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천대사의 시선이 이륜거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혈마에게 향했다.
"너는 왜 꿇지 않느냐?"
혈마는 생긋 웃음을 지었다. 양주에서 소천에게 혈마 당신이라는
소리를 들은 이후 처음 듣는 기분 좋은 소리였다.
"신선하군."
혈마의 모습이 흐릿한 잔상을 이루었다. 법천대사는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몰랐다. 단지 약간 기분이 나쁠 뿐이었다. 파리 한 마리가
눈앞에 성가시게 구는 것처럼. 그는 파리를 쫓아 내듯이 가볍게 선장
을 휘둘렀다. 그 선장의 그림자를 비껴 들어온 햐얀 손이 청동미륵보
살반가사유상을 들고 있는 오른 손을 쳤다.
보살상이 허공 중에 떠오르는 듯 하더니 이륜거에 가볍게 안착이
되어갔다. 아니 안착이 된다고 느끼는 순간 혈종 악구패의 몸이 의자
에 앉아 가볍게 보살상을 받아들었다.
대단히 느리게 움직인 듯 느껴지는 이 동장은 법천대사와 장로, 무
승들의 뇌리에 한 동작 한 동작 끊겨진 모습으로 담겨졌다.
혈종 악구패는 보살상을 높이 들어올렸다.
"미륵부처님을 대신해 남천교령이 명한다. 전 교도는 성불 앞에 무
릎을 꿇고 명을 받들라."
척.
독왕 역상이 무릎을 꿇고 손을 공손히 모아 위로 올렸다.
"삼가 백련교의 좌사 독왕 역상이 명을 받듭니다."
법천대사와 장로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기만 했고 무
승들은 피식 코웃음을 치며 포위망을 강화했다.
악구패의 노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교도로 성불을 알현하고도 거역하는 죄 무엇으로 다스리느냐?"
독왕 역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십삼 형입니다."
"쳐라."
장로 중 두 명이 기합성과 함께 혈종 악구패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걸 신호로 무승들이 일제히 함성을 터트리며 천지를 병장기로 가두
며 돌격해 들어왔다.
악구패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저 나왔다.
"갈!"
순간 날아들던 두 장로의 입에서 우유빛 액체가 폭포수처럼 쏘아져
무승들의 머리위로 뿌려졌다.
"성수환독."
다른 장로들은 부들부들 떨며 성수환독을 토해내는 두 장로를 바라
보았다. 두 장로의 얼굴은 새 하얗게 질렸는데 눈을 점점 크게 뜨는
지 눈동자가 조금씩 커졌다. 무승들은 혈종 악구패의 삼장 밖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 채 두 장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독왕 역상이 천천히 일어나며 성수환독을 토해내는 장로 둘을 가볍
게 가리켰다.
"성불을 알현하고도 거역한 죄. 성불을 향해 무력을 보인 죄. 율법
에 따라 평신도는 십삼 형에 처하고 장로는 이십 일형에 처한다. 이
는 즉시 집행한다."
독왕 역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에서 토해지던 피는 바싹 말랐
고 이마와 광대뼈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며 눈이 건들건들 거렸다. 벌
어진 입과 턱으로는 혀가 질질 흘러 땅에 데일 듯 했다. 팔과 다리는
점점 말라가며 배가 앞으로 부풀어오르더니 밑으로 허연 물을 쏱아댔
다.
혈종 악구패는 성불을 높이 들고 다시 장로들을 바라봤다.
"이래도 성불의 신위에 거역하겠는가?"
장로들은 일제히 오체투지했다.
"성불을 뵙습니다."
무승들은 사태가 어떻게 되는지 몰라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두 장로의 몸이 조금씩 수축되며 신체의 장기들을 하나 둘 토해내기
시작했다. 무승들은 고개를 돌려 구역질을 해댔다.
