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친군(親軍)을 제외한 대명의 전군을 통괄하는 오군도독부는
좌우중전후(左右中前後)의 다섯 부로 이루어졌다. 각 부(府)는 정 일
품의 좌(左) 우(右) 도독(都督)과 종 일품의 도독동지(都督同知) 각
1명이 지휘했고, 각 도독부(都督府)는 상호 예속관계가 없었고 모두
직접 병부(兵部)와 연락을 취하도록 했다. 하지만 정난지변 이후 지
금까지 오군도독부는 이름만 분리되어 있었을 뿐 실제로는 좌군도독
부 좌도독 사마일도가 다스렸다.
그 이유는 원래 오군도독부에 속한 도독과 도독동지들이 최후의 순
간 영락제에 투항했고, 위국공(魏國公) 서휘조처럼 혈연이나 군심을
얻기 위해 죽일 수 없었던 장군들을 회유하기 위해 예전의 관직으로
이들을 유혹했다. 일부는 그 관직에 나가 새로운 황제에 충성을 맹세
했고, 일부는 집에 남아 끝까지 고사를 했다.
영락제는 고사를 한 장군들에게 내려진 임명장의 빈자리는 그대로
놔두었다. 덕분에 오군도독부는 좌(左) 우(右) 도독(都督)중 한 명만
있거나 아예 도독동지가 통솔하기도 했다. 이런 오군도독부의 도독
중에 유일하게 영락제를 따라 정난군(靖難軍)에 가담한 장군이 사마
일도였다. 때문에 오군도독부는 명목상으로는 수평적 관계이지만 실
제적으로는 사마일도의 지휘통제를 받았다.
대명의 전군을 지휘하는 사마일도는 일세의 대장군답게 수염이 번
쩍이는 호안이었다. 그는 금의위 도지휘사 도중걸을 보며 고개를 갸
웃했다.
"일개 강호문파를 치는데 우리 군부가 굳이 나서야 겠소? 게다가
금의위는 황명이 없어도 움직일 수 있지만 우리 오군도독부는 병력을
통솔할 권한(統兵)은 있어도 출병의 권한은 없소. 군이 움직이려면
병부상서가 관련부서의 장들을 모아 회의를 하고 폐하께 주청을 드려
야 하는데 그 일을 하는 데만도 반달은 걸릴 꺼요. 듣기로 일이 아주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다는데 언제 준비를 해서 출병을 하라는 거요?"
미리 깔끔이 정서를 해서 준비를 한 듯한 대답에 도중걸은 말문이
막혔다. 사마일도는 도중걸을 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강남에서 병을 잘못 움직였다가 채 수습되지도 않은 민심
이 흔들린다면 그땐 누가 책임을 지겠소. 금의위가 정 못하겠다면 내
가 폐하께 주청을 드려는 보겠지만……. 그때도 과연 폐하께서 지금
과 같은 관심을 기울여 주시겠소. 더우기 환관들이 정보조직을 만들
려고 폐하께 달라붙어 있는데 이번 일로 그 일이 가속화되지 않겠
소."
도중걸은 가슴 깊숙한 곳을 찔린 듯 인상을 찡그렸다. 금릉의 성문
을 열어준 환관들은 자신들의 공을 내세워 여러 가지 권리를 탐하였
다. 영락제도 이들의 공을 무시하지 못해 황제의 친군 중 일부를 지
휘통제하는 권한을 내려 주었다. 하지만 환관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
하더 자신들의 위치에서 가장 유용한 권한을 기웃거렸다.
환관들이 노리는 업무는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며 황제의 손발
이 되어 고관대작과 군부를 감시하고 내사하는 것으로 지금 이 일은
지금 금의위가 하고 있었다. 금의위는 환관의 득세를 막고 자신들의
입지를 단단히 다지기 위해 막중한 업무를 혼신을 다해 처리해 왔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사마일도의 일언은 도중걸에게 큰 부담이 되었
다.
도중걸은 몇 마디 더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의위에서 알아서 처리하지요."
"부디 큰공을 세워 금의위의 굳건함을 알려주기 바라오."
"잘 알겠습니다."
도중걸은 문 밖으로 나오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군 도독동지
곽추산을 보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 우군 도독동지 곽추산은 답례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곽추산은 사마일도에게 가볍게 군례를 취했다.
