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태성 딸 구서연 >
구태성 선생님이 메일을 보냈고, 난 즉시 다운받아 음악을 들어봤다.
그리고 불안한 마음은 씻은듯이 사라졌다.
“하!”
입에서 절로 시원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퀄리티인 건 말할 것도 없다. 에너지가 넘치며 산뜻하고 밝다.
누가 이런 음악을 싫어하랴.
다 떠나서 대중들의 마음을 완전히 저격할 수 있는 트렌디한 음악이다.
“최고네.”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다.
이런 걸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기대가 깨져서 기쁠 정도다.
그가 만든 음악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신나고 발랄한 음악이다.
역시 명성은 거저 얻은 게 아닌 모양이다. 옛가수라고 해도 당시 트렌드를 주도했던 만큼, 아직도 감각이 죽지 않은 것 같다.
게다가 운도 좋지.
김별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음악이었으니까.
음악을 듣는 동안 머릿속에 그림이 절로 그려졌다.
그녀가 무대에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관객들에게 불러주는 모습.
팬들은 환호하느라 바빴다.
“이제 여기서 조금만 더 손보면 되겠어.”
가수를 특정하지 않은 음악이기에 수정이 필요하긴 했다.
그러나 그리 많은 손질이 필요하진 않은 듯했다. 이 정도의 감각이라면 별이 노래를 듣고 바로 수정할 수 있겠지.
느낌이 좋다. 일이 술술 잘 풀리고 있어.
그래도 곧장 구태성 선생님께 전화하지는 않았다.
내 마음에 들더라도 김별, 그녀의 마음에도 드는 게 아무래도 더 좋을 테니까.
차에서 내려 바로 연습실로 들어갔다.
보컬 연습을 하고 있던 그녀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곡을 구하러 간댔으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되돌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곡 구했어. 네가 듣기엔 어떨지 궁금해서.”
그녀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좋은 소식에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고, 이어폰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어떻게 들을까?
내가 듣기엔 잘 어울리는데.
별이도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
노래를 불렀을 때처럼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그녀.
바로 옆에 앉으니 긴 속눈썹이 자세하게도 보였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그녀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곡이 다 끝났는지, 이어폰을 귀에서 뺀다.
“이거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한다.
나를 바라보는 깊은 눈동자에선 자신감과 열정이 뒤섞이고 있었다.
“그럼 이걸로 할까?”
“네, 좋아요.”
다행이다.
내 마음에만 들었으면 어쩌나 했는데.
***
그날 바로 미팅을 잡았고, 우린 다음날에 곧바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 옆에 웬 소녀가 있었다.
앞머리가 치렁치렁 길다. 눈을 반 이상 가리고 있다.
기르고 있는 건지, 잘라야 하는데 못 자르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신경을 안 쓰는 건지 모르겠다.
피부도 뽀얗고 얼굴도 동글동글한 게, 앞머리를 걷으면 엄청 귀여울 것 같다. 나이도 별이랑 비슷해 보이고.
‘···나 지금 뭐 하냐.’
이것도 병이다, 병. 직업병이 또 도졌다.
지금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닌데.
“안녕하세요.”
또각또각, 하이힐을 신고 허리를 숙이는 그녀.
중심을 잘못 잡았는지 살짝 비틀거렸다.
구태성 선생님은 그런 그녀를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비죽거렸다.
“딸이에요. 이름은 구서연. 이 곡 만든 작곡가예요.”
이 곡을 만든 사람이라고? 선생님이 아니라?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만만하게 보이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며 마주 바라봤다.
“따님이 쓴 곡이라고요?”
“네. 어렸을 때부터 제가 가르치긴 했는데, 이 곡은 서연이 혼자서 만들었어요.”
비죽거리던 입술이 말려 올라간다. 딸자랑에 기분이 좋은가 보다.
그럴 만도 하지. 어지간히 귀가 까다로운 내게도 굉장히 좋게 들렸으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작곡가님. 김유민입니다.”
‘작곡가님’ 호칭 한 방에 경계태세가 사르르 풀렸다.
입꼬리가 춤을 추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 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작곡가라는 호칭이 그렇게도 좋은가?
앞머리를 걷어내지 않았는데도 충분히 귀엽게 보인다.
“서연이가 아직 작곡가로 데뷔를 못했어요. 많이 부족할 것 같아서 같이 나왔습니다. 데모를 들으면 아시겠지만 아직 수정할 부분이 많고, 가수한테도 맞춰야 하니까요.”
말은 딸이 부족해서 같이 나왔다고 하는데,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을 거다.
이번이 처음이기도 하고. 작곡가의 정체를 확인한 내가 실망하고 생각을 바꿀지도 모르니까.
그거야 아무렴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말의 뉘앙스에서 도움을 줄 것 같은 느낌이 풍겼다는 거다.
