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존덕문.
잔잔한 수면위로 몇 마리 잉어가 튀어 올라 파랑을 일으키자 하늘
을 붉게 물들인 단풍이 놀라 떨어졌다. 반달 모양의 호수 둘레에 있
는 단풍들이 호수가에 서 있는 정자를 향해 자태를 뽐내었다. 정자
위에는 단정히 묵은 흑발을 뒤로하고 가슴까지 내려온 검은 수염에는
윤기가 반짝였다. 발그레한 얼굴은 이목구비가 수려했고, 쭈욱 뻗은
눈썹 아래 두 눈은 별빛처럼 반짝였다. 그는 광택이 나는 화선지를
앞에 두고 옆에는 붓을 준비했다.
먹은 이십대 초반의 미녀가 갈고 있었는데 새 하얀 손끝은 먹물이
라도 튈까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먹을 앞으로 밀 때마다 부끄럽
게 내미는 손목 위의 솜털이 움츠러들었고, 비단 옷을 따라 올라간
팔의 곡선이 새하얀 목덜미와 만나 다시 수줍음을 탔다. 갸름한 턱
위에 단풍을 즙내어 바른 듯한 입술이 깜찍한 코 아래 자리했다.
중년인이 붓을 들자 미녀는 먹을 갈기를 멈추고 중년인의 붓에 시
선을 두었다. 감이 얼굴을 쳐다보기 어렵다는 모습이었다.
붓에 먹물이 스며들게 한 뒤에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붓을 들자 먹물이 떨어 질 듯이 붓끝에 모였다. 중년인은 한 호흡이
멈추기 전에 하늘을 이는 산맥 같이 뻗어 나갔다.
미녀는 그 모습을 감히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 깔았다. 눈썹 위로
작은 햇 볓들이 내려 앉아 춤을 추었다. 추추는 붓끝을 쳐다보다가
숨이 막혀 오는지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중년인은 붓을 옆에 두고 조용한 미소를 머금었다.
"추추야. 두려우냐?"
"천녀가 감히 바라 볼 수 없을 정도 였습니다."
중년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멀었구나."
"죄 죄송합니다."
"허허허 너에게 한 말이 아니다. 아직 내 경지가 일천하다는 것이
다. 내가 진정으로 경지에 도달했다면 너는 오히려 편안함과 안락함
을 느꼈을 것이다."
"소녀가 보기에는 아주, 아주 높은 경지 같사옵니다."
"그렇게 봐주니 고맙구나."
"죄송하옵니다."
추추가 고개를 숙이자 중년인은 화선지를 들어 추추 앞에 내밀었
다.
"무슨 글자인지 알겠느냐?"
추추는 입술을 살짝 내미는 듯한 모습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암종무광(暗宗無光)이 아니옵니까?"
"이 글의 뜻은 알겠느냐?"
추추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암흑의 뿌리는 빛이 없기 때문이……."
추추가 말끝을 흐리자 중년인은 무릎을 탁 쳤다.
"네 학문이 얕지 않구나."
"황송하옵니다."
중년인은 암종무광이라 씌인 글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둠은 빛의 부재."
추추는 그 말을 잊지 않으려는 듯이 작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따라
했다.
"어둠은 빛의 부재."
"이 의미를 알겠느냐?"
"천한 계집이 무얼 알겠습니까만, 세상이 혼탁한 것은 그 질서를
바로 잡아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하하하. 너는 나를 너무 과대 평가 하는구나."
"아니옵니다. 문주님은 세상의 빛이 되실 분이십니다."
중년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직도 멀었다. 그리고 세상의 빛은……."
중년인은 잠시 말을 끊고 깊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그의 시선이 추추에게 향하자 사방은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
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추추는 너무 놀라 깊이 숨을 들이켰다.
"무 문주님."
"나는 여기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네."
추추는 손을 모아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나를 위해 이곳에서 어둠을 몰아 내주지 않겠느냐?"
중년인의 목소리에 추추는 아미를 살짝 찡그리고 눈을 내리 깔았
다. 어둠이라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얼굴은 활짝 달아올라 있었다.
"허허. 어둠은 빛의 부재라고 하지 않았더냐?"
추추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이 몸을 천천히 움직여 한 쪽 구석에
놓아둔 초와 부싯돌을 들었다. 탁탁. 부싯돌이 튕기며 불꽃을 내자
환한 미소를 짖고 있는 중년인의 얼굴 윤곽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화
륵. 이내 촛불에 불이 당겨지고 정자 안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드러
났다. 중년인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둠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겠느냐?"
"모르겠사옵니다."
"어둠은 사라 진 것이 아니라 원래 없었던 것이다. 어둠은 단지 빛
의 부재 일 뿐.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라."
"알겠습니다."
"어둠이 깊을 수록 한 줄기 작은 불빛만으로도 세상을 비출 수 있
는 법. 번뇌 또 한 이와 같은 법이란다."
중년인의 고개가 살짝 들려지자 정자의 사방에 내려진 검은 장막이
순식간에 위로 올라갔고 눈부신 햇살이 쏘아져 추추의 눈에 눈물이
살짝 돌게 했다.
추추가 햇살을 피해 고개를 돌리자 정자 밑에 서 있는 두개의 신발
을 발견했다. 추추는 얼른 일어나 허리를 깊이 숙였다.
"어서 오십시요."
중년인도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모았다.
"허허 내가 아우님을 기다리게 한 모양이오."
"아닙니다. 제가 형님의 흥취를 깬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유생차림의 중년인은 현학적인 눈으로 추추를 살짝 보고 정자위로
올라갔다. 추추는 얼른 몸을 숙이고 정자에서 물러났다. 추추가 물러
나는 것을 본 유생차림의 중년인은 살짝 짖굿은 미소를 지었다.
"형님께서 언제 추추의 머리를 올려 주실 껍니까?"
"이대로 두고 보는 것도 즐거움이라네."
"좋은 소식부터 들으시겠습니까? 나쁜 소식부터 듣겠습니까?"
"좋을 대로하시게."
"우선 삼혈맹과 반혈맹의 전황에 대해서 말씀드리지요."
"그래 어찌 되었다던가."
"상강 상류에서 벌어진 첫 전투에서 소림사의 혜원대사와 무당파의
일검자가 혈마에게 패해 자파로 급히 돌아갔다고 합니다. 부상이 심
한 모양입니다."
"호오. 혈마가 전면에 나서다니……. 소림과 무당으로서는 타격에
크겠군."
"그렇습니다. 앞으로 소림과 무당이 백도무림의 구심점 역활을 어
찌 할지 걱정입니다."
"그래서."
"혈마가 전면에 나선 이상 병력을 분산해 신속히 적의 심장부까지
진격해 들어간다고 합니다."
"허허. 희생이 클텐데."
