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1. 풍멸과 광도. (65/95)

  청룡장 4부 존덕문 편

  1. 풍멸과 광도.

  새빨갛게 물든 단풍잎이 산을 불타고 있는 것처럼 번져 있었다. 계

곡을 따라 흘러가는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하늘이 타오르는 듯 했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냇물이 낙옆이 돌돌 뭉쳐 있는 바위를 만나  붉

게 물들었다. 낙옆을 헤치고 물을  마시던 호랑이 한 마리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산군이라는 호랑이가 물을 마시다 주위를  살피

는 경우는 인간의 냄새가 날 때뿐이었다. 위엄을 세운 모습으로 바람

을 한껏 들이킨 호랑이는 고개를 돌려 어슬렁 어슬렁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람에 실려 온 진한 피내음에 서산 마루를 한번 더 쳐다봤지만 이

내 수풀 사이로 몸을 감추었다. 

  

  "두 치 세 푼." 

  발자국의 넓이와 깊이를 확인하고 발자국에 밟힌 풀이 마른 정도를 

살핀 사냥꾼 복장의 중년인이 고개를 들었다. 마른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나와 눈 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코끝이 약간 꺽인 메부리 코 아래 

얇은 입술이 우그러졌다. 

  "여기도 이제 임자가 들어 선 건가? 앞으로는 혼자 사냥하기가  위

험하겠어. 세 살로 한창 힘을 쓸 나인데. 혼자 잡기는 조금 힘들겠는

데……."

  태행산맥에서 사냥을 업으로 삼는 전풍은 호랑이 발자국으로  나이

를 짐작하고 고개를 저었다. 한창 힘이 넘쳐 나는 호랑이를 자기  혼

자 사냥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풍은  바람을 

안고 발자국 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앞으로 전진했다. 그의 앞에 있는 

숲은 매우 울창하고 자잘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사람이

나 동물들이 지나가지 못할 것 같았는데 큰 나무 몇 개를 돌자 잡목 

사이사이에 동굴처럼 뚫린 곳이 나왔다. 전풍은 그 안으로 깊이 들어

갔다. 

  사냥꾼은 긴장된 눈길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 잡목지대는 호랑이

가 기어서는 통과 할 수 있어도 달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  곳이라면 

잠시 몸을 숨길만 했다. 전풍은 잡목 사이의 약간의 공터에 주저앉았

다.

  "이 산에 산군이 정착하기 전에 황노야께 말씀을 올려 잡아 버려야 

겠어. 한 시진쯤 기다리면 다른 곳을 돌아보러 떠나겠지. 오늘은  덧

이나 살펴봐야겠군." 

  나무의 그림자가 위치를 바꾸자 사냥꾼의 목이 나와 자신이 지나온 

통로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바깥쪽으로 불자 고개를 얼른 고개를  안

으로 잡아 다녔다. 잠시 뒤 바람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자 고개를  내

밀고 냄새를 맞았다. 약간 쌀쌀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전풍

은 주위를 한 번 더 살피고 조심스럽게 잡목지대에서 나왔다.

  전풍은 잰걸음으로 자신이 덧을 놓은 곳을 찾아갔다. 그의  발걸음

은 약간 급해져 산만한듯 보였다. 몇 개의 작은 능선을 넘고  조심스

럽게 걸음을 옮기며 사위를 살핀 전풍은 시야를 가리고 있는  나무가

지를 조심스럽게 위로 올렸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한 마리 토끼가 덧에 걸린 채 죽어 있었다. 전풍은 토끼를 꺼내 허

리춤에 묵고 다시 덧을 설치했다. 

  "오늘은 공치지 않았지만 앞으론 호랑이 때문에 걱정이야. 더 이상 

혼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니까 그만 내려가겠어. 피해가 생기기  전

에 놈을 잡아야 할텐데."

  전풍은 빠른 걸음으로 하산을 하기 시작했다.

  

  입에 물고 있던 노끈으로 토끼 가죽을 사방에서 당겨 둥근 틀에 묵

어 가죽이 팽팽해졌다. 산그늘에 가린 얼굴이 약간 검게 보이는 노인

이었다. 노인은 산비탈을 털 썩이며 걸어 내려오는 전풍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여어 전풍. 오늘은 어떤가?"

