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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들과 함께하는 연예계 생활-57화 (57/124)

< 사실 내 덕분이다 >

우리가 리딩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 25분.

2시까지이니, 35분을 일찍 왔다.

신인인 유진이로서도 늦었다고 볼 수 없고, 정아로서는 굉장히 일찍 왔다고 할 수 있는 시각.

반 정도의 자리가 차 있었던 리딩장은 이번에도 여전했다.

정아에게 다가와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후배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거나 정아보다 일찍 데뷔한 배우들도 정아를 아주 반겨줬다.

인간적으로는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반가운 것만은 진심으로 보였다.

정아의 출연으로 인해 흥행이 확실시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반면, 유진이는 당연하게도 찬밥 신세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유진이라고 합니다.”

“아, 네.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유진이라고 합니다.”

“예에.”

담담한 시선이 잠깐 그녀를 향했다가 다시 대본을 향하거나, 아니면 유정아에게로 향한다.

그래도 꿋꿋이 인사를 해나간다.

그녀도 매니저를 하며 이런 광경은 익숙해졌을 테니, 당황스럽진 않겠지.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유진이라고 합니다.”

“네.”

모두에게 인사를 한 그녀가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계속 앉아 있지는 못했다.

문이 열리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벌떡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거든.

그렇게 세네 번을 반복하다 보니, 그녀의 눈은 대본을 향했다가 문을 향했다가 자꾸 왔다갔다 정신없이 이동했다.

다리를 떨고 있고, 페이지는 아까부터 넘겨지지 않고 있다.

눈에 글자가 들어오지 않는 모양.

‘아까는 괜찮더니.’

차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더니, 지금은 여느 신인이랑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고도 명확했다.

연기를 하는 것도, 리딩을 하는 것도 처음인데, 거기에 연기 외적인 것으로 눈치까지 보고 있으려니 긴장이 되는 거겠지.

나는 혀를 짧게 차며, 유진이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유진아.”

“네?”

“잠깐 나와봐.”

우리에게 따라붙는 정아의 시선을 뒤로하고, 우린 리딩장 밖으로 나와 복도 끝에 섰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유진이가 먼저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우. 진짜 왜 이러죠? 소심해가지고. 매니저였을 땐 저렇게 떠는 게 머리로만 이해됐지, 가슴으론 공감이 안 됐는데, 이젠 좀 알 것 같아요. 그래도 잘해볼게요.”

잘하겠다고 말하는 걸 보니, 내가 데리고 나온 이유를 그녀도 알고 있나 보다.

하긴 모를 수가 없겠지.

난 픽, 웃으며 말했다.

“뭐야? 난 매니저니까 잘 알지도 못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선수 치는 거야?”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요! 제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어요?”

“맞잖아. 매니저는 머리로만 이해하고 공감을 못하니까 조언이랍시고 말하지 말라는 거 아니야?”

“그 말이 어떻게 그렇게 들려요? 와···. 선배, 요즘 스트레스 받는 일 있어요? 왜 꼬였지?”

내가 웃으면서 말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멋쩍은 미소를 짓고 있었던 그녀의 얼굴에, 비로소 자연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잘 알고 있고, 앞으로도 보고 싶은 미소.

얘도 나보단 경력이 짧지만 나름 매니저 출신이다.

긴장할 필요 없다, 넌 처음이니까 사람들이 잘하는 걸 기대하지도 않을 거다, 앞으로도 종종 볼 거니까 인사에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다 등등.

이런 조언을 한답시고 다 알고 있는 말을 하는 건 잔소리밖에 안 될 터.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웃고 대화하는 방식이 있다.

유진이는 웃는 얼굴 그대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선배, 저 잘할 수 있겠죠?”

날 빤히 바라보며 묻는다.

저 물음이 비단 리딩만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되물었다.

“뭐가?”

“···연예인 체질이 아닌 것 같아서요. 전 딱 직장인 체질 같은데.”

그 말을 듣고 살짝 웃음이 터졌다.

“하하. 정아가 이걸 들으면 뭐라고 했을 것 같아?”

내 물음에, 그녀의 입에서도 웃음이 터졌다.

“역시 천재들은 재수가 없다고 했으려나?”

“맞아. 너 춤추면 무슨 외계인 같다니까? 같은 사람 같지가 않아. 그게 어떻게 직장인 체질이야? 그리고 있잖아···.”

