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대 주적의 본거지 >
화창한 아침.
유정아의 손에서 시나리오가 한 장 한 장 넘어갔다.
‘스타는 다시 무대로’.
제목에서 몇 가지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었고, 역시 그중에 하나가 맞았다.
10대 후반에 데뷔해 슈퍼스타가 되었던 솔로 아이돌.
국내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 그리고 전세계로 인기가 뻗어나갔다.
데뷔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으나, 인기를 얻는 과정은 무척이나 쉬웠던 ‘류지혜’.
세상이 자신의 발 아래 있는 듯했고, 인성은 점점 망가져버렸다.
그래서, 이는 필연적이었다.
인성 논란.
적나라하게 찍힌 영상은 짜깁기의 여지도 없었고,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날아갔다.
높이 오른 만큼 추락하는 속도도 빨랐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욕했고, 그녀를 옹호해주는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욕을 먹으며 사라졌다.
“이것 때문에 날 캐스팅한 거야?”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보면 찰떡 캐스팅이라고도 할 수 있어서.
“여기까진 재밌긴 하네.”
다시 한 장 한 장 넘어갔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류지혜.
세상 모든 이들이 그녀를 끌어내리고 있으니, 버틸 재간이 없다.
류지혜는 그렇게 자취를 감추었고.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음.”
유정아의 눈이 음미하듯 시나리오를 훑기를 얼마간.
시나리오의 마지막 글자까지 읽은 그녀의 입에서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망설임 없는 손길이 핸드폰을 향했다.
귀에 가져다 대니,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봤어?
“괜찮네. 도둑처럼 안 다니고 합법적으로 연습해도 되고.”
안 그래도 불편하던 참이었다.
회사에 대한 기자들과 사람들의 관심이 가파르게 치솟아서.
연습실을 갈 때와 나올 때도 신경이 쓰였고, 중간에 밖을 다닐 수도 없었다.
솔로 아이돌 데뷔를 준비하고 있다는 게 밝혀지면 꽤 곤란해지니까.
하지만 이 영화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댄스와 노래를 당당하게 연습해도 된다.
누구에게 들켜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맘껏 떠들어보라지.
영화의 홍보만 될 뿐이다.
-내용은 어때?
“방금 괜찮다고 말했잖아. 크큭. 아마 깜짝 놀랄 거야?”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대상을 특정하진 않았다.
그러나 핸드폰 너머의 그도 그녀가 누굴 가리켜 말하는 건지 단박에 알아챘다.
-심성균 감독님도 괜찮더라고. 박범준 감독님처럼 거장은 아니더라도. 독립 영화 찾아보니까 실력이랑 감각도 좋고.
“박범준 감독님 차기작이 어떤 장르지?”
-스릴러.
이하영이 들어가기로 했다던 거장, 박범준 감독의 차기작.
그 장르는 스릴러였다.
“음.”
부드러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 자신만만하고 건방지고 반질반질한 얼굴에 깊은 주름을 새겨줄 수 있을 것 같은 직감이 든다.
“이거 될 것 같아?”
-내가 왜 줬겠어. 일단 내 감으론 아주 좋아.
너무 믿음직스러워서, 그 목소리가 꿀처럼 달콤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남들은 감독의 이름과 출연진으로 흥행 여부를 예측하겠지만.
여기에 그보다 더 확실한 예측 근거가 있었다.
김유민의 감.
이 덕분에 뜬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그녀 역시 이 덕분에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거 개봉할 때에 맞춰서 데뷔하는 걸 목표로 잡아보자.
“···확답은 안 하네?”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건 나도 잘 알지. 그래도 실력이 얼마나 올라오느냐에 따라 좀 더 늦어질 수도 있어.
유정아의 콧잔등이 불만스레 찌푸려졌다.
그리고 단언하듯 말했다.
“두고 봐. 개봉하기 전에 어떻게든 그 입에서 데뷔하자는 말 나오게 해줄 테니까.”
각오이자, 다짐이기도 했다.
***
영세한 영화 제작사, ‘SJ 스튜디오’.
제작사 대표인 임형진은 맞은편에 앉은 심성균 감독을 바라봤다.
누가 봐도 걱정이 될 만큼 죽상을 쑤고 있다.
가뜩이나 앙상하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기까지 하다.
“감독님, 유정아 씨한테 시나리오 잘 전달했다면서 왜 그래요?”
심감독은 퀭한 얼굴을 두 손으로 덮으며 한숨 쉬듯 말했다.
“그게 끝이라서 문제죠. 그 자리에서 제가 어필을 잘했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아무것도 못하고 나와버렸어요. 아마 제 건 신경도 안 쓰겠죠. 유명한 감독님들도 시나리오 주면서 엄청 어필하던데.”
