쐐액액.
사람 몸통의 반정도 굵기의 대형 선박 파괴용 강노가 일렁이는 강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날아갔다. 전 강노 사수가 선두의 사수를 바라봤
다. 명령 없이 사격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모두
놀란 상태였다. 하지만 전방을 본 사수들은 물론 사량환도 입을 딱
벌린 채 뭐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사람이 물위를 날아오고 있었다. 거침없이. 하얀 수염을 흩날리며.
가슴에는 대덕이라는 수를 놓은 노인이. 대덕 뒤에는 사람을 가득 채
워 방금이라도 물에 잠길 것 같은 긴 유엽선수십 척이 지네 발 같은
노를 저으며 뒤따랐다. 대덕의 눈이 청룡장의 전선에 머물렀다.
사량환은 뭔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적은 보았으니 전투에 임해야
함은 당연지사였지만 청룡장에서는 용기를 가지라고 했지 만용을 부
리라고 한 적은 없었다.
'등평도수라니.'
등평도수라는 말이 강호에 떠돌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화
괴담에나 나오는 이야기였지 현실적으로 가능한 건 아니라고 알고 있
었다.
북을 치던 수석대주가 고함을 터트렸다. 지단주가 명령을 내릴 상
황이 아니면 그 자리에서 그 바로 밑 서열이 모든 대권을 주재 할 권
한이 있었다. 수석대주는 그 권한을 사용한 것이다.
"쏴."
수석대주의 명에 정신을 차린 강노수들은 일제히 수십 발의 대 선
박 파괴용 강노를 날렸다. 날아가는 바람 소리만으로도 저렇게 작고
긴 유엽선은 전복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강노들은 비교적 정확하게
대덕과 그 뒤를 따르는 유엽선들을 노렸다.
대덕은 가볍게 장포를 뒤집었다.
파파파.
장강의 수면이 칼로 껍질을 벗겨 내는 듯이 솟아오르며 수막을 형
성했다. 그 수막 너머로 강노들이 쇠도했다.
푸카칵.
마치 벽을 치는 듯한 격타음과 함께 대덕의 정면으로 날아오는 몇
발의 강노가 그대로 물 속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좌우 측으로 날아가
는 강노 십 수발은 물줄기를 뿜어대며 수막을 통과해 유엽선 위를 스
치고 지나갔다. 거센 바람과 물보라가 유엽선에 타고 있던 존덕수호
무령대원들을 덮쳤다. 하지만 이들은 개의치 않고 미친 듯이 노를 저
었다. 땀인지 강물인지 모를 물줄기들이 얼굴과 목을 타고 흘러 내렸
다.
유엽선은 글자 그대로 버드나무 잎을 물위에 띄어 놓은 것 같아 사
람이 한 명 간신히 앉을 수 있는 폭에 높이도 사람 무릎까지 올라오
는 게 큰 배였기 때문에 이십 명이 다 탄 유엽선은 장강에 가라앉기
직전의 상태가 정상적인 상태였고. 속도도 빨라 대부분의 강노는 이
들의 머리 위를 스치거나 옆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수십 발이 집중사
격으로 가해 졌기 때 문에 두 척의 배가 강노에 맞아 부서져 버렸다.
배 위에서 노를 젖던 이들은 잠시 물위를 데굴데굴 구르는 듯 하더니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가 고개를 내밀었다.
유엽선들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 왔기 때문에 다시 강노를 발사할
시간도 피할 시간도 없었다. 수석대주는 검을 빼들었다.
"당파."
이십 오명의 노꾼은 전력을 다해 노를 저었고 나머지 이십 오명은
위아래 날이 선 사각 방패와 어른 팔 길이 정도의 중검을 잡았다. 수
상함정에서는 서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격돌을 벌였기 때문에 장검
보다 이런 방패와 중검이 더 유용했다.
수석대주는 정면에 있는 선우대덕을 피하기 위해 배의 속도가 줄어
드는 것을 감수하고 키를 좌측으로 돌렸다. 배가 살짝 옆으로 돌자
바로 키를 원상으로 돌렸다. 적에게 측면을 다 내줄 수는 없는 것이
다.
사량환은 배가 옆으로 살짝 비끼는 것을 느끼고 대덕에게 시선을
주었다. 대덕이 이쪽 배로 올라온다면 배 위에 있는 가장 고수인 자
신이 막아야 했다. 자신이 대덕을 막는 사이 수석대주를 비롯 배 안
의 전무사가 배를 폭파하고 물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검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량환은 대덕
을 바라봤다. 정말로 물위에 떠 있는 것인지 믿기지 않았다. 청룡장
의 최선봉 지역인 양주의 지단주로 나름대로 장 내외에서 자신과 손
속을 나눌 고수가 많지 않다고 자부해왔지만 오늘 이 순간이 닥치자
과연 일검이나 제대로 받아 낼지 의문이었다.