"그 수밖에 없겠지요."
"아버님 아니 태상문주님께서는?"
"삼혈맹의 대 맹주 혈종 악구패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상 섣불
리 나서실 수 없는 모양입니다."
"흐음"
존덕문의 현 문주이자 선우대덕의 아들인 선우중현은 깊은 침묵에
빠졌다. 그 앞에 앉아 있는 부문주는 상관덕조의 아들 상관덕성이었
다. 상관덕성은 선우중현의 깊은 침묵을 깨고 싶지 않은지 주위의 풍
경을 감상이라도 하듯이 둘러보았다.
침묵을 깬 것은 선우중현이었다.
"태원에서의 일은 어찌 진행되고 있는가?"
"이상 없습니다."
상관덕성의 짧은 대답에 선우중현은 고개만 까딱였다.
"광명안은?"
"광명안의 고수와 간세들은 대거 장안으로 스며들어 장안의 흑도를
접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북령채의 병력과 고수들 대
부분을 호북으로 보내고 있다는 겁니다."
선우중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호북이라. 두 곳에서 난을 일으키기에는 전력이 충분하지 않을 텐
데."
선우중현의 의문에 상관덕성도 동조를 했다.
"그렇습니다. 해서 다른 안배가 있는지.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세
력이 있는지 면밀히 검토중입니다."
"빠른 시일 안에 이루어지도록 해주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주위 청소를 모두 마쳤습니다."
"다행이군. 피해는 어떤가?"
"십이비월당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고 구풍당 또한 적지 않
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몇 명은 우리의 손을 피해 탈출에 성
공했습니다."
"처음부터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피해가 크군."
"이번 일은 수하들에게는 약이 될 것이고, 천하 무림에는 경종이
될 것입니다."
"그래야 겠지."
"여담입니다만 화산파의 이철룡이라는 자가 새로이 입문했습니다."
"이철룡?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데 중요한 자인가?"
"무공은 이류급입니다만 청룡장의 백호대에 소속되었던 자입니다."
"흐흠. 그렇다면 관찰을 해야 겠군."
"또 하나 중요한 소식이 있습니다."
"뭔가?"
"소림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선우중현은 기쁨에 겨운지 어깨를 들썩였다.
"하하하 하하하.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지금이라도 보냈으니 우리에겐 다행이지요."
"그럼 이제 빛이 되어 세상의 어둠을 거두어들일 때가 온 것인가."
"그렇습니다."
선우중현은 추추가 켜 놓고 간 초를 바라보았다.
낮은 계단이 촘촘히 들어서 있어서 한 번에 한 개씩 올라가기에는
감질 맛이 나고 두개를 한꺼번에 건너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갔다.
떡 벌어진 어깨 너머로 너른 연무장이 눈에 들어왔고, 연무장 끝에
는 전각의 지붕 위에 전각을 세운 듯이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자 포
근히 둘러싼 산 능선 아래 방금 지은 듯한 건물들 사이로 산이 벌거
벗은 부위가 드러났다.
산비탈을 따라 높이를 달리해서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아래서 보면
수십 개의 건물이 지붕을 밟고 서 있는 듯 보이는 것이다.
앞서 가던 도인의 고개가 돌려졌다.
"이 사질. 뭘 그리 두리번거리나."
"아 네. 이렇게 크고 멋있는……. 뭐라고 할까."
"하하하 내가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이렇게 건물들이 많지 않았
지. 조금은 황량했지. 이 건물들 모두 요 근래에 세워진 것들이라
네."
"나 사숙께서는 언제 이 존덕문에 가입을 하셨습니까?"
포응검객 나관추는 고개를 들어 창천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세상에 푸른 하늘을 세우고자 할 때부터."
나관추의 선기(仙氣) 어린 어투에 이철룡은 머리를 긁적였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화산파 제자일세. 어찌 두 문파에 적을 두겠는가."
"그럼?"
"이곳은 천하무림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이들이 모이는 곳
일 뿐이네. 따라서 가입이라는 말이 없네. 천하무림의 안위를 위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한 형제라네."
이철룡은 나관추의 옆으로 나란히 너른 연병장을 가로 질러갔다.
텅빈 연병장을 단 둘이 걸으니 몸이 조금 위축이 되는 듯했다.
"사숙. 그럼 여기에와 있는 사형제들이 많이 있습니까?"
"지금은 삼혈맹을 토벌하기 위해서 반혈맹을 따라 강남으로 내려갔
네."
"그럼 저도 강남으로 가게 됩니까?"
"아쉽기는 하지만 우리는 남아서 할일이 따로 있네."
이철룡이 할일이 뭐냐고 물으려 할 때 나관추가 양팔을 들어 올려
포권을 취하는 것을 보고 앞을 쳐다보았다. 그 앞으로 두 청년이 빠
른 걸음으로 다가와 인사를 했다.
"나대협을 뵙습니다."
가슴에 백모란을 수놓은 백의를 입은 두 청년은 허리에 장검을 차
고 있었다. 형제인 듯 얼굴이 비슷했다.
"하하하 백리세가의 두 공자시구료. 반갑소이다."
"이 분은?"
왼쪽다리가 약간 어색해 보이는 청년이 이철룡을 바라보자 이철룡
은 얼른 포권을 취했다.
"이철룡이라고 합니다."
"백리웅풍입니다."
"백리영풍입니다."
간단한 인사가 오가자 백리웅풍이 먼저 걸음을 떼었다.
"급히 가는 길이 있어서 먼저 가겠습니다."
"살펴 가시게나."
"이형.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기쁘기가 한량없습니다."
이철룡은 백리웅풍의 말에 뭐가 기쁜지 몰랐지만 아무튼 자신의 손
을 잡은 백리웅풍의 손을 뿌리 칠 수 없어 가볍게 예를 차렸다.
"별 말씀을……,"
백리웅풍은 몇 번이고 이철룡에게 인사를 하고 연무장을 가로 질러
갔다.
이철룡은 약간의 어색함을 느끼며 전각으로 올라갔다.
전각 앞에는 다 떨어진 옷을 입은 거지 한 명이 기단 위에 걸터앉
아서 술동이를 끼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금새라도 떨어질 것 같
이 위태로웠다.
"저분 괞챦으실까요?"
나관추는 거지가 깰까 두려운 듯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 분이 개방의 제일 기인이신 풍개 견로자(風 犬老子)이시다."
'바람난 거지와 늙은 개 한 마리?'
휙. 풍개 견로자의 머리카락이 뒤집어 지며 새파란 신광이 이철룡
의 전신을 관통했다.
"어린것이 입이 걸구나."
이 철룡은 그 신광에 전신 공력이 산산조각이 나는 듯한 느낌이 들
었다. 그런데 발뒤꿈치에서 시원한 기운이 일어 일주천하자 공력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몸과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풍개 견로자의 얼굴에
가벼운 이채가 스쳤다.