"북 직례(북경)에서 비밀리에 들어 온 정병 오천이 변복하고 강남
의 각지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이라도 즉시 출병
할 수 있습니다."
"금의위가 실패하던 성공하던 일이 벌어지는 순간 우리가 개입한
다. 우리가 개입하는 순간 각 지휘사의 군병은 물론 주, 현의 관군까
지 우리가 지휘통제 한다. 병력의 통제권을 접수하는 그 즉시 각 군
의 지휘관들은 주적 순위에 따라 강남의 반역도들을 주살한다. 그전
까지 반역자들에게는 금의위만 움직이는 것으로 알려져야 한다."
"염려 마십시요. 각 군의 도독이나 도독동지들은 물론 친군과 금의
위도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동원된 정병 또한 자신들이 무슨 임무로
강남으로 왔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강남의 반역자들이나 앞으로 우환거리가 될 자들을 짧고 빠른 시
간 내에 모두 제거한다. 그래야 마음놓고 외적을 상대 할 수 있는 것
이다. 금의위가 꺼려하고 있는 청룡장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제거해야
할 대상중 하나 일 뿐이다. 우리의 주적은 강남의 반역인사들이다.
이번 작전이야 말로 우리 오군도독부가 겉멋만 든 금의위와 간사한
아첨으로 폐하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환관들에게 가하는 따끔한 일
침이 될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곽장군."
"네."
"이번 작전의 공은 그대에게 있네. 그대가 반역도들의 명단을 입수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려운 싸움을 전개했을 것이네."
"모두가 폐하의 성덕이며 장군의 홍복입니다. 소장은 그저 두 분의
공덕에 머리를 조아릴 뿐입니다."
"내 폐하를 알현하고 자네를 주청할 생각이네."
곽추산은 얼른 오체투지를 했다.
"소장에게 이 일을 맡겨만 주신다면 반드시 풍성한 수확을 올려 대
장군님께 바쳐 올리겠습니다."
사마일도는 고개를 끄떡였다.
"기대하고 있겠네."
"황송하옵니다. 장군님. 신불(神佛)께서 장군님께 축복을 내리실
것이옵니다."
구월 구일 중양절이 밝아오자 소주성 외곽에 자리한 청룡장의 소주
지단은 육중한 문을 활짝 열었다. 문 좌우로 청의에 백색피풍의를 두
른 무사 다섯 명이 장검에 손을 얹고 도열했다. 이들 앞에는 청룡당
주 예리성과 백호당주 예리극이 손님들을 맞이했다.
배첩을 내민 백리무군은 날카로운 눈으로 두 당주와 무사들을 훑었
지만 이들은 젊은 투기는 있어도 적의는 없어 보였다. 반혈맹주 백리
무군을 필두로 개방의 풍개 견로자, 협개 나정호, 소림의 혜심대사,
무당의 일송자, 화산파의 무량자, 사천당문의 당표, 포응검객 나관추
등 강호의 기라성 같은 명숙들이 줄줄이 들어갔다. 강호의 일류고수
들과 그 수행인원들이 무수히 들어가고 있지만 청룡장의 무사들은 요
지부동이었고, 두 당주는 미소마저 머금었다.
소주지단의 넓은 연무장 중앙에는 사방이 터진 대형 군막이 세워졌
고 그 좌우로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군막이 산맥처럼 이어졌고, 군
막 안에는 다탁과 의자가 가득했다.
문파를 대신해서 온 이들은 대형군막에 자리했고, 그 외에는 좌우
군막에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앉았다.
군웅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군막 저편에서 단우백과 무상 서
왕, 육대당주와 주요 고수들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왔다. 중단전까지
내려 간 검은 수염이 풍채와 어울려 관운장이 살아 돌아온 듯 보였
다.
이들이 오는 것을 보던 건곤신개가 고개를 갸웃했다.
"청룡장주가 누구를 호위하고 있는 듯 보이지 않소?"
옆에 있던 취선개도 단우백 일행을 자세히 살폈다. 단우백과 무상
서왕의 반 족장 뒤에서 육대당주의 호위를 받는 듯 가운데에 자리한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홍색 치마에 자색 저고리를 입은 소녀는 파리
한 안색에 햇살이 따가운지 눈을 살짝 찡그렸다.