“네?”

“사실 네 진짜 리딩은 오늘이 아니야. 댄스 씬이지. 그때가 진짜 네 진가를 보여줄 수 있는 자리잖아.”

뻔한 말이다. 그녀도 이미 알고 있을 터.

하지만 그녀는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그래도 좀 마음이 편해지네. 고마워요, 선배.”

***

심감독님과 임대표님, 촬영 감독님 등 스탭들의 표정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팬미팅에서 만난 팬들보다도 얼굴에 행복이 가득하다.

유정아의 캐스팅 이후, 영화의 사정과 환경이 그야말로 격변했기 때문일 터.

투자는 끝도 없이 들어오지, 쳐다도 안 보던 기획사에서 갑자기 연락이 쇄도하지···.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눈앞에 있다.

화려한 면면의 출연진.

유진이가 기죽을 만도 한 게, 신인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 화려한 면면들 때문이기도 하다.

리딩이 시작된 후.

그들은 연기로 싸움이라도 하듯, 눈빛에 날을 세웠다.

누가 더 연기력을 날카롭게 갈고닦았는지 겨루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주인공은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괜히 주연일까.

충분히 숙련된 가수는 첫 음만 들어도 실력을 알 수 있고, 충분히 숙련된 래퍼 또한 추임새만 들어도 실력이 가늠이 된다고 한다.

댄스, 글, 작곡, 미술, 연주 등 다른 분야에서도 똑같은데, 연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정아는 마치 버르장머리 없이 대드는 아이를 혼내기라도 하듯,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다른 배우들의 기를 콱콱 짓밟았다.

“내 인성이 그렇게 문제가 되는 거야?”

어쩌면 큰 의미 없을 대사를 담담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하지만 그 속에 당황스럽고 불안한 심정이 아주 약간 엿보였고, 그녀가 갖고 있던 자부심과 자존심 또한 비슷한 크기로 아주 약간 엿보였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

그녀는 대사 속에 캐릭터와 상황, 심리를 녹여냈다.

“사람들 다 나랑 비슷하던데. 자기보다 낮다고 생각되는 사람들한테 다 그러던데. 내가 본 연예계 사람들은 다 그러던데. 나는··· 죽일년이 됐네.”

무감정하게 읊조리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꽤 넓은 리딩장 안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리딩은 원래 고요해야 맞다.

작은 소리도 배우들과 감독의 집중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까.

아주 아주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룰이자, 예의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이 침묵은 그것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연기할 때는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시나리오에 시선을 떼지 않는데, 정아가 연기할 때는 다르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정아를 바라본다.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냘프고 아담한 거인.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니겠지.

정아는 주연이다.

갈수록 조연들의 씬도 많아지겠지만, 이건 정아의 캐릭터 ‘류지혜’가 무너진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다.

자연히 초반엔 정아의 비중이 가장 많을 수밖에 없다.

숫제 차력쇼를 보는 듯하다.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그녀가 가진 실력이 어디까지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실제 촬영장이라면 호흡을 맞추느라 힘을 조절할 수 있지만.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힘 조절 같은 건 쥐뿔도 들어있지 않아 보였다.

기를 죽일 수 있을 만큼 죽여놓겠다는 듯, 그녀는 존재감을 가감없이 뿜어내며 장내를 휘저었다.

허탈함, 절망감, 슬픔, 황당함, 외로움, 쓸쓸함, 후회, 분노, 수용.

그녀의 앞에 놓인 재료들은 많았다.

씬과 대사가 있으니, 재료들을 마음껏 손봐서 올려놓을 그릇도 있는 셈이다.

그녀는 시나리오에 적힌 그 이상을 내보였다.

무슨 감정을 담아내든, 무슨 대사를 내뱉든, 그녀는 몇 번을 보고 싶게 만들고 곱씹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압도적인 재능.

그녀가 연습생 때 두각을 드러낸 이것.

이는 GO엔터로 하여금,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아이돌이라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게 만들어버렸고.

이는 막 전성기를 시작하던 이하영을 손가락만 빨게 만들어버렸다.

‘언제 봐도 사기야.’

유진이도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그녀와 연습할 땐 이 정도가 아니었을 테니까.

다른 배우들은 그래도 자기 이름값에 걸맞게 행동했다.

충격은 받았을 지언정, 리딩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리고.

