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
처척.
개방의 소주분타를 지키고 있는 정예들이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대
며 포권을 취했다. 협개 나정호는 평소처럼 가볍게 손을 들어 답례를
했지만 그의 일수 일수에는 강한 힘이 들려져 있었다.
분타에서 각종 정보가 적혀 있는 문서철을 살피던 건곤신개가 벌떡
일어났다.
"방주님. 구장로는 장로회의가 있을 때까지 연금에 처했습니다. 그
리고……."
협개 나정호는 손을 들어 건곤신개의 말을 끊었다. 그가 장로의 말
을 끊었다는 건 이미 결심이 서 있다는 뜻. 건곤신개의 이마에는 자
신도 모르는 주름살이 크게 잡혔다.
나정호의 목소리는 매우 담담했다.
"취장로는 어디 있소?"
* * *
태호에 떠 있는 화선에서 기녀를 옆에 끼고 앉아 술병을 입에 물고
있던 취선개는 뭔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눈알을 굴리며 방금 배에 올
라선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넓은 어깨와 단정한 이목구비.
반짝이는 호목이 일세 영웅의 풍도를 풍겨냈다. 그 풍도에 걸치고 있
는 넝마 같은 옷이 전혀 추해 보이지 않았다. 화선 안에 있던 여러
군웅들은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개방주님을 뵙습니다."
화선에 오른 협개 나정호는 활짝 웃는 얼굴로 일일이 답례를 하며
취선개에게 다가왔다. 취선개는 착 달라붙는 기녀를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 가득히 어색한 미소를 담았다.
"어서 오십시요. 방주님. 여기는 아무 이상 없습니다."
"장로님. 잠시 뵙지요."
담담한 협개 나정호의 말에 취선개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 앞으로
다갔다. 협개 나정호는 어색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중인들에
게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 배에서 훌쩍 뛰어 내렸다. 사람이 물에 빠
졌을 때 당연히 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취선개가 난간에 다가가 밑을 보자 작은 쾌속정이 배 옆에 찰싹 달
라붙어 물결 따라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그 배 위에는 협개 나정호와
건곤신개가 타고 있었다. 취선개는 훌쩍 배에서 협선으로 뛰어 내렸
다. 쾌속정이 화선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과 반비례로 화산의 풍악소
리가 취선개의 귓가를 쟁쟁 울렸다.
취선개는 건곤신개가 던진 노를 잡고 협개 나정호를 올려다봤다.
"어디로 갈까요?"
협개 나정호는 태호 동안을 바라봤다.
"완평객점으로……."
* * *
당표는 오그렸던 가슴을 펴며 협개 나정호를 맞이했다. 개방의 방
주 협개 나정호라면 공명정대한 길을 걷는 백도인사로 증거가 확실하
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공격할 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서오십시요. 방주님."
"당대협께서 여기에 계셨군요. 며칠 뵙지 못해 본 가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헌데 남궁대협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신응표국에 잠시 가셨습니다."
협개 나정호는 당표를 지긋이 바라봤다.
"존덕문과 당문은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당표는 눈을 살짝 굴렸다. 개방 방주가 이렇게 찾아왔다는 건 어느
정도 속내를 알아냈다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자신이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거였다.
"다른 백도 문파와 같은 처지입니다. 대덕기와 덕조령을 받들어 옛
은혜를 값은 것뿐입니다. 그 와중에 돈도 좀 보내 드렸습니다."
"성수환독은 당문에서 개발한 겁니까?"
당표는 떨리는 목소리로 떠듬 떠듬 대답했다.
"자세한 내용은 저도 잘 모릅니다. 신독의 개발은 본 가에서도 극
소수만이 그 내용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협개 나정호는 싸늘한 눈으로 당표를 노려봤다.
"백리가주를 어찌 생각하십니까?"
