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들과 함께하는 연예계 생활-51화 (51/124)

< 슬슬 시기 좀 잡아야겠다 >

계기는 ‘김석희의 아메리카노’였다.

퇴근 후, 천근만근한 몸으로 맥주를 홀짝이며 본 무대.

그때의 충격은 방송이 끝난 뒤에도, 다음 날에도, 그리고 다음 날의 다음 날까지도 지워지지 않았다.

장진영은 구서연의 노래를 듣고 또 들었으며, 그녀의 뮤비를 보고 또 봤다.

‘김석희의 아메리카노’ 무대 장면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흔히 말해, 덕통사고라고 한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처럼 한순간에 쾅! 가슴을 쳐버려서.

좋아하고 싶어서 좋아하게 된 게 아니라, 거의 강제로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이 나이에 여기에 올 줄은 몰랐는데···.’

장진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학생들만 즐비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또래로 보이거나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순전히 구서연의 무대 때문에 온 이곳.

그녀가 댄스를 하든 기타를 하든 이제 크게 상관이 없었다.

이미 그녀의 팬이 되어버렸기에, 그저 무대를 직관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와아아아아!”

막상 밴드가 세팅되고, 기타를 메고 있는 그녀가 등장하자 목구멍에서 우렁찬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래, 이제 그녀의 댄스 퍼포먼스도 좋아졌지만, 역시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걸 한 번쯤은 직관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장진영은 그녀가 스크린에 커다랗게 잡힌 모습을 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김석희의 아메리카노’에서 보여준 무대가 떠올라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그 무대와 같지 않다는 걸 바로 깨닫게 해주었다.

다른 악기 없이, 오로지 기타 독주로 시작되는 무대.

등허리에서 시작된 전율이 머리 끝까지 쫙 퍼지며 희열을 만들어냈다.

전율과 희열이 그치지 않는다. 소리도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강렬한 소리와는 달리, 그렇게 빠르지는 않다.

허나, 기타를 잘 치는 것의 기준은 속주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듯, 가슴을 울렁이는 연주가 장내 구석구석에 퍼졌다.

그리고.

속주를 못하는 게 아니라는 듯.

파도처럼 부드럽게 너울치던 소리가 지진이라도 만난 듯 점점 더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콘서트 중의 으뜸은 리얼 사운드라고 했던가.

오늘 여기 와서 본 무대들과는 격이 다른 소리가 퍼짐으로써 관객들을 침묵에 빠뜨렸다.

스크린에, 가수석에 앉은 다른 가수들의 표정이 잡힌다.

실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뮤지션.

입을 쩍 벌린 그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괴로워하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눈은 깜빡이는 것도 아깝다는 듯이 무대를 향해 못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와인드업.

그들의 표정 또한 이와 비슷했다. 경악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

그중 송윤황은 눈을 크게 뜬 채 헛웃음까지 내뱉고 있었다.

다시 화면에 구서연이 잡혔다.

구서연의 기타 소리.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그 소리는 그의 바람대로 바로 끊기지 않았다.

다만.

다른 소리들이 합류할 뿐이었다.

드럼과 베이스, 키보드, 그리고 독보적인 음색의 보컬.

“우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

단 한 순간도 클라이막스가 아니었던 적이 없지만.

모든 소리가 합류한 순간, 모든 관객들의 환호성이 폭탄처럼 터졌다.

마치, 지금까지 참느라 죽을 것 같았다는 듯이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치고 있다.

귀에 들리는 소리가 달콤하고 황홀하다.

커다란 스크린에 보이는 그녀의 표정이 밝고 해맑다.

장진영은 또다시 깨달았다.

앞으로 평생 이 무대는 잊을 수 없을 거라는 것을.

그리고 이 무대가 잊히는 날까지 그녀의 열렬한 팬이 될 거라는 것을.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뮤지션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닿기를 바라며, 목이 터져라 환호했다.

***

무대를 위해 스테이지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와인드업.

인기상에 이어, 올해의 노래상, 올해의 앨범상까지 받았다.

이제 올해의 가수상만이 남아 있는 시상식.

무대 뒤에 있는 그들의 입은 하나같이 꾹 다물려 있었다.

다들 머릿속이 복잡해 보인다. 아니면 그저 충격을 받았거나.

송윤황은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정신 차려. 이제 우리 무대야.”

그의 말에 멤버들은 고개를 털거나 목을 돌리거나, 저마다의 방법으로 잡념을 떨쳐냈다.

