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게 가수지 >
광고대행사, 행사대행사, 기자, 피디, 영화감독, 제작사, 잡지사 등등.
나를 찾는 곳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아닌 별이와 정아를 찾는 곳이다.
그런데 별이라면 몰라도 정아는 지금 다른 스케줄을 고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솔로 아이돌을 준비하고 있는데 작품은 무슨.
웬만하면 데뷔하기 전까진 연기를 시키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그런데 정아가 아이돌 준비를 한다고 남들에게 선뜻 밝힐 수도 없으니, 작품 몇 개는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작품을 받지 않았다가 수상하게 여긴 누군가가 파보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러니 몇 개는 받아서 심사숙고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정아의 데뷔는 결과물과 함께 갑자기,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이 내리꽂히는 것처럼 난데없이 깜짝 등장해야 한다.
그래야 더 임팩트 있잖아?
미리 알려져봤자 지레짐작하며 안 좋은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고.
주차장으로 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살포시 내려놓은 가방에는 시나리오 한 개가 들어있었고, 계약서 한 장도 들어있었다.
혹시 몰라 시나리오를 보긴 했는데, 별로더라.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한 건 계약서였다.
별이의 라면 CF 계약서.
‘1위 몸값까지 쳐주네.’
흡족스러운 결과였다.
지금 차트 순위는 2위.
어느덧 1위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고, 1위를 차지하는 건 시간 문제가 되었다.
모두 그 요리 예능 덕분이다. 그거 하나로 인지도가 또 한 번 껑충 올랐거든.
그래서 계약서를 조금 나중에 작성하려 했는데, 저쪽에서 알아서 몸값을 올려주었다.
의도를 알고 있으니 괜히 시간 끌지 말자는 것일 터. 쿨거래도 이런 쿨거래가 없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시동을 걸고, 막 출발하려 할 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유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유진이의 이름이 떠있는 화면 가장자리에 보이는 시간은 오후 2시 정각.
2시 1분도 아니고 2분도 아니고, 00분, 정각이다.
‘설마?’
통화 수신을 드래그하는 검지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어, 유진아.”
-선배, 미팅 끝났어요?
들뜬 기분을 일부러 억누르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난 얼른 홈화면으로 가서 바로 스트리밍 어플을 켰다.
“어, 지금 막 끝났지.”
-아, 언제쯤 오세···.
유진이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듯 희미해졌다.
온 신경은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탐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스트리밍 어플 홈에 보이는 차트.
‘1’이라고 써있는 최상단의 자리에는, 익숙한 앨범 아트와 익숙한 곡 제목이 올라와 있었다.
[ 1. Hang Out – 김별 ]
“1위다.”
드라마 OST가 아니다.
온전히 별이의 이름으로 이루어낸 1위.
가슴이 먹먹해지고, 카타르시스가 등골을 타고 목줄기를 향해 내달렸다.
성취감이 장난이 아니다.
-네, 선배. 우리 별이가 1위 했어요.
미소를 짓고 있는 듯, 유진이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머금어져 있었다.
GO엔터테인먼트가 버린 별이가 드디어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지금까지의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최이사와의 갈등, 회사에서의 안 좋은 기억들, 그리고 별이를 처음 만나고 집으로 가서 고봉밥을 먹었던 일, 별이에게 처음으로 연습실을 보여줄 때, 서연이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가 지나온 길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해 달려왔고.
우리가 옳은 선택을 했음이 마침내 완벽하게 증명되었다.
가슴이 벅차올라 숨이 크게 들이쉬어졌다.
난 얼굴에 큼지막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오늘 우리 회식이다. 다 모이라고 해.”
***
“세상에 이런 쪼잔한 사장이 어디 있어?”
지글지글 돼지 갈비가 구워지는 소리와 함께, 불만 섞인 정아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차트 1위를 했는데 원룸촌 갈비집이 말이 돼?”
같은 테이블에 앉은 유진이와 별이, 그리고 서연이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입맛을 다시며 갈비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난 눈짓으로 그녀들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원룸촌이든 강남이든 장소가 뭐가 중요해? 고기가 중요하지. 고기는 다 같은 곳에서 오는 거야.”
“달라! 다 달라! 내가 제대로 강의 한 번 해줘?”
막상 입에 집어넣기 시작하면 누구보다 맛있게 먹을 거면서 또 저런다.
사실 나도 좋은 곳에서 거하게 파티를 하고 싶긴 한데, 그런 데 가면 괜히 시선만 끌린다.
번거롭고 귀찮다.
우리끼리 즐기기에 이 한적한 원룸촌 만한 곳이 없지.
연습실이든 우리 집이든 걸어서 가면 되니 운전을 안 해도 되고.
