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의 이상함에 귀왕은 남가왕이 눈을 내려감은 채 의자에 비스듬
이 누어 잠을 청하는 듯한 모습으로 손을 늘어뜨린 것을 힐끗 보고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백의인은 단정히 묵은 검은 흑발에 약간 붉게 상
기된 뺨을 가진 중년인이었다. 고요히 가라앉은 두 눈은 매우 반짝였
다.
적혈마군은 도를 집은 손이 자신도 모르게 풀어지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편안하다.'
적천마군은 몸을 크게 휘청이며 그대로 무릅을 꿀고 머리를 조아렸
다. 적혈마군은 적천마군과 백의인을 눈동자만으로 번갈아 보며 잠시
주저했다. 저 백의인이 누구기에 적천마군이 오체투지를 한단 말인
가.
귀왕은 독조를 천천히 뽑아내며 백의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백의인은 성큼성큼 걸어 태사의로 향했기 때문에 대청의 중앙을 지
나야 했다. 여섯명의 절세고수들의 포위망 한 가운데로 자신해서 걸
어들어가는 형국이 되었다. 백의인의 옆모습을 본 적혈마군의 뺨이
새파랗게 질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귀왕은 적혈마군이 떠는 모
습을 보고 주춤물러나며 독조로 가슴을 보호했다. 악인마군과 지옥마
군은 적혈마군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 채 백의
인과 적천을 한 눈 안에 두었다.
남가왕은 실내의 상황과 무관하다는 듯이 의자에 기대어 누운 상태
로 손만 살짝 오무렸다.
백의인은 태사의 앞에 가서 몸을 돌렸리자 적혈이 움직였다. 순간
적으로 악인마군과 지옥마군이 백의인을 노리고 날아들었고, 귀왕의
눈빛이 새파랗게 빛났다.
"삼맹주님을 뵙습니다."
오체투지한 적천의 외침에 백의인의 코앞에까지 날아간 악인마군과
지옥마군은 공력을 급히 거두고 천근추의 공력으로 바닦에 몸을 떨어
뜨렸다. 몸이 전체적으로 바닦에 부딪치며 옆으로 한바퀴 굴러 그대
로 오체투지했다. 적혈마군도 꿈에서 깬 듯 몸을 돌려 오체투지했다.
막 손이 펼쳐지던 남가왕은 벌떡일어나 백의인을 노려보았다. 귀왕
은 남가왕의 손이 펼쳐진 것을 보고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백의인
은 소매가 펄럭이자 허공에서 새파란 불꽃이 확하고 타올랐다. 백의
인은 그 불꽃을 보며 태사의에 앉았다. 남가왕의 하얀 얼굴이 푸들푸
들떨리면서 창백해졌다.
"명왕독을 내가공력으로 태워 버리다니..."
백의인은 고요한 눈길로 사대마군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귀왕은 독
조를 손톱밑으로 말아 넣고 포권례를 취했다.
"삼맹주님께서 대공을 성취하신 것을 경하 드립니다."
남가왕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혈마를 위아래로 천천히 살펴 보
았다.
"미 믿을수가 없어. 저 정말 당신이 그때 그 혈마란 말이오?"
혈마는 남가왕의 푸른빛이 감도는 눈을 주시했다. 남가왕은 마른침
을 꿀꺽 삼켰다. 혈마는 살짝 고개를 끄떡였다. 남가왕의 후들거리는
두 다리가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 의자에 깊이 묻은 옷이 축축이 젖
은 등줄기와 달라붙어 끈적거림을 더했다.
남가왕은 얼른 혈마 앞에 고개를 숙이며 계산을 마쳤다.
"전에 언급하신 사천과 광서의 패권에 대해서 확약을 듣고 싶습니
다."
