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낌만요 느낌 >
결국 내 방을 보컬 룸처럼 꾸며버렸다.
한 번 머리에 꽂혀버리니, 잠도 잘 못 자겠더라고.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이미 대부분의 장비는 다 마련되어 있을뿐더러, 방음벽만 설치하면 됐으니까.
물론 그 과정이 좀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한 번 이렇게 수고를 들이는 편이 낫지.
어젯밤에 모든 정리를 마치고, 아침에 다시 보니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연습실을 아예 옮겨버리는 거지만, 뮤비나 활동 비용이 또 얼마나 들 지 모른다.
이번엔 좀 더 투자할 생각이니, 미리미리 아껴두는 게 좋겠지.
연습실을 하루 아침에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딩동! 벨이 울렸다.
별이가 왔나 보다.
거울로 재빨리 머리와 얼굴을 살피고는 문을 열어줬다.
맨투맨에 슬랙스를 입은 캐주얼한 복장.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인지 모자와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저 안경을 다시 보니까 광고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어제 광고가 공개됐다고 했는데.
보컬 룸을 만드느라고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여기가 보컬 룸이에요?”
“응.”
“너무 잘 돼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걸 혼자 다 하신 거예요? 힘들었겠다. 저도 부르시지.”
“아냐, 이런 게 뭐가 힘들다고. 하나도 안 힘들었어.”
그녀는 처음 연습실을 둘러봤을 때만큼이나 흥미로운 얼굴을 하며 하나하나 자세하게도 살펴봤다.
딱히 구경할 것도 없는데.
“그럼 저 한동안 여기서 연습해도 돼요?”
“그럼. 그러라고 만든 건데. 네 전용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써.”
안무 연습을 할 땐 연습실을 써야겠지만, 보컬 연습만큼은 여기서 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이제 연습실을 별이 혼자만 쓰는 게 아니다.
서연이도 쓰고, 유진이도 잘 쓰더라.
그러니 이 편이 더 효율적이겠지.
“지금은 이걸로 참아. 조만간 아예 연습실 옮겨버리려고.”
“···굳이 안 그래도 될 것 같아요.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이미 다 적응돼서 편하기도 해요.”
“그래?”
“네.”
뭐, 이건 다음에 더 고민해 봐야겠다.
다른 애들 말도 들어보고.
아무튼, 지금은 구경하라고 불렀을 뿐이다.
아침부터 연습하라고 보채기 위해 부른 건 절대 아니었다.
내가 악덕 사장도 아니고, 이미 실력이 이렇게나 좋은 애한테 연습을 강요할 이유가 없지.
“그럼 온 김에 광고 나온 것도 한 번 볼래? 어제 여기 꾸미느라 못 봤거든. 아! 넌 혹시 봤어?”
“아뇨. 저도 못 봤어요. 같이 봐요.”
정말 못 본 거 맞나? 잠깐 의심이 들었다만, 별로 상관은 없었다.
우리는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고.
유튜브에서 ‘김별 펩시’를 검색했다.
“···왜 이렇게 영상들이 많지?”
공식 영상으로 올라온 건 60초 버전과 30초 버전으로 두 개뿐인데.
다른 영상들이 그 밑에 줄지어 있었다.
‘김별 펩시 CF 1시간 반복’, ‘안경별’, ‘댄스별 안경별’ 등등.
난 일단 60초 영상부터 확인해보기로 했다.
역시 광고라서 그런지, 때깔은 정말 죽여주게 뽑혔다.
촬영장에서부터 알았지.
정말 뭘 좀 아는 감독이다.
그런데, ‘펩시 광고’가 아니라, 이건 흡사 ‘별이 광고’나 다름없어 보였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펩시가 코카콜라 이기려고 아주 작정을 했구나.
-배운 사람이군요. 안경별이라니 이런 귀한.
-역시 콜라는 펩시지ㅋ
-아무리 김별이라도 펩시는 안 된다···.
-이제부터 우리는 펩시입니다. 진지합니다.
-안경별 진짜 미쳤나봐!!!
댓글을 보다 보니 피식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보는 맛이 있었다.
30초 버전 역시 마찬가지.
반응들이 대부분 흡사했다.
“다들 너무 귀여우신 것 같아요.”
옆을 바라보니, 모자를 벗고 알 없는 안경을 쓰고 있는 별이가 보였다.
댓글 창이 켜진 모니터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
내가 보기엔 얘가 더 귀여운 것 같은데.