"넌 누구한테 무공을 배웠느냐?"
풍개의 일갈에 이철룡은 머리가 혼동스러워 지며 차분히 가라앉은
공력을 쥐가 갉아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관추가 소매로 이철룡
의 앞을 가리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사질입니다."
"사질? 그럼 무진자의 제자도 아니란 말이냐?"
이철룡은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저는 매화검군님을 사부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풍개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뒤
덮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매화검군이라……."
나관추는 이철룡의 소매를 이끌며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이철룡은
풍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바로 투덜거렸다.
"어떤 분이시길래 사조님을 함부로 부르는 겁니까?"
"허허허 세상에 오직 저 분만이 우리 장문인께 저런 언사를 할 수
있단다."
"네에? 그가 개방의 방주라도 저런 언사를 할 수가 없지 않습니
까?"
"현 방주가 어찌 화산에 실례를 하겠느냐? 저 분은 현 개방주의 사
부님으로 개방의 태상장로의 신분이시다. 현 구대문파 장문인 보다
한 배 반정도 무림에서 위치가 높으시고, 오십 년 전 강북대혈사라
불리우는 혈천마궁의 혈겁에 참가하고 살아 남은 몇 안 되는 산 증인
이시다. 너도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저분께 예를 다해야 한다."
"혈천마궁의 혈겁을 들어 본 적이 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없었습
니다. 그 당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나관추는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그건……. 휴. 강호의 은원이 얽히고 설킨 것이라 함부로 거론할
게 못되니 차후 단둘이 있을 때 말해주마."
"네."
연무장을 가로지른 백리영풍은 이맛살을 찡그렸다.
"형 저런 인물에게까지 굽실댈 건 없쟎아요?"
백리웅풍은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날 지 모르는 법이다.
사람을 보았으면 일단 내 사람으로 만들고, 그것이 여의치 못하다면
좋은 인상이라도 심어 주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법이다."
"내가 보기엔 그저 그런 부류 같은데요?"
"천 명, 만 명의 손을 잡아서 하나 둘을 건지면 성공을 한 것이다.
그런 일은 내가 할 터이니 너는 무공 수련에만 열심하거라."
백리영풍은 약간 침중한 안색을 했다.
"원래 형이 무공에 더 소질이 있었는데……."
"이미 지나간 일이다. 후회한다고 바뀌지 않으니 지금 상황에서 열
심히 하면 된다."
"네."
백리웅풍은 백리영풍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백리영풍은 자신의
시선이 형의 왼쪽다리에 자꾸 가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형의
왼쪽 발목은 삼혈맹에 의해서 잘려졌다. 의족을 했지만 운기에 제약
이 있어 상승의 경지에 들어서기란 매우 요원하게 되어 버렸다.
백리웅풍이나 영풍이 상승의 경지에 입문하지 않고서는 백리무군이
세우고 있는 위업을 이어 갈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
에 백리웅풍은 동생이 무공 수련에 전념할 수 있게 하고, 자신인 대
인관계의 폭을 넓혀 가문의 기반이 되고자 이철룡 같은 수준의 인물
에게도 허리를 숙이는 것이다.
세심각이라고 씌어진 현판 아래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세 명이
문 앞에 의복을 단정히 하고 서 있었다. 이들 가운데 있는 중년인의
얼굴은 나이가 들었지만 제법 준수하고 칼끝 같은 검미가 일품인 종
초홍이 자리했고, 그 좌우로 옥소공자와 웅패신이 무게를 더했다.
종초홍은 화원을 가로질러 오는 일행을 발견하고 얼른 내려가 포
권을 취했다.
"어서 오십시요. 대사님 도장님."
옥소공자와 웅패신도 옥소공자를 따라 내려가 허리를 숙였다.
"아미타불 미거한 소승을 이리 환대를 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
습니다."
"무량수불 빈도가 그 업을 지겠으니 대사께서는 극락왕생하시기 바
랍니다."
아홉 개의 계인이 선명한 홍의가사 위에서 빛이 나고 있는 소림장
로 혜심대사는 무당파의 장로 일송자의 농담에 부처님의 미소를 지었
다.
"소승은 소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눈을 크고 둥글게 뜬 일송자는 백미를 쓸어 내렸다.
"대사께서는 욕심이 과하시니 필히 지옥에 떨어지시겠구료."
"아미타불. 소승은 평소 관세음보살님께 매일 공덕을 올립니다."
혜심대사의 대답에 일송자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정말로 큰 덕을 얻으셨습니다."
"구름 위를 노니는 선불께서 인세에 빛을 발하시니 소인은 도저히
눈을 뜨지 못하겠습니다. 더 이대로 있다가는 소인의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습니다."
옥소공자의 말에 일송자는 더 농을 건네려고 입을 열었다.
"세상을 향한 눈이 멀었으니 이제 곧 득도하시겠구료."
"사숙 지금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이들 뒤에서 조용히 대화를 경청하던 이철룡은 끝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나관추에게 물었다.
"너는 본 산에서 각 종파의 경전과 어록을 강의 할 때 무엇을 했느
냐?"
이철룡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나관추를 혀를 찼다.
"우선 소로 다시 태어나겠다고 한 것은 선어록에 나오는 이야기
다."
한 관리가 선사를 방문해서 그 동안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물었다.
"선사님 공부를 하면 무슨 득이 있습니까?"
선사께서는 자애로운 눈 빛으로 관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득이 없네."
"부처님을 공경하면 극락왕생하지 않습니까?"
"지옥에 떨어질 뿐이네."
관리는 깜짝 놀랐지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물었다.
"선사께서는 공덕이 높으시니 필히 극락 왕생하겠군요."
"허허 다음 생에는 소로 다시 태어날 것이네."
"소인 같이 죄가 많은 이야 공부를 해도 득이 없고 부처님을 공경
해도 죄업이 많아 지옥에 떨어지겠지만 선사께서는 덕을 베푸시고 저
같은 이들에게 밝음을 내려 주시니 필히 극락 왕생하실 텐데 어찌 소
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십니까?"
"오십 년이나 공밥을 먹었으니 소로 다시 태어나서 농부의 짐을 덜
어 주어야 하지 않겠나."
나관추는 이 일화의 핵심을 찍어나갔다.
"이 선담은 한 두 마디로는 설명하기 깊은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
고 있다. 그 중에서도 지금 이 상황과 관련된 설명만 하자면 혜심대
사께서는 공밥을 먹고 있으니 다음 생에 소로 태어난다고 겸양을 하
신 것이다. 헌데 자신이 죽기 전에 다음 생에 날 존재를 미리 결정
할 수 있는 것은 아라한의 위(位)에 올라간 분이 가능하다는 불경 구
절이 있다. 이걸 근거로 일송자님께서는 혜심대사께서 아라한의 위에
올랐다고 자랑하다간 지옥에 떨어진다고 너스레를 떠신 것이다."