남가왕이 현재 사천과 광서에 세력을 뻗힌 것은 어디까지나 묘족의
규합과 군소문파의 흡수정도였다. 아직 이 일대의 정사양도의 대 문
파들에 대한 복속은 요원한 일이었다. 특히 사마외도로 치부되는 문
파들은 직간접적으로 삼혈맹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삼혈맹의 허락
없이 이들을 흡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혈마는 고개를 살짝 끄떡였다.
"내 이름으로 허락한다."
남가왕은 가볍게 읍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혈마는 어느 한 명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지만 귀왕과 남가왕, 사대마군은 모두 혈마가 자
신만 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존덕문을 친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혈마는 가볍게 몸을 세웠다. 사대마군도 일어
났다. 혈마의 한 걸음이 떼어지자 흡사 앞에 붉은 수막이라도 있는
듯이 두 눈부터 붉게 물들더니 얼굴과 머리카락, 손과 옷마저 새빨갛
게 타올랐다. 사대마군은 가슴이 진탕되며 피가 끌어올랐다. 귀왕은
약간 씁슬한 안색을 했고 남가왕은 여전히 불신의 눈빛을 띄었다. 혈
마의 발 걸음이 살짝 떼지는 듯 하더니 어느새 전각을 벗어났다.
주춤거리는 남가왕의 귓가에 귀왕의 전음이 들려왔다.
"남가왕. 그냥 남아있을 것이오?"
남가왕은 귀왕의 전음에 사대마군의 뒤를 따라 대전을 나갔다. 귀
왕은 대전을 한번 훑어 보고 마지막으로 문을 나섰다.
이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혈유가 이륜거를 끌고 대전으로 나왔다.
"청룡장이 대덕을 추적하며 북상중이라는데 좀더 기다리셨던 것이
더 낳지 않겠습니까?"
"대덕은 섣불리 상대할 자가 아니다. 네 말대로 했다가 일이 잘못
됐을 경우 각개격파를 당할 수 있다."
혈유는 마음속으로 승복하지 않았지만 더 따져 묻지 않았다. 아버
지는 지금 초조해 하고 계신 것이다. 돌다리도 두드려가며 일을 진행
시켜 확실히 대덕의 목줄을 따야 할만큼 그에 대한 우려를 앉고 있는
것이다.
혈종 악구패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집었다.
"동생은 떠날 생각인가 본데 네 생각은 어떠냐?"
혈유는 잠시 침묵했지만 곧 입을 열었다.
"독립을 했으면 합니다."
"동생도 없이 삼혈맹을 이끌 자신이 있느냐?"
"백련교의 이상은 저나 본 맹에 맞지 않습니다."
"알았다. 이번 일만 끝나면 모든 대권을 네게 넘겨주고 나는 교로
돌아가마."
"고맙습니다."
"부자간에는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
"우리도 천천히 움직여 보자꾸나."
"알겠습니다."
혈유는 이륜거를 천천히 밀며 대청을 벗어났다. 그 뒤로 두 명의
노인이 흐릿한 형체의 상태로 뒤따랐다.
시골 농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지막 연기를 한 모금 들어 마셔 몸
을 녹인 바람은 산 속 계곡으로 들어서면서 점점 차가워 졌고 오래된
공동묘지 위를 지나면서 더욱 얼어붙었다.
공동묘지 위를 지나던 바람은 인기척에 놀라 머리를 쭈뼛 세우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죽은 체 했다. 공동묘지의 윗자리는 잡초가 무성
하고 봉분마저 무너진 무덤 십여기가 을씨년 스럽게 자리했다.
해가 점점 기울어져감에 따라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떠
돌이 약재상, 곡마단, 상인, 거지 몰골을 한 자들이 각기 자기 몰골
에 맞는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이들은 각 집단별로 일정한 방향으로
경계의 눈초리를 쏘아 보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자 각 집단마다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고 무덤을
도굴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도굴하는 삼십장 정도 떨어진 숲에는 수
십 명씩 무리를 이룬 자들이 삼각형을 두개 역으로 겹쳐 놓은 듯한
모습의 육망진(六網陣)을 친 채 사방을 감시했다.