“그러게. 귀엽네.”
***
머릿속에 온통 안무 생각뿐.
아직 김별이 녹음을 하지 않아서 구서연이 녹음한 가이드 버전이었지만, 음악도 말 그대로 미친듯이 듣고 있었다.
하루 24시간 중,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는 시간이 안 꽂고 있는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나한테 이걸 대뜸 맡겨? 경력도 없는데?’
걱정과 부담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잘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그보다 훨씬 앞섰다.
그렇게 어떻게든 쥐어짜고 쥐어짜본 안무.
벌써 후보가 10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추리고 추린 건데···.”
그리 복잡한 퍼포먼스를 맡긴 것도 아니다.
노래를 흔들리지 않고 부르며 할 수 있는 간단한 안무.
그런 안무를 만드는 건데도, 이렇게나 어려웠다.
이와 비슷한 무대들을 벌써 몇 개나 참고했는지 모르겠다.
이미 이 바닥에 계속 붙어 있었으니 다 알고 있는 무대였는데.
이를 보는 목적과 태도가 달라지니 새롭게 보이기도 했다.
“어떡하지?”
침대에 눈을 붙이고 자고 있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벌떡벌떡 일어났다.
방에 불을 켜고 거울 앞에서 몸을 움직여본다.
하루종일 머릿속에 안무 생각뿐이니, 잠도 잘 오지 않았다.
허나, 그런 이유진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식으로 안무가가 된 것은 아니지만, 안무를 만든다는 것만으로 요동을 치는 가슴.
이렇게 미칠 것만 같은 걸 그동안 대체 어떻게 참았을까?
스스로도 의문이 들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씻으면서도, 디테일 생각에 머리가 꽉 차 있다.
다른 걸 생각할 겨를도 없다.
정신을 차려보면 손끝을 움직이거나 몸을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다.
그렇게 머릿속 용량이 가득 차고, 스스로 어느 것이 더 좋은지 판단이 되지 않을 무렵.
유진은 혼자 결정하는 걸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싹 다 보여주면 되지. 뭐가 문제야.”
10개가 넘어가는 후보 안무들.
설마 이중에 채택되는 동작이 하나라도 없을까.
그리고 오케이를 받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피드백을 받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수정이야 얼마든지 하면 됐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선배가 실망해서 안무 맡기는 걸 물리는 것.
그것 하나만큼은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선배 눈이 더럽게 높기는 한데···.”
핸드폰을 만지는 유진의 손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
[안무 좀 봐주세요.]
유진에게 톡이 와서 연습실로 오라고 말했다.
벌써 다 만들었나? 이리도 일찍 말하는 걸 보니 좀 의아하긴 했다.
유진이 성격에 설렁설렁 했을 리는 없는데.
‘보면 알겠지.’
그런데, 연습실에 들어가 그녀와 눈을 마주한 순간.
난 어떻게 된 일인지 단번에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냥 하루에 쏟아내는 시간과 열정이 달랐던 거다.
그녀가 이렇게나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걸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으니.
“선배.”
나를 부른 그녀는 다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입안에 말이 맴도는 건지, 아니면 말을 고르는 건지.
입만 달싹대고 있을 뿐이었다.
뭘 말하려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그녀가 떨고 있다는 거였다.
난 그녀가 편안하게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작은 미소를 띠며 가볍게 말했다.
“누가 보면 오디션 보는 줄 알겠다. 네 춤 실력 보는 거 아니니까 편하게 해.”
“네? 하하. 저 긴장 안 했어요. 제가 무슨···. 어휴. 아니에요. 하하!”
손을 내저으며 시치미를 뗀다.
거짓말 더럽게 못하네, 진짜.
그녀는 기계적인 미소를 띠며 덧붙였다.
“일단 느낌만 봐주세요. 어떤 느낌이 맞는지 느낌만 보려고 가볍게 만들어본 거예요.”
“느낌만?”
“네, 느낌만요. 느낌. 막 그렇게 뭐··· 최종 시안이거나 뭐 1차 시안, 이런 느낌도 아니고, 그냥 느낌만 보는 거예요.”
“그래, 알았어. 느낌.”
되게 진지하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신중하게 봐야지.
내 앞에 선 그녀.
내 눈치를 힐끔 살피며, 티 나지 않도록 소리 없이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높게 올라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할게요? 딱 열 개만 보여드릴게요.”
“···그래.”
10개?
대단하다. 아무리 복잡한 안무를 바란 게 아니었다지만, 열 개라니.
