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무가 필요할 땐 >
하얗게 샌 머리. 깊은 눈.
GO엔터 박수한 대표는 미간을 구기며 침음을 흘렸다.
대표실의 공기가 무겁다.
맞은편에 앉은 권본부장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다는 듯이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껏 죄송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건 덤이었다.
“권본부장.”
“예, 대표님.”
낮고 굵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권본부장을 부르는 박대표.
그는 본부장에게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로 정아가 계약을 거부한다고? 몸값을 높이려는 게 아니었어?”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미팅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거긴 합니다.”
“그게 그 뜻이지. 계약조건을 들으려고도 안 한다면서.”
계속해서 미뤄지고 있는 유정아의 재계약.
처음엔 그저 몸값을 높이려는 줄만 알았는데, 계약조건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걸로 보아, 그런 것도 아닌 듯했다.
“자리에 나오지 않으면, 직접 가서 자리를 깔 줄도 알아야지. 찾아가보긴 했어?”
권본부장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예. 로드부터 실장에, 팀장에, 그리고 저까지 차례대로 가봤습니다. 그런데 아예 귀도 닫고 눈도 닫아버리더라고요. 하아···.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시면 제가 잘 달래보도록 하겠습니다. 원하는 게 어떤 건지도 들어보고, 진솔하고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노력이 부족했던 제 잘못입니다, 대표님. 염려하게 해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권본부장은 다 좋은데 가끔 말이 너무 길어.”
“죄송합니다.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푹 숙이는 권본부장.
박대표는 소리 없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이만 나가봐. 나도 나름대로 노력해볼 테니까.”
“죄송합니다, 대표님.”
권본부장이 나가자, 박대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 김실장이 있었으면 매끈하게 해결됐을 텐데···. 아쉬워.”
그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며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그는 제 손으로 가시밭길을 헤치고 당당히 성공을 쟁취하고 있었다.
박대표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일들을 회상하며 쩝, 입맛을 다셨다.
그때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신인 가수들 중에 가장 높게 떠오르고 있는 김별과 함께 김유민도 회사에 있었을 터.
‘그럼 이것보다 훨씬 더 성공했겠지. 걸그룹 중 최고가 되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아마 그가 있었다면 유정아 역시 진즉에 재계약을 마치고, 지금쯤 이미 작품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그녀가 김실장을 잘 따르던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그게 잘한 일이었는지 모르겠군.”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며, 박대표는 웬만해선 지나간 일에 후회를 두지 않게 되었으나.
그때의 일만큼은 여전히 가슴 한 켠에 남아, 마음을 어지럽혔다.
양심의 가책 따위가 아니라, 오직 실리적인 이유로.
“김실장한테 가려나.”
유정아가 재계약을 거부하는 이유.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유력해 보였다.
김별이 뜰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것도 유정아였으니까.
그 말인즉슨, 김유민과 계속 연락하고 있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정아까지 나가는 건 좀 곤란한데.”
박대표는 앉은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면 유정아를 손아귀에 계속 쥐고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가려 하는 곳은 김유민의 회사일 터.
다른 연예인 같으면 인성논란이나 갖가지 루머를 터뜨리며, 깔끔하게 해결해준다고 은근히 압박할 터이나.
‘김실장 성격상··· 절대 가만히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재계약을 거부하는 걸로 보면 서로 얘기가 돼 있는 게 분명하다.
아마 김유민은 이미 유정아가 자기 연예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
문제는 김유민에게 아주 치명적인 무기가 손에 쥐어져 있다는 거다.
김별과 이수진에 관계된 모든 것들.
그게 터지는 순간,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하는 레모네이드는 완전히 기세를 잃을 것이다.
“···목줄이 잡혔구만.”
또한, 유정아라면 인성논란이나 루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잘만 활동할 수도 있다.
설령 대중들의 후폭풍이 좀 거세다고 해도, 김별마저도 성공시킨 김유민이 유정아를 못 살려낼 것 같지도 않고.
박수한 대표의 입에선 침음이 그치지 않고 새어 나왔다.
그리고 내려진 결론은 하나.
손아귀에서 보물이 빠져나가려는 걸,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
당시엔 몰랐다.
이렇게 될 줄은, 김별을 이렇게까지 성공시킬 줄은.
이를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하나,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법.
박대표의 미간은 실시간으로 깊어져만 갔다.
“역시 실수였어.”
유정아는 김유민에게 말하지도 않았는데.
지레 짐작하고 행동을 자중하는 박수한 대표였다.
***
음악 소리가 빵빵하게 울리고 있는 연습실.
지금 이곳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다름아닌 이유진이었다.
오늘도 구서연이 집에 가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한 것.