"아라한이 뭡니까?"
"흠 네 단계에서는 이렇게 이해를 하는 게 편하겠구나. 부처님 바
로 밑이 보살이고 그 밑이 아라한이라고 생각을 하면 쉬울 것이다.
더 자세히 파고 들어가면 모두가 하나라고 하는데……. 나도 깨친 것
이 아니고 들어서 배운 것이라 확답을 하지 못하겠다."
나관추의 말을 들은 이철룡은 머리 속이 더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나관추는 이철룡을 끌고 들어가며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고 이철
룡 자신도 인사를 한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
았다. 대청으로 들어가며 나관추는 관세음보살님의 서원에 대해서 이
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관세음보살님께서는 지옥 중생을 다 구제하기 전에는 절대로 성불
하지 않겠다는 원을 세윈 분이다. 이 분의 법력이 얼마나 높으냐면
자신이 지옥으로 가면 지옥이 극락이 되고 도산검림으로 걸어가면 도
산검림이 사라진다는 분이시다. 혜심대사께서 관세음보살님을 찾으신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게 큰 덕을 얻으셨다는 겁니까?"
나관추는 자리에 앉으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큰 덕이란 쌍덕 존자님을 지칭하는 것이다. 소림에서도 이 번 일
에 한팔 거드는 것을 기뻐 하셔서 하신 말씀이다. 사실 소림은 무당
과 달리 극히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왔기 때문에 일송자께서 이와 같
은 농을 하신 것이다."
이철룡은 나관추가 한 말을 다 듣고 자리에 앉아 있는 혜심대사와
일송자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자신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나누
는 둘이 위대해 보였다. 그런 두 사람이 황급히 일어나 급급히 예를
차리는 것을 보고 자신도 벌떡 일어나 문가를 주시했다.
다 떨어진 옷에 열 개의 매듭을 늘어뜨린 풍개 견로자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의 두 눈에는 새파란 광망이 일었고 그 빛을 대하
는 사람들은 고양이 앞의 쥐꼴로 몸을 움츠렸다. 이들 가운데 가장
태평히 서 있는 이는 이철룡 그 하나 뿐이었다. 그는 견로자의 눈빛
이 조금씩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견로자는 이철룡의 눈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신기한 일이야 신기한 일이야."
견로자가 상석에 턱 하니 걸터앉고 앉으라는 시늉을 하자 모두들
공손히 허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하고 의자 끄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앉았다.
견로자는 혜심대사를 쏘아보았다.
"소림에서는 이 번 반혈맹의 거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거 아니
오?"
"아미타불 불문의 제자는 원래 살생을 금기시하고 있습니다. 이 점
은 양해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견로자는 코웃음을 쳤다.
"불제자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중생을 구제하겠소. 모두
서천극락에서 영생과나 따먹고들 있을 참이오?"
"아미타불 본 사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노선배님
께서는 노여움을 푸시기 바랍니다."
견로자는 고개를 돌려 일검미랑 종초홍을 일견하고 눈을 내리 감았
다.
"내가 개방을 따라 남령산맥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 남은 이유를 설
명해 주게."
종초홍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저희 셋은 맹주님의 별명으로 한가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무
림일대 의거에 참여를 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맹주님의 이런 처
사에 조금 야속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일의 진상을 확인하고 나서는
전율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사실은 천하무림을 일대 혈겁으로 몰고
갈 수도 있는 사안이라 맹주님께 상의를 드리러 갈 시간도 없었습니
다."
"아미타불 혈겁은 이미 진행중이지 않소?"
"이건 삼혈맹과는 전혀 별개의 사안입니다. 하지만 삼혈맹의 공포
보다 더 한 공포가 전무림을 뒤덮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나관추는 입을 딱 벌렸다.
"당금 천하에 삼혈맹을 제외하고 천하무림에 혈겁을 일으킬 만한
곳이 있단 말이오? 아니 그런 마음을 가진 마두들이야 많겠지만 그런
세력이 당금 천하에 있소?"
"세력이 아니라 개인입니다."
"혈마 같은 자가 두 세 명이라도 나왔단 말이오?"
"무공은 그보다 못하지만 능히 혈마를 죽일 수 있는 자입니다."
혜심대사는 고개를 갸웃했고, 일송자도 뜬구름 잡는 표정이었다.
당금 천하에 혈마를 죽일 자가 있다는 말이 믿어져지지 않았다. 일송
자가 먼저 운을 떼었다.
"그게 누구란 말이오?"
"놀라지 마십시요."
종초홍은 침을 삼킨 뒤 입을 천천히 열었다.
"독왕."
"어억."
혜심대사는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뜨고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고, 일송자는 피가 머리로 다 몰린 듯이 새빨개져 있었다. 나관
추 또한 경악한 얼굴이었고 이철룡은 고수들이 놀라서 일으키는 기운
에 숨이 가빠왔다. 웅패신과 옥소공자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
만 얼굴을 굳힌 채 필 줄 몰랐다.
번쩍. 풍개 견로자의 눈이 떠지자 대전을 휘감아 돌던 고수들의 기
운이 강풍에 흩날리는 낙옆처럼 사라졌다. 이철룡은 가슴에 가해지는
압박이 해제되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차린 혜심대사가 벌떡 일어났다.
"종대협. 이일의 중대함을 알고 하시는 말씀이시오? 게다가 독왕
역상은 지난 오 십 년간 아무런 소식도 없었는데 그가 갑자기 나타났
다는 걸 어떻게 믿으란 말이오?"
종초홍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하 선배님 들어오시지요."
종초홍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얀 수정관을 든 사인이 대청 안으
로 들어왔다. 이들을 따라 선풍도골의 노인이 의생 차림으로 걸어 들
어왔다. 일송자와 혜심대사는 가볍게 인사를 했다.
"천약성수 하백. 하 신의를 뵙습니다."
천약성수 하백. 백리세가주 백리무군과 함께 사라진 사인 중 일인
으로 의술의 대가였다. 그는 견로자에게 인사를 한 뒤에 좌우에 앉은
소림과 무당의 장로, 반혈 삼협, 나관추와 이철룡에게까지 인사를 했
다. 반혈삼협과 나관추가 일어서자 이철룡도 따라 일어나 예를 갖추
었다. 그사이 수정관을 들고 온 사인은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하백이 허리를 곧게 펴자 모두들 자리에 앉았다.
"여러분 모두 독왕의 성명절기를 알고 있을 껍니다. 아 저 소협은
모르겠군요."
이철룡은 하백의 지적에 얼굴을 붉혔다.
"사숙 아무래도 여긴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보고만 있어라. 이런 중대사에 관람을 했다는 것만으로 네
강호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네."