무덤 윗 부분에 사람 머리통이 하나 들어 갈 만한 굴을 파내고 몸
이 날렵한 한 명이 그 굴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잠시 뒤에 굴 안에
서 가죽에 돌돌 말린 긴 물건들이 밖으로 나왔다. 무덤 하나에서 삼
십개의 가죽 보퉁이가 나오자 무덤 안으로 들어갔던 이들이 고개를
내밀고 굴 밖으로 빠져 나왔다. 밖에 있던 자들은 굴 입구를 메꾸고
잡초와 덩쿨로 위장을 하였다. 위장이 끝나고 서로 교차해서 다른 무
리의 위장상태를 살피고 손질을 해주었다. 이렇게 두 번을 하자 사람
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사라졌다.
무덤 앞에 도열한 이들은 각기 긴 가죽 보퉁이를 자신 앞에 펼쳐
놓았다. 보퉁이 안에는 긴 장도와 암기주머니, 용도를 알 수 없는 검
고 작은 상자와 가죽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의 눈을 끄는 피빛
혈의가 달 빛 아래 핏물을 흘릴 듯 눈을 자극했다.
이들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가죽 위에 개어 놓은 다음 복
장과 무장을 갖추었다. 완벽한 혈의인들로 변한 자들은 벗은 옷과 소
지품들을 가죽 보퉁이에 넣고 등에 걸머졌다. 세 무리가 복장과 무장
을 바꾸는데 걸린 시간은 채 한식경이 되지 못했다.
장도를 든 혈의인 한 명이 앞에 나가 달빛을 바라보고 있는 자에게
다가갔다.
"대군 삼혈단은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달을 올려다 보고 있던 자의 돌려지자 오른쪽 뺨에 난 검상이 한
눈에 확 들어왔다. 오른쪽 뺨에 난 검상이 사람의 시선을 끄는 그는
삼혈맹의 오대마군의 수좌인 적천마군이었다.
적천마군은 고개를 끄떡였다.
"가지"
적천마군이 한 걸음을 떼자 삼혈단원들이 숲 좌우로 뛰어 들어 그
모습을 감추었다. 단지 적혈마군만 적천마군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대군"
"나도 모른다."
적혈마군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맹의 총단이 붕괴 될 때도 움직
이지 않았던 삼혈단이었다. 대맹주가 광적으로 키운 삼혈단. 어찌 보
면 삼혈맹의 역사는 삼혈단을 키우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혈마군은 그 과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사
태가 더욱 의문스러웠다. 존덕문이 무엇이기에 이리 급격히 움직인단
말인가.
"며칠은 백도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있지만 열흘이 지나면 이들의
존재를 어렴풋이 나마 눈치 챌 겁니다."
"적혈."
"네."
"내가 받은 명령을 알고 싶나?"
적천마군은 오대마군의 수좌로 유사시 다른 사대마군의 생사여탈권
을 쥐고 있었다. 적혈은 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지금쯤은 자네도 알아 두는게 좋겠지."
둘은 어느새 공동묘지를 빠져나와 소로길을 따라 밤이슬을 맞으며
걸었다.
"이번 전투에서 살아 남으면 맹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적천마군의 담담한 어조에 적혈마군은 그 자리에 못이 밖힌 듯 멈
추어 섰다. 경악으로 물든 그의 얼굴은 더욱 새파래져서 무덤을 막
뛰처 나온 시체 같았다.
"사 살아 남는다니요. 그리고 맹을 떠나라니……. 삼 맹주님께서
진정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리 셨습니까?"
"삼 맹주님이 아니다."
"그럼."
"대맹주님 이시다. 그리고 떠나라는 명이 아니라 떠나도 좋다는 허
락이었다."