단우백 일행이 점점 가까워 질 수록 소녀의 모습이 크게 부각되었
다. 길에 땋아 내린 머리에는 갖가지 장식이 화려하게 빛났다. 새하
얀 얼굴의 양 빰과 입술은 피보다 붉었고 초롱한 눈망울은 너무도 맑
았다.
화산파의 무량자가 다가오는 이들을 살피다 협개 나정호에게 말을
건넸다.
"저 소녀는 누구요?"
"저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소림사의 혜심대사가 나직히 물어왔다.
"누가 혈마를 죽였다는 소천이오?"
"내상이 심해서 나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소림사의 혜심대사가 나직이 말을 건넸다.
"형산파의 반양상인께서는 오시지 않았소?"
"일이 바쁘시다며 형산으로 돌아갔습니다."
당표가 남궁천기를 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일이 바쁘기는……. 삼혈맹이 사라진 남령산맥 일대를 빨리 장악
하려는 속셈이겠지. 아무튼 이번 삼혈맹의 토벌로 형산파만 덕을 본
것 같아."
서로 말을 주고받는 사이 단우백 일행은 어느새 군막 안으로 들어
섰다. 미소녀는 군막 안에 들어오자 중인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천
막 안에 모여 있는 소림과 무당, 화산, 남궁세가, 당가, 백리가의 고
수들이 이상하게 그녀의 눈을 받아내지 못했다. 공력이 정심한 혜심
대사와 일송도장은 물론 여기 모인이들 중에 최고 배분의 최고 고수
라고 할 수 있는 풍개 견로자도 미소녀의 눈빛에 시선이 떨려왔다.
서왕이 가운데 있는 의자를 반쯤 빼자 미소녀는 사양하지 않고 자
리에 앉았다. 중인들은 무거운 침묵으로 미소녀를 바라보았다.
새 하얀 단순호치가 살짝 벌어졌다.
"제가 약왕각주로 있는 미선(美仙) 홍사옥이에요."
혜심대사는 나직히 합장 배례했다.
"아미타불. 약왕각주시라면?"
"여러분들이 궁금해하는 성수환독의 주인이에요."
군웅들 사이에서 경악성과 비명성이 터져 나왔고, 몇 명은 병장기
를 빼들었으며 급히 운기조식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미선 홍사옥은
그런 모습을 찬찬히 살피며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백리무군은 처음부터 일이 꼬여진다고 생각하고 단우백을 노려보았
다. 원래 대로라면 자신들이 여러 가지 증거를 대고 청룡장을 압박해
들어가서 서로 손을 쓰게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을 진행하는
주도권은 바로 자신이 쥐고 있어야 했다. 헌데 청룡장은 처음부터 단
우백이 나서지 않고 이 어린 계집아이를 내세운 것이다. 그것도 구육
두개 장로의 사인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성수환독을 쓸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일이 이렇게 되면 중인들은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었다.
청룡장이 성수환독을 써서 구육두개를 죽였다면 이렇게 사실 그대
로 드러내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물론 몇 명은 비천설상사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청룡장을 포함한 대부분의 군웅들은 그런 동
물이 있는지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백리무군은 풍개 견로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주도권을 잡아야 합니다.'
백리무군은 물론 남궁천기와 당표의 시선이 풍개 견로자에게 모아
졌다. 견로자의 두 눈에는 싸늘한 광망이 흘렀다.
"네 사부는 어디 있느냐? 사부를 불러와라."
홍사옥은 작은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호. 제 사부님이 누구인지 아세요?"
중인들의 노한 시선은 홍사옥을 건너 청룡장주 단우백에게 모아졌
다. 풍개 견로자가 노기를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주 이게 무슨 짖이오."
단우백은 냉소를 머금었다.
"본 장에서 성수환독을 다루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여러분
들께서는 구육두개 장로님의 사인인 성수환독의 출처와 독왕 역상과
의 관계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오신 것 아니십니까? 본
인은 장의 최대 비밀이 밝혀지는 것을 감수하고 만 천하에 그 사실을
공표하고 있는 겁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시험을 해보셔도 좋습니
다. 단 공력을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일푼의 공력이라도 들어가면
다른 분들이 승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에 제가 손을 쓰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 저와 사제는 군막 밖으로 물러나 있겠습
니다."