육지라면 수하들에게 도망치라는 명령을 내리겠지만 여기는 오갈
데가 없는 장강 하구의 선상. 자신은 대 청룡장의 지단주.
'일 검만 막자.'
사량환은 그 생각으로 수석대주와 잠깐 눈을 마주쳤다. 수석대주는
그 찰나의 순간 긍정의 눈빛을 보냈다. 사량환이 일검을 막는 다면
수석대주는 배를 폭파시킬 것이다.
사량환은 말라버린 목구멍으로 침을 밀어 넣으며 대덕을 빤히 바라
봤다. 마음에는 평온이 물밀듯이 밀려왔고 대덕의 전신이 한 눈에 들
어왔다.
비단 수건처럼 찰랑이는 장강의 물결이 대덕의 발등을 미끄럽게 스
치는 모습. 그 아래 흔들리는 나무 막대. 나무 막대는 대덕의 뒤에
있는 유엽선에 연결이 되어 있었다. 사량환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대덕이 자신을
정면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량환은 대덕이 자신을 보며 짖는 미소에 자신이 지금 뭘 보고 있
는지, 어떤 상황인지 심지어 자신이 여기 있는지 조차 생각나지 않았
다. 그냥 멍한 상태가 되어 머리속이 텅 비어갈 뿐이었다.
대덕과 수십 척의 유엽선이 청룡장의 전선 옆을 스치며 나갔다. 작
은 돌을 몇 개씩 던지기만 해도 배들이 가라앉을 것 같았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유엽선들은 매우 느린 속도였다.
퍼걱.
수박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잠시 울렸고 배 좌우로 부서진 유엽선
의 잔해와 사람의 머리통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당파로 한 척 잡은
모양이었다.
사량환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사라지는 유엽선단을 보며 멍하니
바라만 봤다. 거센 육박전과 수중전만 생각했던 무사들도 멍한 표정
은 마찬가지였다.
"적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들 배라도 침몰이 된 듯 가슴이 덜컥 내려앉
았다. 저 멀리 물살을 헤치며 한 척의 배가 매우 빠른 속도로 이곳으
로 질주해 왔다. 이번에는 수석대주도 전투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그
배를 바라만 봤다.
배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확연히 한 눈에 들어왔다. 순간
전 무사가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렸다. 그 동안 이들의 정신을 빼 놓
은 공포와 얼떨떨함이 한 순간에 다 날아갔다.
"태상장주님 만세, 만세 만만세."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목청이 터져라 부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백오노야를 태운 배는 유엽선단을 따라 저 멀리 사라졌다. 하지
만 무사들의 눈에는 백오노야가 이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주며
격려하고 손을 흔들어 주는 잔영이 남았다.
그 잔영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한 명이 다시 전방을 가리켰다.
"장주님이시다."
무사들은 다시 환호성을 터트렸다.
작은 유엽선에 단우백과 소천, 서왕, 마운룡은 이들의 환호성에 미
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들이 탄 배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이들을 지나쳐 갔다.
단우백이 사량환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사 지단주 우리 모두 장을 떠났다는 건 극비네."
"알겠습니다."
사지단주의 대답은 저쪽으로 멀어져 가는 배의 파랑을 때렸다.
얼얼한 정신이 돌아온 사량환과 무사들은 확 달아 오른 얼굴을 부
비며 서로에게 안부를 나누었다. 그때 배 밑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몇 명의 무사가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멈추어 버린 배 밑에는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좌목이 물을 가득 먹
은 듯한 한 명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이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로잡은 적입니다. 밧줄을 좀 내려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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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입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사사삭.
한 줄기 달 빛이 바람을 타고 산능선을 넘었다. 앞서거니 두서거니
하면서 중앙에서 달리고 있는 백발 노인을 호휘하는 삼인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종내 불 빛이 흘러 나오는 폐찰 앞에 도달했다.
담장이 무너지고 지붕 곳곳이 뻥 뚤려서 별 빛이 마루 바닥을 지나
땅 밑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사인은 전각 지붕에 천천히 내려서서 대
웅전을 내려다 보았다. 대웅전 앞의 땅은 잡초하나 없이 매우 깔끔했
고 수십송이의 꽃이 달 빛 아래 방긋 웃음을 지었다.
