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들과 함께하는 연예계 생활-87화 (87/124)

< 예고편 >

단 한 번의 무대였다.

24위에 오르며 차트를 순항하던 이유진이 1위로 치고 올라가는 데에는 한 번의 무대로 충분했다.

“아주 난리네, 난리야. 하하.”

너털웃음이 흘러나왔다.

공연이 끝난 다음날 아침.

우리는 식사를 위해 다 같이 모였고, 내 옆에 앉은 유진이는 고개를 내밀어 내 핸드폰을 바라봤다.

나는 그녀가 편히 볼 수 있게 몸을 살짝 기울여줬다.

-진짜 괴물이 따로 없네ㅋㅋㅋㅋㅋ

-WE엔터 타율 장난 아니다. 김별, 구서연, 이유진. 다 탑급 솔로임.

-이런 애가 매니저를 했다고?ㅋㅋ

-나 왜 이분 몰랐냐?

아직도 유진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거다.

얼마나 큰 성공을 거뒀든, 인지도는 계속 쌓고 쌓아야 한다.

와인드업의 이름은 들어봤어도 얼굴을 모르는 남자들이 많듯이, 유진이 또한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 더욱 몰아쳐야 한다.

‘그래도 성과가 뚜렷해서 좋네.’

당장은 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목표로 했던 것을 이루어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는 실실 웃음을 흘리며 유진이를 바라봤다.

“1위 축하해.”

이미 아침 식사 자리에 나오기 전까지 몇 번이고 들었으며, 여기 모인 뒤에도 주구장창 들었을 텐데도.

그녀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번졌다.

듣고 또 들어도 좋은 모양이다.

“처음엔 얼떨떨했는데, 가면 갈수록 기분 좋아지네요. 선배, 저 1위 한 게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그것도 가면 갈수록 실감날 거야. 김호영을 이긴 거, 진짜 엄청난 거거든.”

매번 와인드업을 이기는 별이와 서연이 앞이라 내 말에 무게감이 실릴까 의심이 들었지만.

유진이는 와인드업의 매니저이기도 했으니,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를 수가 없을 거다.

현재 유진이의 차트 순위는 1위.

엎치락뒤치락하지도 않았다.

와인드업의 팬들이 비상이 걸린 와중에도, 유진이는 끄떡없이 1위의 자리에서 견고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니까요. 그게 제일 신기해요. 어떻게 이겼지?”

“무대로 이긴 거지. 그냥 실력으로 누른 거야.”

무대로 증명한 실력.

우리는 늘 그래왔다.

별이도 무명이었을 때, 무대를 통해 껑충껑충 인기를 올렸고.

서연이도 ‘AMAM’을 통해 단번에 인기를 훅 끌어올렸다.

이번에 이유진 역시 마찬가지.

그녀는 ‘K-pop Concert’에서의 무대를 통해 와인드업을 꺾었다.

24위에서 압도적인 1위로.

어떻게 보면 벼락스타라고 볼 수도 있었는데, 외부의 요인이 아닌 실력으로 얻어냈으니, 스스로 이 자리를 거머쥔 것이라고 봐도 되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바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스케줄은 끝났으니,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지.

그런데, 별이는 아니었다.

그녀는 우리와 목적지가 달랐다.

“오빠, 저 먼저 갈게요.”

“그래, 활동 잘하고 와.”

별이는 일본, 남미, 동남아로 활동 범위를 좀 더 넓히기로 했다.

유럽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대부분 다 얻었으니까.

다만 유럽에서 활동했을 때만큼 오래 있지는 않을 거다.

알짜배기만 쏙쏙 빼먹게 하고 잠시 휴식기를 줘야지.

별이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자주 연락할게요.”

항상 자주 연락을 했었는데.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더 자주 할 생각인가 보다.

그럴 만도 하다. 외국에 나가 있는데 얼마나 외롭겠어.

“그래. 심심하면 얼마든지 해. 나도 자주 연락할게.”

“네.”

별이가 먼저 떠나고, 우리 또한 미국을 떠났다.

미국에서의 일정은 짧았지만 얻은 게 너무 많았다.

액수로 따지자면 천문학적이겠지.

이제 스타의 입지를 다지며 과실을 좀 더 쓸어모을 차례였다.

***

유정아는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천천히 돌리며 스튜디오를 훑었다.

‘여기가 내 뮤비 촬영장···.’

영화와 드라마 촬영으로 수많은 세트를 봐왔었다.

스케일은 말해봐야 입 아플 지경. 이곳보다 좋은 환경에서 촬영한 적이 많았다.

