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규환은 작은 탁자와 의자 네 개가 있는 정자 앞에 멈추어서 둘을
돌아보았다.
"이곳에서 쉬면서 잠시 기다리시지요. 안에 기별을 해야 하니까
요."
"알겠습니다."
당문호가 허리를 숙이자 목규환은 손을 맞잡고 인사를 하고 물러났
다. 목규환이 정자에서 살짝 떨어지자 당민궁은 참았던 말을 꺼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나도 생각중이다. 저 분은 아마도 운남 목왕부의 인물 같다."
당문호는 눈을 크게 떴다. 운남 목왕부. 황제와 성이 다른 이들 중
왕의 칭호를 받은 다섯 명의 용장 중 한 명인 목영이 받은 왕부였다.
주원장은 목영으로 하여금 자자손손 운남을 지키게 했다. 목영은 호
유용의 난 이후에는 이곳에 틀어 박혀 있는 듯 없는 듯 하였고, 남옥
의 옥 때는 병을 핑계로 군권을 반납했지만 곧 돌려 받았다. 정난지
변이 일어났을 때는 국경의 수비를 핑계로 병마를 움직이지 않고 고
사를 해 지금은 중앙 정계는 물론 세인들의 관심 밖에 위치했다.
당민궁은 고개를 갸웃했다.
"목왕부 인물이 무엇이 아쉬워서 이런 곳에서 역관직을 하고 있는
겁니까?"
당문호는 혀를 찼다.
"쯔쯔."
당민궁은 볼을 약간 부풀렸다.
"하교를 바랍니다."
"역관이란 무엇을 하는 직종이냐?"
"그야 관리들이 오고가는 길에 쉬어 갈 수 있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 아닙니까?"
"또?"
"공문서의 전달……."
말을 하던 당민궁은 무릎을 쳤다.
"그럼?"
목규환이 전각 안쪽에서 걸어오자 둘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멈추었
다. 당문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문호는 목규환의 미소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목왕부에서 뚜코족을 이용해 병력을 키우는 걸 황실에서 알고 있
는 것인가? 황실 몰래 병력을 키우는 거라면, 그 병력의 유지를 위해
서 우리의 상권을 노린 거라면…….'
당민궁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우리를 이렇게 대하는 것은 언제라도 살인 멸구 할 수 있다는 자
신감이 아닌가?'
당민궁의 이런 생각은 당문호의 헛기침 소리에 깨어졌다. 그 순간
아늑한 실내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열린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
을 맞으며 탁자에 앉아서 차를 즐기던 노인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
였다.
목규환은 얼른 손을 맞잡았다.
"왕사."
"오 어서들 오시오."
서평왕의 왕사 목진검은 약간 파란 기운이 감도는 눈을 반짝이며
반색을 표했다. 당문호는 몸을 살짝 떨며 손을 맞잡았다.
"사천당가의 당문호라고 합니다."
"당민궁입니다."
"허허허. 사천 당가의 영명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이 몸
은 목진검이라고 합니다."
목진검이라는 말에 당문호는 허리를 더욱 깊이 숙였다.
"목왕부의 대군저하 아니십니까?"
목진검은 어깨와 목을 반듯이 세웠다.
"허허허 일개 야인일 뿐입니다. 내 친우들 모두 저를 목대숙이라고
부르지요. 자자 서 있지들 마시고 앉으시지요."
"황송합니다."
당문호가 주저하며 의자에 앉자 당민궁은 그 뒤에 시립하려다가 목
규환의 권유로 의자에 앉았다. 이 둘이 앉자 백의시비가 세 잔의 차
를 가지고 나왔다.
목진검은 시비가 내려놓는 잔을 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산골이라 마땅한 차가 없습니다."
당문호가 잔을 받아 들고 향을 음미했다.
"천축의 명품이라는 구연화(救蓮花) 같습니다."
목규환이 탄성을 터트렸다.
"하! 대단한 안목이십니다."
당문호는 살짝 입에 차를 머금었다.
"저희 같은 야인을 이리 환대해 주시니 송구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
습니다. 미천한 자들과 함께 하시는 이 자리가 대군저하께 누가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옵니다."
목진검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허허허."
웃음을 멈춘 목진검은 목규환에게 눈 짖을 보냈다. 목규환이 자리
에서 일어나 읍을 하고 물러났다.
목진검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약재의 집산 때문에 오셨지요?"
당문호는 쓴 약을 입에 물고 웃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저희가 어찌 대군과 사사로운 일에 다투겠습니까."