적혈마군은 너무 놀라 적천마군의 뒷말은 듣지 못했다. 삼혈맹이
생긴 이래 패배라는 말은 입밖에 내지도 못했고 실제로 기나긴 백도
와의 투쟁에서 패했다고 생각한 전투는 없었다. 총단이 무너질 때에
도 사대마군은 패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작전에 의해서 던
져진 사석이라고 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패배도 아니고 살아
남기를 바라며 그 대가가 맹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이라니. 그런 허락
을 받느니 차라리 전군옥쇄하라는 명령이 더 쉽게 받아질 수 있을 것
이다. 맹은 자신의 고향인 것이다.
"양대 봉공과 함께 공격하러 간 지옥마군과 악인마군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직 모르는 게 좋을 꺼다. 그리고 양대 봉공은 언제라도 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자들이다. 잊지 말도록."
"알고 있습니다."
"적혈 명이 하나 있다."
"네. 하명 하십시요."
"살아 남아라."
적천마군의 마지막 말에 적혈마군은 더 이상 놀라지도 않고 이상하
게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혼이 없는 시체처럼 적천마군의 뒤를 따
를 뿐이었다.
/////////////////////////////
초심의 마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막간산, 동천목산, 서천목산에 집결해 있던 신비인들이 급히 남하
중. 신비인들의 행적으로 보건대 그간 알려져 있던 세력은 아닌 것
같음. 태호 분타.>
<청룡장의 금화지단 휘하 분타를 이끌고 북상 중. 전 전력 동원 전
에 없는 대대적인 작전 같아 보임. 금화 분타.>
<청룡장의 일개 당이 황산으로 오고 있음. 청룡장 황산 분타 급격
한 움직임을 보임. 황산 분타.>
<신비인들 추적간에 수십 명씩 모여 든 자들을 발견. 정체 확인하
겠음. 특수 추적 일조.>
<긴급. 군(軍)으로 추정 됨. 본 방에 영광이. 특수 추적 일조.>
<신비인들 청룡장의 황산 분타를 우회했음. 청룡장 더 이상 추격하
지 않고 병력을 물림. 황산 분타.>
<특수 추적 일조의 사체 두 구 확인. 적들을 추적하겠음. 특수 추
적 오조.>
<황산을 벗어난 신비인들 경덕진으로 이동 중. 경덕진 분타에 넘
김. 황산 분타>
강동의 각 분타와 장로의 직권으로 동원한 특수 추적조들이 보내온
전서들을 차례대로 배열 한 건곤신개는 입술에 난 잔주름들을 오무리
며 눈을 파랗게 떴다. 각 분타가 신비인들이라고 지칭한 자들은 존덕
문도일 것이다. 이들은 아직 강호상에 정식으로 개파한 상태가 아니
었기 때문에 일반 분타 제자들까지 그들의 신분을 알지는 못했다.
"태호 북쪽에서는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는가?"
옆에 시립해 있는 개방 소주 분타주는 복날 주인이 점찍은 개처럼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유능한 걸개들을 보냈으니 곧 소식을 물어 올 껍니다."
건곤신개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그는 강동에 도착하기 전에 강동의
각 분타에 비밀명령을 내려 분타내 문파와 무장세력의 움직임에 대해
서 실시간으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와는 다른 명령계통을
통해 특수 추적조를 운용 분타 연락망을 통하지 않고 자신에게 직접
비선(秘線) 보고를 하게 했다.
이 명령에 따라 태호 남쪽의 각 분타와 특수 추적조에서는 명령이
실시간으로 보고되었다. 하지만 태호 북쪽의 각 분타와 특수 추적조
는 아무런 보고도 보내오지 않았다. 태호 북쪽에 아무 일이 없다면
아무 일이 없다는 보고라도 보내 와야 했는데 그 마저도 없는 것이
다.