“···아니에요. 한 번 기다려보자고요. 며칠 기다렸다가 연락 없으면 제가 컨택해볼게요.”
임대표는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유정아의 캐스팅이 그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이긴 했으나, 그것 말고도 얘기할 건 쌓여 있었으니까.
“그보다, 감독님. 구서연이라고 아시죠? 6번 씬에 ‘기타 잘 치는 사람 치고 춤 잘 추는 사람 없다’는 대사 수정해야 될 것 같아요. 이게 농담이긴 한데, 그래도 그 대사에 구서연이 딱 떠오르다 보니까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구서연이요?”
의아한 목소리.
임대표가 심감독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설마 모르세요?”
“예. 유명합니까?”
“유명하다 뿐이겠어요? 감독님, 아무리 시나리오가 완성됐다고 하더라도 가요계 핫 이슈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야 돼요. 음악 관련 영화 찍는데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셔야죠.”
“···네. 너무 바빴어요. 유정아 캐스팅 때문에 골머리 앓기도 했고.”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임대표.
아무튼 이 문제에 대해서 말했으니, 구서연에 대해서 알아보겠지.
“그리고- 아, 잠시만요. 중요한 전화라.”
“네, 받고 오세요.”
임대표가 전화를 받으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임대표가 예상한 대로, 심감독은 바로 구서연에 대해 찾기 시작했다.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그렇게 핫하다 하니, 하나씩 차근차근 알아보면 될 터.
6번 씬 대사를 수정할지 말지는, 다 알아보고 판단할 문제였다.
구서연이 화제가 된 건 기타 때문이었고, 임대표가 말한 것도 기타였다.
그런데 심감독은 기타를 말했던 걸 깜빡 잊은 상태.
그는 유튜브에서 구서연을 검색하고, 무대 영상 중 아무거나 틀어봤다.
“음.”
이어폰을 꽂지 않아 핸드폰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음악.
심감독은 귀를 활짝 열며 유심히 무대를 눈에 담았다.
그리고.
“···안무는··· 누가 짠 거지?”
시나리오의 한 장면에 저것과 비슷한 느낌의 이미지가 있다.
동태 눈처럼 빛을 잃었던 눈동자가 반짝이는 빛을 머금었고, 메말랐던 입술을 낼름 핥았다.
무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심감독.
그가 다음으로 찾아본 영상은 세로 직캠 영상이었다.
쓸데없는 카메라 워킹이 나오지 않고, 안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볼 수 있는 영상.
심감독이 구서연의 기타 치는 영상을 본 건 임대표가 들어온 뒤의 일.
허나 그의 머릿속에 남아 맴돌고 있는 건 기타가 아닌, 안무였다.
시나리오의 한 장면에 담고자 했던 느낌과 너무 잘 들어맞아서.
***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정실장님이 활짝 웃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ARMnet에서 진행되는 시상식, ‘AMAM’에 관련한 소식이었다.
“콜라보랑 특별 무대요?”
“네. 콜라보는 ‘WE-R’의 ‘So Beautiful’ 커버 무대랍니다. 뭐, 단골손님이죠.”
가요계에 한 획을 그었던 ‘WE-R’의 ‘So Beautiful’.
10년 전에 대히트를 친 곡이다.
곡이 워낙 단순하고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어떤 신인을 시켜도 그럴듯한 무대가 만들어진다.
시상식이든 가요대축제든, 매년 등장하는 이유였다.
별이나 서연이나 누가 해도 퍽 괜찮은 무대가 만들어질 터.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멤버는요?”
“별이랑 서연이랑, 하트하트큐트의 제이제이, 그리고 레모네이드의 최진솔이랑 같이 하게 됐어요.”
은근한 어조로 말하며 씩 웃는 정실장님.
레모네이드를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 즐거움이 깃들었다.
우리와 그들의 관계가 이 바닥에 파다하게 퍼진 덕분.
하트하트큐트는 그렇다 치고.
레모네이드라니.
내 입꼬리도 정실장님처럼 길게 찢어졌다.
“재밌겠는데요?”
“그쵸? 하하! 그리고 특별 무대는 별이랑 서연이 각각 하나씩 받았는데 편곡 좀 해달래요.”
“설마 시간 줄이라는 건 아니겠죠?”
“당연히 아니죠. 하하, 우리 애들이 어떤 애들인데요. 별이는 OST까지 세 개 곡을 한꺼번에 하자고 합쳐달래고, 서연이 곡은 밴드 라이브 퍼포먼스로 받아냈습니다. 세션분들이랑 합 좀 맞춰봐야 될 거예요.”