운전을 할 줄 아는 나랑 유진이도 술 한잔 해야 하니, 어떻게 보면 여기가 최고라고 할 수 있지.
“이제 먹어도 되겠다.”
고기를 뒤집던 집게를 내려놓고 하는 말에 정아도 젓가락을 들었다.
저거 봐라. 다른 손엔 이미 상추가 올려져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1위 축하해, 별아.”
“축하해!”
우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고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역시 고기는 언제나 옳다.
“서연아, 가사 나왔어. 이제 가사로 연습하면서 녹음 준비하자.”
보통 직장인 같으면 이럴 때 일 얘기를 하는 걸 싫어하겠지만.
서연이의 얼굴엔 반가운 소식이라는 듯, 미소만 지어졌다.
“진짜요? 가사 보내주세요.”
난 핸드폰으로 그녀에게 가사를 공유해주며 유진이에게 말했다.
“유진아, 혹시 서연이 안무 만들어줄 수 있어? 연습해야 되면 굳이 안 해도 돼. 안무가한테 맡기면 되니까.”
별이와 서연이의 눈이 일제히 내게로 향했다.
유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아뇨. 제가 만들어볼게요. 그리고 이것도 연습이라면 연습이죠.”
날 향했던 별이와 서연이의 눈이 유진이게로 옮겨졌다.
그녀들의 얼굴 위에 물음표가 떠올라 있는 듯했다.
다만, 정아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연습이요?”
서연이 나와 유진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말에, 난 유진을 바라봤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유진이도 우리 회사 연습생이야. 사람 구하는 대로 매니저는 그만두기로 했어.”
“···!”
“헉!”
정아만이 태연했다.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같이 연습할 때 들었나?
유진은 소주잔을 천천히 기울이며 마셨다.
누가 보면 영화 찍는 줄 알겠다.
미녀 배우가 이렇게 조금씩 마시는 씬이 꼭 하나씩은 있던데.
그녀는 비어진 술잔을 테이블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눈매를 짙게 휘었다.
“그렇게 됐어. 놀랐지? 이제 데뷔하면 너희 후배 되는 거야.”
“···축하드리긴 하는데···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된 거예요?”
서연의 물음에 나도 유진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이유를 못 들었네.
들으려 하긴 했는데.
그런데, 대답은 정아에게서 나왔다.
어쩌고저쩌고 했으면서 또 상추 위에 탑을 쌓아 올리고 있다.
“하고 싶다잖아. 하고 싶은 데 이유 있어? 보통 매니저들이 연예인 수익 보면서 현타 온다는데, 얘는 그런 건 아니더라고. 근본이 있잖아. 댄스.”
그 빈약한 설명에 유진이 덧붙였다.
“사람들이 내 무대 봐주면 좋을 것 같아서.”
“하긴··· 언니가 댄스 괴물이긴 하지.”
“멋있겠다. 언니가 솔로로 무대 서면··· 따라올 사람 없을 것 같아요.”
머릿속으로 뭘 그리는 건지, 시선을 허공에 두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애들.
난 그녀들이 그리는 멋진 상상에 한 가지 설정을 더 추가해줬다.
“심지어 유진이 노래도 잘해.”
“···.”
진짜냐는 듯, 별이와 서연이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묻는 가운데.
정아가 쌈을 막 입에 넣으려다가 뺐다.
미간에 얕은 주름을 지으며 유진을 째려본다.
“진짜야?”
“전 잘 모르겠는데, 선배가 잘한다니까 그냥 믿는 거죠.”
화살은 내게로 향했다.
“진짜야?”
난 고개를 끄덕였고.
정아는 쌈을 먹는 대신 소주를 쭈욱 들이켜며 말했다.
“난 세상에서 천재들이 제일 싫어. 양심도 없지.”
“···.”
“···.”
“···.”
어이가 없었다.
“뭐라고?”
“···그러네. 나도 천재였지?”
그녀의 입가에 거만한 미소가 걸렸다.
회식 자리는 길게 이어졌고.
우리는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때.
창밖으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창가 자리라서, 빗방울이 바닥에 튀는 장면이 또렷하게 보였다.
많이 오지는 않는데, 홍대 버스킹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처음엔 이렇게 왔었다. 하늘을 보니, 그때와 같은 구름이다.
하늘이 어둡고 두툼한 구름으로 빽빽하다.
“제가 편의점 가서 우산 사올게요.”
선빵필승이라는 듯, 벌떡 일어나 가게를 나서려는 유진.
별이는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연습실이랑 사장님네 집에도 우산 엄청 많아요. 그냥 카페 가서 그칠 때까지 기다려요. 얼마 안 올 것 같은데.”
모두가 별이를 쳐다봤다.
그리고 3초 뒤, 모두가 동시에 입을 열며 제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별로 안 오니까 그냥 맞으면서 가요. 어차피 가까운데.”