목진검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아닙니다. 아니에요. 우리가 뚜코족을 통해 약재의 집산
을 이 쪽으로 돌린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당문의 식
솔을 이곳까지 모시기 위함이었소. "
창문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일순 멈추고 후한 기운이 둘을 엄습했
다. 당문호는 손에 힘을 빼고 귀왕령에 살짝 손을 얹었다.
"저희 당가에 서신 한 장,전언 한 말씀을 보내 주신다면 끓는 물
타는 불이 두렵겠습니까."
"허허허.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구려."
차로 목을 축인 목진검은 더위를 가르는 일언을 했다.
"묘강 천독문을 아시오?"
당문호의 등줄기에 흐르는 식은땀이 바람에 날아가며 귀왕령이 파
르르 떨렸다.
"조금 알고 있습니다."
당민궁은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쥐어짜는 듯이 느껴졌다.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이 코끝에 맺혀 정신을 더욱 사납게 했다.
목진검은 혀를 찼다.
"허허 젊은 나이에 심장이 이리 약해서야."
당민궁은 목진검의 일언에 목과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
개를 푹 수그렸다. 당문호가 살짝 입을 열었다.
"무슨 하교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묘강 천독문이 귀주에서 청성파의 정예를 크게 물리친 연후에 그
세력을 운남은 물론 광서와 귀주 사천의 남부까지 그 세력을 넓히고
있소. 이제 이 일은 운남뿐만 아니라 사천에서도 신경을 써야 할 정
도가 되고 말았소."
당민궁은 가는 호흡을 통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연후라 목진
검의 말에 의문을 느꼈다.
'그럼 이번 일은 뚜코족이나 운남 목왕부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는 말인가?'
목진검은 조심스럽게 사위를 살폈다.
"이곳에도 그들의 손길이 미치기 시작해 우리가 각 부족을 단속해
야만 했소. 사실 약재의 집산도 우리가 아닌 그들이 먼저 일을 벌려
놓은 것이었고, 거의 성사 단계에까지 가 있던 것들이었소. 해서 더
이상 지켜만 보았다가는 이들의 세력이 눈덩이처럼 불어 날 것이 염
려되어 부득불 뚜코족을 통해 사천 남부를 통솔하게 되었소. 하지만
지금도 우리의 눈을 피해 천독문의 세력이 날로 확장 일로를 걷고 있
소."
당문호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명분은 그렇다 이거군.'
목진검은 계속 해서 말을 이었다.
"운남의 정병이 나서기에는 꺼려지는 바가 있고, 지금은 이들을 이
용하고 있지만 언제 손이 끊길기 모르는 상황이오. 사천의 군마를 동
원하는 것도 검토를 해보았으나 마땅치 않다는 결론을 내었소. 해서
당가에서 이 번 사태를 해결해 주었으면 하오."
목진검의 눈은 매우 빛이 났다. 당문호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감히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가주께 이 일을 알려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목진검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허허허 물론 그래야 겠지요. 그리고 사천의 군벌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움직일 수 있으니 유념해 주시기 바라오."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당민궁은 앞서가는 당문호의 등만 바라보았다. 당문호는 무언가 골
똘히 생각을 하는 표정이었다. 몇 번 한 숨을 내쉬기도 하고, 혼자
고개 짖을 하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삼숙부님. 소질은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
니다. 안계를 넓혀 주시기를……."
당문호는 인상을 찡그렸다.
"뭐랄까. 사충초(死蟲草)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벌 같은 느낌
이라고나 할까. 암흑으로 점점 가라앉은 듯한데 그 실체를 확연히 알
수 없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묘강 천독문은 우리가 어차피 상대해야 할 적이 아닙니까? 운남
목왕부와 우리가 손을 잡는다면 우리한테 득이 되면 득이 됐지 손해
는 가지 않을 꺼라고 생각합니다."
당문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운남 목왕야가 언제 우리와 손을 잡겠다고 했느냐?"
"뚜코족의 왕사라는 목진검이라는 분이 운남 목왕부 사람 아닙니
까?"
"현 목왕의 숙부이기는 하지만 그가 목왕은 아니지 않느냐?"
"그게 무슨……."
"운남 목왕부는 언제든지 발을 뺄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천
독문을 상대하려면 운남에서 하지 왜 사천 남부까지 올라왔느냐 이거
다. 아무래도 가주께서는 뭔가 집히는 게 있겠지."
당문호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짙은 나무색을 살린 대전의 기둥이 삼장 간격으로 세워졌고, 각 기
둥 사이사이에 의자가 하나씩 놓여져 있었다. 대전의 상석에는 호피
로 감싼 태사의에 한 중 늙은이가 눈빛을 살짝 내려 깔고 앉아서 좌
우에 앉은 당문호와 당민궁의 말을 경청했다.
달그닥 달그닥.