나는 곧 다가올 순서에 주먹을 꽉 쥐었다.

이유진.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뭐야. 류지혜? 너 류지혜야?”

“어, 나야.”

“하하···. 잘나가기 시작하면 사돈에, 팔촌에, 초등학교 동창에, 옆학교 교장 선생님까지 연락 온다더니, 류지혜가 왔네. 와. 아, 맞다. 근데 너 나 보러 온 건 맞지? 아니라고 하지 마. 안 믿어. 나 쪽팔리기 싫어.”

꽉 쥐었던 손에 스르르 힘이 풀리고.

입가에 씨익 미소가 번졌다.

‘잘하네.’

정아의 특훈 덕분일 수도 있는데, 사실 내 덕분이다.

내가 긴장을 풀어줘서 이렇게 잘하는 거지.

나 아니었어 봐. 이렇게 못했을 거다.

그러니까 다 내 덕이다.

***

대본 리딩은 내 덕분에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우리는 축배를 드는 대신, 더한 성공을 위해 밥만 먹고 바로 연습실로 향했다.

“오빠는 할 일 없어? 대표가 뭐 이래.”

“이게 오늘 내 할 일이야.”

정아가 피식 웃었다.

전에는 신경 안 써준다고 뭐라 하더니, 지금은 말로 틱틱대면서 웃고 있다.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가장 왼쪽에, 그리고 중앙엔 정아가, 오른쪽엔 유진이가.

정아는 오늘 리딩에서 그렇게 차력쇼를 펼쳤으면서도 유진이의 연기까지 유심히 지켜봤나 보다.

“내가 너 여기서 그렇게 단조롭게 연기하라고 가르쳤어? 사람을 입체적으로 생각해보라고. 캐릭터를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하면 인상적이지가 않잖아. 그럼 영화를 왜 봐? 대사는 잘 뽑혔는데 이걸-“

혼내는 건지 피드백을 하는 건지, 그도 아니면 엊그제 하루종일 스탭 연습만 하면서 들들 볶인 것에 대한 복수인 건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알 것 같다.

복수겠지. 뻔하다.

정아의 작은 뒷통수 너머로, 유진이의 얼굴이 보인다.

흘끗흘끗 눈이 마주치는데, 내가 소리없이 키득대고 있으니 미간이 좁혀진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여기서 그만할까? 이게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 아냐!”

“그게 아니라 자꾸 선배가 웃어가지고.”

홱! 고개를 돌린 정아가 내 얼굴을 노려봤다.

난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표정을 보이며 무죄를 주장했다.

“오빠, 나가. 댄스 할 때 다시 와. 그땐 꼭 와야 돼. 지금은 나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쫓겨났네.’

연습실 문 밖에 서 있는데, 문득 웃음이 나왔다.

저기선 왜 웃었지? 지금은 왜 웃음이 나올까?

사무실로 올라가지 않고,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데.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서연이였다.

“어, 서연아.”

-사장님! 저 대박 곡 하나 나온 것 같아요! 들어보실래요?

또 웃음이 나왔다.

난 원래 이렇게 웃음이 헤픈 남자가 아니었는데.

분명 GO엔터에 있을 때는 표정 좀 그렇게 무섭게 하고 다니지 말고 웃고 다니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웃음이 마를 날이 없다.

“당연히 들어야지.”

서연이가 후속곡을 내고 싶나 보다.

그래, 내면 좋지. 데뷔곡으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역시 천재는 그 시간조차 견디질 못하나 보다.

그래서 천재인 건가?

복도에 선 채로 서연이가 보내준 음악을 들어봤다.

그리고 바로 서연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어때요? 들어봤어요?

“어, 다시 써야겠더라.”

-···.

“트로트는 너무 간 거 아니야? 너 요즘 너무 신났어.”

그래, 어떻게 항상 웃을 수만 있겠어.

가끔 이렇게 한숨이 나올 때도 있어야지.

-정확히 말하면 댄스곡인데 트로트 향을 살짝 첨가한 거예요. 저도 무리한 도전은 안 한다니까요? 이런 신선한 음악은 어쩌면 혁신이 될 수도 있어요! 편견 없이 한 번 다시 들어보세요. 진짜 대박곡일 수도 있잖아요.

“너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하니.”

난 사무실로 올라가며 통화를 이어갔다.

일이나 해야지.

< 사실 내 덕분이다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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