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들과 함께하는 연예계 생활-46화 (46/124)

< 근데 넌 작품 안 해? >

시나리오를 벌써 몇 개나 받았는지 모르겠다.

조금 과장하자면, 작은 책장 정도는 가득 찰 정도였다.

사석이나 다른 자리였으면 고사할 건 고사하고, 최소한만 받았을 텐데.

영화제에서 직접 찾아와서 전달하니 하나도 빠짐없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나 벌써 피곤해. 그냥 오빠가 대기실 밖에 서서 받지, 왜 굳이 여기까지 들어오게 하는 거야?”

“그래도 감독님들인데 어떻게 그냥 돌려보내냐. 그분들이 물건 팔러 온 것도 아니고.”

“팔러 온 거 맞지, 어떻게 보면.”

그렇게까지 틀린 말은 아니다만 맞는 말도 아니다.

아무튼 대기실로 들어오는 발길이 뜸해지더니, 이제 완전히 끊겼다.

올 사람은 다 온 모양이다.

문 밖으로 시끄럽게 들려오던 소리들이 조금 옅어졌다.

멀리서 들려오듯 희미한 소리들만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시작하려나 보네. 오래도 기다렸다.

또각또각, 힐 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점점 가까워진다.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동시에 천천히 문이 열렸고.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해 꽂혔다.

청순한 얼굴, 볼륨감 넘치는 몸매가 훤히 드러난 드레스.

남자라면 누구나 헉, 소리가 나올 만한 극강의 비주얼이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는 탄성 대신 소리없는 한숨만이 새어 나왔다.

‘얜 질리지도 않나. 또 왔네.’

빙긋 웃는 얼굴로 손을 올리며 인사하는 그녀.

“정아야, 나 왔어.”

유정아가 등장하기 직전, 전성기를 시작했던 여배우.

유정아가 등장함으로써, 전성기가 한 풀 꺾인 여배우.

그리고, 한때나마 정아와 아주 가까이 지냈던 동갑내기 친구.

“이하영.”

“너 오늘 되게 예쁘게 하고 왔네? 누가 보면 네가 여우주연상 받는 줄 알겠다.”

사근사근한 말투와 친근함이 느껴지는 표정.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심장이 간질거릴 만큼 풋풋하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랑 정아는 알고 있다.

저건 일부러 열 받으라고 속을 긁는 거다.

사이가 괜찮다면 모를까, 정아와 그녀의 관계는 최악이었으니까.

힐끗 정아를 바라봤다.

가소롭다는 듯 옅은 조소가 입가에 맺혀 있었다.

받아치는 대신, 어디 한 번 더 해보라는 듯이 스윽, 팔짱까지 낀다.

“넌 이번에 가수 회사로 옮겼더라? 축하해. 이제 가수로 데뷔하려나 봐?”

정답이다. 어떻게 알았지?

물론 비꼬기 위해 막 던진 말이라는 걸 알지만 내 몸은 정직하게 움찔 떨렸다.

그런데 정아는 그 말을 정면에서 받았음에도 미동도 없다.

아예 대놓고 코웃음을 치며 받아치기까지 한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여우주연상 후보더라? 기사 보니까 유력하다던데? 축하해. 나 없으니까 이젠 여우주연상도 타보겠네. 맨날 후보에만 그쳐서 안타까웠는데.”

목소리와 표정, 눈빛, 태도에서부터 이하영을 깔보고 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

이하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그녀의 시선이 문득 내게로 향했다.

곱게 휘어지는 눈매.

붉고 도톰한 아랫입술 너머로, 흰 치아가 아찔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죠?”

“···네, 뭐.”

“소식은 잘 듣고 있어요. 요즘 엄청 잘나가시던데요?“

그때.

쯧, 짧게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유정아가 몸을 일으켰다.

“야.”

냉기를 풀풀 풍기는 목소리.

“어?”

“꺼져.”

그녀의 눈동자는 고요하게 끓고 있었다.

이하영은 당황한 척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들려?”

이하영의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진심에서 비롯된, 굉장히 만족스러운 함박웃음이었다.

“여우주연상 때 내가 타게 되면 잘 부탁할게. 아! 그리고 나 박범준 감독님 차기작에 들어가기로 했어. 내년엔 너랑 선의의 경쟁했으면 좋겠다.”

산뜻한 목소리로 거장 박범준의 이름을 언급하고는, 우아하게 몸을 돌려 발을 움직였다.

또각- 또각- 또각.

세 발자국을 걷고 슬쩍 고개를 돌리는 이하영.

기어코 한마디 말을 더 내뱉었다.

“근데 넌 작품 안 해?”

***

수심이 깊다. 물에 잠긴 듯 압박감이 느껴지는 차 안.

정아는 팔짱을 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하영이 지나간 뒤, 여우주연상을 시상하러 갈 때까지도 이랬는데, 그게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제 손으로 이하영에게 여우주연상을 전달해줬기에 더욱 심기가 불편한 것이리라.

