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들과 함께하는 연예계 생활-3화 (3/124)

< 요조숙녀가 따로 없네 >

항상 오갔던 계단을 내려가는데, 이곳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마음이 떠났기 때문인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것 같았다.

일 초라도 빨리 나가고 싶어져서 걸음을 재촉했다.

1층에 내려가 로비 문을 나서니, 바깥 바람이 코를 파고들어왔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나는 그제서야 걸음의 속도를 낮추며, 내 차가 주차된 곳으로 향했다.

‘이제 앞으로 뭐 하지?’

가장 하고 싶은 건 당연히 독립이다.

어떠한 부조리도 없이, 마땅히 데뷔해야 할 애들을 데뷔시키고, 그들과 함께 실력에 맞는 마땅한 성공을 거두고 싶다.

물론 현실에서는 실력과 성공이 꼭 비례하는 건 아니다.

최이사와 이수진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견줄 사람이 거의 없는 보컬리스트보다 실력이 없어서 욕 먹는 아이돌 멤버가 더 큰 성공을 거두는 건 이미 지극히 상식이 된 시장이고, 배우의 경우 역시 연기만 좋다고 다가 아니다.

그런데 그건 어쩔 수 없지. 대중들의 선택이니.

문제는 내가 독립했을 경우.

어쩔 수 없는 대중들의 선택에 의해 실패하게 됐을 때, 짊어질 리스크가 너무 크다.

가수 한 명을 데뷔시키기 위해 드는 비용은 대중들의 상상 이상이다.

아이돌의 경우는 그보다 수십 배는 더하지.

가장 싼 건 역시 배우지만, 배우는 회사가 없어도 뜰 수 있다.

그러니 뜰 만한 배우는 내가 차릴 신생 기획사와 함께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됐다.

“음.”

침음성이 절로 나왔다. 회사를 나가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뒤가 문제다.

다른 직장인들 역시 나온 뒤가 막막해서 사직서를 못 꺼내는 거지, 마음 같아선 수백 번도 더 꺼냈으리라.

그렇게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 그때.

익숙한 실루엣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비록 머리가 헝클어져 있고, 땅을 바라보며 비척비척 걸어가고 있었지만.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그녀였다.

‘김별.’

나는 잠시 걸음을 우뚝 멈췄다.

사정은 나와 달랐지만, 그녀 또한 나와 비슷해 보였다.

회사를 나가야 하는데, 나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

걸음을 멈춘 채,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벼락 같이 스쳐 지나가며, 가슴이 쿵쿵 뛰었다.

누군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다.

‘그녀를 붙잡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거냐.’라며.

반대쪽 귓가엔 ‘독립 기획사를 세우는 건 만용이다.’라는 소리가 들리고 있긴 했는데, 그건 흘려듣기로 했다.

멈추었던 다리가 큰 보폭으로 움직였다.

아직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정리가 되지는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지금이 가장 최적의 타이밍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김별 연습생.”

내 목소리에 천천히 몸을 돌리는 그녀.

어찌나 울었는지 예쁜 얼굴이 아주 엉망이 됐다.

“아, 안녕하세요!”

날 알아보고 화들짝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 와중에도 인사성이 너무 밝다.

그리고 그 인사에, 이미 기울어졌던 마음이 조금 더 기울어졌다.

아까 실력과 성공이 꼭 비례하지 않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녀라면 다를 수도 있다.

마땅히 성공을 거둘 수 있을 만한 실력, 그리고 실력만큼이나 특별한 매력과 비주얼.

그녀에겐 모자란 것이 없었다.

또한 나도 있다.

무명 연예인들을 띄우며, 대형 기획사 안에서도 승승장구했던 내가.

난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제안했다.

“혹시 저랑 같이 시작해볼래요?”

불규칙적으로 들리던 그녀의 숨소리가 딱 끊어졌다.

그리고, 불그스름한 입술 사이로 억눌린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그거··· 저 키워주시겠다는··· 말이에요?”

“네.”

가뜩이나 새빨갛게 충혈됐던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리고 고개를 열심히도 끄덕거린다.

아무래도 목이 막혀서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는 모양인데.

“알겠다는 거 맞죠?”