모든 게 그러하듯, 처음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머리를 질끈 묶고 연습복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 거울 속 이유진.
그녀는 자신의 움직임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가장 파릇파릇했던 그 시절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아서.
‘아직 안 죽었네.’
실력이 녹슨 것도 잠시, 다시 갈고 닦으니 옛 모습이 서서히 나오고 있다.
춤을 춘다는 것 자체만으로 기쁘지만, 실력이 올라오면 더 기쁘지 않겠나.
이 성취감과 희열, 뿌듯함, 중독성은 남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
그런데.
옛 속담 중에 틀린 말 하나 없다고.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었다.
한창 흥이 올라오고 있는 그때.
연습실의 문이 열렸다.
“···!”
유진은 번개처럼 빠르게 몸을 돌렸다.
들어오고 있는 사람은, 가장 들키기 싫었던 김유민.
선배였다.
눈치 없이 신명 나는 비트를 쏟아내고 있는 스피커.
유진은 삐걱삐걱, 춤을 출 때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움직임으로 걸음을 옮겨 소리를 껐다.
“···.”
“···.”
연습실엔 정적만이 내려 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음악을 끄지 말고 그냥 소리만 조금 줄일걸.
뒤늦은 후회를 해봤는데, 지금 다시 음악을 키면 그게 더 어색할 것 같았다.
유진은 숨이 가빠졌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거친 숨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신경 쓰며 소리를 낮추었고
일부러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다고 소용이 있을까.
이미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는데, 춤을 추고 있었다는 게 감춰질 리가 없었다.
괜히 힘들기만 하지.
멍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고 있는 김유민.
유진은 활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어··· 서연이가 재능이 있으니까 좀 더 제대로 알려주려고요. 그래서 일종의 수업 준비, 뭐 그런 거예요.”
“···그래?”
‘안 물어봤다’는 말과, ‘거짓말인 게 다 티가 나고 있다’는 말이 그의 얼굴 위로 다 드러나 있었다.
혀끝까지 올라왔다가 도로 들어간 것 같다.
유진은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못된 짓을 하다가 걸린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선배는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왜 왔어요?”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
손은 어디다 둬야 할 지 몰라 괜히 앞뒤로 흔들었다.
“난 연습실 좀 치우려고 했지.”
“여긴 제가 치울게요. 선배는 들어가보세요.”
눈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손으로는 빨리 가시라고 손짓하면서.
유민은 지그시 유진을 응시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나 갈게. 나 이제 집에 바로 들어가서 씻고 푹 잘 거야.”
이걸 굳이 말하는 저의가 뭘까.
유진은 속으로 제발 그냥 꺼지라고 외치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네. 들어가요, 선배.”
몸을 돌려 나가는 유민.
연습실 문이 닫히자마자, 유진의 얼굴은 울상으로 물들었다.
‘미친! 미친! 미친!’
혹여나 들리기라도 할까 봐, 유진은 잠시 속으로 욕을 퍼붓다가.
확실히 들리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자책을 시작했다.
“으으! 이 미친년! 그냥 몸 풀고 싶어서 춤췄다고 말하면 되지, 그걸 왜 숨겨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는데, 너무 놀란 나머지 숨기는 데 급급했다.
괜히 그림이 이상해져버렸다.
“어떡하지? 그냥 퇴사할까? 쪽팔려서 앞으로 얼굴을 어떻게 봐···. 아 진짜···! 왜 그랬어! 왜! 대체 왜!”
온갖 몸부림을 치며 괴로워하던 유진은 연습실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서연이가 만든 별이의 후속곡.
통통 튀고 산뜻하고 발랄했던 데뷔곡과는 색깔이 좀 달랐다.
산뜻하거나 발랄하지는 않지만 리듬이 더욱 강조됐다.
처음 서연에게 노래를 시켜보기 전, 그녀가 만들어온 곡을 들었었는데.
그때 받은 피드백을 스펀지처럼 흡수해버리다 못해, 아예 레벨업을 해왔다.
단음만 내는 베이스가 아닌, 쫄깃쫄깃 펑키한 베이스 리듬.
베이스 덕후들이라면 이 곡을 듣자마자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버릴 게 분명했다.
또한, 베이스가 후렴의 시작을 열고, 색소폰이 후렴의 메인이 된다.
색소폰을 쓴 것처럼 악기의 구성 역시 데뷔곡보다 더 풍성해졌다.
일렉 기타, 드럼, 피아노는 물론이고, 통기타, 리코더, 플룻, 클라리넷,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까지.
구서연은 절대 놓치면 안 될 인재였다.