난 혀를 내두르며 마우스를 쥐었다.
그녀에게 눈짓을 주니, 고개를 끄덕인다.
‘Hang Out’.
서연이가 녹음한 가이드 버전을 틀자, 눈빛과 표정이 싹 변했다.
펑키한 베이스 리듬에 맞춰 가볍게 튀는 몸.
그녀의 댄스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더욱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때 연습실에선 아슬아슬하게 못 봤거든.
익숙하지 않은 모습에 어색하다.
내가 봐왔던 유진이는 이렇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렇게 몸을 가볍게 움직일 수 있을까.
곡의 색깔에 맞게 표정도 밝다.
동작에 맞춰, 그리고 가사에 맞춰 얼굴도 잘 쓴다.
천연덕스럽기도 하고, 여유로움도 묻어 나온다.
입, 눈썹, 눈동자까지, 그녀의 얼굴은 내 시선을 흡수하듯 빨아들였다.
난 팔짱을 끼고 손으로 턱을 받쳤다.
-약속은 없어도 쫙 빼입고 나가. 시선이 즐거운걸.
-오늘은 커리어 우먼이야. 내일은 공주가 돼볼까.
내가 원하는 느낌이 어떤 건지 잘 파악했다.
그래, 이건 모르면 안 되지.
다른 걸 떠나, 명색이 내가 스카우트해온 매니전데.
그런데 느낌을 파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안무도 잘 짰다.
간단하면서도 리드미컬한 음악을 살리는 안무.
내 입가에 진한 미소가 지어졌다.
턱을 받쳤던 손의 검지가 제멋대로 움직인다.
톡, 톡, 리듬에 맞게 얼굴을 두드린다.
‘저런 게 9개나 더 있다고?’
나와 눈을 마주친 그녀. 춤선이 변했다.
더 탄력적으로, 더 부드럽게, 더 유연하게.
내 긍정적인 표정에 자신감을 얻은 모양이다.
음악이 끝났을 때.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두 번째로 바로 갈까?”
“좋아요.”
흥분으로 발갛게 젖은 얼굴.
난 그런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다시 음악을 틀었다.
중간에 쉬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지만 10개의 시안을 연달아 펼쳤다.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질 정도였다.
여기서 뭘 골라야 되는 거지? 지금 당장 결정하지는 못하겠다.
삼각대에 올린 핸드폰으로 찍은 영상들을 보면서, 행복한 고민에 빠져야겠다.
“하아. 하아. 아이고, 힘들다.”
내 표정이 밝아서 그런지, 땀을 뻘뻘 흘리는 그녀의 표정도 밝았다.
아무리 간단한 안무라도 10번을 연달아 하면 힘든 게 당연한 일.
또한 기계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감정까지 꾹꾹 담으며 최선을 다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유진아.”
“네?”
“너 진짜 천재 맞구나? 과장인 줄 알았는데.”
내 말에, 그녀는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웃음을 흘렸다.
“그거야 당연히 뻥이죠. 전 초보예요.”
난 며칠 전, 못 물었던 질문을 하기로 했다.
지금이라면 물어봐도 될 것 같아서.
“근데 저번에 혼자 연습실에 있었잖아.”
“그때요?”
“그때 뭐 하고 있었어?”
서연이 핑계를 대며 수업준비니 뭐니, 핑계를 늘어놨었지만.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머쓱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그냥··· 몸 좀 풀고 있었어요. 가르치다 보니까 좀 자극돼서.”
“이제야 솔직해지네.”
“저도 왜 숨긴 줄 모르겠다니까요? 그때 얼마나 놀랬는데요!”
“아무튼 수고 많았어. 안무 진짜 잘 짰다. 댄스는 더 잘하는 것 같고. 이것들 중에서 추리면 될 것 같아.”
“알겠어요. 조합해서 다시 가져올게요.”
그녀는 헤벌쭉 미소 지으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전에, 차 안에 그녀와 별이까지 셋이 같이 있을 때.
그녀는 저렇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이런 말을 했었다.
‘선배,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뭔 줄 아세요? 제 춤 걱정이에요. 제가 괜히 천재였다고 말한 게 아니라니까요?’
‘그렇다고 치지, 뭐.’
‘정말이에요. 선배 제 춤 보고 나면 나보고 댄스 가수 해달라고 바짓가랑이 붙잡고 애걸복걸할걸요?’
‘퍽이나 그러겠다.’
이제 보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 느낌만요 느낌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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