  전풍은 토끼를 던져주며 엉덩이가 무거운 듯 노인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황노야. 산군이 여기 자리를 잡은 모양이오."

  황노야는 노안에 주름이 지게 웃었다.

  "그럼 언제까지 이 산에 주인이 생기지 않을 꺼라고 생각했나?"

  "이가 녀석하고 오가 녀석이 돌아오면 놈을 잡으러 가자고 해야 겠

어요. 그 동안 혼자 마을 밖으로 사냥을 나가는 것은 삼가해야  겠어

요."

  황노야는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환히 머금고 토끼를 한 손으로  들

어올렸다.

  "이놈은 살이 투실투실하게 올랐는데."

  "그럼 뭐합니까. 돈이 안되는데……."

  전풍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엉덩이를 털었다.

  "나 갑니다. 마을에 가서 술이나 한 독 마셔야 겠습니다."

  "잘 가게."

  전풍이 구릉아래 작은 산촌으로 천천히 내려가자 황노야는  소도로 

토끼의 가죽을 살 한 점 묻어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벗겼다. 그의  손

이 바람에 가늘게 떨렸다.

  

  십여 호의 작은 마을에 곳곳에는 가죽과 고기가 그늘에서 잘  말라

가고 저녁을 준비하는지 굴뚝마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전풍이 작은 집으로 들어가자 마당에서 가죽을 손질하던 아낙과 아

이가 일어나 반갑게 맞이했다.

  "이제 오세요."

  "아빠 오늘은 뭐 잡았어?"

  전풍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아내에게 황노인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토끼를 잡았지. 황노인에게 가면 토끼고기를 줄 꺼요. 가져다  육

포를 뜨구료."

  "식사부터 하세요."

  "그럽시다."

  아낙이 부엌으로 들어가자 전풍은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이구. 그 동안 많이 컸구나.  아버지가 들기 힘들게 무거워  졌

어."

  "내가 그렇게 무거워?"

  "그럼 이담에 장군님이 될 껀데. 몸이 무거워야지."

  "싫어. 난 이담에 아빠처럼 위대한 사냥꾼 될래."

  "허헛. 녀석 사냥꾼이 뭐가 위대하냐?"

  전풍이 아이와 놀고 있는 사이 아낙은 소반에 나물밥과 반찬을  툇 

마루로 내왔다. 상을 놓고 물을  뜨러 독으로 가다가 황노인이  나무 

쟁반에 뼈를 발라낸 토끼 살코기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어머 조금 있다 제가 갈려고 했는데 직접 오셨어요?"

  아이는 고개를 돌려 토끼 고기를 보고 손뼉을 쳤다. 

  "이야 고기다. 고기."

  전풍은 벌떡 일어났다.

  "아니 제 아낙이 갈 건데 이렇게 가져 오시다니요."

  황노인은 등에 짊어진 가죽 묶음을 툭툭 쳤다. 

  "산을 내려가 이 것들을 오씨 피방에 넘기고 오랜만에  술친구들도 

보고 내일 올라올 생각이네."

  전풍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뭐 그리 급히 내려가십니까? 내일 아침에 가도 되지 않나요?"

  황노야의 얼굴에 주름이 깊이 박히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내일 태원에서 사람이 오니 오늘 내려가야 돈을 제때 받을 수  있

고 덤으로 전노야께서 내리는 술을 한 사발 받을 수 있지 않겠나."

  "아 그렇군요."

  "그래. 자네도 같이 갈텐가?"

  "전 노야께서 나 같은 거야 기억 해주시겠소. 가서 마을 안부나 전

해 주시구려."

  "알겠네. 가서 그리 말씀 올림세."

  "할아버지 맛있는 거 좀 가져다주세요."

  아이의 천진스러운 웃음에 황노야는 고개를 끄떡였다.

  "오냐." 

  황노야는 휘적휘적 팔을 저으며 산을 내려갔다. 전풍은 나무  쟁반

에 놓인 토끼 고기를 약간 무거운 눈으로 내려보았다. 