둘이 소근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백은 말을 이었다.
"독왕 역상은 독문 출신의 고수이나 의가 에서도 오랫동안 연구의
대상이 되어온 존재입니다. 여기 세 분은 독왕 역상이 벌인 참상을
직접 목격을 하셨으니 다 알고 계시곘지만 모르는 분들을 위해 부연
설명을 하겠습니다."
하백은 수염을 쓸어 내리며 잠시 주위를 환기 시켰다.
"독왕 역상은 강북대혈사 때 혈천마궁의 고수들을 독살하며 일대
무림구성으로 떠 오르고 그 명성이 무림 삼왕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헌데 이자의 신분이 마교의 좌사라 혈천마궁의 혈사 후에 생긴 탕마
대전에서 백도의 고수들을 무차별 적으로 독살시켜 나갔습니다. 이에
천하의 영웅협사들이 일거에 떨쳐 일어나 마교를 토벌하였는데 마지
막 전투가 벌어진 황산 광명정에서 홀연이 모습을 감춘 뒤 그 동안
강호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모두들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
다. 헌데 얼마 전 독왕의 성명 절기라고 할 수 있는 성수환독에 중독
되어 죽은 강호의 동도가 생겼습니다."
하백은 소매를 들어 수정관을 가리켰다. 하얀 수정관 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철룡은 시력을 극대화했지만 수정관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나관추 사숙의 얼굴을 굳은 얼굴을 보고
혜심대사의 창백해진 얼굴과 일송자의 핏발선 눈동자를 대하자 수정
관에 대한 궁금증이 더 일었다.
"구육두개(狗育頭 )장로님 아닙니까. 헌데 이 건……."
일송자의 이빨사이로 신음성 같은 소리가 흘러 나왔다.
"서 성수환독. 이 이럴수가. 이 이건 틀림없는 성수환독이오. 내
사부님께서 이 독에 당하셔서 내 눈앞에서 죽어 갔소이다."
일송자가 손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치자 팔걸이가 가루가 되어 먼지
처럼 흘러 내렸다.
"독왕 역상 살아 있었구나. 고맙다. 하하하 하하하."
일송자가 앉아 있던 의자 전체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일송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나 일송자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독왕 역상과 한 하늘을 이지 않을
것이오."
일송자는 핏발선 눈길로 견로자를 쳐다보았다.
"구육두개(狗育頭 ) 장로님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전 강호에 위험을 알리셨습니다. 이 몸은 개방을
따라 독왕 역상을 처단하는 일에 앞장을 서겠습니다. 본 산에 계신
장문사형께서도 제자를 하산시키는 일을 꺼려하지 않으실 껍니다."
이철룡은 하얀 수정관을 쳐다보았다 저 관 안에 구육두개의 시신이
있는 모양인데 자신은 전혀 알 수 없으니 갑갑하기만 했다.
"사숙."
"잘 보거라. 저 하얀 물위에 떠 있는 모습을."
이철룡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하얀 물입니까?"
"수정관은 원래 투명한 관이다. 그런 관이 하얗게 보이는 것은 안
에 있는 내용물 때문이다. 관 뚜껑 부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의
형체가 보일 것이다."
이철룡은 안력을 더 돋구어 관 뚜껑을 쳐다보았다. 과연 관뚜껑 위
로 새하얀 실선 같은 것이 보이더니 어느새 사람의 얼굴과 모습을 갖
추어 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오십대 후반의 평범한 노인 같았다.
저 노인이 구육두개라는 개방의 장로인 모양이었다. 하얀 물은 그 안
에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는데 마치 몸 안에서 작은 소용돌이가 도
는 것 같았다. 그 물결은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철룡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관추는 이철룡의 손을 잡고 공력을 넣어주어
이철룡의 심신은 안정시켰다.
일송자가 정신을 추스르고 다른 의자를 끌어다 앉자 혜심대사도 어
느 정도 심신을 안정시켰는지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독왕 역상의 성수환독이 강호에 다시 모습을 들어내었
다면 이는 무림공의로서 대처해야 할 문제입니다."
견로자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소. 하지만 무림공의를 일으키다가 독왕 역상이 눈치를 채고
숨거나 천하를 향해 독수를 크게 펼칠까 두려운 마음이 일고 있소."
견로자의 두렵다는 말에 전각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헬쓱해졌
다. 나관추가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이며 말을 했다.
"독왕 역상의 독이 지독한 것이기는 하나 그 혼자서 천하무림을 어
쩌지는 못하리라 봅니다. 그가 오 십 년 전에 천하를 위진 시킬 수
있었던 것은 마교의 조직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로 광문협 전투에서 독왕 역상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형산과 청
성의 고수들에게 포위되어 죽을 뻔했습니다. 그 전투에서 마교의 호
교사자가 독왕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독왕 역상은 그때 죽었을 껍
니다."
견로자는 꽉 다문 입술로 전각 안의 인물들을 쳐다보았다. 등과 어
깨의 옷자락이 부풀어오르며 앞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독왕 역상은 당금 천하에 적을 찾기 어려운 문파를 등에 업고 있
소. 아니 그 문파가 독왕 역상을 휘하에 두고 있다고 해야 겠지. 여
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는 곳이오."
일송자와 혜심대사는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동시에 부르짖었
다.
"청룡장!"
그 둘은 서로가 청룡장이라고 부르짖은 것에 놀라 얼굴을 쳐다보았
다.
"대사."
"도장."
둘은 다시 서로를 불렀다. 중인들의 의야한 시선이 둘에게 모아졌
다.
일검미랑 종초홍은 자신이 나서서 묻고 싶었지만 조금 과한 것 같
아 입을 다물었다. 사실 반혈삼협이 현 강호에서 명성을 크게 얻고
있기는 했지만 그 위치와 배분으로 볼 때 이 자리에서 주도적 역활을
담당할 수는 없었다.
견로자는 의야한 얼굴로 혜심대사와 일송도장을 바라보았다.
"소림과 무당이 모두 청룡장의 위험을 알고 있었소?"
"아미타불. 삼혈맹에 독왕 역상이 있다면 노 선배님께서 저희들을
따로 불러 이야기하실 필요가 없었겠지요. 당금 천하에 삼혈맹을 제
외하고 독왕 역상을 담을 만한 그릇은 개방과 무당파, 청룡장 뿐이
아닌가 했습니다. 헌데 개방의 태상장로이신 노 선배님께서 저희 둘
을 부르셨으니 남은 곳은 청룡장 밖에 더 있겠습니까?"
"무량수불. 그 말씀은 소림도 독왕 역상을 받을 그릇이 된다는 것
같소이다."
"아미타불. 죄를 뉘우쳐 고개를 돌리면 아귀와 야차 수라라 할지라
도 성불 할 수가 있으니 어찌 사람을 버리겠습니까?"