묵묵히 운전만 하던 황실장님은 이런 공기가 영 답답했는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답답하고 불편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

그런데 이런 그녀에게는 나조차 쉽사리 농담을 건넬 수 없었다.

이래서 이하영의 얼굴만 보면 반사적으로 한숨이 내쉬어지는 거다.

그녀가 한 번 모습을 드러내면 내가 너무 힘들어지니까.

‘아쉽네.’

예상했던 대로 최이사와 박수한 대표를 마주칠 수는 있었다.

단순히 마주친 것만으로도 최이사의 표정이 썩어들어가던데, 정아가 이런 상태라서 나는 그들을 그대로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만나면 제대로 복장을 뒤집어 놓으려 했는데 아쉽게 됐지.

이제 가요 시상식도 얼마 안 남았으니, 그때 오늘의 몫까지 더해서 골려줘야겠다.

난 손을 뻗어, 시나리오를 집어들었다.

오늘 얻은 거라곤 책장 하나를 채울 만큼의 시나리오들밖에 없었다.

차에 오르기 전.

맨 뒷좌석에 가득 쌓아 놓은 시나리오들 중,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몇 개 집어 들고 조수석에 올라탔었다.

과연 이중에 몇 개나 영화로 만들어질까?

내 옆에 놓인 시나리오들의 수보다는 더 많을 테지만.

흥행하는 것은 이보다 훨씬 적을 게 분명했다.

‘시간이나 때워야지.’

첫 장을 펼쳤다.

그래도 손에 들어온 이상 안 읽을 수는 없으니까.

***

사락. 사락.

종이 넘기는 소리가 그리 느리지 않은 속도로 들려왔다.

조수석에 앉은 김유민이 시나리오를 읽는 소리.

유정아는 지속적으로 들리는 그 소리를 배경 삼아 들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까맣게 썬팅된 차창 너머로 사람들이 어울려다니고 있다.

친구, 연인, 가족.

이렇게 길거리를 보다 보면 모두가 다 행복하게 어울려 지내는 것만 같다.

‘너 혹시 이거 봤어? 어? 왜 안 봐. 그래도 한 번 봐봐. 안 좋은 내용이라고 해서 다 무시하고 외면하면 안 돼. 악플도 피드백이 될 수 있는 거야.’

‘이건 봤어? 넌 너무 댓글에 연연 안 하는 거 아냐? 아니면··· 아닌 척하는 거야?’

안 본다고 말하는데도 어떻게든 악플을 눈에 새겨넣으려던 친구.

의심이 일긴 했으나, 고개를 털어 떨쳐버렸었다.

그런데.

‘하영아! 넌 배알도 안 꼴리니? 그런 싸가지없는 애랑 왜 다녀?’

‘에이, 언니. 저라고 좋아서 다니는 줄 아세요?’

‘그럼? 약점이라도 잡는 거야? 유정아, 뭐 약이라도 해?’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조금씩 멘탈 좀 갉아먹으려고요. 근데 쉽지 않네요.’

우연히 들은 뒷담화가 모든 걸 결정지어버렸다.

역시 ‘친구‘같은 달콤한 관계는 싸가지없는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 와선 티끌만큼도 아프지 않은 기억.

유정아는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담담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사락, 사락.

일정하게 귀를 간질이던 소리가 뚝 그쳤다.

앞을 바라보니, 저걸 다 읽었는지 시나리오가 뒤집힌 채 쌓여 있다.

다 별로였나 보다. 반도 안 읽었겠지.

정아의 시선이 다시 뒤를 향했다.

양손을 뻗어 무겁고 두툼한 종이뭉치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말없이 앞으로 넘겼다.

“···고마워.”

“쉬지 말고 일하라고 주는 거야. 더 해, 더. 날 위해서.”

“하하. 알았어.”

웃음 소리를 흘리는 김유민.

정아는 그를 따라 옅게 미소 지었다.

사락, 사락, 다시 듣기 좋은 소리가 들려오길 얼마간.

파라락- 지금까지 들려오지 않았던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손에 시나리오의 첫 장이 펼쳐져 있었다.

방금 전의 그 소리는 아마 시나리오를 다시 앞으로 넘기는 소리였을 터.

사락··· 사락···. 종이 넘기는 소리가 느릿느릿 이어졌다.

깊은 주름이 잡힌 미간.

자세가 구부정하게 앞으로 쏠리고, 시나리오에 얼굴을 파묻을 듯 가까이 한다.

“···.”

시나리오 속으로 빨려들어갈 듯 점점 또렷하게 빛나는 눈동자.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정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술을 비죽였다.

“으휴···. 이 모습 또 왜 안 나오나 했네. 참 오래도 버텼다, 오래도 버텼어.”

귀에 들리지도 않는지 미동도 없다.

정아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고.

그녀의 눈매는 좀 전보다 더 짙은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또 얼마나 지났을까.

익숙한 풍경이 차창밖을 몇 번이나 스쳐 지나갔다.