  "아빠 아빠 그거 지금 먹을 거에요?"

  "먹기는 말려 두어야 겨울에 양식으로  쓰지. 요즘 들어 잡아오는 

것도 신통치 않은데……."

  아낙의 투정에 전풍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내일은 내 큰놈으로 잡아오리다. 그러니 이건 오늘 이 녀

석이 입이나 달래 줍시다."

  "으이구 애들 입 맛 맞추는 게 어디 끝이 있나요."

  "어허. 그러지 말고 불에 살짝 구워 가지고 오시오. 육회로 먹기엔 

아직 비리니까."

  "알았어요."

  아낙은 고기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전풍은 주위를 살핀  뒤에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이 담에 커서 사냥꾼이 되고 싶냐?"

  아이는 고개를 끄떡였다.

  "응."

  "그래 사냥꾼이 되거라."

  "네."

  아이는 큰 소리로 대답하고 군침을 삼키며 밥을 먹지 않고  부엌을 

자꾸 쳐다보았다. 잠시 뒤에 불에 살짝 구운 토끼 고기를 한  쟁반과 

술을 들고 왔다. 아이는 손뼉을 치며 고기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이야 고기다. 고기."

  전풍은 술을 몇 사발 연속으로 들이킨 뒤에 바람이 불어오는  산골

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그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고기를 먹던 아이는 수저를 평상 

아래로 떨어 뜨렸고 아낙은 졸리운지 머리를 상에 박았다.

  마을에 불던 바람은 금새 멈추었고 곧 고요한 평온이 찾아 왔다.

  

  오씨 피방은 태행산맥에서 나는 가죽의 삼분지 일이 모이는 곳으로 

태행산맥의 초입에 있는 옥구현 전체를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해가 지고 밤이 깊어 왔지만 오씨 피방은 대낮 같이  불을 

밝히고 작업이 한창 이었다. 내일 태원으로 보낼 가죽들을 최종 점검

하고 짐들을 마차에 싣고 내일 거래 될 대금을 미리 정산을 해 놓느

라 모두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게다가 겨울을 나기 위

해서 사냥꾼들이 평소 몇 배에 달하는 가죽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봄

이나 여름보다 물량이 몇 배는 더 많았다.

  여기저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번을 도는 보표들의 모습도 

심심치않게 보였다. 

  오씨 피방의 나총관은 푸짐하게 나온 배를 떡 하니 앞세우며  진행

상황을 살폈다. 

  "흠 올해도 좋은 가죽들이 많이 들어와서 다행이야. 이번 일이  끝

나면 며칠 푹 쉬도록 해야지."

  마차에 실려져 있는 가죽들을 손으로 한번씩 쓰다듬으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그의 옆으로 보표 한 명이 다가왔다.

  "총관님. 우가촌에서 온 황노인이라는 자가 뵙고 싶어합니다."

  나 총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나를? 백호피라도 들고 있는 거 같더냐?"

  "한 칠십여 장 되는 가죽을 가져  온 것 같은데 따로 간직한  것은 

없었습니다."

  "흠 이 바닥에서 나를 보자는 것은 귀한 가죽을 구했다는 이야기인

데……. 어쨌든 우리와 계속 거래를 해온 곳이니 한 번 보도록 하지. 

의외로 한 껀 올릴 수도 있으니까. 별채로 안내하거라."

  "네"

  보표가 물러가자 나총관은 짐들을 대충대충 훑어보고 별채로  향했

다.

  

  가늘고 긴 눈썹 아래 독사처럼 째진 눈이 섬광을 머금고 있는 오씨 

피방의 방주 오대숙(吳大叔)은 탁자 위에 놓인 토끼 가죽에 하얀  가

루를 바르는 나총관의 손에 멈추었다. 토끼의 안 가죽에 하얀 가루를 

바르고 다시 붓으로 조심스럽게 털어 내자 깨알같은 비표가 흘러  나

왔다. 

  오대숙과 나총관, 황노야는 숨을 멈추고 비표를 살폈다. 비표를 집

어 나가던 나총관의 손이 가늘게 떨리며 끝내 몸이 버티지 못하고 의

자에 주저앉아 버렸다. 

