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아마 이렇게 했었지? >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것 같다.
우리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는 시선들.
걸음걸음마다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있었다.
팽팽하진 않으나 삭막하고 적막한 광경.
나올 때도 이랬는데, 그들의 반응은 지금도 똑같았다.
우리를 반기지 않는 눈빛들이 얼굴과 등을 콕콕 찌른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네.’
옆에 있는 그녀들을 흘끗 바라봤다.
정말 치고 박고 싸우기라도 할 듯이 눈빛을 불태우는 서연이.
어깨를 쫙 펴고 평온한 얼굴로 길쭉한 다리를 쭉쭉 뻗는 별이.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턱을 치켜드는 유진이.
내 입에도 진한 미소가 맺혔다.
이렇게 비위에 거슬릴 정도로 구린 냄새가 풍기는 곳을 나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어떻게 보면 최이사와 이수진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나면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다.
“사장님, 근데요. 우리 뭘 부셔야 하는 거예요?”
서연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그 순진한 물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얘는 우리가 진짜 싸우러 온 줄 아나 보네.
“그냥 기선제압하는 거야. 그리고 이 회사 나와서 이렇게 잘나가고 있다, 선전하는 거고.”
그녀는 김이 팍 새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에이, 그게 뭐야. 그럼 그냥 합만 맞춰보고 가는 거예요?”
“하하. 뭐, 그렇지. 연습실에도 사람들은 몇 명 없을 거야.”
그런데 얘는 회사를 다녀보지 않아서 모른다.
우리가 이렇게 여유롭게 얘기를 하며 위풍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저들의 눈에 또렷하게 박히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입으로, 지금의 장면이 계속해서 오르내리라는 것을.
‘이거 엄청 열받을 거거든.’
저들의 입장에선, 그리고 나와 관련이 있던 사람들의 입장에선.
오늘 일은 치욕이고 굴욕일 것이다.
망해야 하는 내가 이렇게 성공해서 버젓이 GO엔터를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아마 자다가도 열불이 터져 물을 벌컥벌컥 마실 거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 마당에, 전 직장 동료가 성공해서 돌아오니 어떻겠는가.
더군다나 좋게 나간 사람도 아닌데.
“시시해. 별거 없네요.”
투덜대는 듯한 서연이의 말에, 큭큭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려던 순간이었다.
불꽃 튀는 전투를 기대했던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한 배려인가.
최이사.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던 그가 우릴 발견하고 걸음을 우뚝 멈췄다.
눈썹이 움찔거리고 동공이 순간적으로 흔들린다.
그리고 애써 태연한 척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걸음을 옮긴다.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우리가 오늘 오는 걸 알고 있었을 테지만, 지금 왔다는 건 미처 못 들었나 보다.
그는 자신이 당황하지 않았고, 우릴 피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왔다.
적막이 내려앉은 건 방금 전과 변함이 없었지만, 주변의 공기는 팽팽해졌다.
거칠게 콧김을 내뿜는 서연이.
유진이는 내 등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가 뗐다.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최이사가 내 앞에 멈췄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태연한 척 입을 연다.
“왔어?”
“하하.”
웃음이 나오는 걸 참지 않고 흘렸다.
그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으나, 눈빛만큼은 확실히 살벌해졌다.
“네, 왔어요.”
“···표정이 재밌어 보이네? 뭐가 웃겨?”
난 어깨를 살짝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보니까 목이 좀 많이 뻣뻣해진 것 같아.”
“사장이잖아요. 잘나가기도 하고.”
“···.”
“그리고···.”
난 그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주위에서 들리는 헛숨 삼키는 소리가 내 입꼬리를 더욱 끌어올렸다.
“제가 좀··· 싸가지가 없어서.”
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실소가 새어 내왔다.
그리고, 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녀들을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뒤돌아보지 않고, 더욱 위풍당당하게.
그런데 그때.
며칠 전 ‘해태영화상’에서 봤던 이하영의 모습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그때 아마 이렇게 했었지···?’
