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들과 함께하는 연예계 생활-44화 (44/124)

< 라인업 실화냐?(무료 마지막) >

“안녕하세요, 선배님! 신인 가수 구서연입니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허리를 꾸벅 숙이는 서연이.

커피를 들고 있던 김석희는 반갑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 사람은 언제 봐도 온화하단 말이야?

서연을 보는 표정에서도 친근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건 아마 구태성 선생님 때문이겠지.

“그래, 반가워. 네가 태성 선배 딸이구나. 선배는 잘 계셔?”

“네! 그리고···.”

서연은 슬쩍 그의 눈치를 보다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빠가 선배님 안 그런 척해도 엄청 기준 높다고, 긴장해야 할 거라고 했어요.”

“하하하! 세상에서 제일 까다로우신 분이 그런 소리를 하네?”

“헤헤.”

헤실헤실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서연.

김석희는 내게로 시선을 옮기며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봬요. 잘 지내셨죠?”

“그럼요. 요새 넘칠 정도로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 덕분이에요.”

“에이. 너무 겸손하시다.”

우리 셋은 잠시 잡담을 이어가다, 그가 화제를 바꾸었다.

“합주도 엄청 잘 됐다고 들었어요. 칭찬이 자자하던데요?”

‘김석희의 아메리카노’의 세션 분들과 서연이는 촬영 전에 만나서 합주 연습을 가졌었다.

오늘 무대에서는 댄스가 아니라,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로 했으니까.

이 바닥에서 내로라하는 초일류의 세션들.

그들 모두 구태성 선생님과 인연이 있었기에, 다들 그녀를 제 딸처럼 매우 친절하고 살갑게 맞이해줬었다.

‘역시 레전드는 레전드야.’

레전드가 괜히 레전드가 아니다.

인맥이 이렇게 골고루 퍼져 있으니.

그런데 합주에 들어갔을 때.

그들의 분위기는 180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별이의 정규앨범 관련 회의 때문에 난 끝까지 보진 못했으나.

분위기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아주 후끈후끈했지.

난 그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때 전 연주로 싸우는 줄 알았어요. 너무 뜨겁고 치열해서요.”

“하하! 합주가 원래 그런 맛으로 하는 거죠. 그리고 워낙 보통 분들이 아니잖아요. 다들 한가락 하시는 분들이니까. 어쩌면 서연이한테 실력 뽐내려고 그런 걸 수도 있어요. 참 유치한 양반들이죠?”

유쾌한 사람이 더 유쾌하게 보인다.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 대기실을 나올 때까지 우리는 시종일관 웃음과 함께했다.

역시 실력도 좋은데 인맥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라니까?

“서연아, 오늘 잘할 수 있지? 이런 무대 보여줄 수 있는 기회 얼마 없어.”

우리의 대기실로 들어서던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건 괜찮은데, 표정 관리가 좀 힘들어요. 이거 적나라하게 나갈 거 아니에요. 녹화한 거 보니까 얼굴이 너무 이상하게 망가져가지고···.”

“원래 천재들이 그러잖아. 심취한 거지. 사람들도 좋게 볼 거야.”

“아니에요. 생초보도 똑같이 그래요. 아무튼 얼굴 이상할 거 같은데···. 이게 쉽게 안 고쳐지더라고요.”

별 걱정을 다 한다. 무대는 자신 있다는 말이겠지.

뭐, 악의적인 캡쳐가 나올 수도 있으나, 그런 걸 신경 쓰면 아무것도 못 한다.

난 그녀가 걱정 없이 제 실력을 모두 뽐낼 수 있게, 걱정을 덜어주기로 했다.

“난 오히려 섹시하던데.”

“···네?”

동그랗게 뜬 눈이 나를 향한다.

대기실로 들어선 발이 우뚝 멈춰 섰다.

난 낯짝도 두껍게,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넌 평소에 너무 귀엽잖아. 그런데 그렇게 연주에 심취한 모습 보니까 왠지 섹시하게 보이더라고.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건가?”

서연이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

“오늘은 정말 특별한 무대가 준비됐어요. 여러분 이제 이런 멘트 식상하시죠? 뭐 맨날 특별하다 특별하다 해서 이제 전혀 기대도 안 될 거예요. ‘쟤가 또 똑같은 소리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신 사람 분명히 있을 겁니다. 솔직히 양심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신 분 손 들어보세요.”

웃음이 흐르며 대부분의 관객들의 손이 올라갔다.

김석희의 입에서 큭큭대는 웃음이 나오자, 관객들의 웃음 소리가 더욱 커졌다.

나 또한 그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에겐 정말 고마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별이의 성공에 발판이 되었던 무대, 그리고 이번엔 서연이까지.

언젠가 보답해야지.

나중에 더 큰 슈퍼스타가 되어도 여기서 부르면 어떻게든 나와야겠다.