두개의 철주를 손안에서 돌리고 있는 사천 당가의 당대가주 당걸의
눈길이 침잠해졌다.
"목진검이 천독문을 상대해 달라는 말이 전부였느냐?"
"네 그렇습니다."
"정말로 다른 말은 없었느냐? 흘러가는 말로다도 사천의 군벌에 대
해서 한 말이 없었느냐?"
당민궁이 무릎을 쳤다.
"있었습니다. 이 일을 사천의 군벌들이 알게 되면 공을 세우기 위
해서 움직일 수도 있으니 비밀을 유지해 달라고 했습니다."
뚝!
당걸의 손에서 돌던 철주가 멈추었다. 우극. 철추가 우그러지면서
사방으로 날카로운 침이 빽빽이 튀어나왔다. 당민궁은 두 눈을 부릅
떴지만 그 침마저 당걸의 손에 이겨졌다. 당걸은 붉어진 얼굴로 두
눈에 살광을 뿜어 대었다.
"중주상인연합회! 정녕 사생결단을 내자 이건가."
당민궁은 당걸과 당문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번 일은 묘강
천독문과 운남 목왕부와 관련이 된 것이 아닌가. 헌데 갑자기 중주상
인 연합회라니? 당문호의 얼굴에도 의혹이 구름처럼 일었다.
"가주. 무슨 말씀이신지?"
당걸은 잠시 끓어오르는 노기를 가라앉히고 목소리를 착 깔았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설명을 안 할 수가 없겠군."
"중주상인연합회에서 운남 목왕부와 손을 잡았다는 겁니까?"
당걸은 고개를 저었다.
"중주상인연합회가 손을 댄 곳은 운남 목왕부가 아니고 당금 황실
이다."
당문호는 빠르게 말을 받았다.
"당금 황제가 대권을 주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중주상인연합회가
이렇게 일찍 현 황제에게 패를 던지기에는 아직 정황이 좋지 않은 걸
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승부수를 던진거다. 어차피 강북의 몇몇 거상이 이
미 당금 황제와 연결이 되어 있으니 이 상황을 고착시키는 것이 더
낳다는 판단을 한 것이지."
"그것과 우리 일과는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당걸은 짧게 말을 끊었다.
"사천 군벌!"
당문호는 눈을 부릅떴다.
"사천 군벌. 황제가 드디어……."
당민궁은 무슨 말이 오고 가는지 몰라 애를 태웠지만 둘의 심각한
얼굴에 감히 묻지 못했다.
당걸은 당민궁을 처다 보았다.
"너도 이제는 대세를 보는 눈을 키워야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세이경청 하겠습니다."
"너도 알다시피 이 사천 지역은 몇 군데 요로만 막으면 기천의 병
력을 가지고도 백만의 정병을 막을 수 있는 곳이다. 해서 역대 황조
가 중원을 통일하고도 이 사천은 함부로 넘보지 못했느니라. 그것은
강호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삼혈맹은 물론 천하 무림을 석권하다 시
피한 혈천작 쿠차호의혈천마궁도 이 사천에서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
했다."
"그건 저의 당가의 자랑이 아니옵니까."
당문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본 가의 저력을 만방에 알리는 것이었
다."
당걸은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눈빛을 하더니 이내 신색을 접
었다.
"사천은 그 지역적 특색으로 인해서 중원이 조금만 혼란하면 바로
독립왕권이 들어섰고, 본 가 또한 그 일에 일익을 담당했다. 원의 철
기도 감히 검협을 넘지 못했으며, 주원장이 보낸 상우춘의 백만대병
도 사천 북북에 집결해 있던 원의 잔여 세력만 소탕했을 뿐이다. 그
외 사천 지역의 한인군벌은 충성의 서약과 함께 자식을 응천부로 유
학을 보내는 것으로 기존의 권익이 인정되었다. 이 곳은 호유용의 옥
이나 군문의 대학살인 남옥의 옥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주원장이 이
곳을 건드려 봤자 이익은 없고 해 됨만 있으니 그 서슬퍼런 칼날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헌데 정난지변이 일어나자 상황은 급변했
다. 그때는 변경에 있는 군왕과 병권을 쥔 장수들이 함부로 병력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이곳 사천은 각 군벌
간에 이합집산이 벌어져 서로 사천의 병마를 장악하려고 하였다. 헌
데 연왕이 승리를 거두자 사천의 군벌들은 여러 가지 유혹을 받게 되
었다. 정통성이 없는 황제. 혼란한 천하. 하지만 주원장의 생각대로
사천에는 천하를 도모할 만한 위인이 없었다. 그렇지만 불난 남의 집
에 가서 쌀을 퍼온다는 말처럼 여러 가지 무리한 요구를 연왕에게 했
다. 연왕은 소수의 병력으로 겨우 응천부만 장악한 상태라 각지의 군
벌들을 회유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각 군벌들에게 독립왕권에 준
하는 권력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지켜지지는 않았지. 이곳 사천을 제
외하고는."
