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들과 함께하는 연예계 생활-16화 (16/124)

< ‘신선한 명가수’라는 게 말이 되냐? >

단 한 번의 음악방송이었다.

두 개의 무대, 그리고 인터뷰.

자정에 방송되기 때문에, 노출도가 떨어지는 게 사실.

그래서 나는 본방송보다는 그 뒤를 노렸었다.

유튜브 클립이나 짤로 인해 더 많은 팬들이 유입될 수 있을 줄 알았지.

커뮤니티나 SNS에서 서서히 퍼져가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 속도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다.

그러니까 반응이 아주 뜨겁다는 뜻.

‘예능도 잡혔으니 말 다했지.’

비록 주말 인기 예능은 아니었지만, 우리에겐 가뭄의 단비나 다름없었다.

대중적 인지도를 쌓기에 예능보다 좋은 건 없으니까.

“사장님, 안녕하세요. 언니도 안녕하세요.”

나와 유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곤 사뿐히 차에 올라타는 별이.

새벽임에도 눈은 똘망똘망 흐트러짐이 없다.

하긴 ‘김석희의 아메리카노’에 출연한 뒤로 이번이 첫 번째 스케줄이니 피곤할 리가.

지금은 거의 최상의 컨디션일 거다.

“사장님.”

“어, 별아.”

조수석에 앉아 있는데, 핸드폰이 뒤에서부터 불쑥 튀어나왔다.

화면에 틀어진 건 음원 사이트의 인기차트.

그중에서도 내 눈은 정확히 한 곳을 향해 꽂혔다.

[44. So Happy – 김별]

이 콘크리트 같은 차트에서 50위를 돌파해 44위를 찍고야 말았다.

물론 당연히 나도 알고 있던 사실이다.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차트를 쉴 새 없이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니, 눈을 피하며 헤실헤실 웃고 있다.

자랑하는 게 민망한 모양이다.

“잘했어, 별아. 너 정말 대단한 일 한 거야. 방송 한 번으로 44위까지 뚫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지? 다 네가 노래도 잘 부르고 매력 있어서 그래.”

“아니에요. 다 사장님 덕분이에요. 사장님 아니었으면 절대 이렇게 못 했어요.”

이유진이 소리 없이 웃고 있는 게 주변 시야로 보였다.

“넌 왜 웃어?”

“와! 목소리 봐. 온도 차이 뭐예요? 선배, 나 진짜 서운해지려 그래요?”

“아니 네가 갑자기 웃으니까 그렇지. 온도 차이는 무슨.”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웃겨서 웃은 거죠. 선배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렇게까지 따뜻하게 대하진 않았잖아요.”

“무슨 소리야. 몇몇 애들한테는 따뜻하게 해줬어. 정아한테도 그랬잖아.”

“그게 따뜻한 거였어요? 정아 언니가 이 말 들으면 진짜 엄청 어이없어할걸요?”

문득 룸미러에 시선이 갔다.

활짝 웃고 있는 별이의 얼굴이 보인다.

우리끼리 투닥투닥 대화하는 게 웃긴가 보다.

***

우리는 사전녹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에는 이미 많은 가수들이 있을 터.

공개홀에 들어가면 바로 인사부터 돌아야 한다.

나는 주차장에서 내리기 전.

별이와 유진이에게 당부하듯이 말했다.

“유진아, 우리 둘 중에 한 명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별이한테 꼭 붙어 있어야 돼. 특히나 GO엔터놈들 와서 헛소리하면 그냥 들이박아버려. 뒷생각하지 말고.”

“네!”

“그리고 별아, 레모네이드한테는 인사 안 해도 돼. 그런 거 상관없으니까. 어차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기도 하고, 내가 옆에 있으니까 인사 안 해도 다른 사람들이 뭔가 사정이 있겠거니 짐작할 수 있거든.”

GO엔터였던 내가 옆에 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별이와 레모네이드.

요새는 예전처럼 이런 선후배 위계질서가 그리 빡빡하지 않았다.

프로젝트 그룹으로 데뷔했던 이가 신인 그룹으로 데뷔하거나, 음방에 나가지 않고 인디에서부터 올라오거나, 망했던 가수가 다른 그룹으로 데뷔하는 등.

요새는 선후배를 따지기가 애매한 경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보는 시각이 예전보다는 너그러워졌다.

대신.

“레모네이드 말고는 모든 사람들한테 다 인사해야 돼.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예의에 대해선 그리 걱정이 되진 않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별이니까.

그냥 음방 첫 출연이니만큼 그냥 노파심에서 말하는 거였다.

‘김석희의 아메리카노’도 음방이긴 한데, 이런 음방과는 결이 많이 다르긴 하거든.

이유진은 마치 GO엔터랑 한 판 뜨러 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결연한 얼굴로 눈빛을 불태웠고.

별이는 옅은 미소를 띠운 얼굴로 대답했다.

“네.”

우리는 주차장에서 내렸고, 바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기 시작했다.