견로자는 무릎을 쳤다.
"맞소. 독왕 역상이 지난날의 죄과를 참회하여 불문이나 도가에 출
가를 하여 죄업을 뉘우쳤다면 이 몸이 먼저 나서 그를 옹호 할 것이
오. 하지만 그가 의탁한 곳은 의(義)를 앞세워 이(利)를 추구하는 세
속의 문파요. 세상에 의를 빙자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이 어디 한
둘이겠소 만 넘어야 할 선과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것이오."
이철룡은 소천의 얼굴을 떠올렸다. 부상자들을 돌아다니며 격려를
아끼지 않던 그 모습이 머리 속을 혼란시켰다. 그런 인물과 여기 계
신 모든 분들이 성토하는 독왕 역상이라는 자가 한 곳에 몸담고 있다
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죄를 뉘우친 건 아닐까?'
이철룡은 그렇게 생각을 했지만 수정관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천
하무림에 의기를 크게 떨치고 있는 개방의 장로를 독살한 것을 보면
죄를 뉘우친 것 같지는 않았다.
나관추가 이철룡의 생각을 끊었다.
"그렇습니다. 더우기 청룡장은 그 내력이 불분명하여 세인들의 의
혹을 사고 있습니다. 독왕 역상 같은 마교의 무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그 본 질 또한 정의를 추구한다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화
산파는 청룡장과는 거리가 멀어 그 실체를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무
당에서는 오래 전부터 청룡장을 주시 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자
리는 모두 믿을 수 있는 분들이 계시니 허심탄회하게 그 동안 청룡장
을 지켜 봐온 것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송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마디로 말하기가 곤란한 곳이오. 그곳은."
일송자의 아리송한 대답에 중인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일송자는 잠
시 더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 청룡장이 생길 때 강동은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왜구들은
해안가는 물론 내륙 깊숙이 들어와 약탈과 방화, 아녀자들의 납치와
폭행 등등 인간으로 저지를 수 없는 옷 갖 악행을 해댔습니다. 관의
힘은 성안의 치안을 유지하는데도 부족했고, 마교가 황산에서 일패
도지한 이후라 이렇다할 변변한 문파 또한 없어 하루가 지나기도 전
에 문파들이 생기고 멸망을 거듭하는 혼돈기였습니다. 이에 민생은
피폐하고 곳곳에 도적과 강도가 들끓었으며 오히려 전란의 시기보다
살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나 왜구를 물리치고 강
동의 질서를 바로 잡은 자가 바로 청룡장의 초대장주인 청룡노야였습
니다. 이렇다할 대 문파가 없는 땅이었기에 청룡장은 욱일승천의 기
세로 커갔고, 현 장주인 단우백이 대권을 넘겨받을 때에는 강동은 물
론 내륙까지 청룡장과 맞설 세력이 전무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본파의
성세를 뛰어 넘는 모습을 보여 주며, 강동의 백도는 물론 마도 문파
와 흑도 조직까지 아우르고 있습니다. 이들이 자기 세력권 내에 마도
문파와 흑도 조직을 통괄하고는 있지만 이 것 만 가지고 이들을 논
죄 하기에는 그 공이 크고, 본 파 또한 호북에 있으면서 인근의 마도
문파와 흑도 조직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으니 치죄는 커녕 부
끄러워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송자의 솔찍 담백한 말에 중인들은 가슴 한 구석이 무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천하의 무당이 두려워하여 경계를 하고 있다니. 일송자
가 완곡한 말을 다시 부드럽게 바꾸었지만 그 말의 심저에 담긴 의미
를 모르지는 않았다.
이철룡은 입안에 노는 침을 살살 굴렸다. 청룡장이 무당파 마저 긴
장하게 하는 곳일지는 몰랐던 사실이다. 그런 청룡장의 총호법과 함
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다는 사실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풍개 견로자가 나직한 한 숨을 내쉬었다.
"도고일척 마고일장이라. 청룡노야의 이름과 출신내력을 알고 있
소?"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견로자를 향했다.
"아미타불 노 선배님께서는 청룡노야의 진정한 내력을 알고 계십니
까?"
"오래 전부터 알아보았고 얼마 전에야 확실히 알 수 있었소."
"그의 출신내력이 어찌 됩니까?"
"그의 이름은 백오."
백오라는 말에 이철룡은 눈을 부릅뜨고 하마터면 크게 소리를 칠
뻔했다. 만약 수정관이 그의 눈앞에서 일렁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백
오노야와 만나서 이야기하고 밥도 같이 먹었다는 말을 거침없이 토해
냈을 것이다. 이철룡의 턱이 빠진 듯한 입과 괴물같이 뜬 두 눈은 중
인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모두들 견로자의 말을 경청하느라
이철룡을 처다 보지 못했다.
"그가 백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데는 유래가 있소."
"어떤 유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백오(白五)는 백오호(百五號)에서 백자의 운을 따오고 호자를 뗀
글자요."
백오호라는 말에 중인들은 저으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혜심대사
가 빠르게 말을 받아 넘겼다.
"아미타불. 그럼 그가 어떤 조직의 일원이었단 말입니까?"
견로자는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소. 그는 내가 아니 강호 동도들이 모두다 알고 있는 문파 출
신이오."
"허."
중인들은 탄성과 함께 서로 얼굴을 돌아보았다. 강호 동도들이 모
두다 알고 있는 문파라면 구파 일방이나 오대세가 정도였다. 마도에
서는 삼혈맹이 있었지만 삼혈맹 출신은 아닌 것 같았다. 견로자는 끊
어지는 목소리로 한자 한자 힘을 주었다.
"그는 오십 년 전 천하 최강 무벌의 무인이었소."
혜심대사와 일송자는 불신의 빛을 띄었다.
"설마 혈천마궁을 말씀하는 건 아니시겠지요?"
견로자는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혜심대사와 일송자는 입을 굳게
다물었고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이철룡은 견로자의 얼굴을 쳐다보
며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만난 그분은 혈천마궁의 후인일 이가 없다. 그분에게서는 일
점의 마기는 물론 속기도 느끼지 못했다. 내 공부가 일천해 제대로
보지 못하는 면도 있지만 그런 분이 마도의 후인일 이가 없다. 더군
다나 말로는 누가 영웅호걸이 될 수가 없겠는가?'
혜심대사가 이철룡의 속을 바로 풀어주었다.
"물론 증거가 있으시겠지요?"
견로자는 그의 이름만큼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상황, 물증, 인증 세 가지가 다 있소. 이중 물증과 인증은 얼마
전에야 찾을 수 있었소."
"허."
대청안의 중인들은 뜻 모를 탄성을 터뜨렸다.