당표는 숨이 콱 막혀왔다. 이 한마디에 대한 답이 자신의 생사를
좌우함은 물론 당가의 앞으로 행방에 중대한 변수가 될 수 있는 문제
였다. 당표는 파리한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그게 저. 어쨌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분이라고 생각됩니
다."
협개 나정호는 당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거칠게 잡은 손아래 당
표의 어깨가 떨고 있는 진동이 느껴졌다.
"당대협께서 이 몸을 도와준다면 저도 당대협을 도울 수 있을 껍니
다."
"제가 도움이 되는 일이 있을까요?"
* * *
소주 신응표국으로 향하는 대로변 골목의 주위로 삼삼오오 거지들
이 모여 이를 잡아댔다. 톡톡 터지는 이의 뱃살을 보며 개방도들은
히죽 웃음을 흘려댔다. 신응표국을 오가던 사람들의 발자취가 점점
작아지더니 종내에는 뚝 끊겼다.
정문을 지키던 표사들은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이 시간에 거
리가 텅비자 가슴이 쿵쾅거려 안으로 급히 보고를 했다. 잠시 후 몇
명의 표두가 거리로 뛰쳐나와 사방을 살피고 급히 표국 안으로 들어
갔다.
신응표국의 정문으로 표국주 신응 오응원을 필두로 무당파의 장로
일송자와 사질 청송자, 소림사의 혜심대사, 남궁세가의 남궁천기가
어색한 얼굴로 나왔다. 이들의 시선이 동편에서 다가오는 세 거지에
게 맞추어졌다.
세 명의 거지가 허리와 어깨를 쭉 피고 번쩍이는 눈빛에 당당함을
담고 힘있는 걸음으로 신응표국으로 다가갔다.
표국주 신응 오응원이 한 걸음 나가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읍했다.
"개방주님과 두분 장로님 어서 오십시오."
협개 나정호는 가볍게 응대하고 혜심대사와 일송자를 노려봤다.
"소림과 무당파에 따질 것이 있어 왔소이다."
일송자가 수염을 길게 쓸어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무량수불. 방주께서 물으실 게 있다면 성심 성의껏 답변을 해드리
지요. 허나 아는 게 적어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온화한 대답이었지만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은 없었다. 이는 천하
대방인 개방의 방주를 대하는 예의가 아니었지만 개방이 비례로 나오
니 무당파인들 예를 갖출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협개 나정호의 굵은 목소리가 신응표국의 현판을 흔들었다.
"두 분의 대답에 따라 차후 강호에 피 바람이 일 수도 있음을 유념
해 주시오."
일송자의 입술을 살짝 비틀렸다. 이는 소림사와 무당파에 대한 일
종의 도전이었다. 허나 일송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모르겠으니 자세한 하교를 바랍니다."
"창왕 언무외 선배님과 백리가주, 그리고 본 방의 태상장로님을 존
덕문에 투입하게 한 원인과 지금 와서 이 세분을 모른 척 하며 자파
의 실리만 챙기는 속사정을 알고 싶소."
일송자는 발끈 하려다 지금까지 소림사의 혜심대사가 단 한마디 말
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다. 혜심대사는 반개한
눈에 염주를 하염없이 굴리며 염불만 해댔다.
'소림사가 관련이 있는 일이었나?'
일송자는 가슴에 이는 폭풍을 잠재우고 제 삼자의 입장에 섰다. 소
림사가 무슨 일을 벌렸다면 무당파로서도 그냥 지나 칠 수 없는 일이
었다. 일송자가 살짝 옆으로 물러나 혜심대사를 바라보자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혜심대사에게 모아졌다. 혜심대사는 눈을 내리감고 고
요히 세심경을 독송하기 시작했다. 홍사옥이 듣고 싶어했던 그 세심
경이었지만 법창은 아니었다.
남궁천기는 속이 확 데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들만의 조직이
라고 생각한 존덕문과, 반혈맹, 동정상회를 잇는 선이 실제로는 소림
사에서 파견한 고수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에 식은땀을 줄줄 흘러 내렸
다. 하기사 창왕 언무외나 풍개 견로자, 백리무군을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천하에 소림을 제외하고 또 어디가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이들
모두 소림과 황하를 따라 동서의 연장선상에 있는 문파의 인물들이었
다.