아, 다른 프로그램에서 불러도 저분이 부르면 무조건 나가야지.

설령 망해가는 프로그램이라도.

“여러분, 그런데 이번엔 진짜예요. 진짜 진짜 진짜로 특별한 무대입니다. 아마 이런 건 태어나서 처음 보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저기 뒤에 보이시죠? 우리 베이시스트 형님. 벌써 음흉하게 미소 짓고 있잖아요.”

관객들의 기대감을 높이고, 분위기를 유연하게 풀어준다.

역시 오랫동안 이 프로를 맡은 이유가 다 있다니까.

그는 적당히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는지, 본격적으로 소개의 말을 꺼냈다.

“자! 그럼 무대 보시겠습니다. 나와주세요.”

심호흡을 하며 목을 둥글게 둥글게 돌리던 서연.

나와 눈을 마주친 그녀의 얼굴엔 비장함이 떠올라 있었다.

“잘해. 파이팅.”

“네!”

정적 속에서 무대 위로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 그녀.

중앙에 서자, 얼굴을 알아본 몇몇이 탄성을 흘렸다.

그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한 줌 정도.

하지만 이 무대로 인해 모든 게 바뀔 것이다.

가뜩이나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던 그녀의 등에 날개가 달리게 되겠지.

딱. 딱. 딱. 딱.

딱딱한 드럼 스틱이 부딪히는 소리를 시작으로, 서연이의 손이 기타를 거침없이 튕기며 소리가 퍼졌다.

그녀의 입꼬리는 씨익, 말려 올라가 있었다.

***

녹화가 끝난 뒤, 다음 스케줄로 이동하는 김석희.

그의 입술은 과묵하게 닫혀 있었고, 눈은 멍하니 풀려 있었다.

그리던 어느 순간.

그의 입에서 힘 빠진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더 고민할 것도 없어.”

그는 바로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수신인은 <일도 잘하는 밴드>의 메인 PD.

신호음은 두 번이 울리기도 전에 끊어졌다.

-예, 선배님.

“내가 보장할게. 구서연 픽스하자. 기타리스트 겸 보컬로.”

-그렇게 잘해요? 매력 있고요? 성격은 어때요?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흥미와 궁금증이 가득하다.

“어. 그렇게 잘해. 그렇게 매력 있고, 성격도 좋은 것 같아. 싹싹하고.”

-기타리스트 겸 보컬이면, 김별을 빼자고요? 아직 섭외 안 하긴 했는데···. 근데 기타랑 보컬을 한 명으로 해버리면 멤버가 줄어들어서 별로 안 좋아요.

“김별이랑 구서연 둘이서 번갈아서 보컬하면 되지. 그림도 다양하고 좋겠구만.”

-으음.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선배님만 믿고 바로 김별이랑 구서연 미팅 한 번 잡아볼게요.

“그래. 정말 후회 없을 거야.”

***

음악으로 전국의 학교를 휩쓸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예능으로 안방을 휩쓸고 있는 이종락.

오늘도 야외 촬영장에서 언제나와 같이 활약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처럼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머릿속 한 켠에 구서연의 기타 연주가 둥둥 떠다니고 있어서.

녹화 중에도 팔뚝이 물고기처럼 펄떡 튀어오르기도 했다.

“뭐야 갑자기.”

“음? 원래 천재들은 가끔 이래. 드러머의 본능이지. 나 몰라? 77Max의 천재 드러머.”

“그러지 말고 병원을 가.”

“하긴 형이 천재를 어떻게 이해하겠어. 천재가 돼봤어야 알지.”

그래도 어찌어찌 녹화를 잘 끝마쳤다.

차에 올라탄 이종락은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감았다.

“종락아. 방금 섭외 전화 왔는데 깠어.”

차에 시동을 건 매니저가 말했지만 이종락은 눈을 뜨지 않았다.

졸음은 오지 않는데 눈꺼풀이 무거워서.

“뭐였는데?”

“음악 예능.”

“아, 잘했어.”

음악 예능은 더 설명을 들을 것도 없다.

항상 커트하라고 말해뒀으니까.

“쩝. 그래도 한 번쯤은 출연해도 되지 않겠냐? 팬들이 너 음악하는 거 엄청 보고 싶어 하는데.”

“됐어. 안 한다니까.”

주위 사람들은 이를 항상 안타까워했으나, 이종락의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매니저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래도 이번 프로그램은 구성도 괜찮던데. 멤버도 좋고.”

“···.”

“김석희 씨도 있고 김별이랑 그 뭐야. 구서연이랬나?”

“···뭐!?”

무겁게 감겨 있던 눈은 번쩍 떠졌고.

좌석을 한껏 젖혀 누워있다시피 했던 몸은 벌떡 일으켜졌다.

“깜짝이야! 야 씨! 사고날 뻔했잖아!”

“미안. 근데 뭐라고? 누구라고? 김별? 구서연?”