온전히 구서연의 힘으로 만든 음악이라지만, 그의 도움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암만 그래도 구태성인데, 이름값이 있지.
구서연은 제 아버지의 말이 이어질 때 불만스럽게 콧잔등을 찌푸렸다.
자신의 곡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게 영 마뜩잖은가 보다.
나와 눈을 마주치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린다.
이번 곡이 발매되면 작곡가로서 데뷔하게 되는 거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눈치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다.
“지금 저희 가수도 연습실에 있으니까 같이 보러 가시겠어요?”
내 말에 그들은 고개를 동시에 끄덕였다.
***
우리 집 근처 연습실에 도착했다.
같이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선생님은 걸음을 멈추고 구서연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 있어. 사장님이랑 계약 관련해서 얘기 좀 하게.”
구서연은 나를 흘끗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선생님은 날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김사장님.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서연이한테 요구사항 있으면 편히 말씀하셔도 돼요. 애가 워낙에 고집불통이라서 제 말은 이제 안 듣거든요. 하하! 딸한테 음악 가르치는 게 생각보다 힘드네요.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지 모르고 충고를 들으려고 하질 않아요. 아마 사장님이 말씀하셔야 현실을 깨닫고 태도를 고칠 겁니다.”
“네?”
“서연이가 또래들보다 수준이 높긴 한데, 사장님이 보시기에도 수정할 부분이 보이긴 하잖아요. 어쩌면 가수한테 맞출 때도 제 고집대로만 할 수도 있어요. 그때는 제 눈치 보지 말고 냉정하게 말씀하셔도 된다고요.”
“아··· 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구태성 선생님의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귀에는 약간만 손보면 될 것 같은데.
뭐, 아직 별이 노래를 안 들어봤으니 지레짐작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우린 짧게 말을 마치고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별이와 구서연이 어색하게 서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의 발소리에 황급히 몸을 둘리는 둘.
“안녕하세요, 선생님!”
“반가워요.”
별이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숙였다. 선생님은 손을 들어올리며 가볍게 인사했다.
대선배 앞이라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선생님은 그녀의 긴장을 풀기 위해 가벼운 질문을 몇 가지 던졌다.
음악은 뭘 좋아하는지, 꿈이 뭔 지, 음식은 뭘 좋아하는지 등등.
별이의 긴장이 조금씩 풀어질 동안, 난 구서연을 몰래 관찰했다.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원래 창작자들은 프라이드가 높기 마련이거든.
제 곡으로 계약을 하러 왔는데, 다른 이가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으면 불만이 있을 만도 하지.
그게 설령 업계에서 높은 대우를 받으며, 자신을 기르고 가르친 아버지라 하더라도.
“목은 다 풀은 것 같은데.”
“네, 선생님. 다 풀었어요.”
별이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대답했다.
“그럼 바로 노래 들을 수 있죠?”
“네.”
“그럼 편하게 불러봐요. 가장 자신을 잘 나타날 수 있는 노래로.”
별이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대선배 앞에서 노래하게 됐으니 얼마나 떨릴까.
난 조금이라도 격려해주기 위해, 눈을 마주한 그녀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가 잘할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녀는 화답이라도 하듯,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과 구서연, 그리고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별이는 내게 불렀던 ‘When We Were Young’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노래가 이어질수록 구태성 선생님의 눈매가 짙은 호선을 그렸다.
마음에 들 수밖에 없지.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애가 요즘 어디에 있다고.
지금 내 표정이 어떨까? 아까 선생님이 딸자랑을 할 때 지었던 표정과 비슷할 것 같다.
자랑스럽고 뿌듯한 심정으로 가슴이 꽉 차오른다.
곁눈질로 구서연도 살펴봤다.
그녀의 반응은 선생님보다 더 심했다.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별이의 노래에 푹 빠져든 모양새다.
이윽고 노래가 끝났다.
구태성 선생님은 빙그레 웃는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자신의 딸이 만든 음악을 부를 가수가 노래를 기똥차게 부르니 기꺼울 수밖에.
선생님은 구서연에게 말했다.
“서연아, 어떻게 고칠 지 대강 감이 오지? 이것 봐. 아빠가 말했잖아. 이것저것 막 넣기보다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니까. BPM을 확 낮추고 브릿지에 숨쉴 틈을 줘야 돼. 지금은 너무 정신없어서 이대로 녹음하면 보컬이 확 죽어버릴 거야. 드럼도 1분까지는 약하게 줘도 되고. 그렇게만 해도 그루브랑 기승전결이 살아날 거야.”
구서연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혀 끝까지 튀어나오려는 말을 가까스로 삼켜내는 게 눈에 보일 정도.