뚜벅- 뚜벅- 뚜벅.
세 발자국을 걷고 슬쩍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런데 이수진은 지금 뭐 하고 지냅니까?”
최이사의 얼굴은 마치 고추냉이를 한 주먹이나 입에 넣은 듯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
“아니, 선배! 꼭 그렇게 해야 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괜히 화를 키우는 꼴이잖아요!”
유진이가 내 양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걱정과 근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눈동자.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아니 사실 이게 합리적이라면 합리적인 생각이지.
가뜩이나 안 좋은 사이, 화를 돋우면 우리한테도 화가 미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게 뭐 별거라고. 이런 것까지 참을 필요는 없잖아. 우리가 당한 게 얼만데.”
잘 풀려서 망정이지, 그들은 이미 내 화를 키우고 키우고 또 키웠었다.
화를 키우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말이 저쪽엔 해당되지 않고 내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라면.
난 기꺼이 불합리를 택하겠다.
“저도 사장님 말에 동의해요! 그리고 진짜 멋있었어요! 카리스마 대박!”
반면, 서연이는 마냥 좋아한다.
난 크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또 한 카리스마 하지. 멋있기도 하고.
아주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
우리끼리 기다리고 있던 그때.
마침내 연습실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레모네이드의 맏이인 최진솔, 레모네이드를 맡은 윤실장.
그리고 하트하트큐트의 제이제이까지.
“사장님, 저 잘하고 올게요.”
별이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저도 엄청 잘하고 올게요!”
서연이도 주먹을 들어올린다.
우리와 별 상관이 없는 제이제이에겐 많이 불편한 자리가 될 터.
그런데 어쩔 수 없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구조상 절대 불가능하거든.
우리는 불필요한 대화를 전혀 나누지 않고, 바로 동선과 합을 맞추는 연습에 들어갔다.
별이랑 최진솔은 몇 년간 붙어 있던 사이인데도, 서로 한마디 말도 나누질 않는다.
그냥 댄스로만 싸우고 있을 뿐.
“우리 애들이 찍어누르네요. 서연이는 재능 있어서 그렇다 치고, 별이가 저렇게 춤을 잘 췄었나? 매일 봐서 잘 몰랐는데, 진짜 많이 늘긴 했나 봐요. 그쵸? 선배도 보이죠?”
최진솔이 그녀들에게 지기 싫어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런데 상대가 되질 않는다.
서연이와 별이에게도, 그리고 제이제이에게도.
“애초에 레모네이드라는 팀이 별이를 중심으로 짠 팀이었으니까. 역시 잘 받쳐주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원래 레모네이드는 퍼포먼스 팀이 아니었다.
그랬으면 이수진은 아무리 낙하산이더라도 절대로 이 팀에 끼지 못했겠지.
‘아니···. 어떻게든 가능하긴 했겠구나?’
양심 없고 얼굴에 철판 까는 걸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니까.
아무튼, 별이의 댄스도 많이 실력이 늘었다.
이렇게 비교하니까 눈에 확 띄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눈에 띄게 비교되는 게 있었다.
“와. 보컬은 진짜 우리 애들하고 비교도 안 되네요.”
각자 녹음한 것을 취합해서 만들어낸 커버곡 음원.
파트는 공평하게 나뉘어졌는데, 과연 이걸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최진솔의 입장이었으면, 차라리 자신의 파트가 없기를 바랐을 것 같다.
이게 공개처형이지 뭐야.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이제이와 마주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별이와 서연이.
최진솔은 씩씩대며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합을 맞춰보는 정도의 연습이었기에, 별로 시간도 들지 않았다.
허나, 결과는 이 짧은 연습으로도 선하게 보였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네.’
세상 사람들한테 우리 애들 자랑하게.
***
‘AMAM’의 대기실.
방금 전까지 레드 카펫 인터뷰에서 활기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별이와 서연이는 축 늘어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럴 거면 그냥 자라니까.”
“안 돼요. 머리 망가져요. 얼굴도 부을 거고.”