당문호의 안색이 헬쓱헤 졌다.
"그럼?"
당걸은 눈을 내리 감았다.
"황제는 사천을 두고 포석을 깔기 시작한 것이다. 그걸 가능하게
할 자금을 대면서 부추긴 것은 중주상인연합회 일 테고. 운남 목왕부
는 천독문을 핑계삼아 사천 남부에 군대를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
군대는 천독문이 아니라 사천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당문호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당걸은 고개를 저었다.
"중주상인연합회에 있는 간세가 뜬금 없는 소문이라며 보내온 정보
라서 나도 반신반의했었다. 그래서 너를 보낸 것이었고."
당민궁은 헬쓱해진 안색으로 당걸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우리는 황실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겁니까?"
당걸은 고개를 저었다.
"사천의 삼대 군벌인 송번, 건창, 강녕위의 재주로는 연왕을 막지
못해. 거기다가 운남 목왕부 마저 현 황제에게 돌아섰다면 대세는 이
미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사천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표(表)를 보낸
다면 다른 군벌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럼?"
"우린 사석이다. 어느 쪽 편을 들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사천당가가 대세에 따라 황실에 붙는 다면 아직은 군벌의 영향력이
막강한 사천지역에서 예전처럼 활개를 칠 수가 없는 것이고, 중주상
인연합회와의 상권경쟁에서도 밀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천 군
벌을 지지하거나 중립을 선언한다면 사천 군벌이 황권에 무릎을 꿇었
을 때 중주상인연합회가 이일을 꼬투리 삼아 맹공을 퍼붓는 다면 더
욱 심각한 사태가 벌어 질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비공식적인 통
로긴 하지만 천독문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은 상태가 아닌가. 당걸은
눈을 반쯤 내리 감았다.
'일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
그때 대청 안으로 한 명이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가주님."
"무슨 일인가?"
"천독문에서 서찰을 보내왔습니다."
당걸은 서찰을 받아 활짝 펼쳤다.
<당가주 친전.
세인들이 말하기를 사천의 땅위에는 오직 당기(唐旗)만이 펄럭인다
고 합니다. 내 일찍이 이 말을 믿지 아니하였는데 사천을 유람하다
보니 정말로 당문의 깃발이 뒤덮고 있더이다. 외인은 송곳 하나 꽃을
땅이 없으니 서 있지도 못하겠더이다. 잠시 쉴 곳도 없어 이리저리
떠돌다가 피로에 지쳐 마침내 병이 들게 되었소이다. 이에 진인(眞
人)과 대사(大師)를 모셔 처방을 구하니 천제(天帝)께 빌어보라 하더
군요. 전심전력으로 천제께 기도 하기를 삼칠일. 하늘에서 선녀가 내
려와 천제의 명을 전하기를
'땅은 당문의 것이니 천제께서도 사사로이 자리를 내어 주실 수 없
습니다. 그러니 기도를 멈추고 고향에 돌아가 편히 사시기 바랍니
다.'
이에 크게 실망하여 병이 더욱 깊어지자 선녀가
'만금을 내어 굶주린 백성을 위로한다면 천제께서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사천의 하늘을 빌려주실 것이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니 이 몸은 두렵고 신기하여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하늘을 넘볼 수는 없는바
사천을 떠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때 내 눈에 들어 온 것은 거
리를 메운 굶주린 이들이었습니다. 내가 사천의 하늘을 빌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찌 이런 이들을 보고 그냥 돌아갈 것인가.
'내 만금을 내어 이들을 먹이고자 하니 하늘께서는 천도를 살펴 주
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전심전력으로 베풀기를 또한 삼칠일. 하늘에서 다시 선녀가
가마를 대령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정성이 갸륵해서 천제께서 사천의 하늘을 빌려주기로 하였
으니 가마에 오르소서.'
하여 내가
'아직 가진 재물을 다 풀어 사람을 돕지 못했으니 어찌 일신의 안
녕을 추구하리요'
하니 선녀가 다시 말하기를
'천제께서 이 일을 참으로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대저 사람이 가진
바가 없는 하늘을 천제께서도 빌려주실 수 있는데 백년도 살지 못하
는 사람이 만년을 넘게 가는 땅의 주인의 행세를 하니 이는 천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허니 그대가 나서서 천도를 바라 잡으라고 천제
께서 말씀하시었습니다.'