  "어떻게 보시오. 나총관?"

  "틀림없는 은이호(隱二號)의 필적이고 그의 담당 비표입니다."

  "삼혈맹 뿐만 아니라 이들의 주력으로 본 맹을 치겠다 이건데 혹시 

적의 역 공작은 아니겠소?"

  "역 공작은 아닐 것 같습니다. 역 공작이라면 반대 급부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줄 망정 그들이 얻는 바가 없

는 술수입니다."

  "신중해야 하오. 우리 비선을 캐기 위한 술책일 수도 있소."

  오대숙의 말에 나총관과 황노야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그럼……."

  "여기까지는 적에게 노출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럴리가요. 만전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황노인의 말에 오대숙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최종의 안배를 실시해야 겠소."

  "여길 버리자는 말씀이십니까?"

  "태행산맥 일대에 흩어져 있는 우리 정보망이 어느 정도 저들의 눈

을 피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오대숙의 말에 나총관과 황노야는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이것이 사실이던 역 공작이던 저들은 태행산맥 일대에 대한  청소

를 결심 한 것이오."

  나총관과 황노야는 이를 악물었다.

  "나총관."

  "네."

  "보표들로 하여금 주위를 순찰케 하고,  내일 화물을 옮기기로 한 

표국에 가서 지금 즉시 화물을 옮기자고 하시오. 또한 나총관은 그들

과 함께 움직이시오. 이 일이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우리는 작은 가능

성도 소홀이 할 수 없는 입장이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오대숙은 결연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

었다.

  "우리가 눈치 챈 것처럼 행동을 하면 저들은 오늘 밤 바로 치고 들

어 올 것이오. 나는 맹의  정예들을 이끌고 이곳에서 저들과  맞서다 

몸을 피하겠소. 황노야는 이곳 지하토굴을 지키시오. 사흘이  지나도 

연락이 없으면 모든 문서와 흔적들을 파기하시오."

  나총관과 황노야가 일어나 읍을 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오후까지 아무 일이 없으면 나 총관은 특급전서로 맹에 연락

을 하시오. 모든 일은 즉시 실행하시오."

  오대숙의 마지막 명령에 둘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물러났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오대숙 앞으로 한 명의 혈의복면인이  장도를 

등에 차고 오체 투지했다.

  "지단주님을 뵙습니다."

  "만약 적이 처들어오면 내일 아침까지 버티고, 별명이 없더라도 각

기 살길을 찾아가라." 

  혈의복면인의 고개가 발딱 들려졌다.

  "지단주님!"

  "항명은 용서치 않는다. 물러가라."

  혈의복면인은 고개를 쿵 처박고 나서 물러났다.

  

  육중한 철문이 활짝 열린 오씨 피방의 정문으로 수십 대의  마차와 

선잠에서 막 깬듯한 표사와 쟁자수 짐꾼 백여 명이 순식간에 빠져 나

왔다. 이들이 일으키는 소란으로 옥강현의 닭들이 놀라 회를 쳐댔다. 

마차가 나가고 한 식경 후 쯤에는 일꾼으로 보이는 이들이 각기 짐을 

짊어지고 문을 나오며 숙덕대었다.

  "태행산맥의 산대왕들이 내려온대……."

  "현령님께서 관병을 보내 주실까?"

  "관병이 뭐 필요가 있나. 예가 어디라구 산적 나부랑이들이 깝죽대

는 지 원."

  "어쨌든 오대숙께서는 우리에게 조금이라고 화가 갈까봐 미리 피하

라고 하시니 정말 대인이실세."

  "헌데 지금 가면 성문을 열어 줄려나?"

  "쪽문을 내 조카 녀석이 지키고 있네. 삼촌이 가는데 열어야지  제 

까짓게 버팅 길 수 있나."

  "자자 빨리들 가자구"

  하인들 마저 모두 빠져나간 오씨  피방은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로 

인해 불이 난 것처럼 보였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외소한 노인은 품에 안고 있는  장도를 

쓰다듬었다. 백발 상투를 튼 머리에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고, 입가

는 반쯤 벌어져 침이 고였다. 왼쪽 눈두덩이는 오른쪽 눈덩이보다 배

는 두꺼워 보였다. 

