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천부를 휘감아 도는 진회하(秦淮河)위에 반 쪽 달이 새 초롬이
떠올라 별 빛들을 지워갔다. 진회하를 내려다보는 한 장원의 이층 전
각에서 고요한 목소리가 사위를 촉촉히 적셨다.
"오랜 기다림이 있었다."
목소리가 흘러나온 이층 전각의 창가는 빛이 넘쳐났고 수묵화가 사
방 벽에 빼곡히 걸려 있어 은은한 묵의 향기를 느끼게 했다. 수묵화
아래로 검은 무복을 입은 수백 명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 가운데
새하얀 백발을 뒤로하고 하얀 수염을 단전까지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붉은 뺨을 어루만지며 수염까지 쓸어 내렸다.
텅빈 대전으로 두 명이 약간 무거운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가슴
에 덕조라는 글을 새긴 백발노인 상관덕조였다. 붉은 안색에 분칠을
한 듯 눈썹이 매우 무표정하게 보였다. 그 옆을 따르고 있는 존덕문
주 선우중현은 약간 흐트러진 흑발과 조금 까칠해 보이는 검은 수염
이 근심을 매단 듯 했다.
"백도와 청룡장의 충돌작전은 실패했습니다. 백리무군을 비롯한 오
전 칠각의 형제들은 새로운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호 이남의
전 연락망이 마비가 됐습니다. 덕분에 덕조회의 전 병력의 생사는 물
론 현황까지 불분명한 상태입니다. 다른 백도문파의 연락망을 이용하
려고 해보았지만 그들도 목을 빼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확실한 게
있다면 청룡장의 주력이 대거 남진했다는 겁니다. 내일 오후까지는
어떻게 정보망을 보강 할 수 있습니다만 그 사이가 문제입니다. 덕조
회가 전멸할 지도 모릅니다."
선우중현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선우대덕은 별 미동을 보이지 않았
다. 선우중현은 다급히 설명을 덧 붙였다.
"백도와 청룡장의 충돌도 실패로 돌아간 지금 덕조회마저 전멸한다
면 앞으로 본 문의 대계를 펼치는 데 큰 지장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그곳에서 건문회와 청룡장의 이름으로 거병하는 순간 일의
성사 여부와 관계없이 임무가 끝난 것이다."
선우중현은 깜짝 놀라는 급히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건문회와 청룡장의 이름으로 거병을 하는 게
덕조회의 임무였다니요? 덕조회는 청룡장을 치기 위해 남하시킨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럼 방금 나간 존덕수호무령대의 임무는 뭡니까?"
선우대덕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일 날이 밝으면 알게 될 것이다."
다시 황급히 입을 여는 선우중현을 보자 선우대덕은 상관덕조를 바
라보았다.
"양산월의 장안 거병이 내관들에게 접수되었느냐?"
선우중현은 무슨 말인지 잘 몰라 상관덕조의 안색을 슬쩍 바라보았
다. 상관덕조는 무한한 환희를 담은 미소를 지었다.
"네. 지금쯤은 금의위와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을 껍니다. 날이 밝
으면 오군도독부에 명이 내려질 것으로 보여집니다."
"흠. 강동의 유지와 호족들의 반응은 어떠했느냐?"
"오군도독부의 정병이 자신들을 노리고 강남 곳곳에 스며들었다는
정보에 모두들 두려워 했습니다. 이들은 밤을 도와 소주로 모여들
것입니다. 이들이 소주로 모여든다면 청룡장은 하기 싫어도 칼을 빼
들어야 할겁니다."
"후후후. 청룡장과 청룡장의 소주지단에 모여든 백도군웅들과 강동
의 유지와 호족들이 한데 뒤섞여 오군도독부의 공격을 받게 된다면
일이 정말 재미있게 진행되겠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청룡장의 움직임을 보면 아직 이러한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듯 합니다."
"그들의 움직임이 어떻하더냐?"
