

-솔로 무대 한 다음에 합동 무대 할 수 있는 거 아님? 아직 실망하기엔 이르다고 봄.

다른 팬들도 같은 심정인지, 다들 댓글을 다는데 어쩐지 힘이 빠진 듯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솔로 무대만 하고 끝이라면?

일주일 전의 그 무대가 넷이 함께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무대였다면?

‘솔로 무대도 좋긴 한데··· 어쩐지 아쉽네.’

당장으로선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입맛을 쩝, 다시다가 맥주로 목을 축였다.

맛도 없지. 맥주에 물을 탄 것마냥 밍밍하게 느껴졌다.

맥주가 불량이거나 혀가 고장이 났나 보다.

그는 컴퓨터를 끄고 TV앞에 앉았다.

아쉬운 기분은 방송이 시작된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이는 김별의 솔로 무대가 펼쳐지는 순간, 깨끗하게 날아가버렸다.

정규앨범 1집의 타이틀 곡 ‘Bad’.

나쁜 여자 컨셉의 김별은 언제 봐도 매혹적이었으니.

“와···.”

새삼스럽게 놀라웠고, 새삼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뭐가 아쉽다고 실망을 했을까.

‘솔로로도 이렇게 빛나는데···.’

팬으로서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래. 그룹으로 안 하면 어때. 솔로 활동으로도 충분한데.’

‘Bad’ 다음으로 데뷔곡 ‘So Happy’, 그리고 ‘Hang Out’으로 이어지는 10여분의 무대.

무대를 보는 동안 기쁨이 충만하게 차올랐다.

이제 땡깡은 그만 부려야겠다.

어쩌면 김별도 속상해할지도 모른다.

그룹으로 활동할 수 없음에, 팬들이 아쉬워하는 것을 걱정하면서.

그 착한 김별이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라이브 방송으로 팬들에게 불을 지핀 것도 그녀였기에.

팬카페나 커뮤니티에 글을 남겨야겠다.

미약한 손길이나마, 팬들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노력해야겠다.

김별은 혼자서도 너무 좋은 무대를 보여주고 있으니,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고.

가장 좋아하는 최애 가수, 김별의 무대가 끝이 났지만 그는 방송을 끄지 않았다.

구서연, 그리고 이유진과 유정아도 좋아하고 있었으니.

‘얘네 무대까지도 봐야지.’

맥주의 맛이 다시 살아났다.

맥주가 목구멍을 시원하게 긁으며 무대를 보는 재미를 증폭시켰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뒤.

그녀들의 솔로 무대가 모두 끝났을 때.

그는 방송을 끄지 않은 채, 핸드폰으로 커뮤니티와 팬카페에 들어가봤다.

아까 결심했던, 미약한 손길을 보태보기 위해서.

그런데 어쩐지 팬카페와 커뮤니티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난리통에 휩싸여 있다.

-속보!!!!!!!!! 애들 다 자리 비웠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마지막 한 방이 있었구나!

-5252!!! 믿고 있었다구!!!

-캬~ 극락이다ㅋㅋㅋ 합동 무대 한 번 더 가즈아~

“뭐!?”

사람이 참 간사하다.

방금 전까지도 솔로 무대에 만족할 수 있다는 마음이었는데.

그녀들의 합동 무대가 예상된다고 하자, 눈이 번쩍 뜨이고 흥분이 급격하게 차오른다.

그는 쿵쿵 뛰는 세찬 심장박동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눈을 황급히 TV로 향했고.

딱 그 순간에 그녀들 네 명의 모습이 화면에 들어왔다.

-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

현장에서 얼마나 큰 환호성이 쏟아지고 있는지 알 법했다.

그는 볼륨을 더 크게 키웠다.

너무 흥분해서일까. 정신이 없고 어지러웠다.

저번 무대의상과는 천지 차이. 청순한 컨셉이라는 건 척 보기에도 알 수 있었다.

함성 때문인지, 아니면 서프라이즈를 하는 게 즐겁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그녀들도 걸그룹 무대를 즐기고 있는 건지, 다들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띠고 있다.

이번엔 웃음을 참으려는 기색도 없다. 아예 대놓고 웃고 있다.

이제 보니 청순 컨셉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청순하고, 귀엽고, 상큼하고, 아름답고, 다 하고 있으니까.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있다는 것도 그제서야 자각할 수 있었다.

덕질을 할 줄도 몰랐는데, 어느새 진짜 심각한 덕후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좋은 기분이다.

척박하고 메말랐던 생활에 어마어마한 활력소가 생겨버렸으니.

“···!”

반주가 시작되며 화면 하단에 제목이 뜬다.

아이돌에 관심이 없었던 자신도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노래였다.

‘진짜 미쳐버리겠네.’

그녀들이 짓고 있는 표정들이,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넷이 함께 꾸미는 퍼포먼스가.

팬심의 한계치를 천장을 뚫고 확 올려버리고 있었다.

“이건 진짜 미쳤어!”

리미트가 없다.

팬들을 행복사 시키려고 아주 작정을 했나 보다.

12월의 겨울.

바깥은 여전히 추웠지만, 팬들의 마음만은 한여름보다도 뜨겁게 달구어지고 있었다.

***

[WE엔터 합동 무대의 연타석 홈런! 정식 걸그룹 활동을 향한 청신호일까?]

[WE엔터를 향한 팬들의 기대감은 최상! 연예계 관계자, “곡도 있으니 시기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데뷔할 것.”]