정신을 차린 법천대사의 얼굴과 눈동자가 급격히 충혈되었다. 장로
의 신분에 오를 때 몇 가지 맹세를 성불을 하게 하는데 그 와중에서
어렴풋이 한 가지 금제를 하는 것을 느꼈었다. 이 금제의 발동은 교
주와 교의 알려지지 않은 집법자만이 알고 있다고 전해졌다.
그도 막연한 전설인 줄만 알고 있었는데 오늘 직접 당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혈종 악구패의 시선이 새 하얗게 질려 버린 법천대사에게 머물렀
다. 그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소. 서천교령?"
악구패의 질문에 정신을 차린 법천대사는 빠르게 말을 토해냈다.
"남천교령. 지금이야 말로 용화세계를 열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
요. 지금 이 기회를 노친다면 얼마나 오랜 시간 다시 어둠 속에서 보
내야 할지 모르오. 북천교령이 아니면 어떻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계요. 남천교령 내 목을 줄테니 부디 성전을 일으켜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시오."
혈종 악구패의 눈가에 진한 아픔이 스쳐지나갔다. 서천교령은 진정
으로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교도일지 모른다. 자신보다도 더. 하지
만 그 주체가 대덕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천교령. 본 교내에서조차 일심으로 용화세계가 오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치 않은데 어찌 미륵께서 지상에 강림하시겠소."
"아니오. 용화세계는 누구나 바라고 있소. 보시오. 오늘을 위해 수
백 년간 피와 눈물로 보내온 신도들의 역사를. 미륵께서는 그 역사를
아실 것이오."
"일반 신도라면……."
혈종 악구패는 애잔한 눈길을 법천대사에게 보냈다.
"오늘의 이 모습을 보고도 왜 선대로 부터 사대 교령이 모여야 미
륵께서 하생하신다고 한지 정말 모르겠소?"
"……."
"교주와 사대교령의 마음이 오직 한 길로 완벽하게 일치한 적이 있
었소? 이 다섯 중에 한 두 명은 늘 용화세계보다 그 자리가 주는 권
력에 더 얽매여 있지 않았소? 그 권력욕이 최대로 발휘되어 교주와
사대교령이 교권을 놓고 벌인 쟁패가 오늘날 서로의 업장을 해결하기
위해 이런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이 아니오? 교의 최고 위치에
있는 다섯 명의 마음도 하나로 모이지 않는데 어떻게 수십만 교도와
천하만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용화세계를 구현하겠다는 거요."
법천대사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살진(殺盡). 호법을 위해 이 몸이 지옥에 가겠소."
"지금이야 이용해 먹는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대덕도 죽여야 할텐
데 상대할 능력이 있소?"
법천대사의 눈두덩이가 크게 흔들렸다.
"본 교의 최대 배덕자를 상대할 능력도 없으면서 교도들을 전쟁터
로 몰아 넣겠다는 건 무슨 경우요?"
"대덕은 남천교령께서 맏아 주면 되지 않겠소."
"자신이 벌인 일을 남에게 떠 맞기려 하시오?"
"교를 위한 일이오. 진심이오."
혈종 악구패는 고개를 저었다.
"서천교령 시간을 끌어도 소용없소. 존덕문에서 이곳으로 올 구원
군은 없소."
법천대사가 냉소를 머금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소."
"어떻게 연락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존덕문에 남아 있는 상관적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선우삼현에게는 이 소식이 전해지지 않을 것이오.
적어도 며칠 동안은……."
법천대사의 입술이 푸들푸들 떨리며 눈 꼬리가 아래로 급히 쳐졌
다.
"그 그럴리가."
"이래도 성불의 권위에 무릎을 꿇지 않겠소."
법천대사의 몸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힘없이 무너졌다. 독왕 역
상은 가슴을 살짝 쓸어 냈다.
"내 손으로 교도들을 죽이지 않게 해 줘서 고맙소."
혈종 악구패는 불상을 왼쪽에 놓고 독왕 역상을 바라봤다.