긴 생머리가 출렁일 정도로 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오늘,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몇만 배는 더 큰 것 같네.

나는 그녀를 내 차에 태우고 회사를 나왔다.

집이 어디인지 대충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인적사항을 봤었는데 우리 집이랑 꽤 가까웠거든.

난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묵묵히 운전만 했다.

그리고 숨소리가 안정되었을 때, 말을 건넸다.

“부모님이랑 상담 먼저 하세요. 그리고 허락받으면 내일 같이 그만두기로 해요.”

“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조수석에 앉은 그녀가 힐끗 곁눈질을 하며 말했다.

아직 내가 그리 편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런 건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주겠지.

일단 말부터 놓자.

“알았어. 그리고 허락받으면 나도 한 번 찾아봬서 말씀드려야 하니까, 시간 언제가 괜찮으신지도 여쭤봐. 난 언제든지 상관없어. 내일 당장이라도. 어차피 한동안은 백수일 것 같거든.”

그렇게 얼마나 더 운전을 했을까.

그녀의 집앞에 차를 대고, 핸들에 손을 올린 채 옆을 쳐다봤다.

“잘 들어가고 내일 보자.”

“네.”

대답한 그녀는 안전벨트를 풀지 않았다. 그 위에 손만 올린 채 꼼지락대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녀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인 끝에 말했다.

“그···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서요.”

“같이 회사 나가자고 한 거? 감사할 거 없-“

정면으로 향하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내 쪽으로 향했고.

그녀는 올곧은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뇨. 그냥 다요. 다 감사해서요.”

“아···. 그래. 알았어.”

“그럼 전 들어가볼게요. 내일 봬요.”

제 할 말을 마쳤다는 듯, 꾸벅 머리를 숙인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

다음 날 아침.

사옥을 올라가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믿는 구석이 생겨서 그런지, 내게 쏠리는 날 선 시선들이 산뜻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렇게 회사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다시 회사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사직서를 냈는데, 인수인계조차 안 시키더라고.

날 일초라도 빨리 내쫓고 싶었겠지. 내겐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회사 앞 카페에 들어가 김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벌써 소식이 들어간 건지, 핸드폰 화면에 후배 로드 매니저의 연락처가 떴다.

“···음.”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함부로 전화를 받았다간 귀에서 피가 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중에 연락해야겠다.’

내가 맡았던 연예인들이 앞으로 연락을 할지 모르겠지만, 회사를 그만둔 내게 연락할 직원은 이 후배 한 명뿐.

다른 이들은 없을 것이다.

핸드폰이 짧은 진동음을 반복적으로 냈다.

전화를 받지 않으니 톡이 쏟아지고 있다.

이 톡을 전화로 들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역시 안 받길 잘한 것 같다.

그때 카페의 문이 열리며 눈이 퉁퉁 부은 김별이 들어왔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는 생기 넘치는 눈웃음을 지었다.

여기에 연예인들이 자주 보일 텐데도 불구하고, 카페 안의 소음이 뚝 멎었다.

전부 다 그녀를 바라보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눈이 부었는데도, 그녀가 뿜어내는 빛은 바라지 않았다.

“저 왔어요.”

미소 한 번으로 카페를 화사하게 만들어낸 그녀가 이제 내 연예인이라고 생각하니 뱃심이 두둑해졌다.

그래, 얘랑 함께라면 성공까지 가는 길이 그리 고되지만은 않을 것 같다.

“부모님한테는 잘 말씀드렸어?”

“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말씀드렸어요.”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그치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하면서 내가 좀 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나? 후련해 보이는 모습을 감추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딱히 뭘 하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잘된 일이다.

“그래서 부모님은 언제가 편하시대?”

“아무때나 괜찮다고 하셨어요. 오늘 오셔도 된다고 하셨어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다른 게 문제가 아니다.

그녀를 붙잡고, 부모님께 신뢰를 심어주는 것.

이게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했다.

***

그녀의 집에 가까워질수록 입술이 말라갔다.

만일 부정적인 입장이라면 어쩌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말씀드렸고 허락을 받았다지만, 나하고 대화할 땐 분위기가 또 다를 수도 있다.