댄스를 배우고 무대 공포증을 극복하느라 정신없었을 텐데, 이런 고퀄리티의 곡을 뽑아오기까지 하다니.
곡을 처음 들었을 땐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정말 작곡을 그만두길 잘했지.
만약 안 그만두고 계속 했으면 이런 사람들이랑 경쟁해야 했을 거 아냐.
생각만 해도 절망적이다.
곡이 단순히 좋기만 한 것도 아니다.
‘별이한테도 잘 어울려.’
그런데 앞으로 나오는 악기가 많아서 그런지, 보컬이 비어 있는 부분이 꽤 있다.
일단 귀로 듣기에 좋기는 한데, 이 부분을 편곡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별이가 부르는 걸 직접 들어보고 결정할 생각이었다.
어젯밤에 곡과 찰떡같이 잘 어울리는 가사도 뽑혔겠다, 나는 모두를 연습실로 불러모았다.
“언니.”
모두가 모인 연습실.
서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유진에게 물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해요?”
“어? 아냐. 내가 무슨. 그냥··· 아무것도 아닌데?”
“···?”
경직된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이는 그녀를 나는 대놓고 빤히 바라봤다.
시선이 자기한테 꽂히고 있는 걸 알 텐데, 애써 모른 척한다.
얘는 진짜 거짓말 못하네.
능글맞게 행동하는 것도 재능이 필요한 일이구나.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별아, 파이팅!”
“···네. 감사합니다...?”
내 시선이 그녀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나 보다.
아직 별이는 준비도 안 하고 있는데, 파이팅부터 외친다.
그래도 숨기고 싶다는데 캐묻기엔 좀 그래서.
난 그냥 내버려두기로 하고 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목 풀래?”
“네.”
연습실에 보컬 룸이 없는 게 한이다.
후속곡에 써야 할 비용 때문에 아끼고 있긴 한데, 좀 더 벌면 연습실부터 다시 마련해야지.
아니면 이곳의 인테리어를 싹 뜯어 고치거나.
그리 넓지 않은 연습실에 컴퓨터와 스피커, 마이크가 있기도 하고.
베테랑 가수들도 모니터링 이어폰을 끼며 이렇게 연습을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보컬 룸이 있는 게 훨씬 낫지.
지금까지는 연습실을 쓰는 게 별이 혼자이기도 했고, 그동안 연습해왔던 짬과 실력이 있어서 큰 부족함이 없긴 했으나.
점점 거슬리는 부분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며 불만이 생기고 있다.
욕심이 생기는 거겠지? 성공에 대한 갈증이 더 진해진다.
특히나 이렇게 편곡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반주와 함께 자세히 듣고 판단해야 할 때는 더 보컬 룸이 절실했다.
보컬 실력을 평가하는 것도 아니고 모양 빠지잖아.
이럴 거면 그냥 우리집으로 부를 걸 그랬다.
그래도 어느 정도 세팅이 돼 있어서 조금만 더 손보면 그럴듯한데.
“다 풀었어요. 이제 부를까요?”
별이의 목소리에, 머릿속 상념을 깨끗하게 지우고 눈앞에 집중했다.
지금 그녀의 노래를 들어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으니.
서연이가 컴퓨터를 만지자, 가이드를 뺀 반주가 스피커로 흘러나오고.
마이크를 든 별이가 몸으로 살랑살랑 리듬을 탔다.
그리고 도입부.
입을 열어 그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약속은 없어도 쫙 빼입고 나가. 시선이 즐거운걸.”
노래 제목은 .
“오늘은 커리어 우먼이야. 내일은 공주가 돼볼까.”
듣기만 해도 신나는 음악, 그리고 보컬 역시 ‘과연 별이’라고 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런데, 마이크와 스피커 때문에 더욱 무대처럼 보여서 그런 걸까?
어째선지 무대가 조금은 부족해 보였다.
난 가슴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무대를 바라봤다.
그리고 음악이 모두 끝났을 때.
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건 음악의 문제도 아니고 보컬의 문제도 아니다.
그 둘은 더 건드릴 게 없을 정도로 훌륭한 데다, 너무 잘 어울렸거든.
“편곡은 필요 없을 것 같아. 그런데···.”
다들 나를 바라보며, 내 입에서 나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엔 댄서들이 필요할 것 같아. 라이브에 무리 가지 않는 선에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안무도 필요하고.”
내 입을 바라보고 있던 별이와 서연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내 시선 역시, 그쪽으로 향했다.
“...! 왜, 왜요? 왜 날 쳐다봐요?”
눈동자로 팝핀을 추고 있는 이유진.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유진아, 네가 한 번 만들어볼래?”
< 안무가 필요할 땐 > 끝
ⓒ 쏘하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