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들과 함께하는 연예계 생활-9화 (9/124)

< 정아야 도와줘 >

“내가 그걸 모를까 봐.”

회사를 나왔는데도 이유진은 이유진다웠다.

얘는 날 옆에서 그렇게 봐왔으면서 이런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전달하려고 한다.

혹시나, 그리고 만약에 모르고 있을까 봐 걱정이 돼서 그런 거겠지.

도통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

GO엔터에서 우리에게 훼방을 놓을 것은 진작에 예측 가능했다.

우리가 이를 어떻게 뚫어야 하는지가 문제인 거지.

“하아.”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방법이 그리 마땅치 않다.

GO엔터 안에 있을 때는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아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척척 해결해 나갔었는데.

지금은 그때와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어쩔 수 없네.”

이제 음원 발매일이 며칠 남지 않았다.

어떻게든 자력으로 음방을 뚫어보려 했지만, 쉽지 않더라.

내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도 믿는 구석이 하나 있긴 해서 그리 막막하지만은 않았다.

구태성 선생님께 부탁하는 건 최후의 보루라고 해도, 다른 선택지가 하나 더 남았다.

“그런데··· 얘가 안 해주면 어쩌지?”

아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난 고개를 털어내며 전화번호부 목록에 이름을 검색했다.

[도움 필요하면 얘기해.]

내가 회사를 나갔을 때, 짧은 톡 하나만 달랑 보냈던 여배우, 유정아.

난 그녀에게 곧장 통화를 걸었고.

신호가 채 두 번이 가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됐다.

전화를 받자마자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어떻게 된 게 참 정이 없어.

차갑게 식은 눈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그려졌다.

-도움 필요하면 얘기하랬다고 진짜 도움 필요할 때만 연락하면 어떡해? 어? 언젠가 도움이 필요할 것 같으면 자주 연락해서 미리미리 기름칠이라도 하는 게 비즈니스의 기본 아니야? 하여간 사람 참 딱딱하다니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뜨기 전에도 언젠가는 자신이 스타가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고, 실제로 스타가 된 뒤에도 저 성격엔 한 점 변함이 없었다.

변한 게 하나 있다면 사치와 씀씀이가 무척 커졌다는 것.

그런데 뭐··· 그만큼 버니까 그건 내가 왈가왈부할 게 못 되지.

“정아야. 도와줘. 부탁할 거 있어.”

덜컥 본론부터 꺼냈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 같아서.

그동안 그녀와 함께 하며 체득한 노하우였다.

-이거 봐, 이거 봐. 나한테 뭐 맡겨놨어? 내가 선심 써서 부탁 들어주는 거야. 오빠, 이거 혼동하면 정말 곤란해?

역시, 현명한 처사였는지 그녀는 못 이기는 척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우리집으로 와. 팥죽 사들고. 식혀서 오면 안 돼. 따끈따끈하게. 알지? 나 지금 슬슬 배고파지려고 해.

어련할까.

난 마른 웃음을 흘렸다.

***

유정아와 연락이 닿고 1시간 뒤.

나는 익숙한 주차장에 들어서고 익숙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여긴 언제 봐도 끝내주네.”

눈을 돌리는 곳마다 럭셔리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일반인 수입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집.

난 그런 집에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팥죽을 들고 가고 있었다.

어딜 가든 눈에 띄는 유정아.

밖에서 만났으면 100m 밖의 시선까지 모조리 끌어 모을 정도로 화려하게 꾸몄을 텐데, 집에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건 보안이 생명이거든.

나랑 같이 사진이라도 찍혀봐라.

GO엔터 사람들이 보면 눈에 불을 켜고 파헤치려 들 거다.

난 문 앞에 도착해 벨을 눌렀다.

비밀번호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다른 회사니 막 열고 들어가기는 좀 그래서.

문은 바로 열렸다.

그리고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정아를 마주할 수 있었다.

“또 뭐가 그리 불만이야. 팥죽도 사왔는데. 따끈따끈해. 안 식었어. 내가 빨리 오려고 얼마나 밟았는 줄 알아?”