"장강에 거경방의 수상객들과 태호 이북의 지단과 분타를 집결시켰
고, 청룡단도 수로의 요소를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백오가 잘 쓰는 전법이지. 퇴로를 막고 정예로 적의 심장부를 쑤
시는……. 백오라면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잘 알 것이다. 그로서는
군부와 정면 충돌을 하는 것 보다 일단 예봉을 피하고 나를 제거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오군도독부의 일차 공격은 어찌어찌 막아내고 내
목을 들고 사실의 전후 관계를 밝힌다면 청룡장의 세력과 강동의 유
지 호족들이 많이 꺽기이기야 하겠지만 큰 피를 흘리지 않고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이겠지. 허나 여긴 응천부. 청룡장이 전력을 다할 수 없
는 지역이지. 소수의 고수들이나마 모두 소주에 묶여 있고, 백오와
몇 명의 정예들로는 정면대결을 걸어올 수가 없을 테니 속이 타겠
군."
"후훗 이제 백오에 대한 짐을 더시겠군요."
선우대덕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머리가 시원해 진 느낌이야."
선우중현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다
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번 작전의 핵심은 백
도와 존덕문의 정예를 이용 청룡장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헌데 두 분
께서는 전혀 다른 일로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상관덕조는 멍해 있는 선우중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둘 째도 일의 전말을 알 때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늦은 저녁이었지만 금의위의 집무실은 분주히 오고가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자기 일이 아니면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였다. 서진명은 그
바쁜 와중에도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부하들에게 몇 번 고개
만 끄떡여 주고 도지휘사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밖의 분주함과는 아랑곳없이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는 집무실은 마
치 텅 빈 공간 같았다. 의자에 간신히 걸터앉아 있는 도지휘사 도중
걸은 검게 마른 눈동자를 들었다.
"소식을 듣고 오는 길인가?"
"장안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도중걸은 묵묵히 고개를 끄떡였다. 이미 알고 있던 일이지만 사실
의 확인되자 서진명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금의위의 주된 임무는 암
행과 정보수집, 공작, 암살 등이었다. 현재 금의위의 임무 제 일 위
는 건문회였고, 제 이 위는 티무르 제국의 동진이었다. 티무르 제국
의 동진이 제 이 위인 것은 군부가 이일을 전담하고 있기 때문이었지
만 금의위로서는 이 중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되었
다. 이들의 문제가 붉어진 다면 명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것이다.
헌데 이 두 가지가 다 얽힌 사건이 장안에서 터진 것이다.
건문회의 장안거병. 일단 일이 벌어진 이상 금의위에는 변명의 여
지가 없었다. 책임자 처벌보다 더 큰 것은 황제의 불신으로 새로운
정보조직이 대두하는 것이다. 책임자 처벌은 몇 명의 수뇌부에 한 정
될 수 있지만 새로운 정보조직의 대두는 금의위 전체의 몰락을 불러
올 것이 뻔했다.
자신이 죽더라도 금의위가 유명무실하게 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도중걸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게 되었네. 일단 강남부터 휩쓸어 버리
게."
외부의 적을 치기 위해서는 먼저 내부의 불순세력을 제거해야 하는
법. 장안에서 거병이 일어났다면 강남에서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
이 없었다. 이런 일에는 먼저 선수를 치는 자가 유리한 고지를 점령
하는 법이었고, 일단 칼을 빼들면 옥석을 구분하지 않고 빠르게 휘둘
러야 했다.
서진명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려고 할 때 종소리가 다섯 번 연달
아 울렸다. 도중걸은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섯 번의
종소리는 고위층 내관이 방문한다는 신호였다. 고위층 내관이 금의위
를 방문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황제의 부름이나 황명을 전할 때뿐이
었다.
도중걸과 서진명은 의관을 정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명의
새끼 환관을 대동한 병필태감 도공공은 귀에서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
을 수염 대용으로 쓰다듬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청에 들어섰다.
도중걸과 서진명은 새끼 환관이 황금포단을 들고 왔는지 슬쩍 살폈
다. 황금포단을 들고 있다면 어명이 내린 것이고, 없다면 아직 기회
는 있는 것이다.
도중걸과 서진명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병필태감 도공공의 입가
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등뒤로 더욱 밝아진 달빛이 흘러 들
어왔다.