대형 기획사에서도 끝에 가서 뒷통수를 맞았는데, 나라고 곱게 보일까?

대형 기획사 신인 걸그룹의 예비 데뷔조에서, 신생 기획사의 유일한 연습생으로.

격차가 극심하니, 내가 부모여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안 내리세요?”

“아, 내려야지.”

그런데 나와는 달리 그녀는 걱정이 없는 듯 편안해 보이기만 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아! 젠장.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지 선물도 못 사왔다.

지금이라도 사와야 하나?

내가 걸음을 멈춘 채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자.

그녀는 이런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눈매를 진하게 휘었다.

“들어가요.”

“···그래.”

선물은 다음에 사드려야겠다.

나는 그녀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의 어머니와 식탁에서 마주 바라보며 앉았다.

김별은 어머니의 옆이 아닌 내 옆에 앉았다.

어머니께서는 그런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내게 물었다.

“어제 별이한테 말은 다 들었어요. 이제 회사를 차리신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아직 마련된 건 없지만 최대한 빨리 기반을 갖춰서 제대로 데뷔시키겠습니다.”

어떤 기반을 마련할 건지, 어떻게 데뷔시킬 건지.

생각해두었던 플랜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을 이으려 했는데.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어머니께서 먼저 입을 열어 물으셨다.

“실장님에 대해선 여러 번 들었어요. 원래 별이가 데뷔하기로 했던 그룹을 담당하기로 했었다고. 회사에서도 엄청 잘나가는 분이라 되게 좋아하면서 말하더라고요.”

이미 전부터 내 자랑을 했었구나.

“엄마.”

김별의 목소리에 어머니는 손을 휘- 저으시며 말을 이었다.

“이미 잘되고 계셨는데 다 뿌리치고 나올 만큼 우리 별이가 잘될 가능성이 있는 건가요?”

모름지기, 부모라면 자식 걱정을 하기 마련.

어머니는 그녀가 얼마나 잘하는지, 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를 묻고 있었다.

난 이에 대해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별이는 연습생들 중에서 재능과 실력이 가장 뛰어났습니다. 데뷔조에서도 별이가 핵심이어서 별이를 받쳐줄 수 있는 멤버들로 구성했었고요. 별이 한 명 빠진 것만으로도 저쪽은 밸런스가 망가졌고 오합지졸이 됐을 만큼 잘합니다. 제가 이번 걸그룹 프로젝트에 들어가면서 별이 월말 평가를 예전 것부터 하나하나 살펴봤는데, 큰 폭으로 발전하는 게 눈에 띄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발전할 게 더 남아 있고요. 별이의 재능은 그만큼 독보적입니다.”

“···그래요?”

“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번 최종평가 때, 별이를 보면서 신기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무표정일 땐 차가워 보이는 고양이상의 얼굴이 웃으니까 아기 같이 순해지기도 하고, 긴장했을 때는 강아지 같아 보이기도 했거든요. 그렇게 유심히 지켜보게 만들고 기억에 남길 수 있게 하는 건 비주얼만 뛰어나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때, 데뷔만 하면 팬들을 쓸어모으는 건 일도 아닐 거라고 확신이 들었습니다. 스타성이 확실하니까요.”

“···.”

“제가 차릴 회사는 걱정이 되시는 게 당연하지만, 별이가 가진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으실 것 같습니다.”

내가 말을 마쳤을 때.

어머니의 시선은 내가 아닌 김별을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푹 숙인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젖어 있었다.

어머니는 헛웃음을 뱉으며 말했다.

“요조숙녀가 따로 없네.”

아래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제 어머니를 찌릿, 째려봤다.

“나만 만만하지?”

작게 혀를 찬 어머니는 다시 나를 바라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여서, 나 또한 긴장의 끈이 느슨하게 풀렸다.

“잘 알겠어요. 아직 밥 안 드셨죠?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네, 잘 먹겠습니다.”

설령 밥을 배터지게 먹고 왔더라도, 지금은 꾸역꾸역 뱃속으로 집어넣어야 할 때였다.

그런데.

‘허락해주신 거겠지···?’

내 앞에 놓여진 고봉밥을 보니, 아마 그런 것 같다.

< 요조숙녀가 따로 없네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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