“아니, 선 긋는 게 눈에 너무 잘 보여서. 연락도 안 하고, 집으로 오라고 했는데도 굳이 굳이 벨을 누르고. 이게 선 긋는 게 아니면 뭐야? 꼭 그렇게 딱, 딱, 지키면서 살아야 돼? 참 피곤하게 산다, 피곤하게 살아.”

반가운 반응이었다. 입으론 툴툴대는데, 저것도 다 정이 있어서 저러는 거다.

날 생각해주지 않았다면 애초에 도와준다고도 안 했을 거고, 지금 여기에 오지도 못했겠지.

내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날 위아래로 훑어봤다.

“왜 웃어? 나 방금 진지하게 말한 거야.”

“알아.”

난 태연하게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높고 넓은 거실.

사치를 좋아하는 그녀답게 참 값비싸게도 꾸몄다.

커다란 그림은 물론이요, 러그, 의자, TV, 스피커, 소파, 식탁 등등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그러나 내게는 퍽 익숙했다.

옆에 따라오는 인기척이 없다.

뒤를 돌아보니, 현관에 멈춰 서 있는 그녀가 보였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눈에 힘을 주며 날 노려보고 있다.

“에이! 부탁 안 들어줘. 됐어. 물러. 취소해.”

“또 왜? 뭐가 문젠데?”

“···또 왜? 뭐가 문젠데? 내가 그렇게 말하지 말랬지. 그리고 오빠는 집밖에 안 보여? 그래, 돈이 최고지? 뭐··· 그건 인정해. 그런데, 슈퍼스타인 내가 눈앞에 있는데도 그렇게 쌩 들어가버린다고? 이게 슈퍼스타를 대하는 태도가 맞아? 더구나 부탁하러 온 사람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리만은 정직하게 움직여 내 쪽으로 향했다.

내 손에서 비닐봉지를 빼앗아 들고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투덜투덜, 오랜만에 만나니 말이 더 많아졌다.

‘그동안 많이 답답했나 보네.’

이게 다 연락을 안 한 내 죄지, 누굴 탓하겠어.

아, 물론 그녀의 문제도 있다.

친구가 없거든. 그녀에겐 터놓고 얘기할 만한 사람이 나밖에 없다.

원인은 누가 봐도 명확했다. 말투와 성격.

사실 속내는 정말 정 많고 착한데, 나처럼 어느 정도 가까워지지 않으면 그게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끝도 없이 틱틱댈 것만 같던 유정아.

그녀의 태도는 팥죽 한 숟가락이 입속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뀌었다.

사르르 녹아내리는 표정과 목소리. 심지어 나긋나긋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팥죽 이거 아는 사람만 아는 맛이야.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괜히 밭에서 일하시는 할머니들이 새참으로 팥죽 먹는 게 아니라니까? 사람들이 대한민국 전통 음식을 사랑할 줄 알아야지. 외국에서 온 것들, 다 마케팅이라고. 근데 팥죽은? 마케팅을 안 해. 그래서 저평가된 거야. 주식으로 따지면 이만한 저평가 우량주가 또 없어.”

대체 이 말을 몇 번을 듣는 건지.

그래도 맛있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맛있네, 진짜.

그녀의 앞에 놓인 그릇은 얼마 안 가 싹싹 비워졌다.

그녀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까?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부탁하기 딱 좋은 타이밍.

뭐든 수용할 듯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나는 별거 아니라는 투로 담담하게 얘기했다.

“우리 가수가 데뷔하는데 음방 못 나갈 것 같아서 홍보 좀 부탁하려고.”

“앞뒤 사정은 나도 대충 알고 있어. 그래서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사실 그녀에게 SNS에, 별이 앨범 사진과 간단한 소개 정도만 올려달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지금 기분으로 보아, 조금 더 나아가도 될 것 같았다.

“너 연습생 출신이잖아.”

“응. 그렇지?”

그녀는 애초에 아이돌 연습생으로 회사에 들어왔었다.

그런데 연기 수업에서 너무 압도적인 재능을 보여 아예 배우 쪽으로 빠지게 되었다.

결과는? 지금 그녀의 집을 보면 알 수 있다.