막간산에 또아리를 튼 존덕문 덕조회 십삼당의 수좌인 일진무극당
주(一眞無極堂主) 금향진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나무로 잘 위장된
바위에 올라앉아 오후의 햇살을 하나 가득 받고 있는 드넓은 평원을
바라보았다. 오곡이 풍성한 벌판. 사시사철 농사가 가능한 농토. 태
원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우기 여기서 남서쪽으로 삼백
리를 가면 황산 광명정이 있다.
황산 광명정을 생각하자 금향진은 가슴 설렘을 느꼈다. 첫사랑의
연인을 수십 년만에 다시 만나는 것 같았다. 이제 곳 그곳에 가볼 수
있으리라.
구구 중양절의 날이 밝으면, 간악한 악도들을 토벌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빛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이어가던 금향진은 인기척에 고
개를 돌렸다. 그 앞에는 십삼약당의 당주인 천약성수 하백이 흰 수염
을 바람에 가볍게 날리며 미소 띈 얼굴로 다가왔다.
'이 일이 끝나면 바로 청소를 해야 할 자.'
금향진은 보살도(菩薩道)를 모르는 이런 자들을 이용하는 것에는
찬성을 했지만 회의 당주로 임명한 것에는 원색적인 거부감을 가졌
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용가치가 크니 웃는 얼굴로 대해야 했다.
"무슨 일이시오."
천약성수 하백은 주위를 살피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덕조령이 내려왔습니다."
금향진은 뜬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덕조령이 자신에게 내려와
다른 당주에게 전파가 됬으면 됬지 다른 당주, 그것도 보살도를 모르
는 당주로 부터 자신이 받는다는 건 생각도 못했다. 금향진이 뭐라고
대꾸를 하려고 할 때 천약성수 하백은 오른손은 펴서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모아 가슴 위로 끌어올리는 항마촉지인을 살짝
지어 보였다. 헌데 왼손의 검지가 중지와 함께 엄지에 닿아 있었다.
금향진은 깜짝 놀라 왼손을 말아 쥔 상태에서 검지를 세우고 가슴
으로 끌어 당겨 반배를 취했다.
"부처는 사방에 있는데 어느 부처가 진짜 부처이오?"
"땅에는 동서남북이 있지만 하늘은 원융무애하여 사방이 없고 오직
달과 해만 충천할 뿐입니다."
금향진은 너무 놀라 달과 해인지 해와 달인지 다시 물으려 했다.
해와 달이라면 우사였고 달과 해라면 좌사였다. 금향진은 천약성수
하백의 얼굴을 보고 그가 어떤 능력으로 십삼당주에 올랐는지 떠올렸
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좌사를 뵙습니다."
그의 가슴은 쿵쾅거렸다. 교에 입교한 이후 좌사의 얼굴을 뵌 적은
극히 적었다. 그는 교의 신화적인 좌우양사(左右兩師) 두 분 중에 우
사는 뵙고 싶어했지만 좌사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배교도가 좌사의
손에 어떻게 죽어갔는지 몇 번 보았기 때문이다. 젋은 날의 기억이었
지만 지금 상기되자 사지백해가 힘을 잃고 식은땀을 줄줄 흘려 내었
다.
천약성수 하백은 금향진의 어깨를 부축했다.
"나는 달 그늘에 뜨는 칠성 중하나요. 당주께서는 이 덕조령대로
십삼당을 움직이시오. 이 명이 끝날 때까지는 어떠한 명령도 우선할
수 없소."
금향진은 천약성수 하백이 전해주는 서찰을 공손히 받아들었다. 천
약성수 하백은 금향진의 어깨에 앉은 이슬을 털어 주었다.
"십삼형(十參刑)을 기억하시오."
금향진은 오래 전에 사라졌던 그 형벌을 떠올리자 다시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교의 가장 끔찍한 십삼 형이 사라진 것은 좌사께서
모습을 보이지 않은 후였다. 이제 좌사께서 다시 세상에 나오셨으니
십삼형도 자연스럽게 부활이 된 것이다. 금향진은 자신이 십삼형의
고통을 모르는 이들에게 시범을 보이는 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소 소인은 자 잘 알고 있습니다."
떠듬거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한 금향진은 천약성수 하백이 몸
을 돌려 자신의 당이 포진한 곳으로 가자 조심스럽게 서찰을 펼쳤다.