“편의점 가서 사온다니까? 여기 바로 옆이야. 문 열면 10초도 안 걸려!”
“그냥 택시 타고 가! 그때도 내 말이 맞았잖아!”
“카페 가서 기다리면 되죠. 느긋하게 커피도 마시면서.”
내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이럴 땐 알아서 결론이 내려지는 게 답이더라.
결국 이렇게 시간 끌다가 또 억수로 쏟아지겠지?
그래도 오늘은 택시가 잡힐 것이다.
***
팬미팅 리허설이 시작되기 직전.
새로 뽑은 세 명의 매니저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심히 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스탭들이 바쁘지, 지금은 별로 할 것도 없는데.
매니저를 뽑는 과정은 꽤 수월했다.
실장급 매니저들을 뽑았으니, 정보를 찾기도 쉬웠거든.
연락 몇 통이면 그들에 대한 소문과 평판을 다 들을 수 있었다.
면접을 보러 온 사람들 중 이미 안면이 있는 사람들도 꽤 됐고.
여기 모인 실장급 매니저들은 일 잘하고 깨끗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들.
모두 우리 회사의 비전이 좋다고 판단해서 온 것일 거다.
판단력도 좋지.
앞으로 매니지먼트팀의 주축이 될 사람들.
역시 경력직이라 그런지 가르칠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사장님, 지금 리허설 시작한답니다.”
팬들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팬미팅.
차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덕분에, 오늘 최고의 분위기에서 마주할 수 있을 터.
황실장님의 말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세팅을 끝낸 별이의 모습은 오늘도 역시 완벽했다.
너무 예뻐서, 사인할 때 가까이에서 본 팬들이 기절할지도 모르겠네.
그런데 리허설을 진행한 뒤.
내 생각은 일부 바뀌어버렸다.
“저 오늘 컨디션 좋은 것 같아요.”
그녀의 컨디션이 좋았다.
이러다간 사인을 하기 전에, 노래만 듣고도 기절할 수도 있겠다.
‘어떻게 노래를 이렇게 하지?’
매일 보는 나조차 경탄할 정도였다.
별이는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만, 새로 뽑은 매니저들의 반응은 달랐다.
그들은 ‘역시 회사를 옮긴 건 신의 한 수였다’라고 생각하는 듯, 환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의 생각에 적극 공감하는 바다.
우리 별이가 인성도 그렇고 뭐 하나 빠지는 게 있어야지.
더러운 GO엔터를 때려치고, 별이를 잡은 건 내게 신의 한 수였다.
***
팬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축제.
아니, 축제보다 더했다.
그럴 만도 했다. 공중파 요리 예능에서 먹는 모습만으로 화제가 되는 게 말이나 되는가.
꿀노잼. 먹는 것만 보여서 재미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눈이 너무 즐거워서 재미 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이 너무 예쁘고 시선을 뗄 수 없어서.
불 같이 화르륵 타오르는 화제는 아닐 지언정, 은은하게 퍼지고 퍼진 덕분에 차트도 서서히 올라가 마침내 1위를 차지해버렸다.
물론 곡이 좋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분위기는 최고조였는데.
무엇보다.
‘첫 번째 팬미팅이니까.’
황실장은 팬들의 표정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중소형 기획사에서 경력을 쌓고 대형 기획사로 옮길 생각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규모가 더 작은 회사로 옮기게 됐다.
그런데도 전혀 후회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만 될 뿐이었다.
WE엔터가 사람을 구하기 시작했을 때, 이 바닥에서 발을 담은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노리며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들었다.
유정아도 있고, 막 떠오르는 김별도 있으니, 비전이 있어 보이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막상 들어와보니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들이 더 남아 있었다.
이 회사는 유정아와 김별만 있는 회사가 아니다.
알고 보니 잠룡이 두 명이나 더 있었고, 유정아는 변신을 준비 중이었다.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을 거머쥔 김유민의 스토리.
이미 연예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지만, 황실장은 그들보다 더 많은 걸 알아버렸다.
포텐이 그 어떤 회사보다도 강한 기획사.
이 회사는 빠른 시일 내에 1티어 회사로 올라가게 되리라.
“안녕하세요.”
아직 모습이 드러나지 않고 목소리만 들릴 뿐인데.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김별을 맞이하는 팬들.
고척 돔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만큼이나 맹렬한 기세가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노래가 시작됐을 때.
“와아···.”
팬들의 함성은 멎었고.
핸드폰을 보거나, 장비를 만지거나, 걸음을 옮기던 스탭들의 동작이 동시에 멈췄다.
그리고 그들의 눈은 모두 무대 위에 있는 김별에게로 향했다.
황실장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게 가수지.”
역시 이 회사로 오기를 잘했다.
< 이게 가수지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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