개방의 연락망이 이렇게 교란되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큰 일이 태
호 북쪽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좀 전에 남궁천기가 와서 넌
즈시 주변 상황을 물을 때는 별일 없다는 식으로 돌려대기는 했지만
그의 가슴은 평온을 되찼지 못했다.
정보는 필요 한 때에 손에 있어야 한다. 일이 이미 일어난 뒤에 들
어오는 정보는 사후약방문을 벗어나지 못하는 법. 건곤신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청룡장의 소주지단의 움직임은 어떠한가?"
"매우 평온합니다. 단지 강동 각지의 호족들과 유림, 거상들이 소
주로 급거 들어온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청룡장과의 접촉이 있었는지
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청룡장에서 백도를 상대로 피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건 아닌 것 같
은데……."
잠시 생각을 하던 건곤신개는 무릅을 쳤다.
"존덕문! 내가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 까. 청룡장과 존덕문 이
둘이 꼭 소주에서 붙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건곤신개는 황급히 탁자를 헤집으며 몇 장의 전서를 헤집었다.
"막간산과 동, 서천목산에 집결한 신비인들이 존덕문도면 이야기가
된다. 태호에서 신비인들이 움직인 시간과 청룡장의 대응 속도를 따
져 본다면 일의 선후와 양측의 속셈을 어느정도는 파악 할 수 있다.
여기서 태호 북쪽에서 언제 일이 벌어졌는지 그 파급이 어디까지 미
칠 것인지 지금 파악해야 한다. 늦으면 여기 모인 백도의 주력이 그
물망에 갇힌 어군 꼴이 될 수도 있다."
건곤신개는 전서들을 시간상으로 나열하며 한 장의 종이에 빠르게
옮겨 적었다. 그 전서의 내용 옆에는 전술 전략적 이동과 가치에 대
한 짦은 주평을 달았다. 흩날리는 먹물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별로 개
의치 않았다. 몇 장을 급히 써 내려간 건곤신개는 자리에서 벌떡 일
어났다.
"방주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물살이 철썩이는 태호가를 따라 바람의 흔들림이 갈대 위를 스쳐
지나갔다. 바람이 잠시 머무른 곳은 태호 가에 작은 부두를 끼고 있
는 십여 호가 간신히 넘는 어촌마을 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마을은
매우 조용해서 간혹 들리는 기침소리만이 폐촌이 아님을 알렸다.
마을 입구에 내려선 두 발 위로 긴 줄이 엉킨 호로병 하나가 흘러
내렸다. 그가 흩어진 머리카락을 어깨 위로 살짝 넘기자 흐릿한 달빛
이 굵은 얼굴선을 따라 흘렀다. 개방의 태상장로 풍개 견로자였다.
좌우를 살피던 그는 가볍게 왼 발을 반 바퀴 돌리고 마을을 가로지
르는 대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풍개 견로자는 한 눈에 담은 마을
을 확인했다. 매복은 없었다.
몇 걸음을 떼던 풍개 견로자의 발걸음이 작은 싸립문 앞에 멈추었
다. 문 좌우로도 얇고 긴 싸릿대가 엉성하게 엮여 담을 형성했다. 그
의 시선이 문을 넘어 반쯤 열려 있는 쪽문에 다다랐다.
달빛이 흘러 들어가는 쪽문을 타고 문턱에 기대어 있는 노인의 멍
한 눈에 크게 확대되어 풍개 견로자의 눈썹을 파르르 떨게 했다.
"언형."
노인의 손이 느릿하게 들려지며 초점이 살짝 모였다가 다시 흩어졌
다.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달빛을 타고 걸렸다.
팡.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싸립문이 산산조각이 나 허공으로 떠올랐다
가 눈처럼 흘러 내렸다. 풍개 견로자는 땅으로 한치 정도 들어간 발
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며 진각(震却)의 수법으로 땅을 굴렸다. 엷은
흙먼지가 땅에서 올라오는 안개처럼 주위를 뒤덮어 풍개 견로자의 발
을 가려주었다.