기대하고 있는 팬들을 위해 텐션을 끌어올려야 한다.

그런데, 정작 이런 말을 하는 송윤황도 그들과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올해의 노래상, 올해의 앨범상까지 수상했고, 올해의 가수상만이 남은 지금까지 몇 개의 무대가 더 있었던가.

하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엔 김별과 구서연의 무대가 잊히지 않았다.

송윤황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잡념을 떨쳐내려 했지만 쉽지 않다.

멤버들도 여전히 방금 전과 비슷한 얼굴들이다.

짧게 혀를 찬 그는 관계자석을 바라봤다.

관계자석에 앉은 채, 활짝 미소 짓고 있는 익숙한 얼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까 스크린에 잡혔던 모습이 떠오른다.

‘되게 좋아 보이시네.’

설마 그렇게 울먹이는 모습을 볼 줄은 몰랐는데.

“스탠바이할게요. 30초 전입니다.”

송윤황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내고 후우, 긴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이제 정말 집중해야 할 시간이다.

이 시상식의 주인공 자리를 빼앗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올해의 가수가 될 거니까. 올해의 앨범상을 받았고, 올해의 노래상을 받았고, 인기상을 받았으니까.

주인공은 자신들이 되어야 마땅하다.

“10초 전입니다!”

멤버들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어느새 눈빛이 되살아난 그들. 역시 든든하다.

송윤황은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던 대로만 하자.”

조연출의 지시를 받고 당당한 걸음으로 올라가는 무대.

기다렸다는 듯이 관객들의 함성이 무대 위로 퍼부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공은 자신들이 되어야만 한다.

와인드업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렸다.

***

미리 예약해둔 고깃집.

우리 회사의 직원들이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에 공통적으로 흥분과 기대, 기쁨, 희망이 떠올라 있었다.

“사장님, 입 찢어지겠어요.”

황실장님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의식도 못 하고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내 입꼬리가 끝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굳이 내릴 생각도 없다.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다.

세상이 더없이 아름답게 보이고, 우리의 내일에 고급스러운 레드카펫이 깔린 느낌이다.

“인터넷 보셨어요? 지금 난립니다.”

박실장님이 고기를 뒤집으며 말한다.

난 고개를 저었다.

“정신이 없어서 못 봤는데, 오늘은 안 보려고요. 이대로도 너무 행복해서요.”

“하하! 아꼈다가 내일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네요.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당연히 기대해야 하고, 당연히 기대에 걸맞아야 한다.

왜 아닐까. 그런 무대들을 보여줬는데.

누가 뭐라 해도 오늘 시상식에서의 주인공은 우리 애들이었다.

별이와 서연이.

그중에서도 특히 서연이는 다른 가수들이 보여준 적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는 무대를 선보였다.

그러니 주인공이 되어야 마땅하다.

귀가 발에 달리지 않았다면 그 무대가 얼마나 수준이 높은지 못 알아볼 수 없을 터.

그 넓은 시상식장에 꽉 들어찼던 관객들이 모두 서연이의 색으로 물들어졌던 만큼, 이를 TV와 인터넷으로 본 시청자들도 틀림없이 알아봤을 것이다.

‘일도 잘하는 밴드’의 피디와 작가, 그리고 김석희 씨까지 아까부터 성화다.

그들뿐만 아니라 핸드폰으로 연락이 쏟아지고 있다.

난 제대로 고기도 먹지 못하고 그들에게 일일이 답장을 해줬다.

그런데 희한하지.

속에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배가 불러오고 있다.

‘아···. 행복해.’

이게 행복이지.

“사장님, 이제 저쪽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선생님도 그렇고 계속 이쪽 보던데요.”

황실장님의 말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별이와 서연이, 유진이, 정아, 그리고 구태성 선생님까지 자리한 테이블.

정아는 쌈 위로 또 거대한 탑을 쌓고 있었고, 서연이는 아까의 폭발적인 반응에 아직도 여운이 남는지 멍한 얼굴로 고기를 씹고 있었다. 와중에 먹긴 먹네.

선생님은 행복에 겨운 얼굴로 술잔을 채웠고, 유진이는 얌전하고 평범하게 식사하고 있다.

그리고 별이는.

고개를 돌리고 있을 때부터 쭉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데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고 태연한 얼굴. 오늘 신인상의 주인공답지 않은 얼굴이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을 향해 걸었다.

한 걸음씩 걸어갈수록 한 명씩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자리에 앉을 땐 이곳의 모두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유정아가 실실 웃으면서 입을 연다.