이에 나는
'당문은 오백년간 사천에 있어 하늘을 무시하기를 여러 차례 하였
는데 이 몸이 나선다고 천도가 바로 잡히겠나이까'
하고 묻자 선녀가 웃으며
'천도는 이미 바로 잡히었으니 거사께서는 그대로 행하시면 되나이
다.'
라는 말을 남기도 다시 홀연히 사라졌소이다. 나는 이 일이 참으로
신기하고 괴이로워 고민하기를 며칠을 하셨소이다. 천도가 이미 바로
잡히는 했지만 지상에서 그 것을 행하려 한다면 시체가 산으로 쌓이
고 피가 강으로 흐를 것인 데 내 공덕이 아무리 높다 한들 한 사발의
피에 비길 것이오, 한 줌의 살에 비할 것인가. 허나 천도를 행하지
않는 다면 더 많은 피와 시체가 쌓일 것은 분명한 터. 이에 나는 평
화로이 해결할 방법을 찾고자 전심전력하였는바 당문에서 만금을 내
어 백성을 위로하고, 천제께 죄를 빌고, 사천을 사천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겠소.
이 몸은 금불산(金佛山)에서 천도가 행하여지는 것을 막고 있으니
속히 일을 서둘러 주시기 바라오.
남왕련주.>
당걸의 입이 씰룩였다.
"금불산. 내 목에 비수를 들이대는 구나 천독문. 아니 이제는 남왕
련이라고 불러 주어야 하나."
금불산은 중경에서 남쪽으로 백리 정도 떨어진 귀주와 접경지역에
있었다. 이 금불산 앞에는 장강의 지류인 오강(烏江)의 지류가 흘렀
다. 폭이 좁은 강이긴 하지만 소형 선박이 다니는데는 큰 불편은 없
었다. 이 오강을 타고 반나절 정도 내려가면 중경에서 뱃길로 반나절
거리인 읍릉(泣陵)에 도착한다. 금불산에서 중경까지의 육로는 약 백
오십리로 빠른 준마로 달린다면 하루만에 도착 할 수 있는 거리였다.
천독문 정도의 문파가 금불산을 장악한다면 읍릉은 물론 중경까지
이들의 세력권에 들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천당가의 성도에서
중경까지는 오백리가 넘는 거리라 아무래도 중경에서의 영향력이 줄
어들기 마련이었다. 이 두 곳이 천독문의 세력권에 들어간다면 최악
의 경우 사천당가는 중원과의 교통을 사천 북부의 검협을 통한 산서
와의 통로만 남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야 어떻게든 오갈 수 있겠지만
대량의 약재나 물자수송은 어렵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금불산 뒤쪽
에는 귀주고원이 펼쳐져 있어 묘족 문파인 천독문에게는 자기 안마당
같은 곳이었다.
당문호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당걸을 올려다보았다.
"사천 서남부에서는 운남 목왕부가 쳐 올라오고, 입구는 천독문이
막는다면 본가는 끝장입니다. 가주 이대로 당할 수는 없지 않습니
까?"
당걸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중유생(死中有生)! 사천에 있는 전 가솔을 모아라."
머릿결이 귀밑을 스쳐 오르며 파란 하늘을 담아 청 녹색을 띈 눈자
위가 반짝이는 모습을 보이게 했다. 그가 앉은 바위 주위로는 자색의
꽃들이 만발했고 나비들도 한가로이 노닐었다. 그의 발 아래에는 산
정상의 완만한 능선과 그 아래의 가파른 협곡의 경계선에 큰 원목을
박아 만드는 목책이 세워지고 있었다.
특가호는 옆에 시립해서 남가왕이 보고 있는 산세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지단 건립이 삼 할 정도 진척되었습니다. 만독동에서 가져온 오대
독물은 이곳에 적응시키고 있습니다만 당문의 기습에 대비해 전력을
더 증가시키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남가왕은 고개를 저었다.
"사천에 남은 당문 식솔을 다 긁어모아야 이 백이 약간 넘을까? 그
중에서 이곳까지 쳐들어 올 수 있는 이들은 일 백 명이 채 안 되는
데 무슨 걱정을 하는가?"
"남령산맥에 있는 당문과 백도가 이곳으로 오지 않을까요?"
"남령산맥에 진출한 당가고수들은 삼혈맹에서 최대한 죽여주기로
약속했고, 실제로 혈마가 직접 나서서 몇 번 손을 썼기 때문에 그들
이 돌아온다고 해도 큰 전력의 보탬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백도
는……. 하하하 하하하."