<하늘에 있는 덕이 빛이 되어 땅에 비취니 제마(諸魔)가 굴복하고
만물이 생명을 되찼도다.
일이 틀어졌다. 지금 청룡장의 정예무사들이 그곳으로 진격하고 있
고, 각 분파와 지단이 광역포위망을 구성중이다. 일단 포위망이 완성
되면 그 누구라도 돌파 할 수 없게된다. 일진무극당주는 본 회 십삼
당을 이끌고 남쪽 신안강(新安江)까지 내려가라. 신안강에서 서쪽 황
산으로 길을 터서 가되, 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단 한 명이라도 절대
로 맞서지 말고 다시 남쪽으로 도주해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황산
으로 가다 길을 막는 자를 만나면 절대로 맞서지 마라.
남쪽으로 가면 창강(昌江)의 상류에 도달할 것이다. 이 강을 따라
가면 경덕진이 나온다. 사흘 뒤 오시에 경덕진 남문에 도를 차고 경
비를 서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햇살이 너무 덥습니다' 라고 하면 그
가 '경덕진에는 쉴 곳이 많습니다.' 라고 답변을 할 것이다. 그럼 너
는 '먼길을 와서 노자가 부족한데 어쩌지요.' 라고 되 물으면 그는
'관대인은 대인대덕하신 분이라 노자가 없는 분들에게도 쉴 자리를
마련해 주십니다.' 이때 너는 '그럼 밝은 빛으로 길을 비추어 주시겠
습니까.' 라고 하며 일문 짜리 동전 아홉 개를 건네주어라. 그럼 그
가 너희들이 숨어 있을 곳을 안내해 줄 것이다. 만약 경비를 서는 자
가 창을 들고 있으면 경덕진에는 들를 생각하지 말고 파양호를 건너
남창성 남문으로 가라. 이곳에서의 행동요령도 동일하다. 만약 남창
성의 남문에서도 안내자를 찾지 못하면 구령산(九嶺山)으로 숨어 들
어가 나의 명을 기다려라.
덕조(德照)>
일진무극당주는 급히 서천목산과 동천목산에 사람을 보내 명을 전
했다. 일이 틀어져 포위를 당했다면 최대한 청룡장의 영역에서 멀어
져야 했다.
육당을 이끌고 한 밤중이 되어 막간산에 밑에 들이닥친 예리성의
손에 일대에 포진한 각분타에서 보내온 전서가 잡혔다. 예리성은 전
서를 살피며 곤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옆으로 예리극과 가구통이
따라 붙었다.
"무슨 소식입니까?"
"막간산과 동천목산에 있던 놈들이 서천목산에 집결했는데 모두 도
주 중이라는 군. 포진한 분타 병력으로는 상대 할 수 없다는 보고
야."
현무당주 가구통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있던 자들이 지금 서천목산에 도착했다면 오전에 출발했다는
말인데……. 그것도 거침없이 달려야 할 텐데.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새벽이면 아직 장의 상황이 호전되기 전입니다. 그때 병력을 물린
다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맞지 않습니다. 적들에게 이 지역은 낮
설고 지리에 어두운 지형입니다. 그런 지형을 매복을 두려워하지 않
고 질주해 간다는 것은……. 우리의 방어선과 유사시 우선적으로 차
단하는 곳을 알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백호당주 예리극은 고개를 갸웃했다.
"적들이 우리의 경계망을 알고 있다면 도주할 필요가 있나? 그리고
내가 적의 경계망을 안 다면 한 두 군데 급습을 해서 적이 무턱대고
추적하지 못하게 하겠네."
현무당주 가구통은 고개를 끄떡였다.
청룡당주 예리성은 강동의 지도를 보며 손을 집어나갔다.
"남쪽으로 길을 텄다면 금화지단쪽으로 도주하고 있다는 말인
데……."
"금화지단에는 이미 연락을 보내 휘하 분타병력을 이끌고 북상해
달라는 전서를 보냈습니다. 금화지단이 북상하여 신안강(新安江: 전
당강의 지류중 하나) 건너편에 진을 치고, 항주지단에서 쾌속정을 타
고 부춘강(富春江: 전당강의 지류중 하나)을 거슬러 올라오는 길이니
하루 뒤면 신안강에 도착할 것입니다. 우리가 남진해 내려간다면 적
의 삼면을 포위해 일망타진 할 수 있을 껍니다."