“오늘의 주인공 왔네? 마침 오빠 얘기 하고 있었어.”

“음? 무슨-“

“역시 기분 좋아 보여. 펑펑 우니까 속이 좀 시원해?”

“···.”

별이의 입에서 풉, 웃음이 터졌다.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더니, 그녀의 표정이 담담했었던 건 웃음을 참고 있었던 거였나 보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이렇게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의 눈이 빨개져 있는 게 보인다.

아, 그러고 보니 별이도 울었었지?

난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을 뿐이고, 별이는 아예 뚝, 뚝, 눈물을 쏟아냈다.

‘이걸 놀려, 말아?’

고민은 짧았다. 안 놀려야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 얘기를 꺼내면 자리가 조금 어색해질 것 같았거든.

“자, 이거 봐. 내 핸드폰 배경화면이야.”

정아가 핸드폰을 내밀어 보여준다.

화면엔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 내 얼굴이 큼지막하게 떠올라 있었다.

“나 이제 평생 우울할 일은 없을 것 같아.”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게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젠장. 흑역사로 고생하는 연예인들 마음을 이제 좀 알 것 같네.

그동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는데, 말만 쉬운 거였다.

“사장님, 우리 서연이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정말 요새 살 맛이 나요. 하루종일 인터넷 보는 재미로 살고 있습니다.”

싱글벙글한 얼굴의 구태성 선생님.

눈빛에서 진심이 절절하게 느껴지고, 목소리는 공손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난 그가 얼마나 행복해하고 있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서연이와 내가 만난지 그리 길다고 할 수는 없는데, 그동안 쌓인 얘기가 벌써 한 트럭이다.

그런 나도 이렇게 행복한데, 과연 아버지로서는 어떨까.

난 공손한 그의 인사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답했다.

“저도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서연이를 만날 수 있게 돼서 저한테 얼마나 큰 선물인지 모르겠습니다.”

멍했던 서연이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말랑말랑한 미소가 번진다.

“그쵸? 사장님은 진짜 인복 타고나신 거예요.”

“쓰읍! 서연아, 사장님한테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아빠는 좀 가만히 있어. 당연히 장난이잖아! 설마 내가 진심으로 이러겠어?”

“사장님한테 그런 장난은 치는 거 아니야, 서연아. 예의는 지켜야지. 더구나 다른 사람들도 다 있는데.”

“아빠! 나도 사장님한테 고마워한다니까? 그냥 좀··· 하아. 아빠가 나랑 사장님에 대해서 뭘 알아!”

천하제일의 효녀가 따로 없다. 조금 매운 맛이네.

우리 테이블은 금세 조용해졌다.

이제 배가 좀 고프다.

너무 안 먹었어.

난 상추와 깻잎을 들어 포개고, 고기와 구운 마늘, 양파, 버섯, 쌈장, 고추에 김치, 콩나물까지 올렸다. 그리고 입안에 그대로 쑤셔 넣었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조합.

입안에 꽉 들어찬 쌈을 꼭꼭 씹어 넘기고 술 한잔을 들이켰다.

“크으.”

만약 오늘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면 술맛이 더없이 썼을 텐데.

지금은 천상의 맛이 느껴진다.

여기 모인 사람들 덕분이겠지.

서연이의 말대로 난 정말 인복이 끝내주나 보다.

그런데, 옆이 내내 조용하다.

이유진.

잘 먹고 있기는 한데, 얘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과 술이 있는 자리에서 그리 조용히 먹기만 하는 애가 아니거든.

“유진아.”

“네?”

나를 똑바로 마주한 두 눈에 흔들림이 없다.

좋은 날이기 때문인지, 은은하게 미소까지 띠고 있다.

하지만 그 속을 내가 왜 모를까.

그렇게 연습을 미친 듯이 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녀의 마음이 어떨지는 뻔했다.

애써 멀쩡한 척 숨기고 있을 뿐이지.

‘유진이라면···.’

완전무결하다시피 했던 와인드업의 무대를 보며 문득 떠올랐던 그녀.

그녀라면 그들에게 닿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착각이겠지만, 그 순간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아무튼 슬슬 시기 좀 잡아야겠다.

이제 그럴 때가 됐어.

난 그녀의 눈빛을 받으며 평소와 다름이 없는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아냐, 맛있게 먹으라고.”

“···? 네. 선배도요.”

지금 말했다간 체할지도 모른다.

< 슬슬 시기 좀 잡아야겠다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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