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들과 함께하는 연예계 생활-98화 (98/124)

< 파블로프의 개가 된 기분 >

“아주 난리도 아니네.”

가벼운 마음으로 꾸민 무대였다.

재밌을 것 같고, 팬들도 좋아해줄 것 같아서.

그런데.

“으음.”

국내고 해외고 기대 이상으로 너무 폭발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

단순히 좋아한다는 걸 넘어서, 걸그룹으로 곡을 내라며 네 명의 팬덤이 똘똘 뭉쳐버린 듯했다.

사실 별이의 라이브 방송 때문에 시작된 거긴 한데, 이는 단순히 배경이 깔린 것에 불과했다.

팬들의 마음에 불씨를 지핀 결정적인 트리거가 된 것은 바로 무대.

-와···. 와···. 와···. 진짜 감탄밖에 안 나온다.

-생각만 해도 완벽했었는데 실제로 뭉치니까 이건 뭐 그냥 어벤져스네.

-김유민 사장님 보고 계시나요? 이번 무대를 보고 신뢰가 더 깊어졌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현명한 선택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김유민 안목에 제정신이면 당연히 합치지. 팬들 니즈를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계실 텐데ㅋㅋㅋ 그렇죠 사장님? 예? 맞잖아요. 그쵸?

“하긴 무대가 너무 사기였지···.”

유튜브고 커뮤니티고 팬카페고, 이런 제목도 넘쳐났다.

[WE엔터 4명이 걸그룹을 무조건 해야 하는 이유]

[가요대축제 레전드 써버린 WE엔터 가수들의 해외 파급력]

[김유민이 걸그룹을 만들면 회사에 이득인 이유]

별이의 라이브 방송으로 화제가 됐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상치 않은 기류가 인터넷 곳곳에 퍼지고 있었다.

똘똘 뭉친 병사들이 무기를 양손에 쥔 채,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느낌.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목덜미가 서늘하다.

‘팬들이 이렇게 다 대동단결해버리면···.’

심지어 갖가지 그룹 이름을 내놓기도 하고, 넷이 같이 찍힌 사진들이나 둘 이상 묶인 사진, 영상들을 짜깁기하여 실제로 그룹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컨텐츠를 만들기도 했다.

어찌나 이렇게 부지런한지.

‘이렇게 된 거 확 그냥 그룹으로 앨범 하나 내버려?’

내가 사무실에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인터넷을 보고 있을 때.

정실장님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사장님, SBC에서도 넷이 합동 무대를 해줄 수 있냐고 하는데 어떡할까요? 일단 보류하긴 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이렇게 화제가 되고 있으니 다른 방송국도 군침을 흘릴 만하지.

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회의 소집해주세요. 매니지 실장님들이랑 홍보팀장님만 들어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

일단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게 좋겠다.

나도 고민이 많이 됐으니.

회의가 열리고, 가장 먼저 대답한 건 홍보팀장님이었다.

“반응은 좋지만 팬들이 요구한다고 해서 다 맞춰주는 건 좋지 않습니다. 당장 1월에 이유진 씨는 미국에 가야 하고, 다른 멤버··· 아니, 다른 가수 분들도 다 각자 활동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정아 씨만 해도 지금 대본이랑 시나리오가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고요.”

하긴 정아도 연기는 계속 해야지. 유진이도 미국에 가야 하고.

정실장님이 말을 받았다.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지금도 이런 반응이 나오고 있는데 몇 번이나 더 무대를 하면서 팬들에게 희망을 줬다간, 솔로로 활동하게 될 때 실망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 말도 맞긴 하다.

정말? 진짜? 정말로 나오는 거야? 하다가 막상 솔로 티저 하나 떠봐라.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다.

하지만 황실장님과 박실장님은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전 문제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대를 더 하면 더 좋아하고 말죠. 그런다고 솔로로 데뷔할 때 과연 실망할까요? 지금 당장이야 바로 어제 그런 무대가 있어서 큰 문제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조금만 더 지나면 팬들 사이에 떠도는 밈처럼 될 확률이 큽니다.”

하긴, 그 말도 맞겠다.

솔로로 내든 뭘로 내든, 애들이 앨범을 낼 때 과연 팬들이 실망할까, 좋아할까?

좋아할 확률이 크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애들이니까.

“저도 황실장님이랑 같습니다. 연예계에서 이런 화제가 되는 건 어떻게 봐도 호재입니다. 실제로 걸그룹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가끔 영상 컨텐츠로 써먹을 수 있는 소재가 될 수 있고요. 해외 홍보에도 좋은 영향만 받을 겁니다.”

누구의 말도 틀린 게 없다.

고민이 깊어져서 의견을 물어봤는데, 오히려 고민이 더욱더 깊어지고 있다.