향기의 독특함과 진함은 일행이 처음 느껴 보았다. 향기로운 꽃 내
음이 사인의 심신을 상쾌하게 했으나 꽃 향기에 취한 삼인과 달리 한
걸음 앞에 서 있는 노인의 눈에는 수심이 깊어갔다.
대웅전의 문이 활짝 열리자 네 명의 거한을 대동하고 검은색에 가
까운 녹색 머리카락에 여자보다 희고 고운 피부에 약간 높은 콧날과
깊이 들어간 눈에 푸른색 기운이 감도는 미청년이 천천히 계단을 걸
어 내려왔다. 그가 내려오자 꽃 들은 더욱 향기를 내 뿜어 온 천지가
헌화의 공덕으로 넘쳐 나는 것 같았다.
노인은 가볍게 포권례를 취했다.
"남가왕께서는 공력이 더 깊어 지셨구료. 경하 드리오."
남가왕이라는 자는 뒷짐을 지고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하하하. 어디 귀왕 선배만 하겠습니까. 모두들 나를 남가
왕이라 불러 주지만 어찌 무림 삼왕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허허허 과찬이오. 무림 삼왕이야 말로 모두 허명이라고 할 수 있
지요."
남가왕이 손을 들어 대웅전 안으로 안내를 했다.
"들어오시지요. 다과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럼"
귀왕과 귀왕삼사가 허공을 밟으며 천천히 꽃 밭 위로 내려가자 남
가왕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자 안으로"
"먼저 들어가시지요."
서로가 겸양을 하면서 대웅전 안으로 들어갔다. 대웅전 앞에는 작
은 다탁을 사이에 두고 두개의 의자가 향이 오르는 불상을 등지고 나
란히 놓여 져 있었다. 남가왕이 귀왕에게 왼쪽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허허허 그쪽도"
"연배가 있으신데……."
귀왕이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자리에 앉자 남가왕도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불상을 서로 등지고 대웅전 앞에 있는 화원을 바라보는 둘을
중심으로 좌우로 귀왕삼사와 네 거한이 시립했다.
남가왕은 옆에 놓인 차를 들어 입가를 살짝 찍고 손으로 감싸 그
온기를 느꼈다.
"소제가 이번에 중원에 출사를 한 것은 삼맹주와의 약속도 있었지
만 나름대로 뜻 한바가 있어서 입니다."
귀왕은 수염을 가볍게 쓸어 내렸다.
"그렇겠지요. 나도 왕야 만할 때는 천하가 좁다고 돌아 다녔소이
다."
"천하가 넓다고 하나 소제와 이렇게 차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아
마도 삼맹주와 선배님 뿐일겁니다."
"천하는 넓고 기인이사는 모래알 같이 많으니 찾아보면 왕야와 배
짱이 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오."
남가왕은 고개를 흔들고 고개를 돌려 귀왕을 바라보았다. 귀왕도
남가왕의 파란 기운이 도는 눈을 직시했다.
"선배님. 삼맹주와의 약속도 이제 몇 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중
원에 인재가 많다고 하나 삼맹주만한 사람이 또 있다고는 보지 않습
니다."
"대맹주가 있지 않소."
남가왕은 차잔을 내려놓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하하하"
한 참을 신나게 웃은 남가왕은 입안에 미소를 가득 머금었다.
"대맹주가 삼맹주의 능력에 버금 간다면 천하가 어찌 아직 이대로
있겠으며 소제가 감히 이런 마음을 품을 수 있었겠소."
"그럼……."
"대맹주라고 불리우니 무언가 재주는 있을 테지만 삼맹주만 하겠습
니까. 그리고 그 실체를 확인한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귀왕은 수염을 쓸어 내렸다.
"천하는 주인을 정하지 않으니 왕야께서도 기회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남가왕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삼맹주를 넘을 수 있겠느냐 이 말씀이오?"
귀왕은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십년 전 세상이 좁다고 느낀 나를 삼 맹주는 철저히 패배 시켰었
지요.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다를 껍니다."
"허허. 그래서 젊음이 좋은 건지도 모르겠소. 나이가 드니 세상을
떠나 조용히 유유자적 하고 싶은 마음만 드니 걱정이오."
"아참. 이 맹주가 우리를 왜 태원으로 부른지 아십니까?"
"내가 이 맹주의 깊은 속을 어찌 알겠소."
남가왕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고 미간을 모았다.
"그를 보면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그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언제가 삼혈맹과 적이 되는 한이 있어
도 중원을 놓고 자웅을 겨루어 보고 싶기 때문이겠지.'