특가호는 남가왕이 돌연 웃음을 터트리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웃던 남가왕은 웃음을 멈추고 손을 저었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군. 남의 집을 털기 위해 자기
집을 텅텅 비우고 간 도둑이 남의 집을 털어 보기도 전에 자기가 쌓
아 놓은 재물을 빼았겨 존립이 위태롭게 되어가고 있으니 내가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미와 청성은 어찌 하시렵니까? 특히 청성파는 귀주에서 우리에
게 호되게 당해 그 원한이 깊을 텐데요."
"청성은 이미 그 주력을 우리가 반쯤 섬멸했고, 남령산맥에 집결한
아미와 청성도 삼혈맹에서 최대한 피해를 입혀주기로 약속했다. 그들
에게 남은 전력이라고는 자파를 지켜나갈 정도, 우리가 이 금불산을
바탕으로 중경을 장악한다 하더라도 아미와 청성에는 별 피해가 없을
것이니 당가와 연합해 오기는 힘들 것이다. 이미 사전에 손도 써 놓
았고."
특가호는 남가왕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
력을 움직이고 있는 남가왕.
특가호는 문득 그의 진실한 정체가 궁금했지만 시선을 곧 내리 깔
았다. 신에 대해 궁금점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자유였지만 그 비밀을
알려고 하면 눈과 귀가 멀기 마련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해를 일각
이상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남가왕은 사악 미소를 머금었다.
"아미와 청성이 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 그보다 우
리가 수집하는 약재를 처리할 자를 뽑아 두었나?"
"민진만이라는 자로 십 년 전에 약재업에 손을 댔다가 사천당가의
무력에 밀려 가산을 탕진한 자가 있습니다. 좀더 조사를 해봐야 하겠
지만 십년 전에 사천당가와 맛선 걸 보면 중주상인연합회와 연결이
되어 있지 않나 십습니다."
"중주상인연합회라. 판로가 안정권에 접어들고 우리가 사천 약재상
을 완전 장악할 때까지는 쓸모가 있겠군. 군소문파의 회유는 어느 정
도 진척되어가고 있나?"
"사천 당가와 크고 작은 원한이 있는 흑도 문파들을 포섭하고 있지
만 많이 꺼려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당가의 위명을 거스르기 힘든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수 백 년을 지배해온 그들이니까. 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사천의 진정한 패주가 누가 될 것인지. 당가. 그 영광의 이
름은 이곳 금불산에서 지게 될 것이다."
당문호는 약간 침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현재 묘강 천독문은 남왕련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천 남부지역에서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아미파나 청성파와
의 충돌은 극도로 자제하고 있습니다만 이미 이 십여 개의 군소문파
가 천독문의 휘하에 들어갔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사천 남부지역의
약재를 전매하면서 우리의 상권을 크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강녕위에
이 사실을 통보하고 힘을 써 줄 것을 청하였으나 알겠다는 말만 되풀
이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문호의 설명에 대청에 자리한 백여 명의 당문 일족은 깊은 침묵
에 잠겼다.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당문호에게 물음을 던졌다.
"천독문의 전력은 어떻소?"
"금불산에 집결하고 있는 천독문의 문도들 중에 무공이 높은 자들
은 얼마 되지 않으나 그 수가 천을 헤아리고 있고, 지금 갖은 기관
진식을 깔고 있는 상황이라 더 이상 방치를 했다간 중경을 포함한 사
천의 동남부를 그들에게 넘겨주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다른 한 명이 일어나 의견을 제시했다.
"아미와 청성과 협력하여 대응을 하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청성은
귀주에서 천독문에게 크게 당했으니 이번 일에 좌시하지 않을 께 아
닙니까?"
"아미와 청성과 물밑 접촉을 해 보았는데 그들은 우리를 전위로 내
세울 생각입니다. 즉 강물이 우물물을 범하지 않는 이상 자신들이 직
접 손해를 볼 것이 없다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현 천독문은 아미와
청성의 제자들이 벌이고 있는 표국업이나 객잔은 물론 다른 상권은
거의 관여를 하지 않고 우리의 독점사업인 약재거래만 파고드는 상황
입니다."
중인들의 얼굴에 우려의 빛이 번져갔다.
"그럼 청성과 아미의 지원은 기대 할 수 없는 것이오?"
"속가 제자들의 개별적인 참여는 가능……."
쾅.
당걸은 손을 들어 팔걸이를 쳤다. 중인들은 이 한 소리에 침묵을
지키고 당걸을 쳐다보았다.
"본 가문이 언제부터 다른 문파의 지원을 바랬느냐?"
당가 식솔들은 모두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당걸은 부릅뜬 눈으로
말을 이었다.