집에 가서 엄청 투덜댈 게 눈에 선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도 그녀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이걸 저렇게 바꾼다고?’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지금의 음악은 별이에게 꽤 잘 어울리는 색깔이었으니까.
그의 말처럼 바꿨다간 아예 곡의 특색까지도 완전히 바뀌어버리겠지.
우리는 그런 변화를 원하지 않았다.
구서연은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성난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아빠, 내가 봤을 땐 그렇게까진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구태성은 코웃음을 치며 나를 바라봤다.
아까 말했던 대로 고집불통이지 않냐는 듯, 공감을 구하는 표정이다.
그런데, 어째 내 눈엔 반대로 보였다.
선생님이 오히려 고집불통 같았다. 딸의 음악에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 한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꼰대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건 딸이 조금이라도 더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인 것 같기도 하다.
선생님이 느끼기엔, 조금이라도 더 좋다고 느껴지는 방향이 저거인 거겠지.
다른 사람도 아닌 딸이라, 개성을 존중해주기보단 자신의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런데.
‘선생님이 이런 장르의 음악을 하진 않았잖아.’
톡톡 튀고, 산뜻하고, 밝은 팝 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었지.
물론 선생님도 밝은 음악을 하긴 했으나, 선생님을 대표하는 곡의 대부분은 운치가 느껴지는 포크송이다.
“서연아. 네가 아직 현실을 몰라서 그러는데, 네 수준이 또래에 비해서 높을 뿐이지, 아직 프로의 세계에선 많이 부족한 면이 있어.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더 성장하는 법이야. 사장님, 사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이분 설명 드렸지? GO엔터에서 엄청 능력 좋기로 소문난 실장님이셨어. 이분이 안목도 좋고 감도 좋으시거든. 이미 시장에서 증명된 분이니까 괜히 반발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잘 귀담아 들어.”
조금 의기소침해진 듯, 혹은 정말 그 말이 맞냐는 듯.
구서연은 침을 꼴깍 삼키며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 시선을 잠시 마주하고는, 별이에게로 눈을 옮겼다.
그녀는 나를 고요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어떻게 하든, 나를 전적으로 믿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얘를 성공시키기 위해선 못할 것이 없겠다.
얘는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내가 주관을 뚜렷하게 해야겠지.
선생님이 아무리 베테랑이라고 해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원했던 건 구서연이 만든 곡이지, 선생님의 명성이 아니었으니까.
“선생님.”
“네. 편히 말씀하세요. 눈치 보지 마시고 냉정하게.”
부드럽게 손짓하며, 은근히 비관적인 의견을 내도록 종용하고 있다.
난 단호하게 말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전 이 곡을 쓴 작곡가님과 작업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아니라 따님 분과만 작업하고 싶다.
이런 내 뜻을 바로 알아챘는지, 그의 미소가 굳었다.
“그 말은···.”
“호의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 도움을 주시고 싶으시면 별이 보컬을 봐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에둘러 거절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고개는 갸웃하면서도 입꼬리는 솟구쳐 올라갔다.
하긴 자기 자식을 치켜세우는 말에, 어느 부모가 안 좋은 반응을 보일까.
거절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일견 벅차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사장님께서 그러시다면 뭐··· 알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조금이라도 잘 안 풀리거나 그러면 언제든지 저한테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 그리고 보컬 봐주는 것도 괜찮고요. 녹음할 땐 특히 더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구서연은 그것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아빠, 됐어. 이제 내가 알아서 할게. 이거 만든 작곡가는 나야. 그리고 사장님도 마음에 들어 하시잖아.”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힘을 실어줬기 때문일까? 기세가 등등하다.
우물쭈물 내 눈치를 보지도 않는다.
선생님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 서연아, 끝나면 바로 연락해. 앞에 있을게.”
“내가 애야? 나 혼자 갈 수 있어.”
자신감을 얻었는지,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펴며 제 아버지를 날카롭게 째려본다.
앞머리가 길어서 그렇지, 자세히 뜯어보면 얼굴 생김새나, 하는 행동이 마냥 귀엽다.
키랑 몸집도 아담하고.
이 정도면 아이돌을 해도 참 좋을 것 같은데.
‘그건 관심사가 아닌가?’
가이드 보컬도 직접 부른 것 같은데, 꽤 잘 불렀다. 무엇보다 음색이 좋았지.
그런데 뭐, 그런 건 저쪽 집안에서 어련히 알아서 할 거다.
아버지가 구태성인데.
난 딴생각을 접어두고선, 최대한 온화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얘기 끝나면 제가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생님. 출발할 때 연락도 드리겠습니다.”
“···그럼, 알겠어요.”
그는 헛기침하며 몸을 돌렸고.
구서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휙-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봤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 얼굴엔 온통 싱그러운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진짜 열심히 할게요!”
< 구태성 딸 구서연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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