남궁천기는 본 가가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
졌다.
* * *
낮게 깔린 구름이 산의 경계선을 따라 안개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
었다. 안개가 살짝 걷히고 내려앉음에 따라 이슬에 젖어 가는 흑의인
들의 움직임이 드러났다 감추어졌다. 이들의 모습은 하늘에서 낸 천
병 인 양 한번 드러날 때마다 능선과 계곡을 달리했다.
선두의 움직임이 약간 어지러워진 후 안개 속으로 사라지자 뒤따르
는 이들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검은 장갑이 나뭇가지를 살짝 내리자 산 속에 폭 파뭇힌 듯한 작은
암자가 눈에 들어왔다. 새벽 안개가 향화처럼 피어오르는 암자의 지
붕위로 고요한 독경소리가 은은한 서기를 뿜는 듯 했다. 암자의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유정암(有情庵)이라는 글자가 이슬에 젖어 그 음각
을 더욱 선명히 했다.
흑의인은 품안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명단을 확인했다.
<유정암(有情庵).>
슥.
명단 위에 손이 스치고 검은 선이 그어졌다. 그의 손이 좌우로 흔
들리자 사개 조 팔 명이 좌우 고지대로 산개 했다. 수하들의 좌우 산
개와 거점장악을 살핀 후 손을 앞으로 두 번 까딱였다.
삭.
서늘하게 뽑힌 검날을 타고 열 두 개의 그림자가 땅에 낮게 깔려
암자로 밀려들어갔다. 독경소리가 약간 높아지며 잠시 평탄을 잃었
다. 그 순간 땅을 타고 나가던 흑기령주의 몸은 땅에 바로 밀착 됐
다. 슈슛. 수십 개의 비도가 흑기령주 주위에 내려 꽃히고 암자의 정
문이 폭발하듯 터저 오르며 십 수명이 방편산과 선장을 휘두르며 날
아 내렸다. 선두에 서 있는 나한 같은 승려가 눈을 부라렸다.
"왠 놈들이냐?"
"존덕문!"
흑기령주의 일갈에 승려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들의 반응에 흑
기령주는 주저 없이 손을 뒤집었다. 순간 그의 손 등 위로 물총새가
날개 짓을 하며 날아오는 듯한 착각이 모두의 눈에 잡혔다. 그건 흑
기령주 하나 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것은 빛살이었다. 그리고 바람이었다. 허공을 가득 수놓은 파랑
이었다. 승려들. 아니 존덕문의 숨겨진 최정예들이 그것을 느꼈을 때
는 환살비의 광휘가 천지를 뒤 덥었다. 잠자리의 날개가 사방으로 퍼
져나가며 무지개를 뿌리는 듯한 환상이 이들을 뒤덮었다. 그 황홀함
에 정신을 잃고 생명을 바친다는 마가의 전설이 드디어 이 땅에 다시
재림한 것이다.
승려들은 선장과 방편산을 발악적으로 휘둘렀다. 이들의 움직임에
따라 거세게 이는 선풍이 환살비들이 더욱 높고 넓고 깊게 퍼지게 했
다. 불의 검이 지나간 듯 베어진 부분에서는 핏물 터저 올랐다. 그것
은 하나의 피막을 형성하였다. 푸푹. 무언가 꽃히는 듯한 소리. 그리
고 몇몇 사람들의 등뒤에서 튀어나오는 붉은 막.
흑기령주는 쓰러지지 않은 자들을 헤집고 다니며 검을 그었다. 빙
그르 그들의 검이 스침에 따라 승려들의 몸은 반원을 그리며 돌다가
차가운 땅에 누웠다.