"천독문이 잠시 득세를 하는 듯이 보이지만 수뇌부만 잘라 낸다면
힘을 못쓰는 오합지졸일 뿐이다. 그 수가 천을 헤아린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된 일초 반식이라도 익힌 자가 몇이나 되겠느냐? 하지만 우리
는 오 백 년간 축적된 암기와 독술을 개개인이 한 몸에 안고 있다.
묘강 천독문은 우리의 상대가 아니다. 이번 기회에 천독문을 제물로
삼아 사천의 패주가 당문임을 다시 한 번 만 천하에 알리고, 무주 공
산이 된 운남과 귀주로 세력을 확장할 때이다. 천호."
"네."
"출정 준비를 갖추어라. 내가 친정을 하겠다."
당문의 식솔들은 일제히 당걸을 처다 보았다.
"가주."
당문호가 급히 나와 허리를 숙였다.
"가주의 신분이 가볍지 않은데 겨우 천독문 정도로 친정을 하시다
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천독문 쯤은 서북 변경에 가있는 우리 형제
의 일부만 귀환하여도 쉽게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전서를 받았는데 출정하지 않는다면 사천의 군소문파들이 우리를
우습게 보고 천독문과 손을 잡을 것이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천독문도 금불산 일대에 완전한 방어망을 칠 것이다. 해서 지금
내가 친정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 우리가 일단 금불산 밑
까지 진격하여 전선을 형성한 후 서북 변경과 남령산맥에 가 있는 식
솔들을 불러모은 다면 일전을 벌일 만 하다. 각 문파에 나의 친정을
알려 군소 문파들로 하여금 천독문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라."
"알겠습니다."
"천독문. 더 이상 그 이름이 강호에 전해지지 않게 해주마."
관도 옆의 공터에 천막을 치고 열 개 정도의 탁자를 놓고 차와 음
식을 파는 노천객점이 자리했다. 객점 앞에는 평래(平來)라는 깃발이
펄럭였다. 탁자 주변에는 수 십 명의 사내들이 헐거운 옷에 수수를
벨 때 쓰던 흙이 묻은 박도를 여기 저기 널려 놓고 삶은 돼지고기와
술을 맛있게 먹어대었다.
우걱 우걱 먹어대는 사람들 앞으로 열 마리 말이 경쾌한 속도로 달
려왔다. 이 말들은 앞에 내걸린 깃발 앞에 와서 말을 멈추었다.
"워워워."
선두에 선 노인의 눈이 가늘게 떠지며 반짝 빛이 흘렀다.
'평래라. 편히 오라는 뜻인데 이는 우리더러 편히 금불산까지 오라
는 말이 아닐까? 더군다나 박도에 흙이 묻어 있기는 하지만 수수를
베는 철이 아니니 이들은 농부가 아니라 무사라고 봐야겠지.'
노인은 사람들과 박도를 살펴보고 맨 좌측에 있는 청년을 보며 턱
짓을 했다. 청년은 말에서 내려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주인은 어디 갔습니까?"
탁자에서 음식을 먹던 한 명이 입에 고기를 물고 손에는 기름이 뚝
뚝 떨어지는 살더미를 들고 우물거리며 말을 했다.
"잘 모르겠소. 주인장이 어제 밤 꿈에 독물들에게 쫒기는 꿈을 꾸
었는데 금불이 나타나 독물을 쫒아내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디
다. '이 꿈은 내일 현실로 나타날 것이니 너는 사람을 모아 술과 고
기를 대접하여 객점을 지키게 하라. 사흘 밤 낮 동안 이 일을 행하
라. 이를 어길 시에는 일족이 멸문 할 것이니 명심 또 명심하라.' 여
기 주인은 꿈에서 깨어났지만 너무도 선명해서 우리들에게 술과 고기
를 대접하면서 하루종일 이곳을 지키며 있다가 독물이 오거든 잡아
죽여 달라고 부탁을 했소."
청년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 박도로 말이오?"
뒤에 있던 한 장한이 손가락으로 객점 한 쪽에 쌓아둔 큰항아리를
가리켰다.
"독물을 잡는데는 이 박도보다 저기 모아 둔 돼지기름이 더 좋수
다. 뱀은 이 돼지기름 앞에서는 꼼짝을 못하니까."
청년이 냉소를 지으며 손을 쓰려하자 노인이 낮은 헛기침을 터트렸
다. 청년은 한 쪽 있는 항아리를 힐끔 보고 노인에게 다가왔다.
"몇 명은 힘을 쓰겠지만 우리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자들입니다.
쓸어버릴까요?"
노인은 저들의 행태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천독문에서 얄팍한 심리전을 펼치는 것이다. 우리가 저런 촌부를
상대로 검을 뽑았다간 천하 동도들의 웃음꺼리만 될 뿐이다. 이 분노
는 가슴속에 담아두었다가 금불산에서 마음껏 펼치기 바란다."