"좌사께서 평마군을 해체하고 교도들을 거센 피바람에 해를 입지
않게 잘 보살펴 주시오. 나는 대덕의 최후는 봐야겠소."
"알겠소."
"새로 교법이 정리 될 때까지는 율법에 따라 남천과 동천의 양대교
령을 가지고 있는 내가 성불을 모시고 있겠소."
"교법이 정리된 후에 성불을 반환 받겠소."
"그리하시지요."
둘은 서로 합장 반 배를 하고 헤어졌다.
어둠이 점점 짙게 깔려가는 하늘 위로 아직 별은 뜨지 않은 상태였
다. 달그닥 거리는 이륜거 소리만 정적을 으깨었다. 혈마는 검은 장
막 저 너머를 보는 듯 심유한 눈빛을 했다.
"대덕에게 바로 가야겠지요."
"그전에 만나야 할 자들이 있다."
장안성의 높은 가을 하늘 아래 선선한 바람이 낮게 날아 거대한 연
병장에서 날아오르는 먼지를 저 멀리 날려버렸다. 먼지가 약간 엷어
지자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연무장에 빽빽히 솟아 있는 창검이 오와
열을 유지한 채 거친 예기를 뿜어대며 하늘을 마구 찔러댔다.
대오의 사이를 지나다니는 무술교관들은 호통을 치며 병사들의 자
세를 잡아 주었다.
군의 훈련을 지켜보는 양산월의 옆으로 붉은 전포를 입은 잔살마군
주진우가 다가왔다.
"장안 일대에 흩어져 있는 위소(偉所) 열 두 개를 모두 접수했습니
다. 중간에 작은 저항이 있었고 탈주병이 많아 병력은 일만 이천 정
도만 건졌습니다."
오유지의 군세를 물리친 양산월은 그 여세를 몰아 주진우에게 기병
과 보병 오천을 주어 인근 위소를 통합하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주진우는 양산월의 명대로 인근 위소를 휩쓸었다. 건문제의 깃발을
내세워 대군으로 압도하자 오유지의 패배로 각 위소간의 유기적 연관
관계가 끊긴 상태라 대부분 각개 격파를 당했고 세력이 크게 불자 나
중에는 알아서 투항을 해온 것이다. 양산월은 잠시 셈을 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이제 총 병력이 삼만 이천이 된 건가?"
"그렇습니다."
"명군의 동향은 어떤가?"
"섬서도지휘사사와 하북도지휘사사로 양 성(省)의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아직 대병이 모이지는 않았습니다. 양 지휘사사의
정원은 산서도지휘사사가 오만 칠천. 하남도지휘사사가 육만입니다만
옥문관으로 정병을 많이 보낸 상태라 숫자는 채워서 나오겠지만 정병
은 많치 않은 상태입니다. 호북도지휘사사는 아직 동원령이 내려지지
지 않았답니다."
"흠. 오유지는?"
"행방이 묘연합니다. 후일 책임추궁이 두려워 자살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만 확인된 것은 없습니다."
"이 일대의 병권을 우리가 장악한 이상 그는 그리 중요한 인물은
아니니 더 신경을 쓸 것 없네."
"적의 병력이 집결하기 전에 우리가 선수를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병력으로는 장안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효
과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적 정병과의 교전
은 가급적 피하면서 산서와 하남, 호북 일대를 휘저으며 다녀야 합니
다. 예전에 홍건적이 원군에 써먹었던 방법이죠."
양산월은 씨익 웃음을 흘렸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네. 문제는 어느 때 그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느냐겠지. 존덕문의 대덕에게서는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는가? 그
들이 산서에서 거병을 해준다면 짐을 많이 덜텐데."
"광명안을 통해 백련교도들이 오대산 극락사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했습니다만 확연한 실체를 잡아내지는 못했습니
다."
"그렇게 쉽게 실체를 드러낼 곳이라면 명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발
본색원하고서도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겠는가."