  휘리리릭. 한줄기 바람이 허공에서 뭉치며 회오리를 형성해 천천히 

지상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회오리  속에서 깡마른 수수깡에  옷만 

걸쳐놓은 듯한 노인이 듬성듬성 빠진  회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나왔

다. 회오리가 사라 졌는데도 노인의 두발은 허공에서 천천히  돌면서 

땅에 내려 설 줄 몰랐다. 흡사  두 발로 두개의 작은 회오리를  타고 

있는 것 같았다. 

  "낄낄 눈치를 챈 모양이군."

  "귀찮아."

  "광도(狂刀)가 귀찮으시댄다."

  노인의 눈이 뒤를 향하자 검은 그림자가 내려섰다.

  "저희들이 처리하겠습니다."

  "낄낄 아무렴 그래야지."

  광도는 눈두덩이가 두 배는 큰 왼쪽 눈을 치켜 떴다.

  "풍멸(風滅)."

  "응"

  풍멸이라 불리 운 노인은 오씨 피방으로 물이 모래밭으로 스며들듯

이 다가가는 검은 그림자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더 귀찮아 지기 전에 일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낄낄 네 놈이 먼저 싸우자는 말이 나오다니 신기하네."

  "대덕이 혈마를 쳐죽이면 바로 청룡장으로 쳐들어간다고 했지."

  "그래서 지금 바람을 쏘이러 나온 거 아니냐."

  "청룡노야라는 자가 창왕이나 혈마보다 강할까?"

  "그렇겠지. 그러니까 창왕과 혈마는 단독으로 상대하겠다고 하면서 

청룡노야라는 자를 상대 할 때는 우리더러 힘을 보태라고 하는 거 아

니냐."

  광도는 얼굴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 한 번 해 볼래?"

  광도의 빛나는 눈을 대한 풍멸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시작했군."

  풍멸은 대답 대신에 그런 말을 하고 오씨 피방을 쳐다보았다. 

  

  오대숙은 손에 들린 유성추를 가늠해 보았다. 사슬의 양끝에  마름

모꼴로 매달린 두 추가 좌우로 조금씩 흔들렸다.

  "삼맹주님을 따라 천하를 누비던 십  년간의 삶. 그 분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뛰었다."

  촤르르 칠 장에 달하는 사슬이 문가로 길게 펴지며 한 쪽 끝만 그

의 손에 남았다. 꾸욱. 유성추의 끝을 힘주어 쥐었다.

  "무인으로서 후회는 없다."

  츄리릿. 유성추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아니 오대숙의 몸이 문가로 다가가며 유성추를 거두어들이는 것이 유

성추가 살아서 그의 손안으로 얌전히 앉는 것 같이 느껴졌다. 

  문이 열리자 엄지손가락 만한 철 구슬을 기관으로 날리는 연환노를 

들고 사방을 경계하는 보표들의 모습이 보였다. 보표 중 몇 명이  오

대숙을 보고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오대숙이 무공을 지니고 있

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병기를 들고  나오

는 것은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방주님. 산적들은 저희들의 힘만으로도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안

에서 편히 쉬고 계십시요."

  오대숙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으면 나도 좋겠네."

  

  몸에 달라붙은 옷이 그려내는 각진 근육의 선이 잘 어울리는  중년

인은 일 백에 달하는 수하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이번 전투의 중요성은 내가 더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모두 잘  알

고 있으리라 믿는다."

  중년인은 말을 끊고 눈에서 빛을 토해 냈다.

  "이번 전투는 우리 존덕문과 삼혈맹의 서전을 알리는 전투이자, 천

하 무림에 정의를 세우는 첫 시발점이다. 이런 뜻 깊은 전투를 첫 임

무로 맡게 된 여러분의 가슴은 지금 뛰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

다. 십삼당 중에 우리 구풍당과  십이비월당이 선택 된 것은  운명이

다.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때문에 이번 전투는 우리의 피해를  최소

화한다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구풍당주는 자신감에 찬 눈으로 당원들의  가슴에 불을 붙여 나갔

다.