허나, 유정아에게 있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세트장은 그 어느 세트장보다도 더 특별했다.

배우가 아닌, 가수로서 서는 세트니까.

유정아의 눈은 세트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았고, 구석구석 꼼꼼하게도 살폈다.

“마음에 드네.”

담담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였으나, 그 목소리 속엔 감정이 파도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옆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김유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야지. 지금까지 중에 가장 많은 돈을 들였는데. 하필 컨셉이 여러 얼굴을 가진 여자라, 컨셉을 다양하게 찍어야 되잖아. 정아, 네 뮤빈데 어설프게 찍을 수도 없고.”

정아는 어이없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그래봤자 뮤비지. 제작비 들어봤자 얼마나 든다고. 오빠는 내가 데뷔만 하면 돈 쓸어담는 거야.”

“하하. 그건 맞지.”

이미 곡이 완성됐고 안무까지 나온 마당이니, 어느 정도 성공을 점칠 수는 있었다.

정아의 데뷔는 대박은 따놓은 당상.

이건 이미 정해진 수순이나 다름없었는데, 문제는 ‘얼마나’ 성공하느냐다.

정아는 미간을 구기며 작게 혀를 찼다.

“하필 직전에 이유진이 그렇게 해버리면 나더러 어쩌라고···.”

케이팝 콘서트에서의 무대는 유정아도 봤다.

이미 범접할 수 없는 괴물이라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한숨이 나올 만한 무대.

그 이유진이 일류 댄서들과 함께 칼을 갈아 구상한 퍼포먼스이니, 그 정도의 퀄리티가 당연한 거긴 한데, 그래도 너무하다 싶었다.

“쓸데없이 이미지만 잡혀가지고.”

“응? 무슨 이미지?”

“WE엔터가 다 무대로 증명한다는 이미지. 난 걔네처럼 가수로서 특별하지 않은데.”

“너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한다. 네 무대도 얼마나 좋은데.”

정아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그저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댄서들과 함께했던 자신의 연습 영상을 돌려보고 또 돌려봤었다.

무대는 자신이 있긴 했다.

김별과 구서연, 그리고 이유진처럼 매우 특별한 무대를 만들지는 못할 뿐이지.

“그래. 뭐, 거기까지 바라는 건 너무 욕심이지.”

정아는 씩,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난 이미 배우로 탑을 찍었으니까.”

주변에 천재들이 너무 많다. 아니, 주변에 있는 이들이 죄다 천재다.

김별, 구서연, 이유진.

그녀들의 불합리한 재능을 향해 분통을 터뜨렸을 때, 들었던 말이 있었다.

배우나 배우 지망생이 이 모습을 봤으면, 분노했을 거라고.

스스로가 판단해봐도 자신은 배우로서 천재가 맞았다.

옆에 있는 천재들이 목표로 삼는 영역에 자신은 이미 배우로서 돗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다.

그런데, 가수로서 옆에 있는 천재들을 따라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덕분인지, 지금은 가수로서도 자신감이 넘쳤다.

비록 그 천재들과 같은 수준의 퍼포먼스를 하진 못하겠지만, 그 바로 밑 정도는 어찌어찌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나는 내 방식대로 하면 돼.’

크게 보자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의 개봉 시기에 맞춰 화제성을 한껏 끌어올리는 전략도 남들이 따라하지 못하는 자신의 방식일 것이고.

작게 보자면, 홀로 다양한 캐릭터를 표현해야 하는 ‘Face’의 컨셉을 소화하는 것도 그렇다.

“서연이가 컨셉을 참 잘 잡았어. 배우로서도, 가수로서도 잘난 여자잖아, 내가.”

“···.”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인데? 해봐, 어디. 이렇게 좋은 날에, 한 번 내 기를 죽여봐. 자, 무슨 말이 그렇게 혀끝까지 차올라서 못 견디겠다는 얼굴이 된 거야?”

“아냐. 네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맞지, 서연이가 컨셉을 잘 짜도 너무 잘 짰어. 응.”

말을 마치고 쩝, 입맛을 다시는 김유민을 보며 유정아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난 연예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여자 유정아나, 사람 유정아로도 정말 잘나고 좋은 사람인 것 같아. 그치?”

“···.”

“그치?”

“···그치. 맞아.”

가수를 꿈꾸길 잘했다.

아직 가수로 이룬 성과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유정아는 기분 좋은 나날이 차츰 늘어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오늘도 그렇고.

***

이유진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아이돌 판에 관심도 없었던 대학생, 강준수.