목소리는 여전히 컸고, 말은 빨라졌다.

매니저는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둘 다 섭외했다는데?”

이종락은 득달같이 말을 받았다.

“바로 한다고 연락해! 다른 사람 섭외하기 전에 빨리!”

음악 예능 섭외 0순위, 음악 예능 출연 횟수 0번의 이종락.

그의 얼굴은 초조함과 흥분으로 물들었고.

심장은 펄떡펄떡 뛰기 시작했다.

***

금요일 밤 11시 20분.

퇴근 후 겨우 집에 돌아온 34살의 직장인 장진영.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죽겠네, 진짜.”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씻기도, 옷을 갈아입기도 힘들 정도.

그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곤,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친구들은 금요일 밤을 불태우기에 바쁘다는데.

자신은 일이 언제 끝날지 몰라 약속조차 잡을 수도 없었다.

설령 지금 부르는 사람이 있더라도 체력이 모자라서 나가지도 못 하겠지.

“취미라도 가져볼까···.”

출퇴근 시간에 음악 감상을 하는 것 빼고는, 취미도 사라진지 오래.

하루의 낙이라곤 이렇게 퇴근 후에 먹는 맥주가 전부였다.

장진영은 자신의 비참한 신세에 혀를 차며 TV를 틀었다.

“에라이. 볼 것도 없네.”

삶이 팍팍해서 그런지, 감성도 팍팍해지는 느낌이다.

더구나 남들 잘 사는 예능 따위는 꼴도 보기 싫었다.

“저런 거 보면 배만 아프지.”

그렇다고 다른 데 관심이 끌리지도 않는다.

영화도, 드라마도, 스포츠까지도.

탁! 맥주 캔을 따고 술을 들이켜며 채널을 돌리는데.

‘김석희의 아메리카노’가 나오고 나서야 손이 멈추었다.

“그래, 음악이나 듣자.”

-오늘은 정말 특별한 무대가 준비됐어요.

“뭐 맨날 특별하대.”

-여러분 이제 이런 멘트 식상하시죠?

“음?”

-뭐 맨날 특별하다 특별하다 해서 이제 전혀 기대도 안 될 거예요. ‘쟤가 또 똑같은 소리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신 사람 분명히 있을 겁니다. 솔직히 양심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신 분 손 들어보세요.

“큭큭. 재밌네.”

역시 김석희다. 호감 가는 연예인.

그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조금씩 흥미가 올라온다.

대체 얼마나 특별하길래 이러는 건지.

-자! 그럼 무대 보시겠습니다. 나와주세요.

그리고 등장한 것은 순둥순둥하게 생긴 미소녀였다.

특이하다면 일렉 기타를 메고 있다는 것.

허나, 기대감이 식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특별은 개뿔. 기타를 쳐봤자 얼마나 친다고.”

중고등학교를 ‘77Max’의 전성기와 함께한 그로서는 콧방귀만 나올 뿐이었다.

그러나 굳이 채널을 돌리지는 않았다.

따로 보고 싶은 채널도 없는 데다가.

‘귀여우니까.’

귀여우면 된 거지.

장진영은 다시 맥주를 홀짝이며 TV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어?”

기타를 튕기기 시작한지 몇 초 지나지 않아, 그의 입에서 당황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TV의 볼륨을 키웠고, 두 눈을 크게 뜨며 귀를 쫑긋 기울였다.

신들린 듯 기타를 연주하는 TV속 미소녀.

만약 연주가 받쳐주지 않았다면 콧방귀를 뀌며 천재 코스프레를 한다고 여겼겠지만.

귀가 제대로 달렸다면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듣는 귀가 어지간히 높은 그의 귀에도 경악스러운 수준으로 들렸으니까.

-안녕하세요! 구서연입니다!

무대가 끝나고 배꼽인사를 하며 활짝 웃는 그녀.

몸이 떨릴 정도로 전율이 흘렀다.

“내가 뭘 본 거지···?”

넋 놓고 인터뷰를 보던 그는 구서연이 퇴장하자마자 TV를 꺼버렸다.

핸드폰으로 황급히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구서연을 검색했다.

그리고 거기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게 만들 기사들이 올라와 있었다.

[HTBC의 예능 신작! <일도 잘하는 밴드>의 초호화 출연진!]

[77Max 이종락, 드디어 음악 예능 출연 확정! 김석희, 김별, 구서연, 김성혁과 호흡 맞춘다.]

[구서연, 미친 기타로 재차 실력 뽐내다. <일도 잘하는 밴드>에서 그녀의 역할은?]

[일+음악 <일도 잘하는 밴드> 출연진 공개. 프로그램의 컨셉은?]

“···라인업 실화냐?”

아까 전까지만 해도 축 처져 있었건만.

지금 그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기대감에 기분 좋은 활력이 도는 기분이었다.

< 라인업 실화냐?(무료 마지막)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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