귀왕은 남가왕의 그늘진 얼굴을 살짝 보고 아무도 모르는 한 숨을
내쉬었다. 삼혈맹의 이 맹주 혈유가 자신에게는 편안하고 필요한 존
재로 다가 왔기 때문이다.
남가왕은 살풋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두렵기는 하지만 시간은 제 편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귀왕의 의혹에 찬 눈빛에 남가왕은 대답을 하지 않고 화원을 보며
손을 들었다. 파아악 화원에서 망울이 채 터지지 않은 한 송이 꽃이
그의 손으로 날아왔다. 망울이 채 피지 않은 꽃은 대웅전 안으로 돌
아오면서 만개를 하기 시작해 남가왕의 손에 들렸을 때는 활짝 피어
미태를 과시했다. 진한 꽃 내음이 귀왕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활짝 핀 꽃. 그래서 이제는 저야 할 꽃이지요."
귀왕은 남가왕이 들고 있는 꽃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전에 보지 못한 꽃인데 중원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것 같소이다."
"남만의 오지에서만 피는 음."
남가왕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활짝 미소를 지었다.
"중원 말로 옮기면 꽃의 여신이라고 합니다."
"꽃의 여신이라."
"이 꽃을 중원 곳곳에 심어 놓고 남들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제
소박한 꿈입니다. 귀왕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남가왕의 미소에 귀왕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시간이 다되어 가고 있소. 아직은 우리가 먼저 가서 기다려야
하지 않겠소."
남가왕도 미소를 띄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아직은 그래야 겠지요. 아직은 말입니다."
새벽까지 거하니 먹고 잠을 잔 이철룡은 오후 늦게야 눈을 떴다.
찌부둥한 머리위로 객방의 지붕이 이리저리 비틀리고 있는 것처럼 보
였다. 이철룡은 머리를 좌우로 틀었다.
"후 이게 숙취라는 건가. 어제 너무 많이 먹은 것 같군. 하기사 주
는 대로 받아먹었으니까."
이철룡의 눈앞으로 이리저리 발들이 오고가자 몸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철룡이 누울 때만해도 넓은 침대에 자기 혼자 였는 데
지금 보니 네 명이나 잠들어 있었다. 이철룡이 자는 사이 들어와서
잔 것 같았다.
이철룡은 어질한 머리를 몇 번 흔들고 방밖으로 나갔다. 긴 회랑을
따라 수십 개의 방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객방 앞의 넓은 공터는 오
늘 새벽까지 퍼 먹어댄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깨끗이 정돈되
어 있었다. 단지 몇 개의 탁자에서 음식을 가득 쌓아 놓고 서로 술을
권하는 주당들만이 어제의 잔치를 증명했다. 이들 중 한 명이 이철룡
을 보고 술병을 흔들었다.
"이봐 젊은 친구 이리 와서 한잔하게. 여기 아직 음식이 많이 있
네."
이철룡은 술과 기름진 음식을 보자 속이 미식거려 손을 흔들었다.
"아뇨. 저는 너무 많이 먹었나봐요. 맛있게들 드세요."
"젊은 친구가 원 그렇게 나약해서야 쓰나."
"사부님한테 술 먹는 것을 못 배운 모양이지."
"강호에서 영웅호걸이 되려면 주색에 도가 통해야 하는 거야."
이철룡은 손을 휘휘 저으며 객방을 돌아 나갔다. 막상 객방을 떠나
자 어디 마땅히 갈 데가 없어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그때 한 무사
가 그 옆으로 달려나와 읍했다.
"뭘 도와드릴까요?"
이철룡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무사는 웃는 얼굴로 다시 공손히 읍을 했다.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요. 성심 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이철룡은 무사의 행색을 살폈다. 청의를 입
고 허리에 가벼운 검을 찬 청룡장의 무사였다. 밤새 쉬지도 못했는지
눈이 약간 충혈된 모습을 보였다.
"그게 저……."
이철룡은 사숙 나관추의 행방에 대해서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사질이 사숙의 행방을 타 문파 사람에게 묻는 건 자파를 깍아 내리는
것 같았다.
"화장실이……."
무사는 웃으며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철룡은 앞서가는 무사의 뒤를 따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말 사숙께서 어디로 가신 거지. 그렇다고 내가 장로님께 바로
찾아가 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낮은 유등이 침묵의 무게에 눌려 떨어 질 듯이 깜빡 거렸다. 흐릿
한 유등의 불빛에 둘러 앉은 사인의 얼굴이 매우 어둡게 보였다. 좌
측 가에 앉은 남궁천기가 상석의 백리무군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두 존자님과는 연락이 완전히 두절이 된 겁니까?"