풍개 견로자의 상체가 얼음 위를 미끄러져 가는 바람처럼 쪽문에
다가갔다.
노인은 문턱을 손으로 잡고 상체를 반쯤 문 밖으로 빼내다가 힘에
겨운 듯 문설주에 몸을 기댔다. 낡은 적삼이 수수깡에 걸친 듯한 노
인의 메마른 입가가 작게 비틀렸다.
"견형."
풍개 견로자는 노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오? 천하에 창왕 언무외가……."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는 노인이 바로 전 백도가 삼혈맹을 치기 위
해 남령산맥으로 진격하던 도중 부러진 창만 놔두고 실종한 창왕 언
무외였다.
풍개 견로자는 급히 창왕 언무외의 맥문을 잡았지만 공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풍개 견로자의 얼굴이 급격히 사그러지며 양 눈이
파르르 떨렸다.
"혈마에게 당한 것이오?"
창왕 언무외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날 나를 부른 것은 혈마가 아니라 청룡장의 태상장주인 백오노
야였소."
풍개 견로자의 두 눈에서 새파란 섬광이 튀었다.
'그럼 이건…….'
순간 풍개 견로자의 몸이 그대로 허공으로 떠오르며 초가집의 지붕
위에 내려섰다. 고요한 사방에 닭이 회를 치는 소리가 태호의 파도와
어울려 묘한 화음을 이루었고, 부두가에 매어진 작은 선박들의 작은
움직임만이 시선을 끌었다.
"매복은 없는 건가?"
밑으로 내려가려던 풍개 견로자의 머리가 순간적으로 급격한 회전
을 했다. 창왕 언무외를 부른 것이 혈마가 아니라 청룡장의 태상장주
라면, 그 동안 창왕 언무외가 이곳에 머물렀던 건 이해가 간다. 헌데
그 소식이 지금 자신에게 들어왔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문을 품게
하는 것이다.
자신을 비밀리에 잡고자 한 것이면 지금쯤 매복이 튀어 나와야 했
다. 하지만 아무도 없지 않은가. 풍개 견로자의 시선이 문가에 기대
어 자신을 힘없이 올려다보는 창왕 언무외에게 머물렀다.
'그가?'
풍개 견로자는 마음속으로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창왕 언무외가
가짜가 아니라면 모를까 진짜인 이상 자신을 공격할 이가 없었다. 게
다가 공력까지 상실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청룡장이 노리는 건 뭔
가?
풍개 견로자는 이런 생각을 담고 천천히 땅에 내려섰다. 풍개 견로
자는 창왕 언무외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은 마음의 창. 고수는 상대
의 눈을 보고 손을 쓰는 법.
풍개 견로자가 본 창왕 언무외의 눈동자는 맑고 투명했으며 동정을
담고 있었다.
'동정?'
풍개 견로자는 창왕 언무외가 자신을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에 정신이 약간 혼미해졌다.
'동정은 내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창왕 언무외의 손이 허공에서 살짝 반원을 그리며 돌았다. 순간 벽
을 이루고 있던 수 백개의 싸릿대가 그의 손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날아드는 싸릿대와 창왕 언무외 사이에 풍개 견로자가 내려서고 있었
다.
풍개 견로자의 눈빛이 투명하게 빛나며 뒤에서 날아드는 싸릿대를
무시하고 창왕 언무외의 눈을 노려보았다. 좀 전과 마찬가지로 일말
의 거리낌이나 적의는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단지 깊은 동정과 안타
까움이 일렁일 뿐이었다.
둘 사이에 놓인 어둠이 짧게 흔들리며 풍개 견로자의 굵은 턱이 크
게 움직였다.
"언형. 내 목이 필요하시오?"
언무외는 담담한 미소로 답하며 검지와 중지를 창끝처럼 찔러갔다.