"내가 의혹을 처음 가지게 된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하겠소. 원말
명초, 전국의 혼란이 극심해 지고 강남에서 삼왕(주원장. 장사성. 진
우량)이 쟁패를 하고 있을 때 원의 황제는 혈천작 쿠차호가 죽자 호
룬 바투를 내세워 혈천마궁을 개편해서 강력한 군벌을 탄생 시켰소.
이때 병사의 주력을 이루었던 곳이 오기(五旗)였소. 이 오기는 각기
중앙 황기. 동방 청기. 남방 적기. 서방 백기. 북방 흑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기 이천 오 백의 정병을 거느렸소. 호룬 바투는 이 오기를
이끌고 천하에 모습을 드러내어 강북에 흩어져 있던 원병들을 규합해
서 강력한 군대로 재구성하고, 당시 강북에서 일어난 백련교의 반란
을 철저히 탄압해서 백련교의 백만병사를 만리장성 너머 요동으로 몰
아내 버리고 한때 강북을 장악했었소. 이 공으로 호룬 바투는 원의
군권을 장악하여 삼왕으로 하여금 감히 장강을 건널 생각을 하지 못
하게 했소. 다행이 천시가 도와 호룬 바투가 정적에 의해 군권을 박
탈당하고 그의 지지기반인 혈천마궁 또한 원 황실의 눈 밖에 나고 말
았소. 이때 천하 군웅들이 일제히 떨쳐 일어나 혈천마궁을 친 것이
여러 무림동도분들이 잘 알고 있는 강북 대혈사이오. 이때 폭풍노도
처럼 휘몰아쳐 간 중원의 여러 영웅호걸들을 막아 선 것이 바로 혈천
마궁의 오기였소. 이 당시 오기의 주장을 맞은 곳은 동방 청기. 일명
청룡수호봉황기(靑龍守護鳳凰旗)였소. 이들은 황하에서 그 모습을 드
러내어 조직적인 급습과 퇴각, 매복으로 병법에 어두운 우리가 산서
와 이곳 태행산맥까지 진격하는 동안 무수한 피를 흘리게 했소. 헌데
우리가 혈천마궁의 본 궁까지 밀고 올라오자 이들은 그 모습을 싹 감
추었소. 우리는 혈천마궁을 무너뜨리고 나서 이들과 호룬 바투의 흔
적을 찾았소. 이들은 원 황제의 어가를 호위하여 중원을 탈출하기 위
해서 경사로 간 사실을 밝혀 내었소. 우리는 삭초제근을 하기 위해서
이들을 추격했지만 이미 장성 넘어 북방으로 일찌감치 도망을 가 그
흔적을 찾지 못했소. 나는 물론 당시 강호의 일대 명숙들도 이들의
주력은 북으로 도망을 쳤고 몇 몇 잔당들만 중원에서 몸을 숨기고 있
는 줄 알았소."
견로자는 호흡을 끊고 중인들을 쳐다보았다. 모두들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중간 중간에 자신들이 알지 못했고,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사건들이 더 첨가가 되면서 당시의 정황이 머리 속으로 떠올려
졌다. 이철룡은 영웅담을 듣는 아이처럼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
다.
'내가 당시에 태어났다면 천하의 의기(義氣)를 위해 검을 떨쳤을
수 있었는데 정말로 아까운 일이다.'
견로자의 눈빛이 빛나자 이철룡은 자신의 상상을 접고 이목을 집중
시켰다.
"그건 우리의 큰 착각이었소. 그 착각으로 인해 중원 무림은 일대
혈사에 빠지게 된 것이오. 강북으로 도망을 친 것은 오기의 잡병들이
었고, 그 중추는 중원에 남아 정도와 당시 새로운 중원 무림의 패주
로 떠오르던 백련교를 이간질 시켰소. 더우기 이때 명 태조가 백련교
를 핍박하여 마교라 선언하고 일대 토벌을 가했소. 이에 중원 각파가
편승하여 백련교와 일대 혈전을 치루었소. 아 정말로 정말로 통탄할
일이었소."
견로자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시 중원 각파의 명숙들과 백련교의 고수들이 비밀리에 장성을
넘어 혈천마궁의 잔당을 일거에 토벌할 계획을 세워 놓은 때였소."
일송자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재빠르게 물었다.
"노 선배님의 이 말씀은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백도와 마
교 아니 백련교와의 싸움의 시발이 혈천마궁에서 벌어진 다툼이 번진
것이 아니었습니까?"
견로자는 손을 들었다.
"앞으로 할 이야기 중에 그 답이 있소."
"예 알겠습니다."
일송자가 고개를 숙이자 견로자는 말을 이어갔다.
"중원으로 숨어든 오기의 수뇌부는 중원 각파와 백련교를 이간질해
서 내전이 벌어지도록 꾸미는 일에 전력을 투구했소. 중원 무림은 이
들의 간계에 속아 백련교와의 기나긴 싸움에 들어가고 양쪽 다 상처
만 입게 되었소. 이 일로 인해서 중원 무림의 정기는 삼십 년을 쇠퇴
했고, 북쪽으로 도망친 혈천마궁의 잔당들은 한 숨을 돌릴 수가 있었
던 것이오. 그때 내전을 벌이지 않고 혈천마궁의 잔당을 제거하기 위
해서 장성을 넘었다면, 강호는 큰짐을 두개나 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
이오."
견로자가 잠시 말을 끊자 나관추는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한
혜심대사를 일견하고 견로자에게 자신의 궁금증을 물었다.
"큰 짐을 두개나 지지 않았다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견로자는 몸을 살짝 숙였다. 단순히 몸이 살짝 앞으로 숙여진 것이
지만 대청 안의 건물 자체가 안으로 오목하게 모여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기의 수뇌부가 중원 각파와 백련교의 이간질에 어느 정도 가시
적인 성과를 거두자 바로 꼬리를 자르고 각기 자신들의 영역을 정해
힘을 키워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흩어졌소. 이들 중 가장 먼저 자
리를 잡은 곳이 바로 남방 적기의 후신인 삼혈맹이오."
견로자의 마지막 말은 매우 낮게 끝났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와
향후 천하무림에 던져질 충격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중인들은 입
을 딱 벌린 후 말을 더 잊지 못했다. 전 무림의 공포. 삼혈맹이 오기
의 후신중 한 곳이라면 나머지 네 곳은 또 어떠할 것인가? 중인들은
잠시 추리에 잠겼다.
일송자는 자신의 가슴속에 집히는 말을 꺼내었다.
"그럼 동방 청기. 청룡수호봉황기의 후신이 청룡장이란 말씀입니
까?"
견로자는 고개를 끄떡였다.
"불행이도 그렇소."