단우백과 서왕의 군막 뒤로 물러나자 홍사옥은 아미를 상큼 치켜뜨
고 견로자를 노려보았다.
"내 사부가 공손술유라면 믿겠어요?"
견로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공손술유 그가 누구냐?"
"증삼이라면 어때요?"
당표가 두 눈을 부릅떴다.
"요망한 것. 뉘 앞이라고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증삼은 공자의 제자였다. 증삼이 사부라면 어때요라고 물은 것은
내가 독술에 경지에 오른 전대고수의 비급을 익혔다고 주장을 한다면
당신들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은 것이었다. 모두들 그 말을 알아들
었지만 독왕 역상의 공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당표 였기 때문에 마
음이 초조해서 격한 말이 나온 것이다.
"흥."
홍사옥은 코웃음을 치며 손끝을 살짝 튕기었다. 그 순간 당표의 눈
이 부릅떠지며 양손으로 허공을 휘어잡았다. 백리무군이 장검을 빼들
었고 남궁천기의 손에도 어느새 검이 들려져 있었다. 당표는 양손에
열 개의 비도를 나누어 움켜쥐었다. 혜심자와 일송자는 그냥 앉아 있
었지만 옷자락이 부풀어오르며 사위를 누르는 압력을 가중 시켰다.
무량자는 차가운 눈으로 단우백을 바라보았다. 무량자의 눈빛은 단
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단우백의 공세를 차단시킬 수 있을 것 같이
강렬했다.
홍사옥의 전신은 군막 안에 가득 찬 고수들의 의해서 완전히 노출
이 되어 있었지만 청룡장의 수뇌부들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고 싸
늘한 눈길만 더해갈 뿐이었다.
홍사옥은 풍개 견로자의 전면에 침을 튀겨가며 냉소를 퍼부었다.
"당신은 정말로 철면피군요."
풍개 견로자는 일순 멍한 얼굴이 되었다. 무림에 출도하여 강호를
전전하면서 수백 번의 생사대전을 치루었고, 수천에 달하는 악도들을
지옥으로 보내 버렸다. 그 와중에서 들은 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
지만 그의 마음에 단 한번의 꺼리낌도 주지 못했다. 헌데 이 소녀의
평범한 욕 한마디에 자신의 공력이 흐트러지며 얼굴을 자신도 모르게
붉어지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 깜짝 놀랐다.
'내가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풍개 견로자는 다시 싸늘한 표정을 짖기 위해서 얼굴을 굳혔지만
모두의 눈에 어색함이 역력히 드러났다. 혜심대사와 일송자의 옷자락
은 가라앉았고 기세가 전과 같을 수 없는 남군천기와 백리무군도 검
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백리무군이 한 걸음 나서자 홍사옥이 재빠르
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성수환독을 쓴다고 했는지 따지고 싶은 거
죠?"
"그렇다. 그건 독왕 역상만이 만들 수 있고 해독 할 수 있는 독이
다."
"제가 대답을 한 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홍사옥은 견로자를 똑바로 보며 눈을 빛냈다. 견로자의 눈길이 살
짝 돌아갔다.
"무엇을 바라시오."
"내 집을 지켜 줄 수 있나요? 당신들 때문에 내가 입은 피해를 보
상해 줄 껀가요? 호숫가에서 아이들이 장난삼아 던진 돌에도 개구리
는 맞아 죽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껀가요?"
홍사옥의 말에 얼굴빛이 변한 것은 견로자가 아니라 뒤에서 묵묵히
앉아 있던 단우백이었다.
"홍 대고 그 그분을 모욕하지는 마십시요. 홍 대고께서 입으신 피
해는 제가 보충해 드리겠습니다."
홍사옥의 얼굴이 돌아가며 싸늘한 광망을 뿌리자 단우백도 고개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홍사옥이 견로자의 이름대로 자신의
집을 지키는 개가되라는 말 뜿을 알아챈 군웅들이 여기저기서 화를
터뜨렸다. 하지만 견로자는 화를 터트리지 않고 침울한 얼굴을 했다.
"대공을 완성하는데 방해가 되었구료."