이렇게 의견이 갈리면, 결국 내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으음.”

쩝, 입맛을 다시길 몇 차례.

갈팡질팡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회의실 문에 노크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에요?”

문을 연 직원의 표정은 굉장히 오묘했다.

표정만 봐선 희소식인지 안 좋은 소식인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회의 중간에 들어올 정도면 보통 소식은 아닌 듯한데.

직원은 입을 열어 말했다.

“지금 김별 씨가 라이브 방송 중인데-”

별이의 라이브 방송.

‘또?’

이번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

김별은 인터넷으로 팬들의 반응을 보다가, 너무 좋은 반응에 신이 나버렸다.

당장이라도 팬들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아, 김별은 집에서 라이브 방송을 켰다.

“안녕하세요.”

이때가 WE엔터에서 회의가 열리기 직전.

김별은 지금 회사에서 어떤 회의가 일어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고, 다들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걱정 없이, 팬들의 뜨거운 반응을 마냥 좋아하기만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김별은 평소보다도 더 빠르게 올라가는 시청자 수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제 무대 대박이었어요!

-신인 걸그룹 메인 보컬 김별 왔냐구!!!!!

-다른 멤버들은 어디 있어요?ㅋㅋㅋㅋㅋㅋ

-비하인드 풀어줘요! 연습은 어땠어요?

팬들도 듣고 싶은 게 많은 모양.

싱긋 웃음이 나왔고, 목소리의 톤도 높아졌다.

“연습했을 때 유진 언니가 고생 많이 했어요. 저희 연습을 다 진두지휘했거든요. 그리고 원래 무대에서 웃으면 안 되는데, 올라가기 전에 너무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김별은 신나게 썰을 풀었다.

처음 다 같이 모였던 식당에서 곡을 결정했다는 것, 그때 눈이 예쁘게 내렸다는 것, 연습 과정은 어땠고, 현장에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지만 팬들은 이런 얘기를 좋아해주고 있었다.

“아! 그리고 어제 스케줄 끝나고 돌아오는데, 서연이가 차에서 곡도 들려줬어요. 전에 제가 라이브 방송했을 때, 서연이도 같이 걸그룹 하면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하나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들어보니까 엄청 좋은 거 있죠? 어제 무대 끝난 직후에 들어서 그런지 저희 네 명의 색깔이 확 드러나 있는 게 더 잘 보이는 것 같았어요. 역시 서연이 작곡 실력은 진짜 최고인 것 같아요.”

김별은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팬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빨리 올라왔던 채팅은 불이 붙은 듯 속도가 늘어났다.

-????ㅋㅋㅋㅋ 곡을 썼다고요?ㅋㅋㅋㅋ

-와! 이건 끝났네ㅋㅋㅋㅋㅋ 앨범 가즈아!!!!

-서연이가 곡 썼으면 끝이지ㅋㅋㅋ 언제 나와요? 엄청 설레네!

-그래 이거지!!! 대박!!!

폭포처럼 쏴아아- 쏟아지는 채팅창의 화력을 본 김별.

그녀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어? 제가 뭐··· 실수한 건가요? 또···?”

-ㅋㅋㅋㅋㅋㅋㅋㅋ실수 아니에요. 너무 잘하셨어요.

-역시 김별이 최고다. 믿고 있었다고!ㅋㅋ

-실수일 게 뭐 있어요. 곡이 나왔다는 소중한 정보를 알려주신 것뿐인데ㅋㅋ

-점점 현실성이 갖춰지는구만. 너무 좋아~

김별은 혹시 몰라 입을 꾹 다물었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법.

이 소식은 이미 여기저기에 퍼지며 곳곳에서 축포가 터지고 있었다.

***

우리는 그날 저녁에 바로 모였다.

별이를 부르고 서연이, 정아, 유진이를 회사로 불렀다.

많은 직원들이 퇴근한 밤.

우리는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연습실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죄송합니다.”

별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시무룩하게 말했다.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죄송할 게 뭐 있어.”

비록 인터넷은 아침보다 훨씬 들썩거리긴 했다.

기자들은 노났다고 기사를 쓰고 있고, 방송국은 얼씨구나 하고 춤을 추며 여기저기서 합동 무대를 원하고 있고.

예능에서도 기를 쓰고 우리 넷을 같이 섭외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별이가 이렇게 될 걸 알고 그런 게 아니라서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딴에는 그저 재미있는 썰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정아는 김별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과는 왜 해? 쓸데없이. 연예계에서 화제는 클수록 좋은 거야.”

정아는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안 그래? 이 각박한 바닥에서 화제가 되는 게 뭐가 문제야. 좋은 일이기만 하구만, 뭐 심각한 일이라고 모이게 해?”