인터넷이 이유진의 이름으로 뒤덮이고 차트마저 1위를 달리고 있었으니, 강준수가 그녀의 무대를 보고 팬이 된 건 우연이라고 할 수만은 없었다.

얼마 전까진 이름도 생소했던 가수는 강준수의 생애 첫 덕질 대상이 되었다.

며칠간 반복되어 몸에 익은 서치.

과제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지금도 습관처럼 이유진의 이름을 검색했는데.

두 눈이 휘둥그레 뜨일 문구들이 화면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유정아 주연 영화, ‘스타는 다시 무대로’에 이유진 출연!]

[‘스타는 다시 무대로’ 1차 예고편 공개. 괴물 신인 가수 이유진 나온다.]

[‘스타는 다시 무대로’ 제작사, “이유진이 맡은 ‘성희주’는 비중 있는 역할이다. 영화를 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뭐?”

누워있던 몸이 벌떡 일으켜질 만큼 빅뉴스였다.

이제 막 데뷔한 괴물 신인 가수가 영화, 그것도 유정아가 주연인 영화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 나온다니.

이 외의 정보는 아직 몰랐지만, 이 얄팍한 정보만으로도 흥분이 되었다.

더 많은 정보를 찾는 건 나중 문제.

일단 그가 먼저 해야 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예고편을 보는 것.

“스타는 다시 무대로.”

과제가 끝난 뒤, 머리를 식히기 위해 핸드폰을 킨 거였는데.

어째, 과제를 할 때보다 머리가 더 팽팽 돌아가는 느낌이다.

찾아보니, 무려 1분 13초의 예고편이다.

여기에 이유진이 몇 초나 나올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나온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강준수는 바로 예고편을 틀었다.

그리고 유정아가 나왔다.

-내 인성이 그렇게 문제가 되는 거야? 사람들 다 나랑 비슷하던데. 자기보다 낮다고 생각되는 사람들한테 다 그러던데. 내가 본 연예계 사람들은 다 그러던데. 나는··· 죽일년이 됐네.

“와.”

역시 유정아는 유정아였다.

이유진을 보기 위해 튼 예고편인데, 순식간에 몰입을 시키고 있다.

영화의 내용은 제목처럼 직관적이었다.

몰락하고 좌절한 스타, 그리고 다시 무대를 꿈꾸며 도약을 준비하는 스타.

재미있을 것 같은 오락 영화인데, 유정아가 연기해서 그런지 벌써부터 이 캐릭터를 응원하게 된다.

-뭐야. 류지혜? 너 류지혜야?

그때, 이유진이 등장했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강준수는 헛숨을 들이켰다.

역시 단단히 마음을 사로잡힌 게 분명했다.

유정아가 잔뜩 몰입시킨 줄 알았는데, 아직 더 몰입할 구석이 남아 있었나 보다.

아찔한 감각과 함께 집중력이 천장을 뚫었다.

-어, 나야.

-하하···. 잘나가기 시작하면 사돈에, 팔촌에, 초등학교 동창에, 옆학교 교장 선생님까지 연락 온다더니, 류지혜가 왔네. 와. 아, 맞다. 근데 너 나 보러 온 건 맞지? 아니라고 하지 마. 안 믿어. 나 쪽팔리기 싫어.

씬이 바뀌고, 연습실이 나온다.

-너 미쳤어? 너 잘 춘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이걸 나더러 추라고!? 세상에서 너 혼자 출 수 있는 걸 나더러 추라고?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이게 하나씩 뜯어보면 고난이도는 아니거든. 디테일만 조금 많을···.

-야! 그게 어려운 거야! 그게!

흥미와 궁금증이 증폭됐다.

과연 이유진이 어떤 댄스를 췄을까?

영화에서 그녀가 하나의 매력적인 캐릭터로 나와서 춤을 춘다니.

이건 영화를 보라는 협박과 다름없었다.

허나, 그 협박은 기쁨의 비명을 만들어냈다.

“이건 무조건 봐야 돼!”

강준수의 눈빛이 번쩍거렸다.

.

.

.

그리고 이러한 반응은 이유진의 팬이고, 유정아의 팬이고 모두 비슷하게 나타났다.

유정아의 팬들에게도 이 영화는 마성의 매력으로 다가왔으니까.

-유정아의 댄스라니.

-우리 정아가 아이돌이라니.

-이걸 어떻게 안 보냐;;;; 영악하다, 영악해.

-이건 봐야지. 독하다, 독해.

대중들은 유정아가 실제로 데뷔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벌써 뮤직 비디오까지 찍었다는 것도 모르고.

< 예고편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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