  "적들은 방안에 있는 보표들을 가장 최전선으로 배치했다.  이들은 

십이비월당이 맡아서 처리를 할 것이다. 우리는 십이비월당이 보표들

을 처리하는 동안 바로 방의 중심부로 쳐들어간다. 우리가  중심부로 

쳐들어가면 저들도 정예를 내보내서 상대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들

을 신속히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십이비월당에게 적장의 수급을  넘

겨주지 않을 수 있다. 이는 우리 모두의 영광이 될 것이다."

  말을 다시 짧게 끊었다.

  "나는 여러분을 믿는다."

  "당주님 십이비월당에서 곧 공격을  하겠다는 신호를 보내  왔습니

다."

  무사의 전언에 당주는 고개를 끄떡였다.

  "십이비월당은 오씨 피방의 사방에서 공격을 감행 할 것이다. 우리

는 왼쪽 담장을 공격하는 조를 지원한다. 그들이 통로를 열면 우리는 

바로 적의 심장부를 친다."

  "존명"

  

  담 밖에 깔아 놓은 줄의  끝은 담장 위에 방울이 달린  나무가지에 

묶여 있었다. 오장(伍長:다섯 명의 대장)은 그 방울을 뚤어져라 쳐다

보았다. 딸랑. 방울이 그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는 듯이 울음을  토

해냈다.

  "온다."

  사다리를 타고 담장 뒤에 붙어 있던 보표 오장 이 손을 흔들며 나

직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자 전각 그늘에 몸을 숨긴 네 명 잽싸게 달

려나와 담장 밑에 감추어둔 사다리를 벽에 걸치고 눈만 위로  내밀었

다. 

  어둠을 뚫고 십여 명의 흑의 복면인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

었다. 앞에서 달려오는 여섯 명은 나한전과 비도를 움켜쥐었고  나머

지는 긴 사다리를 들고 뒤에 바싹 붙었다.

  오장은 연환노를 들고 맨 앞에서 달려나오는 자를 겨냥했다. 

  "모두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놈을 노려 저놈이 대장일꺼야."

  핑. 피피핑. 가장 앞에 달려오던  자에게 연환주가 집중되자 그는 

벌집이 되어 쓰러졌다. 나머지 흑의 복면인도 주춤거리자 뒤에서  대

갈 일성이 터져 나왔다.

  "어서 암기를 날려라."

  그의 고함성에 암기를 움켜쥔 자들은 벽 위를 향해 마구 암기를 뿌

렸다. 보표들은 얼른 고개를 담장 밑에 파묻었다.

  "제기랄. 그 놈이 아니었군."

  타타탕. 벽면에 암기가 튕겨지며 화려한 불꽃을 수놓았다.  그러는 

사이 네 명이 사다리를 들고 담에 기대기 위해 달려왔다. 

  "쏴라."

  오장이 먼저 고개를 내밀고 연환노를 쏘아대자 보표들도 지지 않고 

연환노를 마구 날리자 흑의 복면인들은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그 순

간 그들 뒤에서 장궁으로 무장한 수십 명의 궁수들이 시위를 놓는 모

습이 보였다.

  "숙여."

  오장의 외침에 보표들은 일제히 벽에 고개를 쳐박았다. 벽에  화살

이 박히는 소리와 머리위를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쌩쌩 들렸다. 오장

은 고개를 들어 전황을 살피려 했지만 소나기 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얼른 얼굴을 파묻었다. 

  화살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사다리가 벽에 걸쳐지는 소리가 들렸다.

  "퇴각해."

  오장의 명령에 보표들은 일제히 전각 뒤로 물러났다. 담장 위로 날

아오던 화살비가 그치고 검은 그림자들이  담장 위로 모습을 드러냈

다.

  "쏴라."

  오장의 명령에 일제히 담장을 향해 연환주를 날렸다. 막  담장에서 

뛰어 내리던 흑의복면인이 가슴을 부여잡고 앞으로 나뒹굴었다. 하지

만 이내 곳 담장의 곳곳에서 십 수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넘어와  이들

이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쏴라."