단 일점의 살기도 담지 않은 공격에 풍개 견로자는 전신의 공력을 끌
어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도 일대 무학의 종사. 그의 양손은 자연
스럽게 태극을 그리며 언무외의 수지창(手指倉)을 휘감아 돌렸다. 순
간 수백 개의 싸릿대가 풍개 견로자의 등을 파고들었다.
폭죽처럼 터저 오르는 싸릿대가 깃털처럼 흩어지다 바늘처럼 얇아
저 땅에 내렸다. 둘 사이에 작은 옷자락의 스침이 새색시의 바스락거
리는 소리처럼 퍼져 나갔고 달빛이 더욱 밝아졌다.
풍개 견로자의 호로병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사이로 마른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풍개 견로자는 자신의 목젓 아래 천돌혈(天突穴)을 집
고 있는 창왕 언무외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약간의 힘만 더한다
면 풍개 견로자의 위풍당당함은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왜?'
창왕 언무외의 손이 천돌혈을 타고 위로 올랐다. 그 손길을 따라
뜨거운 열기가 목을 타고 넘어왔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풍개 견로자
의 입을 타고 껄쭉한 검은 타액이 가래처럼 흘러 내렸다.
태상 장로께서 작은 어촌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 뒤를 조심
스럽게 뒤따르던 구선개 앞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내려섰
다. 구선개는 자신을 둘러쌓고 있는 검은 그림자들을 바라보았다. 비
슷한 키에 몸집 얼굴을 가린 검은 두건 사이로 빛나는 눈동자들. 긴
장검을 담담한 여유로 들고 있었다.
적이 공세적인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구선개의 등줄기로 차가
운 기운이 흘러 내렸다.
'이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가 온다면 나는 이곳에서 빠져
나갈 수 없으리라.'
오랜 경험으로 자신의 상황을 파악한 구선개는 매서운 독기를 뿜어
내며 몸을 급격히 회전시켰다.
파파팟.
날카로운 옷자락의 떨림과 함께 격한 악취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중에서도 강한 힘은 전면으로 쏘아졌다. 검은 그림자들은 후발선
제(後發先制)의 수법으로 구선개의 정면에 위치한 자들은 가볍게 자
신들의 방위를 막았고 다른 이들은 후면을 공격했다.
검진 안의 단 한 동작이었지만 구선개는 그 위력을 알 것 같았다.
전면으로 공격해 들어가던 구선개는 왼 발로 땅을 파듯이 집고 앞으
로 나가는 힘을 빙글 돌려 후면에서 공격해 오는 자들에게 힘을 돌렸
다. 강공에는 강공으로. 구선개는 검진을 형성한 자들의 공력보다 자
신이 높다는 확신을 가지고 적과 정면대결에 승부를 건 것이다.
검은 그림자들의 검이 살짝 떨리더니 구선개의 좌우로 갈라섰다.
순간 검진이 갈라지며 퇴로가 눈에 들어왔다. 구선개는 더 보지 않고
급히 퇴로로 몸을 뺐다. 그의 등뒤로 날카로운 예기가 쏱아져 들어왔
다. 암기류 같았다.
구선개는 왼쪽 소매를 급히 휘둘러 뒤에서 날아오는 예기를 휘감아
돌았다.
푹푹.
왼 팔뚝에 밀려드는 격한 통증과 함께 몸이 크게 휘청였다. 구선개
는 왼 팔을 돌아 보지 않고 이를 악물로 신법을 펼쳤다. 팔이 크게
걸리적거리는 것으로 보아 철전(鐵箭)종류 같았다.
단궁을 날린 검은 그림자들은 흔들리는 구선개의 심장을 겨누었지
만 긴 휘파람 소리에 단궁을 거두었다.
구선개의 앞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솟구쳐 그의 길을 막아섰다.