정아가 별이를 감싸주고 있다.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걸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우리한테 관심을 쏟는다는 거니까.”

그런데 이렇게 물살을 타고, 서연이가 곡까지 만들었다는데, 걸그룹을 안 한다?

그럼 팬들 사이에서 불만이 발생할 수도 있다.

뭐, 그렇다고 그렇게 심각한 문제로 번지지는 않을 터.

애들이 활동을 중단하는 것도 아니고, 회의에서 나온 것처럼 우리 자체 컨텐츠로 갈증을 풀어줄 수도 있는 거니까.

다만, 스탠스는 이제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

SBC 특별무대가 며칠 남지 않았으니,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들을 이 자리에 불렀다.

“너희들은 어떻게 하고 싶어?”

유진이가 되물었다.

“뭘요? 특별무대요, 아님 그룹으로 앨범 내는 거요?”

“둘 다. 자유롭게 의견 내봐.”

먼저 의견을 낸 건 서연이였다.

그녀는 여기 있는 모두를 지그시 눈에 담으며 말했다.

“저는 별이랑 언니들이랑 같이 활동하면 재밌을 것 같아요. 팬들도 원하시고. 같이 특별무대 하는 것도 좋았고요. 앨범 내도 좋을 것 같아요.”

별이와 유진이도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저도요. 제가 실수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좋을 것 같아요.”

“와···. 내가 걸그룹···? 요즘 걸그룹들이 너무 어려서 양심에 찔리기는 한데··· 이렇게 좋아하시는 거 보면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하하. 저도 다 좋아요, 선배.”

우리는 모두 정아의 입을 바라봤다.

시원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는 그녀의 입술이 작게 열렸다.

“나도 얘네 조금은 맘에 들어. 하자. 하면 되지. 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오빠, 별것도 아닌 걸로 왜 무게를 잡아?”

“내가 언제 무게를 잡았다고.”

“가볍게 생각하자고. 어차피 이 짓도 우리 즐기려고 하는 건데, 뭐. 난 하고 싶은 거 다 할래. 리스크 같은 거 생각했으면 난 애초에 아이돌 한다고 설치지도 않았어.”

정아는 ‘오늘 점심 메뉴는 추어탕’이라고 말하듯, 무척 가볍게 얘기했다.

덕분에 미묘하게 눌려 있던 분위기도 부드럽게 풀리는 듯했다.

나도 은근히 압박을 받고 있었던 모양.

그런데 생각할수록 정아의 말이 백 번 맞았다.

‘그래. 하면 되지. 즐기면 되는 거야. 팬들도 원하고 있고.’

내가 생각했을 때도 가능성이 있어서 그녀들을 보며 걸그룹을 상상했었던 거 아닌가.

이제 와서 보면 뭘 그리 오래 고민했나 싶다.

그냥 하면 되는 것을.

난 그녀들 모두의 얼굴을 찬찬히 훑으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녀들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얼굴에 미소를 띠웠다.

“좀 설렌다. 근데 나 걸그룹 진짜 해도 되나? 애들 너무 어린데.”

유진의 말에 정아의 얼굴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야! 내 나이는! 나이가 뭐가 어때서! 어!? 법에 걸그룹 나이 제한 있냐?”

“···없죠.”

별이는 유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유진 언니는 이제 미국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맞다. 선배, 저 어떡해요?”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미국은 가야지. 당장 걸그룹 앨범 내겠다는 게 아니야. 직원들이랑 언제 앨범 낼 지 얘기도 더 해봐야 하고. 일단 팬분들 기대감이나 키우자고. 올해 남은 무대들, 다 같이 무대에 서면서.”

남아 있는 공중파 무대는 둘.

그리고 시상식 무대 하나.

순간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시상식을 언급하며 거들먹거리던 박대표.

그의 면상이 구겨지는 걸 빨리 보고 싶다.

우리 애들이 남아 있는 모든 무대에서 합동무대를 한다면, 설령 와인드업이 대상을 타더라도 화제에 우리한테 묻혀버릴 테니까.

‘재밌겠네.’

그런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걸 깜빡해버렸다.

‘곡 썼다고 했지?’

곡이 어떤지 들어보지도 않았다.

이건 그간 쌓인 신뢰 때문이겠지.

안 들어봐도 곡의 퀄리티가 어떨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거든.

우리의 명곡 자판기는 항상 실망을 안겨준 적이 없었으니까.

난 서연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곡 썼다는 거 한 번 들어볼까?”

서연이는 엣헴, 헛기침을 하며 거만하게 웃었고.

난 저 모습에 벌써부터 환희가 차올랐다.

쟤가 저럴 때마다 항상 대박이 터졌거든.

파블로프의 개가 된 기분이다.

< 파블로프의 개가 된 기분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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