흑기령주의 시선이 좌측 산 능선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작은 소
란과 함께 하나의 수급이 살짝 공중에 띄워졌다가 내려앉았다. 비밀
통로를 통해 도주를 하려던 자를 잡은 것이다.
흑기령주는 검을 거두며 발길을 재촉했다.
이 암자의 비밀통로나 은신처에 한 두 명이 숨을 죽이고 있을지 몰
랐다. 하지만 그들을 찾아내어 죽이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존
덕문이 자신들의 급습을 알아채기 전에, 선우대덕이 태행산맥으로 들
어오기 전에 태행산맥 천 여리에 걸쳐 흩어져 있는 존덕문의 비밀 분
타과 고수들을 최대한 많이 제거해야 했다.
* * *
촤라락.
수십 개의 칡 덩쿨 같은 사슬이 그의 몸을 휘감아 돌았다.
"끄아!"
단전에서 터저 오른 공력이 사지백해로 흩어지며 사슬을 끊어내며
양팔로 선풍을 일으키며 사방에서 날아드는 검을 휘감아 돌렸다. 이
대로,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오늘을 위해 태행산맥의 심처에서 뼈
를 깍고 살을 다지는 수련을 한지 수십 년. 이렇게 허무하게 정체도
모르는 자들에게 피를 뿌리고 쓰러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 개의 검날이 그의 손을 타고 옆으로 흐르는 것을 느끼며 그는
주저 없이 청의인의 가슴을 격타했다. 퍼걱. 청의인이 가슴이 터지면
서 작은 세침들을 뿌렸다. 시원한 감각이 손을 타고 목까지 급격히
올라왔다. 목이 자신도 모르게 굳어지며 뻣뻣하게 굳은 혀가 목을 막
아 숨을 쉬지 못하게 했다. 가슴에 가득 찬 화기가 빠져나가지 못해
그의 몸을 태우려 할 때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배를 타고 밀려들어
왔다. 화기가 몸 속으로 급격히 빠져나가며 그의 눈동자가 뒤로 뒤집
혔다.
청기령주는 그의 시체를 밀고 가슴을 손으로 털었다. 청룡갑이 터
지며 찢어진 옷자락이 손에 걸려 칼로 슥슥 오려 내었다. 그 사이 수
하들은 주변을 돌며 확인사살을 실시했다.
"가자. 시간이 없다."
"존명."
이십 명의 청기령은 바람을 타고 북상했다. 다섯 줄기의 진격대오
는 태행산맥을 타고 바람보다 더 빠르게 북상하며 했고 이들이 지나
간 자리에는 시체만이 남았다.
* * *
기치창검이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대는 존덕문의 총단으로 창검을
휴대한 사냥꾼, 화전민, 심마니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정문을 지
키는 호위무사들은 이들의 출입을 제지하기는커녕 공손히 받들기 분
주했다.
청룡장을 치기 위해 전 무사들이 남하하여 텅 비었던 오전 칠각의
대전각과 군소전각, 객방들이 이들로 점점 메워져갔다.
정원이 가득 찬방과 전각에는 작은 삼각 깃발이 하나 둘씩 올랐고
어느새 존덕문의 정문 성벽 위에는 거대한 현무도가 살아 있는 듯 펄
럭였다.
현무도의 깃발이 거세게 흔들리고 정문을 지키는 무사들의 몸이 날
아 갈 듯한 폭풍이 잠시 이는 듯 하더니 깡마른 수수깡에 옷만 걸쳐
놓은 듯한 노인이 듬성듬성 빠진 회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급히 정문
을 돌파했다.
정문을 지키는 수문장은 그 모습을 흐릿하게 보고 중문을 향해 날
아가는 모습에 급히 궁례를 취했다. 그는 바로 존덕문의 태상호법중
한 명인 풍멸이었다.
존덕문의 중앙대전이 거칠게 열리며 풍멸이 급히 날아 내렸다. 수
십 개의 의자 사이에 간간히 보이는 빈 의자가 시선을 확 끄는 대전
에는 선우삼현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선우삼현은 아무 기별 없
이 들어온 풍멸을 탓하지 않고 급히 물었다.