"제 말귀를 알아듣는군요. 청룡장에서 십 년 동안 공부를 하는 동
안 저를 보호를 해주고, 원하는 약재와 독물들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약간의 보답을 해왔어요. 헌데 오늘의 사태가 발생했으니 그간의 공
부가 모두 헛 공부가 되어 버렸어요. 다시 십 년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여자로서의 아름다운 나이는 다 간 것이고, 또한 다시 이런 사
태가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보장 할 수 없는 거 아니겠어요."
홍사옥의 이 말은 청룡장과 자신이 깊은 관계가 아니라는 뜿도 포
함하고 있어서 군웅들이 청룡장을 치는 명분을 약화시키는 효과도 있
었다. 견로자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귀하가 성의 있는 대답을 해준다면 십 년 간 귀하의 집을 지켜주
겠소. 단 개방주의 사부가 아닌 풍개 견로자 그 자체로 말이오."
홍사옥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중인들은 넋을 읽은 듯
했고 당표는 얼굴에서 식은땀 마져 흘리고 있었다. 홍사옥은 품에서
새파란 빛이 어린 비수를 꺼냈다. 그 모습에 사인은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다. 홍사옥은 비수로 자신의 오른쪽 소매를 잘랐다. 소매는 잘려
지는 것이 아니고 새하얀 김이 되어 허공에서 사라졌다. 헌데 그녀의
팔목 윗 부분은 보송보송한 솜털이 나 있는 새햐얀 피부였는데 아래
는 새파랗게 죽어 있었다. 그 죽어 있는 가운데에 몇 개의 가는 비침
이 밖혀 있는 것을 고수들은 볼 수 있었다.
"옥정. 천년 한옥 천근을 제련하면 한 방울 얻을 수 있다는 독문의
무상지보. 다른 약과 배합해서 잘만 쓰면 만년 삼왕과 버금가는 약이
지만 독으로 쓸 때는 더 없는 독이 되고 말죠. 어지간한 독의 내성이
없는 사람은 일각을 버티지 못하죠. 아마도 당신들이 내 사부라고 주
장하는 그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서 준비 한 것 같군요. 하지만 이 옥
정도 제 팔을 마비시킬 뿐 더 이상은 진전하지 못하네요. 이것으로
제가 청룡장의 약왕각주를 할 만한 실력임을 보인 건가요? "
홍사옥의 말에 혜심대사와 일송자는 약간 얼굴을 굳혔다. 군웅들은
여기저기서 어린 소녀에게 너무 심한 독을 썼다는 소리를 터트렸다.
혜심대사는 얼른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당 대협께서는 홍시주께서 성의 있는 답변을 해주신다
면 해약을 드릴 겁니다."
"그렇습니다. 당 대협께서는……."
웅성대는 중인들을 무마하기 위해서 말을 꺼낸 일송자는 당표를 돌
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헌데 당표는 품에 손을 넣은 채 식은 땀만 흘
릴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당 대협님께 무슨 짖을 한 거냐?"
백리무군의 일갈은 웅성대는 군중들을 진정시키고 정신을 가다듬게
하는데 충분했다. 홍사옥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당 대협님을 보호해 주시겠어요?"
백리무군은 싸늘히 냉소를 지었다.
"누가 누구로 부터 당대협을 보호해 달라는 거냐?"
홍사옥은 일절 대꾸를 하지 않고 풍개 견로자만 바라보았다. 풍개
견노자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당표의 뒤에 가서 섰다.
"이제 대답을 하시겠소?"
"당가주께서 제 대신 대답을 해주실 꺼에요. 다른 자가 살인 멸구
를 하지 않는 다면 말이죠."
홍사옥의 냉소에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당표에게 쏠렸다. 당표의
이마에서 흘리는 식은땀이 더욱 깊어져 갔고, 이제는 몸마저 부들부
들 떨리기 시작했다.
백리무군이 일갈을 터뜨렸다.
"당 대협께 무슨 짖을 한 거냐?"
"호호호 당표 나와 같이 죽을 용기가 있느냐?"
홍사옥의 서슬 퍼런 눈길에 당표의 입이 벌어지며 새하얀 피를 토
해 냈다. 중인들의 눈이 커지며 경악성을 터뜨렸다.
"성수환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