주차장 옆에 붙어 있는 흡연구역.

이곳에도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그렇게 삼보일배하듯 걸음을 옮겨 대기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신인 5팀이 함께 쓰는 대기실.

그 안엔 레모네이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신인가수 김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와 레모네이드를 제외하고 세 팀.

우리는 레모네이드의 파티션을 그대로 지나쳐 다른 팀들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파티션 사이로 싸늘한 시선이 꽂혔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저들이 별이를 제외하고 제일 막내 신인이니, 순서가 뒤로 밀린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3팀의 인사를 끝내고도, 레모네이드를 그대로 지나쳤다.

다른 대기실에 있는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기 위해서.

그런데, 역시 저들은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김유민!”

귀청 떨어지겠네.

여기 지들만 쓰나.

조금 시끌벅적하던 소리가 음소거를 누른 듯 대번에 조용해졌다

난 귀찮다는 듯 귀를 후비며 말을 던졌다.

“왜요.”

“···!”

이팀장의 얼굴이 울긋불긋 달아오른다.

음방엔 제대로 얼굴도 안 내미는 양반이 오늘 여기에 온 이유는 뻔했다.

나와 김별을 보기 위함이겠지.

아, 이유진도 있구나.

이팀장의 희번득한 눈이 우리 셋을 연달아 훑었고, 나도 이팀장 뒤를 훑었다.

이팀장 뒤로 보이는 얼굴들이 다 익숙하다.

그리고 그중에서 이수진은 독기가 뚝뚝 떨어지는 악독한 눈으로 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방귀 뀐 놈이 성 낸다더니, 딱 그 꼴이다.

“야 김별! 너 선배한테 인사 안 해?”

이팀장이 김별에게 대뜸 삿대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하곤 말이 안 통할 거라 생각했나 보다.

그런데 얄팍한 수작이다.

까짓거 나도 부리지, 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야, 레모네이드. 너네 나한테 인사 안 해? 유진이한테는?”

“···!”

“···!”

그녀들의 눈이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일어나지도, 앉아있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다.

그 와중에 이수진만이 보란듯이 다리를 꼬았다.

하긴 그 피가 어디 가겠나. 당황할 거라는 기대도 안 했다.

“야! 김유민!”

까슬까슬한 수염이 나 있는 두툼한 턱살이 출렁출렁 떨린다.

얼굴이 시뻘게져 있는데, 할 줄 아는 거라곤 소리지르는 것밖에 없다.

난 그에게 한 발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속을 좀 더 긁어내기 위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그런데, 내 뒤쪽에서 별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안녕하세요, 왕팀장님. 인사가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

“···!?”

왕팀장?

몸을 빙글 돌려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는 제 입을 가리며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죄송합니다, 이팀장님. 잠시 헷갈렸어요.”

“···풉.”

“크크큭.”

우리가 웃는 소리가 아니었다.

숨죽인 채 귀를 기울이고 있던 다른 파티션에서 나는 소리.

“···아.”

나도 뒤늦게야 이해했다.

공중도덕이 없고, 소리지르는 것밖에 못해서.

어느 땅에 많은 ‘왕’ 씨라고 돌려서 깐 것이다.

아니, 이 정도면 그냥 대놓고 깐 건가?

왕팀장, 아니 이팀장은 눈을 부릅뜬 채로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곳에서, 상상치도 못한 충격이 날아들어 경황이 없나 보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나도 당황스러웠다.

그 착한 별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이러는 건 그림이 별로 좋지 못했다.

아무리 레모네이드를 무시하라고 했어도.

‘아니··· 아니지.’

별이는 엄연히 피해자다.

어린 나이에 커다란 기회비용을 날리며 데뷔조에 들었는데.

그녀의 모든 노력을 GO엔터가 부당한 방법으로 짓밟아버렸잖은가.

아무리 사람이 착하다 한들, 속에 맺힌 원한이 없겠나.

오히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이렇게 뻔뻔한 태도를 보이는 저들이 훨씬 더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거였다.

이건 정확히 해야지.

그리고.

‘이 정도는 아직 괜찮아.’

나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애들을 이끌고 서둘러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볍다.

방금 전 이팀장이 지었던 표정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온몸을 상쾌하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별아···.”

이유진은 입을 틀어막으며 김별을 바라봤다.

“죄송해요···. 너무 화가 나서···.”

“아냐. 잘했어, 잘했어.”

유진이 별이의 어깨를 감싸며 토닥여주었다.

내가 주의를 줄 필요는 없겠다.

본인도 다음부턴 이래서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니.

“가자. 선배님들한테 인사해야지.”

“네.”

내 옆에 바짝 붙으며 대답했다.

***

공개홀 중앙에 앉아 있는 정요석PD.

그는 김밥을 먹으며 통화했다.

“김밥도 질린다 이제. 난 대체 언제까지 이거 먹어야 돼.”

-그럼 마누라라도 만들든가. 도시락 좀 싸달라 그래.

“소개라도 해주고 그런 말을 해라.”