구선개는 양손을 휘둘러 달려드는 검은 그림자들의 공격을 막았지
만 왼팔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몸에서는 예전에 느끼지 못
한 악취가 흘러나오는 듯 했다. 그리고 스치는 검광. 하늘을 찢는 파
공성과 붉은 피막이 악취를 잠시 잠재웠지만 비릿한 혈향에 더 깊은
구토를 자아내게 했다.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태호의 파도소리와 어우러져 그의 옆으로 빠
르게 다가오는 듯 했다. 손만 들며는, 한 번만 소리쳐 부른다면, 지
금 자신의 모습을 모두에게 보일 수 있을 텐데.
츄칵.
한 순간에 일어난 사념을 뚫고 날카로운 검기가 어깨를 타고 흘렀
다. 잠시 간지러움이 생기고 곧 시원해지다가 뜨거워 졌다.
'이 사실을 혜심대사에게 알려야 한다.'
구선개는 날아드는 검날을 쳐내며 품안에 손을 넣었다. 둥근 신호
탄이 손안에 잡혔다.
순간 얼굴 정면으로 뜨거운 열기가 확 밀려왔다. 구선개는 목을 옆
으로 틀어 열기를 비끼며 쌍수로 상체를 보호했다. 보이지 않는 열기
속에 적의 손으로 짐작되는 물체가 팔에 걸렸다.
서로의 팔과 팔이 부딪치는 격돌의 순간 발생하는 반탄력을 이용하
여 신호탄을 높게 던졌다. 하늘 높이 솟아 오른 신호탄은 붉은 빛을
내며 찬찬하게 타올랐다.
퍼퍼펑. 퍼펑.
태호 위에 떠 있는 무수한 유람선들이 폭죽을 일제히 터트려 올리
며 밤하늘을 밝게 빛냈다. 유람선 위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강
바람에 실려 구선개의 가슴을 후벼팠다. 자신이 보낸 신호탄의 불빛
이 저 유람선의 폭죽을 뚫고 방도들에게 전해질지 가슴이 무거워졌
다. 그런 그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뜨거운 열기가 그의 목안
으로 밀려들어 가슴과 내장을 화끈하게 달아오르게 하고 곧이어 머리
로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다.
낮게 깔린 갈대 숲 사이로 협개 나정호가 사방을 살피며 조심스럽
게 움직였다. 발을 디디는 곳은 깊이 들어가 순식간에 물이 고여 들
었다. 협개 나정호는 발이 젖어 오는 것을 개의치 않고 갈대 숲 옆으
로 난 작은 물길로 다가갔다.
눈앞이 조금 트이며 작은 수로가 발 앞에 다가왔다. 수로 위에는
폭이 좁은 협선이 물위에 떠 있었고 삿갓을 눌러 쓴 노인이 삿대를
집고 허허로이 앉아 있었다.
협개 나정호는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개방 방주를 맏고 있는 협개 나정호입니다. 선배님께서 창왕 언무
외님의 행방에 관한 단서를 주시겠다고 하신 분입니까?"
노인은 천천히 삿갓을 벗었다. 깡마른 얼굴이에 약간 기개가 꺽인
듯한 모습이었지만 협개 나정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선배님."
창왕 언무외는 천천히 협개 나정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잡티 하
나 없이 꽁꽁언 심연을 바라보는 듯한 눈이 협개 나정호의 전신을 차
갑게 식혔다.
"내 기억으로는 자네가 협개 나정호 같은데 자네도 나를 창왕 언무
외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협개 나정호는 얼른 포권을 취했다.
"네. 개방의 나정호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제가 아는 바로는 확실히
창왕 노선배님이십니다."
창왕 언무외는 아무런 대답 없이 정면을 바라봤다.
"자네는 아닌가 보군."
협개 나정호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가
아니라는 것인가. 나정호는 궁금증을 안고 가볍게 몸을 숙였다.
"무지한 후배에게 길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창왕 언무외는 눈을 내리감고 회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