이내 차가 멈추고, 운전석에 앉은 황실장님이 조수석에 앉은 김유민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유정아는 황급히 입을 열어 나지막이 말했다.

“굳이 그러지 마세요. 저 갈게요.”

황실장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문을 열어주려 버튼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때.

김유민이 고개를 번쩍 들며 외쳤다.

“정아야!”

“아! 깜짝이야! 놀랐잖아!”

제자리에서 펄떡거린 게 민망해 버럭 소리쳤다.

그의 손에 쥐어진 시나리오는 맨 뒷장이 올라와 있었다.

타이밍 좋게 다 읽은 모양.

소리친 건 깔끔하게 무시한 김유민이 씨익, 웃으며 몸을 완전히 뒤로 틀었다.

맨 뒷장이라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시나리오를 그대로 건넨다.

“이거 한 번 볼래?”

“···.”

이를 받지 않고 그의 눈만 뚫어져라 응시하는 정아.

그가 덧붙여 말했다.

“알아. 가수로 데뷔하기 전까지 웬만하면 작품 안 할 거라고 한 거 안 까먹었어. 근데 그래도 한 번 읽어봐. 이유가 있으니까.”

유정아는 천천히 손을 뻗어 종이 뭉치를 받았고.

이를 뒤집어 가제를 봤다.

“’스타는 다시 무대로’?”

그녀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

아침 일찍 사무실에 들어오는 정실장.

이미 직원들 중 반 이상이 출근해서 그런지 북적북적했다.

정실장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꽤 친해진 홍보팀 직원의 자리로 향했다.

“이야. 아무리 근무 시간 아니라도 그렇지, 출근하자마자 딴짓이네.”

“음? 아, 정실장님 오셨어요?”

정실장은 직원이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또 NBA야?”

“네. 컨퍼런스 준결승 끝나서요. 지금 한창 재밌을 때라서 시도 때도 없이 보게 되네요. 하하.”

경기를 보는 것도 아니고, 커뮤니티에서 떠들어대는 게 그렇게 재밌다고 한다.

“농구가 재밌어? 내가 스포츠를 좋아해봤어야 알지.”

“실장님도 한 번 봐보세요. 지금 컨퍼런스 결승 올라온 네 팀도 2강 1중 1약인데, 엄청 재밌어요.”

“얼핏 듣기론 농구가 제일 반전이 없는 스포츠라던데.”

“오! 아시네요? 강팀이 강하고 약팀이 약하죠. 아마 1중이랑 1약 떨어지고 동서부 강팀끼리 파이널 치를 거예요.”

“승부를 다 아는데 그게 재밌어?”

“엄청 재밌다니까요.”

정실장은 스포츠 잡담이 재밌다기보단, 그냥 출근 전 잡담이 재밌었다.

사무실에 들어오긴 했지만, 자리엔 안 앉았으니 정실장의 논리로는 아직 출근한 게 아니었다.

허나 그런 시간도 계속될 순 없었다.

부산스럽던 사무실도 시간이 지나며 점차 조용해지고.

정실장도 자리에 앉아 출근이 시작됐다.

지이잉- 지이잉-

마치 알람이라도 울리듯, 정실장은 핸드폰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 자식들이 우리 사무실에 CCTV라도 달아놨나. 내가 이래서 출근을 미루는 거야, 이래서.”

한숨 쉰 정실장은 전화를 받았다.

“예, 피디님. 저 WE엔터로 옮긴 거 아시죠?”

-알고 전화한 거예요. 아무튼 이번에 합동 무대 한 번 하셔야죠?

“오! 합동 무대요?”

정실장의 눈빛이 바뀌었다.

시상식의 합동 무대.

팬들끼리 비교질이 심하기 때문에, 인기가 절실한 경우가 아니면 웬만해선 피하는 게 좋지만.

그건 GO엔터에 있을 때의 얘기.

지금은 어느 누구와 붙어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비록 반쯤은 립싱크로 진행하겠지만 그걸로도 클라스 차이는 나는 법이니까.

“멤버가 어떻게 됩니까?”

-다 1년 내에 데뷔한 신인으로 할 거라서요. 김별 씨, 구서연 씨, ‘하트하트큐트’의 제이제이 씨, 그리고 레모네이드의 최진솔 씨예요. 이거 하실 수 있죠? 곡이랑 시간은···.

피디의 말을 경청하는 정실장의 입꼬리가 쭈욱 찢어졌다.

전화로 언급한 순서대로 2강, 1중, 1약.

승부가 빤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무지하게 재밌을 것 같았다.

NBA가 이래서 인기가 많은 건가.

“당연히 해야죠. 아! 근데··· 서연이나 별이 무대가 설마 그것만 있는 건 아니겠죠? 피디님, 둘 다 특별 무대 정도는 빵빵하게-”

정실장은 통화를 이어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앉아 있는 건 영 별로였다.

< 근데 넌 작품 안 해?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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