"남쪽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여성(黎城)아래의 주요조직은 모두 전멸했소."
선우삼현의 눈이 부릅떠졌고 대전을 가득 메운 이들은 헛 바람을
가득 켰다.
"그럴 리가. 아무리 급습을 당했다지만 여성(黎城)까지라면 그 전
력이 만만치 않은데……"
"각개격파!"
풍멸의 한 마디에 대전에 모인 이들은 가슴에 추를 단 듯 했다. 선
우삼현이 눈을 깔고 생각에 잠기려 하지 풍멸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여성까지 밀고 온 자들은 소수 정예로 기습의 실익을 챙긴 것이
오. 이제 저들은 기습의 이점을 잃었고, 우리는 여기 이 만큼 모였으
니 승리는 우리의 것이오."
풍멸의 말에 모두들 짐을 내려놓는 듯한 상쾌함이 밀려왔고, 서로
의 얼굴과 자신들의 인원을 확인하면서 가슴속에 뿌듯함이 차 올랐
다. 이 정도 전력이라면 그 어떤 곳과 정면 대결을 해도 충분한 승산
이 있으리라.
"그보다 급한 것이 극락사(極樂寺)이오."
"극락사라니요?"
"극라사에서 정기적으로 와야 하는 연락이 오늘은 오지 않았소."
선우삼현은 가슴의 한 구석이 철렁 무너짐을 느꼈다. 오늘 새벽에
받은 급보에 극락사를 챙기지 못했다는 실책에 대한 자괴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선우삼현이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본 풍멸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극락사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꿈을 접고 다시 어둠 속에
숨어들어야만 하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애벌래가 되어서 말이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정예 일 백을 이끌고 극락사 쪽으로 가보겠소. 만약 적이 극
락사를 유린하고 남하 중이라면 그 병력으로 전선을 형성해 보겠소."
대전 중에서 한 명이 회의적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기 현재인원이 채 사 백이 안 되는데 거기서 일 백을 빼낸다면
총단방어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풍멸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선우삼현의 옆에 앉아 있던 광도(狂
刀)가 두꺼운 왼쪽 눈두덩이를 치켜올렸다.
"여기를 지키고 있으면 우리야 안전하겠지만 다른 형제들은 어찌
되겠는가? 그리고 적이 여산까지 왔다고 하더라도 여기까지 오는 데
사흘은 족히 걸릴 터. 그 시간이면 충분히 극락사까지 갔다고 오고도
남음이 있네."
"그렇기는 하지만 전황이라는 것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 아니
겠습니까?"
풍멸이 고개를 끄떡였다.
"자네 말이 맞네. 그럼 내가 먼저 극락사를 살피고 올 테니 광도
자네가 정예를 이끌고 천천히 뒤 따라 오게. 극락사에 무슨 일이 있
다면 바로 응원을 요청하겠네. 별 일이 없다면 여기와 극락사의 중간
쯤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니 바로 회군한다면 총단에 별일이 없을 것
이야."
두 태상호법이 이렇게 말을 하자 그는 더 이상 의견을 제시하지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선우삼현은 둘의 말을 잠시 생각해 본 결과 타
당하다고 생각하여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두 분께서 수고를 해주십시오. 힘이 드시더라도 시간이 없으
니 일을 빨리 빨리 진행 해주셔야 합니다."
"알겠소."
풍멸은 고개를 까딱이고 바람을 휘감아 올리며 대전을 떠났다. 광
도도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는 듯 하더니 대전 안에서 이십여 명을 손
가락으로 찍어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이들이 나가자 원래 빈자리가 있
어서 인지 대전에 있던 사람들이 반으로 줄어 든 듯한 느낌이 들었
다.
선우삼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빨리 빨리 와 주십시오. 더 이상 큰 손실을 입기 전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