“오!”
시상식에서 밴드 라이브라니.
아주 귀한 기회가 되리라.
지금 인터넷에서 최고의 화제가 되고 있어서 이런 기회가 만들어진 거지, 시기가 조금만 비껴갔어도 절대 이런 기회는 없었겠지.
‘기회는 좋은데 할 게 태산이네.’
난 해야 할 것들을 머릿속에서 하나씩 세어보았다.
편곡도 맡겨야 하는데, 콜라보 곡의 녹음도 해야 하고, 안무 연습도 해야 한다.
그 와중에 시상식 측의 세션들과 합주를 맞추면서 완벽하게 무대 준비도 해야 한다.
물론 넉넉한 시간 동안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런데.
“얘네들은 꼭 4일 남기고 이러네요.”
싫으면 하지 말라는 거지.
그 귀한 시간, 다른 팀한테 주면 그만이거든.
짜증나도 어쩔 수 없다.
어떻게든 해보는 수밖에.
이를 다 완벽하게 준비한다면.
시상식의 주인공은 우리가 될 거니까.
***
너무 바빴던 3일.
그러나 별이와 서연이가 나보다 훨씬 더 바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조수석에 앉은 채, 고개만 돌려 뒷좌석에 앉아 있는 그녀들을 바라봤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차에 탄 지 5분도 안 돼서 곯아떨어졌다.
새근새근 숨을 쉬며 곤히 자고 있는 별이와 서연이.
이 모습만 보자면 이렇게 귀엽고 천사 같을 수가 없는데.
그보다 기특한 마음이 더 컸다.
뭐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구치곤 했다.
짧은 시간 동안 할 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해하며 열심히 하는 모습만 보여줬다.
차는 부드럽게 나아갔다.
그리고 아주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서연이에겐 처음 오는 곳이겠지만, 나와 별이, 그리고 운전석에 앉은 유진이한테는 익숙한 이곳.
“여길 이렇게 또 오네요.”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묘한 얼굴로 말하는 이유진.
난 그녀를 보며 낮게 웃음을 흘렸다.
“여기가 그리워서 박실장님 대신 오겠다고 한 거야?”
“네!? 선배,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우리 회사 들어오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여긴 다신 오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게. 나도 다신 오고 싶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올라가는 광대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 표정을 본 유진이 또한 귀에 걸릴 듯,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저도 왜 이렇게 좋죠? 약간 그런 거 같아요. 금의환향? 아, 아니다. 토벌! 악당들의 본거지를 토벌하러 온 느낌이죠! 아니, 침략인가?”
고개를 갸웃하며 계속 씰룩거리는 입꼬리.
아주 신이 났나 보다.
나도 그렇고.
“응징 어때?”
“응징도 좋은데요? 아니면 심판?”
“심판도 좋지.”
우리끼리 낄낄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착했어요?”
서연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눈을 뜨기가 그리 힘든 모양이다.
열심히 준비했기 때문이겠지.
지금 이게 토벌이라고 치면, 서연이는 무시무시한 신무기였다.
“어, 다 왔어.”
서연이는 쭈욱 기지개를 켜고는 옆에서 자고 있는 별이의 어깨를 콕콕 찔렀다.
“야, 일어나. 도착했어.”
“···으음.”
“그만 자고 일어나. 도착했다니까?”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린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별이.
익숙한 광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꿈뻑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감돌았다.
역시, 별이도 우리랑 같은 마음인가 보다.
아니, 그녀가 우리의 몇 배는 되겠지.
“···진짜 왔네.”
낮게 중얼거린 별이가 나와 유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유진이도, 그리고 나도.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고.
우리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욱더 짙어졌다.
“다들 그렇게 좋아요?”
우릴 보며 헛웃음을 터뜨린 서연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로서는 우리의 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할 거다.
그런데도 그녀는 우리를 따라 전투력을 드높였다.
“아무튼 다 부셔버리면 되는 거죠?”
그래. 다 부셔버려야지.
난 투지에 불타오르는 그녀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내리자.”
네 명이서 서는 콜라보 커버 무대.
우리는 동선과 합을 맞춰보기 위해 이곳에 왔다.
연말이라면 이렇게 시간을 내는 게 어림도 없었겠지만.
지금은 가능하거든.
시상식은 이거 하나만 준비하고 있으니까.
위풍당당. 의기양양.
우리는 대장군 같은 기세를 끌어올리며 나아갔다.
우리가 있는 곳은 GO엔터테인먼트.
우리 최대 주적의 본거지였다.
< 최대 주적의 본거지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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