"화산파를 지금 손보고 지나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후일 본 파가 들어오는게 쉽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네만 명분이 명분이다 보니 무림
문파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조금 아쉽군요. 이 병력이라면 화산을 휩쓸어 버리는 건 간단한
데……."
"조금만 참게 강호는 강호식대로 처리 할 수 있을 테니까. 가서 장
수들을 대회의청으로 집결시키게 작전 회의를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양산월은 동쪽 하늘을 잠시 바라보며 대회의청으로 향했다. 그가
바라본 하늘 아래는 존덕문이 있었다.
시원한 물줄기가 목으로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신수개는 물주머니
를 더 높이 들어올려 얼굴과 머리에 퍼부었다. 물방울이 목을 타고
내려가 쾌속선 안에 넓게 퍼지자 노를 젓고 있던 거지들에게 튀었다.
"푸하 좀 살 것 같군."
신수개는 방금 회령분타주가 전해준 전서를 손에서 다시 펼쳤다.
<직선으로 북상하고 있음. 황하가에 쾌속선단이 집결하고 있는데
소속을 알 수 없음.>
신수개는 의자에 걸터앉아 급히 전서를 휘갈겨 썼다.
<총타의 각 분타의 인력을 총 동원해서 황하가의 쾌속선단이 상륙
할 만 한 곳부터 북상로로 추정되는 목들을 감시할 것. 그들을 추적
하는 청룡장의 무리들도 찾아 낼 것. 그간의 상황을 소주에 있는 건
곤신개 장로님께 보고 할 것. 신수개.>
신수개는 전서구에 서신을 넣고 하늘 높이 날아 올렸다. 신수개는
청룡장과 거경방이 장강을 봉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사실
과 원인을 밝히기 위해 개방 양주분타에 머물며 정보를 수집하고 있
었다. 그 와중에 그는 믿지 못할 소식을 접했다. 신선이 한 무리를
이끌고 장강을 걸어서 건너고 청룡장이 그 신선이 이끄는 무리를 공
격했다는 거였다.
기담이설(奇談異說)에나 나올 이야였지만 콧방귀만 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신선이 장강을 걸어서 건넜다는 말은 못 믿어도 청룡장과 존
덕문도들이 격돌했다는 건 믿을 수 있었다. 그도 이번에 청룡장과 존
덕문이 일대 격돌을 벌일꺼라고 예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방 각
분타에 비상 경계령을 내리고 정보를 수집했다. 과연 일단의 신비인
들이 곳곳에서 북상하고 있다는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고, 이들이 하
남에 들어섰을 때는 공공연히 정체를 드러내고 빠르게 북상하고 있다
는 보고가 들어왔다. 흡사 누군가에 추적을 당하고 있는 듯이.
신수개는 즉시 쾌속정을 수배해 놓고 각 분타에 부두마다 노꾼들을
준비해두라는 영을 내렸다. 신수개는 역마소처럼 요소 요소의 부두마
다 노꾼들을 갈아가며 빠른 속도로 북상하며 각 분타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을 처리하고 명령을 내렸다.
"존덕문은 태행산맥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들이 급히 물러나고 있
다는 건 뭔가 잘 못 되가고 있다는 말. 존덕문이 패한다면 청룡장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천하 대세는, 개방은 어찌 될 것인가."
신수개는 배의 속도가 빨라지는 만큼 거세게 부는 역풍에 몸을 움
츠리며 낙조를 지켜봤다. 벌써 이틀 째 쉬지 않고 북상하고 있는 중
이었다.
바람을 가득 품은 돗이 황하를 거슬러 올라갔다. 배 좌우에 나와
있는 각기 스물 다섯 개큰 노가 쉬지 않고 돌아가 그 속도를 더 빨리
했다. 단조로운 배의 갑판은 텅 비었고 돗대 위에는 청, 홍, 황, 흑,
백의 다섯 색 깃발만이 펄럭였다.