전각은 끝없는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했고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밀납 인형처럼 웃는 것 같았다. 이철룡은 오른 손을 들
어 명치끝을 쓸어 올렸다. 체한 것 같이 가슴이 아려왔고 창백해진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구토가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여 입을 벌렸
다. 거억. 뱃속에서 신물이 입안위로 치밀어 올랐다. 나관추는 이철
룡의 상태를 보고 손을 잡아 공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사질 무슨 일인가?"
이철룡은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들었다.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나관추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강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보다 더한 일도 있기 마련이네. 나가
서 잠시 쉬려는가?"
"아닙니다. 좀더 듣고 싶습니다."
이 둘의 나지막한 대화를 끊고 일송자의 곤욕스러운 표정이 주목되
었다.
"노 선배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견로자는 손을 들어 일송자의 말을 끊었다.
"말을 끊어서 미안하오만 인증과 물증을 제시 할 때까지는 계속 들
어주기 바라오."
"알겠습니다."
일송자는 입을 다물고 견로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혜심대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을 반개 한 채 염주를 계속 굴렸다. 견로
자는 품에서 한 장의 서찰을 꺼내어 혜심대사에게 천천히 보냈다. 혜
심대사는 서찰을 받아 옆에 앉은 일송자와 함께 보았다. 서찰을 보던
혜심대사와 일송자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혜심대사의 손을 떠난
서찰이 나관추에게 건네졌다.
나관추가 서찰을 촥 펼치자 날아오를 듯한 글이 한눈에 들어왔고
한 쪽에 작은 당지가 붙어 있었다. 나관추는 서찰을 먼저 읽었다.
<백부님께.
얼마 전에 오래 전에 헤어진 사촌을 만나보고 참으로 기꺼웠습니
다. 너무도 오랜 세월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끈끈한 혈육의 정이 어
디 가겠습니까. 백부님의 사업이 날로 번창을 하시고 계신 것을 보니
마음 한 구석이 뿌듯하며, 이 몸도 매진하여 큰 나리께서 베푸신 은
혜의 만 분의 일이나마 빨리 갚았으면 하는 마음이 앞서고 있습니다.
큰 나리께서는 백부님의 공을 입술이 마르도록 치하하고 계십니다.
내년 봄에 큰 나리를 모시고 악양루에서 잔치를 베풀어 사해의 동도
들을 초빙해 동정호가 마를 때까지 놀아 보았으면 합니다. 이 잔치는
소질이 준비하겠습니다. 백부님께서는 그저 옆에서 지켜 봐 주시면서
소질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셨으면 합니다.
조카 양(楊) 올림>
나관추는 옆에 있는 당지를 보았다.
<황하가 범람했다. 주 동생이 식솔을 이끌고 작은 집으로 피난을
가도록. 양(楊)>
서찰과 당지의 필체를 비교하던 나관추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제 눈이 밝지는 않지만 이 두 장은 한 인물이 쓴 것이 분명합니
다. 헌데 이것이 이번 일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지는 북령채주 양산월이 반혈맹의 급습을 받고 북으로 간 수하
들에게 보낸 전서요."
"그럼 이 것은……?"
견로자는 좌우 어깨에 걸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우선 양산월의 신분부터 밝혀야 겠군. 양산월은 광명안의 수뇌부
로 오기의 후예이오."
혜심대사와 일송자 나관추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이철룡은
몸을 가늘게 떨고 주먹을 꼭 쥐었다. 수정관 안에 있는 인물이 매화
검군 같아 보였다.
견로자는 눈을 더욱 빛냈다.
"석년 산서에서 벌어진 표맹과 북령채와의 대전을 기억 할 것이오.
낭인 몇 명을 모아 머리 수만 채웠던 청룡장이 다른 표맹의 문파들을
이끌고 탈 출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오."
나관추가 고개를 갸웃했다.
"북령채는 저희도 관심을 기울여 살펴보았지만 생성된지 채 삼사년
이 넘지 않았습니다. 오기의 후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듯 합니다."
견로자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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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모에 참가하기 위해서 서울로 갑니다.
며칠 서울에 머무를 것 같습니다.
때문에 연재는 쉽니다.
고맙습니다.
"양산월은 중원에 남아 있던 오기의 후예가 아니라 북방으로 도주
한 자들의 한 지파의 후예이오. 그는 티무르 제국이 중원에 심어 놓
은 광명안의 수뇌부로 그 동안 오기의 후인들을 찾다가 표맹과 함께
온 청룡장의 무사들이 펼치는 전법을 보고 알아차린 것이오. 청룡장
의 집단전법은 오기 중 동방 청기가 사용하던 방법과 아주 흡사하오.
아니 청룡장의 집단전법이 한 단계 더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소.
해서 양산월은 청룡장에게 길을 내주었고, 이런 서찰을 보내려 한 것
이오."
"우리는 이 사실을 눈치채고 겉으로 반혈맹을 이용해 북령채를 친
것이오."
"그럼?"
"그 전투에 존덕문의 정예가 투입되었소. 그들이 아니었다면 반혈
맹의 전력만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었던 상대였소. 하지만 청룡장에
서 눈치를 채지 못하게 그들의 전력이 비밀리에 유지되고 있는 것처
럼 상황을 꾸며 놓았소. 얼마나 속일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말이
오."
나관추는 무릎을 쳤다.
"사실 저희 화산파에서 북령채의 잔당들을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들의 전력이 고스란이 유지되고 있는 듯한 정보를 접해 의혹
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전후 사정이 있었군요."
견로자는 생긋 웃었다.
"앞으로 화산파에서도 그 작업을 계속 하는 것처럼 보여 주시기 바
라오."
"물론 입니다."
견로자는 중인들의 시선을 모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본 인이 그 동안 한 조사에 따르면 중원에 남아 있던 오기도 중원
무림의 추적에 하나 둘씩 죽거나 도주해 처음 계획했던 대로 사방과
중앙 중에 두 곳만 뿌리를 내리는데 성공을 했소. 청룡장과 삼혈맹이
바로 그 곳이오. 북원의 세력이 안정이 되지 못하고 우리 중화의 힘
이 백배 천배로 커지자 이들도 그 동안 은인자중 하며 중화의 세력인
양 행세를 했소. 하지만 이제 원의 한 갈래인 티무르 왕국이 중원을
넘보게 되자 본래의 면목을 드러낼 것이오. 우리는 이들이 중원의 힘
을 좀먹는 것을 막기 위해 반혈맹을 조직해서 삼혈맹과 맛서 왔던 것
이오. 이 와중에서 청룡장과 삼혈맹이 공개적으로 손을 잡는 것을 방
지하기 위해서 이러한 사실을 애써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소. 삼혈
맹을 치는데는 다른 대의명분이 필요 없었기 때문에 청룡장에서도 함
부로 경겨 망동을 하지 못하게 할 수 있었소. 이 모든 사항을 이미
관부에서도 확인했소. 때문에 우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