백리무군은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여기저기서 나직한 침음성이
흘렀다.
당표는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덕조회의 항주지단과 금화지단 공격 소식은 없습니까?"
남궁천기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개방에 넌즈시 알아 본 결과 덕조회는 황산 밖으로 쫒겨 간
듯 합니다."
포응검객 나관추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뭐가 어떻게 되 가고 있는지 알아야 일을 벌려도 벌리지 않겠소."
남궁천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보다 강동을 어떻게 빠져나갈 건지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
니까?"
"무슨 말씀이오?"
"청룡장이 우리를 살려 둘까요?"
바르르 당표의 몸이 떨리며 모든 이들의 가슴을 헤집었다. 그제서
야 모두들 자신들이 적진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백리무군은 어깨를 살짝 숙이며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공개적으로 우리를 공격하지는 못할 꺼요. 암습도 마찬가지. 적의
독만 잘 피한다면 강동을 빠져나가는 건 어렵지 않을 꺼요. 문제는
강동을 빠져나간 연후 우리의 세력권으로 안전하게 들어 갈 수 있느
냐 그것이오."
포응검객 나관추가 주먹을 쥐었다.
"함께 움직입시다. 우리가 함께 움직인다면 세인들의 눈이 있는데
저들이 함부로 공격해 올 수야 있겠소."
당표는 무릎을 쳤다.
"맞습니다. 우리 넷의 세력을 모은 다면 적지 않은 전력이오. 게다
가 오전 칠각의 형제들이 있으니 청룡장이 대대적인 인원을 동원하기
전에는 우리를 상대 할 수 없을 꺼요."
고개를 약간 갸웃한 백리무군은 포응검객 나관추를 바라봤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게 되지 않겠소?"
"일단은 이 위기를 돌파하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리무군은 무심한 눈으로 포응검객 나관추를 바라봤다.
"청룡장이 우리의 명단을 모두 가지고 있을까요?"
나관추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야 있겠습니까만 우리 넷은 눈치 채고 있을 껍니다."
"맞소. 어제 군막 안에서 한 행동만으로도 우리 넷은 제거 명단에
올랐을 꺼요."
당표는 어제 일을 떠올리기 싫다는 듯이 살짝 몸서리를 쳤다. 덜컥
거리는 창문 소리에도 깜짝 깜짝 놀라 암기를 손에서 발사 할 뻔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사천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단신으로 강동을 살아서 떠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서지 않았다.
성수환독을 새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독술의 대가가 버티고 있는
청룡장에서 자신의 독술은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
럼 결국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으로 헤치고 나가야 하는데 청룡장에
는 당표보다 무공이 뛰어난 고수들이 많았다. 그들 중 한 명만 나서
도 당표는 죽은목숨이었다. 당표의 유일한 목적은 살아서 사천에 도
착하는 것이었다.
남궁천기는 침을 살짝 입안에서 돌렸다. 위기는 뒤집어 말해서 기
회가 될 수 있었다. 존덕문의 쌍덕과 연락이 두절 됬다는 말은 강동
어디에선가 청룡장과 존덕문의 쟁패가 벌어졌다는 말이다. 이 쟁패에
서 청룡장이 이겼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존덕문이 이겼다면 어떤 명령이든 내려왔어야 했다. 하다 못해 퇴
각하라는 명령이라도 말이다. 더군다나 청룡장의 소주지단은 아무 일
이 없었다는 듯이 평상시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거대한 세력간의 충
돌이 없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남궁천기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앞으로의 방향을 정리했다. 자신이
보아 왔던 실패한 상인들의 경우를 떠올렸다. 대부분 과감하게 투자
할 때와 물러 날 때를 구분 못해 미적거리다가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생사존망의 위기에 몰려 손해가 난다는 걸 알면서도 일
단 물린 돈을 아까워 계속 투자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십중
십 큰 손해를 보고 파산지경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금 발을 뺄 때인가 더 강하게 투자를 할 때인가.'
남궁천기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존덕문과 청룡장의 쟁패의 승부
에 따라 차기 강호의 대세가 뒤바뀌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에 따라
천하 상권도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남궁세가는 그
동안 존덕문에 많은 투자를 해왔다. 그 투자의 금액과 정성을 볼 때
여기서 손실을 입는 다면 가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더 시간
을 끈다면 도매금으로 가문 전체가 피에 잠길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번 일은 단순한 상계의 치열한 황금전쟁이 아니라 강호의 쟁패였고,
강호의 싸움은 늘 피를 동반했다.
남궁천기는 손에 쥔 땀을 흘려 내렸다.
'하지만 아직 승부가 난 건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