[대중들의 시선은 시상식, ‘AKM’으로! ‘AKM’과 MBS에서도 WE엔터 소녀들 합동 무대 할 가능성 높아!]

팬들이 말 그대로 미친듯이 열광하고 있었다.

연말이기에, 보통이면 여러 화제가 사방에서 휘몰아쳐야 하는데.

지금은 우리 애들이 모든 화제를 휩쓸어버려서 다른 화제들이 묻히고 있었다.

신드롬이라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었다.

[구센세(구서연)의 도움을 받은 일본의 국민 여동생 호시노 하즈키, SNS서 맹렬한 응원 보내.]

[구서연의 일본, 김별의 유럽, 이유진의 미국, 유정아의 세계. 전세계가 손꼽아 기다리는 걸그룹 탄생하나?]

표현은 저렇게 됐지만 서연이가 일본에서만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별이가 유럽에서만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유진이도 미국에서만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저곳에서 유독 더 인기가 높을 뿐이다.

아무튼 전세계의 팬들도 모두 대동단결하여 그룹이 탄생하길 고대하고 있었다.

청신호 중에 청신호지.

물론 연예계에선 아직 정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걸그룹에 대한 화제 말고, 다른 화제도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 애들에 관한 것.

[이유진 빌보드 차트 31위! 미국 활동 없이도 착실히 올라간다. 현지에서의 인기는?]

[유정아, 이유진 출연 영화, ‘스타는 다시 무대로’ 천만 관객 돌파 직전. 전문가 “1500만까지 갈지도 모른다.”]

유진이의 곡이 빌보드에서 순항 중이고, 영화 또한 순항 중이다.

사실 이 둘은 어느 정도 묶여 있다고 봐도 된다.

하나가 잘되면 다른 하나도 잘될 수밖에 없는 구조.

빌보드 순위가 계속 높아지고 있는 이유 중에는 영화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렇다 할 미국 활동 없이도 유진이가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겠지.

“아주 여기저기서 빵빵 터지는구만.”

최고의 연말을 보내고 있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연말이 내 생애 또 언제 있을까?

“이대로만 가면··· 애들 그룹으로 데뷔하자마자 빌보드 상위권 가는 거 아냐?”

행복한 망상이지만 가능성이 있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이렇게 그룹 활동을 미룬 게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아직 탄생하지도 않은 그룹이 나오기를 세상이 열망하는 게 말이나 되냐고.’

그런데 지금 말이 안 되는 게 현실로 이뤄지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지. 꿈 속을 거닐고 있는 기분이다.

나는 헛웃음과 파안대소를 번갈아 터뜨리며 연습실의 문을 열었다.

“늦었어!”

“선배, 왔어요?”

“오빠.”

“사장님! 우리 대박 터졌어요!”

우리 자랑스러운 애들이 나를 반겨줬다.

연중 가장 바쁜 연말.

우리는 다른 스케줄을 모두 제쳐두고, 시상식에서의 합동 무대를 준비하는 데에 열을 쏟기로 했다.

“오빠, 우리 다음 무대는 섹시로 가자. 아무래도 그게 맞아. 나한테 제일 잘 어울리잖아.”

정아가 말했고, 서연이의 눈은 정아의 전신을 바쁘게 훑었다.

“···아닌 것 같은데.”

“뭐? 너 지금 뭐라 했어!”

“···.”

“뭐라고 했냐고!”

“···.”

“어, 그래! 조금 친해지니까 이제 내가 아주 만만해 보이지? 어?”

“···.”

“대답 안 해!?”

별이와 유진이는 씩씩거리는 정아에게 달라붙어 진정시키려 애썼다.

정아의 눈은 자신에게 달라붙은 별이와 유진이의 전신을 스윽, 훑었다.

그리고 몸을 살짝 움찔한 정아가 순식간에 침착함을 되찾았다.

“오빠, 다음 컨셉은 뭐가 좋을 것 같아? 생각해둔 거 있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생각해뒀지.

“일단 섹시는 아니야.”

“···.”

처음엔 걸크러쉬, 다음은 청순이었다.

사실 외국엔 걸크러쉬가 직빵이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시선이 쏠린 와중에 비슷한 컨셉을 하는 것보단 다양한 컨셉을 보여주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다.

게다가 이미 우리 애들한테 홀려버린 이상, 우리가 뭘 하든 환호를 보낼 터.

그러니 외국에 앞서 국내 팬들의 기강부터 확실하게 잡기로 했다.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오늘부터 거울 보면서 귀여운 표정 짓기 특훈 들어가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씻을 때, 밥 먹기 전에, 밥 먹는 도중에, 자기 직전에, 그냥 하루 종일 틈 날 때마다 최대한 귀여운 척하는 거야. 이번 컨셉은 하이틴이야. 상큼하고 귀여워야 돼.”

우리는 이번에 대상을 받지 못한다.

와인드업이 받겠지.

하지만 시상식이 끝났을 땐.

모두가 우리의 이름을 외치고 있을 거다.

그것도 아주 격렬하게.

“사장님, 저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귀여워서 그렇게까지 표정 연습할 필요는 없죠?”

서연이 내게 묻자마자, 별이가 대신 즉답했다.

“그건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야. 지극히 주관적이라고 말해야지.”

난 또 한 번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다급히 입을 열었다.

“내 눈엔 너희 넷 다 귀여워. 팬들도 그렇게 볼 거고.”

내 말에 모두 선선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다들 자기가 한 귀여움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 귀여운 표정 짓기 특훈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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