대성공이지.

그녀의 노래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연습생이었던 만큼 보컬에도 기본적인 실력은 있을 터.

나는 무리하다면 무리할 수 있는 부탁을 대뜸 꺼냈다.

“노래 커버 영상 좀 찍어줄 수 있어?”

“···! 내, 내가? 커버곡을 부르라고?”

웬만해선 당황하지 않는 그녀가 눈에 띄게 당황한다.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고, 대번에 커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 연습생 출신이면 기본은 할 거 아니야. 그리고 요새는 배우도 다양한 컨텐츠로 소통하는 시대야. 노래 부르면 팬들도 좋아할걸?”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을 집어먹고 있었다.

몇 번이나 입을 뻥긋거리던 그녀가 겨우 소리를 냈다.

“···오빠가 봐줄 거야?”

긍정적인 신호다. 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가수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뭘 하든 확실히 하는 성격이잖아, 내가. 그러니까 대충 넘어가지 말고 진지하게 봐줘야 돼. 이왕 할 거 제대로 해야지. 못하는데 배우라고 대충대충 넘어가는 거 눈에 보이면 나 바로 때려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알겠지?”

경고하듯이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이번엔 내가 당황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꺼낸 부탁을 정아가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의문과 의심이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으나, 난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곡부터 들어봐.”

핸드폰을 꺼내 음악을 틀려는데, 그녀가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다시 나오는 그녀의 손엔 언제나 보던 고급 헤드폰이 들려 있었다.

“나 혼자 들어볼게.”

그녀는 내 핸드폰을 들고 소파에 앉아 헤드폰을 꼈다.

핸드폰 액정 위, 허공을 노닐던 그녀의 손가락이 마침내 화면을 터치했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지켜봤다.

지금까지 본 걸로 말미암아, 하나의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연습생으로 시작해서 배우가 된 그녀.

어쩌면 가수의 꿈을 가슴속에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작곡가를 꿈꿨던 내가 현실과의 타협을 통해 매니저가 된 것처럼.

그녀 또한 가수를 꿈꾸다가 현실과 타협해 배우가 된 걸지도 모른다.

그녀와 내가 다른 것이라고는 하나.

난 이제 작곡가에 미련이 없었으나, 그녀는 아니라는 것.

미련인지, 아니면 아직도 진지하게 바라는 꿈인지는 제대로 판단이 서질 않았지만.

그녀가 노래에 있어 진심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4분여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눈을 떴다.

천천히 헤드폰을 벗는데, 어째선지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나를 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씨! 내가 이걸 어떻게 해! 얘 너무 잘하잖아! 누구 바보 만들 일 있어!?”

“내가 봐주면 되잖아.”

“아니 봐준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잖아! 적당히 잘해야지, 이럼 비교만 돼서 자체 흑역사 쓰는 거라고!”

별이가 많이 잘하긴 하지.

그런데 지금 뿌듯함을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다.

“누가 똑같이 따라하래? 너는 너대로 부르면서 장점을 살리면 되잖아.”

“말은 잘하지. 오빠 내 노래 들어본 적 없잖아. 그러면서 장점은 무슨.”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들어보자는 거지. 정 아니다 싶으면 안 올리면 되고. 뭘 하기도 전부터 앓는 소리냐?”

“···뭐야? 부탁하는 태도가 왜 이래?”

팥죽 사오라고 말할 때 자기 말투는 생각 못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그걸 지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쉬운 건 나니까.

그런데 그녀 또한 아쉽긴 한 모양인지, 몇 번의 설득 끝에 그녀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목을 푼 그녀는 아랫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웃지 마. 나 노래 잘 못한다고 분명히 말했어?”

“절대 안 웃어. 약속할게.”

헤드폰은 한쪽만 끼고 있고, 눈은 내 핸드폰에 들어 있는 가사지를 보고 있다.

후우- 숨을 길게 내쉬는 그녀.

지켜보는 나도 덩달아 떨렸다.

그녀의 노래를 들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마침내 그녀의 손가락이 음악을 재생했고.

입이 열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정아야 도와줘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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