이 배의 선실에는 청, 홍, 황, 흑, 백의 다섯 색깔의 옷과 두건을
쓴 오인이 원탁에 자리 한 채 회의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현재 존덕문에 남아 있는 고수는 삼인이오. 상관적성의 모습을 하
고 있는 선우삼현과 풍멸, 광도요. 상관평의 말 대로라면 무사는 약
삼 백 정도가 남아 있을 것이오. 이들 모두 정예중의 정예라고 할 수
있소. 우리의 임무는 대덕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이들을 쓸어 버리
고 함정을 파두는 것이오."
"덕조의 후인이 다른 농간을 하지 않았겠소?"
"덕조의 후인이 농간을 부렸을 가능은 농후하지만 대부께서 더 이
상 지상에 머무를 수 없다고 하셨으니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
소."
"으음."
"곧 상륙하는 지역부터는 적진이라고 보면 되오. 새로운 명령은 없
을 것이오. 각기 맏은 공격로를 따라 태행산맥을 북상하며 적들을 주
살 하시오. 존덕문의 총단에서 봅시다."
"알겠소."
이들은 남경에서 동해를 돌아 황하로 들어온 청룡노야가 직접 키운
오기령이었다. 거리상으로 보면 육로로 북상하는 것보다 먼 거리지만
육로보다는 해로가 몇 배는 더 빠른 법. 게다가 이들은 교대로 쉬지
않고 노를 저어 왔음으로 육로로 북상중인 대덕 일행보다 이틀 정도
일찍 태행산맥의 초입에 도착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배가 강가에 닿자 오기령은 각 기주를 따라 배에서 뛰어 내렸다.
청, 황, 홍, 흑, 백의 다섯 줄기는 빠르게 태행산맥을 향해 질주해갔
고 배에서는 작은 불꽃이 점점 크게 일어 선체를 모두 태우기 시작했
다.
화려한 실내에 가운데 큰 태사위를 두고 좌우로 세 명씩 자리했다.
좌측 상석에는 하얀 백발을 묵지 않아 흘러내리고 달보다 하얗고 시
린 피부에 두 눈은 검은자위만 보이고 적검색 입술이 하얗게 웃는 귀
왕이었다.
"남가왕(南家王)께서는 오늘 결판을 보실 생각이시오?"
귀왕 앞에 있는 남가왕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머리카락에 여자보
다 희고 고운 피부에 약간 높은 콧날과 깊이 들어간 눈은 푸른색 기
운을 띄었다.
"후후후. 처음에 한 맹약의 조건을 지키려는 것뿐이오."
남가왕은 냉소를 머금고 귀왕 옆에 앉아 있는 혈의인을 처다 보았
다. 혈의인의 왼쪽 뺨에 있는 검상이 씰룩이자 옆에 있는 자가 그의
손을 잡았다. 적천마군과 적혈마군이었다. 이들 앞에는 지옥마군과
악인마군이 불편한 기색으로 자리했다.
적혈마군은 적천마군의 손을 잡고 앞에 앉아 있는 지옥마군과 악인
마군에게 살짝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남가왕은 의자에 깊이 기대어 두
발을 쭈욱 뻗었다.
"귀왕께서 먼저 손을 쓰시겠다면 소제가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겠습
니다."
귀왕은 백발을 살짝 흔들었다.
"그럴 필요야 있겠소."
"헌데 오라고 해 놓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게 아닌지 모르겠
소."
남가왕이 비아냥거리며 정문을 보는데 갑자기 문이 활짝 열렸다.
사대마군은 활을 떠난 화살처럼 벌떡 일어나며 자신의 병장기에 손을
얹었다.
"누구냐?"
적혈마군이 성큼 내려서며 외쳤지만 밖에 있는 수하들의 반응이 없
는 것을 보고 등골이 시려왔다. 전각 주위에 깔아 놓은 자신의 수하
들은 자신도 몰랐던 삼혈맹의 정예 중 정예로 대맹주의 직속부대였
다. 그런 그들이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못하고 이자를 들여보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