“전 안 자도 괜찮아요. 하나도 안 피곤해요.”
서연이와 별이가 차례대로 답했다.
조금이라도 더 예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잠을 참고 있는 거다.
데뷔 초엔 다들 이러더라.
조금만 지나면 이럴 때 자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걸 깨닫고는 어디서든 눈을 붙이려 하겠지.
그녀들은 새벽에 리허설까지 하고 돌아와, 잠깐 눈만 붙이고 다시 샵에 갔다 왔다.
그러니 안 피곤할래야 안 피곤할 수가 없을 터.
그렇게 얼마나 더 있었을까.
다른 대기실을 열고 외치는 조연출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이제 들어갈 시간이 됐다는 것.
“우리도 나가자.”
“네···.”
“으···.”
별이랑 서연이는 겨우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긴 팔다리를 쭉쭉 늘이는 별이, 그리고 짧은 팔다리를 휙휙 돌리는 서연이.
그래도 몸을 푸니 졸음이 달아나는지, 눈빛이 조금은 선명해졌다.
정실장님과 박실장님.
그리고 스타일리스트의 손길을 다시 한번 받은 별이와 서연이까지.
우리는 대기실을 열고 나와, 복도를 걸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유민이 형!”
반가움을 머금고 있는 그 목소리에, 표정과 행동까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 정도면 뒤통수에 눈이 달린 거지.
우리는 동시에 몸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와인드업의 막내, 장영기.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그의 뒤로, 하나같이 익숙한 얼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황, 서도현, 김호영.
각자의 표정은 달랐지만, 그들 모두 나를 바라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형! 잘 지냈어요? 진짜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지. 보다시피.”
텐션 높은 장영기의 말에, 피식 웃으며 답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K팝 그룹.
그들이 내 앞에 일 자로 도열했고, 서연이와 별이는 내 옆에 딱 달라붙어 그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별입니다.”
“안녕하세요, 구서연입니다.”
딱딱하고 낮은 목소리.
와인드업의 눈이 그녀들을 스치듯 지나가고, 다시 내 얼굴에 꽂혔다.
그저 담담한 얼굴의 송윤황.
불편한 건지 어색한 건지, 멋쩍게 미소 짓는 김호영.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서도현.
그들의 눈을 한 명씩 마주하고 있는데.
그들의 뒤로 박수한 대표가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사장. 오랜만이야.”
“네. 오랜만입니다.”
박대표는 내 앞에서 멈추지 않고 마저 걸음을 옮기며 멀어졌다.
그와의 대화는 그렇게 간단하게 끝났으나, 그가 내게 적대적이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내가 안 것처럼, 아마 박대표도 내가 적대적이라는 걸 알겠지.
뭐, 별로 신경 쓸 만한 건 아니다.
당연한 거니까.
잠시 와인드업에게서 시선이 멀어진 순간.
리더이자 맏이인 송윤황은 입을 열었다.
“엄청나더라고요. 축하해요.”
뭐가 엄청나다는 건지 캐묻지는 않았다.
아무튼 나름 좋은 말을 건네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대충 끄덕이니, 서도현과 김호영도 뒤를 이어 입을 열었다.
“축하해요, 형. 형이라면 잘될 줄 알았어요.”
“저희도 잘하고 있어요. 여전히.”
지금은 딱히 추억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애틋한 마음도 섭섭하거나 나쁜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냥 우연히 마주쳐서 오랜만에 인사를 한 것뿐이니까.
대충 인사도 했겠다, 이제 슬슬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옆에 있던 별이가 내 팔에 슬쩍 손을 올리며 말했다.
“오빠.”
“···?”
“저 대기실에 뭐 두고 온 것 같아요.”
스트레칭 때문에 조금은 선명해졌었던 눈빛이.
지금은 뭐라도 베어버릴 듯 시퍼렇게 벼려져 있었다.
근데, 오빠라니.
그녀에게는 처음 듣는 호칭이었다.
왜 갑자기?
< 그때 아마 이렇게 했었지?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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