통화하고 있는 상대는 입사동기, 신준혁.

그는 예능국에 있다가 드라마국으로 옮겼고, 지금 첫 번째 드라마를 만드는 중이었다.

-야, 근데 너 그거 진짜 복 터진 소리야. 음방 피디 개꿀인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드라마국은 진짜 지옥이다, 지옥.

“뭐래. 그거 잘못 알려진 거야. 이게 얼마나 힘든데.”

정요석과 신준혁이 서로 다른 곳에 소속되어 있어도 둘은 여전히 막역했다.

서로 징징거리거나 놀리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줄 만큼.

-어휴. 야, 말도 마라. 여긴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니야. 아! 그러고 보니 너 추천할 만한 명가수 없냐? 신선한 사람으로.

“장난해? ‘신선한 명가수’라는 게 말이 되냐?”

-아 대충 느낌 오잖아. 그럼 됐지. 우리 젊은 여자 보컬 필요해. 음악감독님이 짬이 좀 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나한테 짬 때리시더라. 좀 알아보래.

일을 똑부러지게 잘하는 놈이다.

말로만 투덜거리는 거지, 사실 자기도 직접 나설 만한 것이라 생각해서 이렇게 가수를 알아보는 거겠지.

다만, 주소를 잘못 찾았다.

“그걸 음방 PD한테 물어보냐? 다 아는 놈이 그런 말을 해.”

-그래도 명색이 음방 PD가 시장에 있는 가수들은 줄줄이 꿰고 있어야지.

“퍽이나 그러겠다. 넌 단편영화 줄줄이 외고?”

-···그거랑 이거랑은 많이 다른 거 아니냐?

낄낄거리며 통화를 하다 보니 이제 곧 리허설을 할 시간이 됐다.

둘은 다음에 한잔 하기를 기약하며 통화를 끊었고.

정요석PD는 옆으로 다가온 조연출과 대화를 나눴다.

오늘 이곳에 꽤 흥미로운 일이 발생했으니, 안 떠는 게 이상한 일이다.

“GO엔터 이팀장님이 김실장님 신인 가수한테 한 방 먹었다면서?”

“하하. 네, 아시잖아요. 두 회사 어떤지. 그래도 GO엔터에만 그러지, 얌전하고 착한 것 같던데요? 인사 엄청 열심히 하고 다니는 거 보셨잖아요.”

다름아닌 음방 PD라서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대략적인 선에서는 알 수 있었다.

CP선에서부터 김별의 출연이 막혔었으니, 악연이라는 걸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지.

“그래도 용케도 떴네. 완전히 묻혀버릴 줄 알았더니.”

“김실장님이 괜히 김실장님이겠어요? 그리고 신인이 실력도 엄청 좋던데요?”

“그래?”

“네, 확인 안 해보셨어요?”

정요석은 볼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요즘 섭외를 뭐 실력 보고 하나? 어차피 AR 깔거나 AR같은 MR 깔고 하는데.”

“하긴 화제성이나 사이즈가 중요하죠.”

사실 다 확인하는 게 정석이긴 해서, 둘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공공연히 밝혀져도 큰 문제는 없다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 들어봤자 좋은 것도 없어서.

“이번에 레모네이드가 1위 하겠죠?”

“그럴 거야. 끈덕지게 음방 나오더니 결국에 1위 따버리겠어.”

정요석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역시 대형 기획사는 여러모로 참 집요했다.

대화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리허설이 이제 막 시작되려 했으니까.

준비는 모두 끝났고, 이제 사전녹화했던 가수들을 제외한 팀들이 올라올 터.

그중 첫 번째는 오늘 이곳에서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신인.

김별이었다.

아까 인사하고 대화를 나눴을 때.

비주얼과 분위기를 보고는, 뜬 이유를 잘 알겠다며 지레짐작했었는데.

실력도 엄청 좋다는 조연출의 말을 듣고는 조금 기대감이 올라왔다.

어느새 고요해진 공개홀.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무대에 오른 김별이 허리를 푹 숙이며 씩씩하게 인사했다.

“신인가수 김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잘 부탁해요.”

정요석은 핸드 마이크로 인사에 화답했고.

곧이어 그녀의 리허설이 진행되었다.

산뜻하고 밝은 반주가 흐른다.

김별은 그에 살랑살랑 리듬을 타며 해맑게 웃는다.

이렇게 봐선 도저히 이팀장에게 한 방 먹인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

그렇게 반주가 도입부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핸드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다 대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이번 순서는 분명 AR이 아닌데?

눈이 크게 떠지고, 귀가 쫑긋 기울여졌다.

심지어 AR같은 MR도 아니다.

베테랑 가수들도 코러스를 넣는 만큼, 목소리를 아예 안 깔지는 않았으나.

이 정도는 거의 생라이브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정요석PD는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별안간 헛웃음을 터뜨렸다.

친한 동기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서.

“여기 있었네. 신선한 명가수.”

< ‘신선한 명가수’라는 게 말이 되냐?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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