현무당주 가구통의 말에 예리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과연 그럴까? 적이 우리의 방어선을 안다면 신안강에서 바로 서쪽
황산으로 길을 잡지 않겠나? 물론 적이 우리 방어 계획을 알고 있다
면 말일세."
백호당주 예리극이 자신만만하게 말문을 열었다.
"민단을 통해 이미 신안강 일대의 어촌 마을에 수상한 자들에게 배
를 내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유사시에 배에 불을 질러야 할 경우 본
장에서 다 값아 주기로 했습니다. 적이 배를 이용하지 못한 다면 곧
따라 잡을 수 있습니다."
"어디서?"
"황산이나 구화산 쯤에서……."
말을 하던 백호당주 예리극은 입을 꾹 다물었다. 청룡장의 서쪽 최
대 세력권은 황산과 구화산의 중간지점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청
룡노야때 부터 황산너머로 세력진출을 금지해 왔다. 초기에는 황산의
동쪽 변두리에도 못 미치는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힘이
넘쳐 자연스럽게 황산을 넘어 구화산까지 뻗혔지만 무사를 직접 보낸
적은 거의 없었다. 단지 그 일대 군소 문파들이 청룡장의 안면을 많
이 봐줄 뿐이었다.
"우리가 육대당과 항주, 금화 양 지단, 팔개 분타의 전 병력을 이
끌고 황산을 넘었다고 치세. 장주님의 명령은 어기는 건 둘째치고 이
많은 병력이 빠져나가면 본 장의 세력은 누가 유지하고 있나? 자네
지금 평시라고 생각하고 있나?"
백호당주 예리극은 형의 질책에 목을 뺐다.
"아 아닙니다. 제가 잠시 잘못 생각했습니다."
현무당주 가구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황산에 미리 가서 진을 치고 있겠네. 밤을 도와 달린다면 새
벽녘에는 당도 할 수 있을 꺼야."
"병력을 나누기에는 적의 숫자가 너무 많은 것 같은데……. 고수도
파악되지 않은 상태이고, 여러모로 좋지 않아."
"적을 소탕하는 것은 몰라도 저지하는 것은 내게 맏겨 보게."
예리성은 고개를 끄떡였다.
"좋아. 몇 개 당을 지원해 줄까?"
"현무당 하나면 족해. 황산분타 친구들은 내가 오는 것도 탐탁하지
않을 껄."
가구통 뒤에 있던 현무당의 대주 한 명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자
신감의 표현이었다.
이철룡은 기름이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철판 위에서 칼을 돌리며 잘
양념된 고기완자들을 이리저리 헤집는 걸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요리
사는 고기완자가 제대로 익었는지 살펴보지도 않고 접시에 담자 앞에
서 기다리던 점소이가 잽싸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고기 완자가 익
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이들은 서로 사양하거나 겸양을 떨지 않고 젓
가락을 놀렸다.
이철룡은 따끈한 고기완자를 하나 입에 물었다. 뜨거운 기운과 함
께 매콤하면서도 육즙이 씹히는 맞이 입안을 침으로 가득 고이게 했
다. 이철룡은 고기완자 하나를 다 먹고 접시를 내려보았지만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이철룡은 입맛을 다시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군막 안에는 본격적으로 술판을 벌이려는 듯 술동이가 끊임없이 날
라져 왔고, 군웅들도 사양하지 않았다. 이철룡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도 웃는 얼굴로 잔을 권해왔다.이철룡은 옆에서 주는 술잔을 받
으며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새우를 노릇노릇하게 튀긴 요리가 탁자 위에 올랐다. 이
철룡은 새우를 하나 입에 물고 사숙을 찾았다.
'사숙께서는 어디 가셨지?'
두리번거리던 이철룡의 눈에 한쪽 구석에 자리한 채 음식을 피하는
나관추의 모습이 잡혔다. 이철룡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숙에게다가 갈
려고 했지만 접시를 들고 이리저리 뛰는 점소이들이 잠시 눈앞을 가
리는 사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자시 자리에 앉았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주방장들의 칼 놀리는 솜씨가 막 떠오른 달빛에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