"네."
노인은 당걸 가주의 오촌 당숙으로 장로의 위치에 있는 천수비타
당인걸이었고, 이 들은 사천당가의 천독문 공격대의 선봉이었다.
"한 명은 본대로 가서 이곳의 상황을 알리고 명을 받아 오너라. 우
리는 앞서 가겠다."
"네."
한 명이 말을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가자 나머지 구인은 빠른 속도로
관도를 지나갔다. 당가의 공격대는 될 수 있는 한 현성은 피해 이동
했다. 주민들에게 당가와 천독문이 벌이는 싸움을 보여주고 싶지 않
았다. 당문은 사천에서는 적이 없는 살아 있는 전설이어야 했다.
인적이 드문 길을 찾아 이동을 하는 당문 선봉대 앞에 한 마을이
이들을 맞이했다. 마을은 이십여구가 채 될 까 하는 작은 촌락이었는
데 집집마다 연기가 솥아 올랐고 아이들이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다니
고 있었다. 마을 전체에는 잔치집 같은 분위기가 흘렀고 살기는 일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집집마다 긴 장대에 급히 휘 갈겨 쓴 듯한 깃
발이 펄럭였다.
"평래!"
"벌써 열 번째 깃발입니다. 이제는 아예 작은 마을까지 이렇게 깃
발을 매달아 놓았군요. 흡사 우리가 길이라도 잊어 먹을 까봐 두려워
하는 듯이요. 천독문에서 무얼 노리고 있는 걸까요?"
당인걸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좋지 않다."
당인걸은 천천히 말을 몰아 마을로 들어갔다.
"모두 적의 기습에 대비하라."
"네."
청년들은 녹피를 끼고 일제히 암기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십여 호의 집집마다 불때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고 툇마루에
앉은 일가족은 모두 쌀밥에 고기를 뜯고 있었다. 거리에는 벌거진 얼
굴을 하고 서 너 명이 어깨동무를 하고 돌아다녔고, 아낚네들은 함박
웃음을 터트렸고 아이들은 살이 주렁주렁 달린 갈비대를 손아귀에 들
고 다녔다. 일반 농촌에서는 평상시는 물론 명절 때도 보기 힘든 광
경이었다.
술에 코가 빨갛게 달아 오른 촌로가 이들 앞에 달려와 말고삐를 잡
았다.
"아이구 어서 오십시요. 그러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다니 누굴 기다렸다는 말이냐?"
"나리님 일행이 먼저 오셔서 술과 고기를 대접하라고 준비하라고
하셨습죠. 여기 이걸 보여 주면 아실꺼라고 하셨습니다요."
촌로는 소중히 간직한 서신을 꺼내 공손히 올렸다. 당인걸의 눈짓
에 한 청년이 녹피를 낀채 받고 호흡을 멈춘 채 서찰을 열었다. 청년
은 품에서 하얀 가루를 꺼내 서찰 위에 뿌려 보고 고개를 끄떡였다.
"독은 안 발라져 있는 것 같습니다."
청년의 말에 촌로는 무슨 소리인가 눈을 껌뻑 거렸다. 당인걸은 서
찰을 펼쳤다.
<평래. 남왕련주.>
당인걸은 서찰을 묵묵히 접어 봉투에 다시 넣었다.
"천독문주 아니 이제는 정말로 남왕련주라고 불러주지. 이 정도 세
력을 떨치는 것은 남만의 야인들에게는 불가능 한 거니까. 하지만 이
런 방식으로 우리 당문을 흔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정말 오산이
다."
당인걸은 서찰을 무사에게 주고 촌로를 내려다보았다. 무공이라고
는 전혀 익히지 않은 듯한 모습에 세월의 무계를 얼굴에 지고 있는
촌로는 고삐를 움켜 쥔 채 당인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인걸은 웃
음을 지어 보려고 했지만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우리는 이미 배불리 먹었으니 남은 음식이 있다면 그대들이 먹어
라."
"하지만 대인 소인들은……."
탁.
당인걸이 말고삐를 살짝 후려치자 촌로는 그 힘에 못 이겨 몇 걸음
을 뒤로 물러났다.
"그리 알아라."
당인걸이 말고삐를 돌리자 다른 이들도 따라 말고삐를 돌렸다. 마
을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크게 외쳤다.
"평래. 평래. 평래."
당인걸이 이끄는 전위가 마을을 벗어나 관도를 질주해 나갔다. 당
인걸은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가슴 속 한 구석에서 울컥 울
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자제하지 못했다.
'이건 적의 기만술이다. 기만술. 당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