  오장이 은폐해 있던 전각의 지붕에서도 이들을 지원하는  연환주가 

날아오자 담장을 넘어 달려오던 흑의복면인들은 검으로 연환주를  쳐

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야합."

  기합성과 함께 담장을 차고 하늘로  날아오른 구풍당주가 단 숨에 

전각 지붕으로 다가갔다.

  "쏴라."

  전각 지붕에 숨어 있던 다섯 명이 연환주를 날렸지만 그는  검으로 

튕겨내며 전각 지붕에 내려섰다. 

  "도망쳐라."

  전각지붕에 있던 자들이 그렇게 소리치고 반대편으로 내려선 뒤 동

쪽으로 냅다 뛰었다. 

  오장은 앞으로 달려오는 흑의복면인들을 향해 연환주를 무차별적으

로 날렸다. 복면인들이 잠시 주춤거리자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퇴각해."

  오장의 명령에 보표들이 물러나자 칠팔 명만 이들을 추적하고 나머

지는 대오를 갖추며 안쪽으로 뛰어갔다. 

  

    

  구풍당주가 거느리는 병력이 왼쪽 담장을 훑으며 올라가자  담장에 

붙어서 십이비월당의 월담을 저지하던 보표들은 바로 안쪽으로  퇴각

했다. 보표들이 퇴각하자 마자 십이비월당의 무사들은 일제히 담장을 

넘어와 반대편 담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들은 보표들의  제압이

라는 첫 임무를 잊지 않고 있었다.

  

  구풍당주가 마른침을 삼키며 전각 모퉁이를 돌자 안에서 중문을 닫

고 있는 보표들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구풍당주는 손에서 암기를  뿌

렸다. 타타탕. 중문에 부딧친 암기가 불똥을 튕기며 격한 소리를  내

자 문을 닫던 보표들은 일제히 안으로 도망을 쳤다.

  

  "돌격."

  

  구풍당주의 명령에 무사들은 일제히 문을 박차며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파파팡. 수십발의 연환주가 정문으로 난사되었다.  구풍당주는 

그 위세에 놀라 몸을 구르며 뒤로 피했다. 하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몇 명이 땅바닥을 뒹굴며 신음성을 토해냈다. 

  

  오씨 피방 곳곳에는 검고 매캐한 연기가 치솟아 올랐고,  여기저기

서 터져 오르는 비명성이 점점 잦아드는 소리는 구풍당주의 피를  식

게 하였다. 

  

  구풍당주는 벽에 등을 댄 채 열려져 있는 문을 주시했다. 

  '이제 곳 십이비월당이 청소를 마치고 집결을 할 것이다. 더  이상 

지체를 하면 공을 세울 기회를 잃게 된다.'

  구풍당주는 엄폐물로 쓸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한 쪽에 있는 수레에 가서 멈추었다. 

  

  "흘흘흘. 제법이군."

  풍멸은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며 앞으로 나갔다. 광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한 손으로 털었다. 풍멸은 그런 광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갈텐가?"

  "비사영추(飛蛇影追) 오철중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지."

  풍멸은 몇 가닥 없는 수염을 진중이 쓰다듬었다.

  "그 이름이 자네 엉덩이를 옮길 정도인가?"

  "개를 보면 주인을 알겠지."

  풍멸은 입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살짝 억눌렀다.

  "푸훗."

  

  오대숙은 중문을 노려보았다. 

  보표들은 긴장된 안색으로 연환노를 들고 전각 위에 몸을 숨긴  채 

사태의 추이를 살폈다. 중문 밖에서 들리는 비명성은 점점  잦아들고 

달빛은 교교로이 사방을 비추기 시작했다.

  

  쾅. 문이 거칠게 열리고 수레를 옆으로 뉘운 채 십여 명의 흑의 복

면인들이 밀어 닥쳤다. 전각 지붕과 앞에서 수십발의 연환노가  수레

와 흑의 복면인들을 향해 난사되었다. 

  

  "타핫."

  

  내원의 서쪽 담에서 기합성이 터지고 한 명이 비조처럼 담장을  차

고 날아올라 전각 위에 내려섰다. 구풍당주는 보표들이 연환노를  돌

릴 사이를 주지 않고 단칼에 세 명을 베었다. 남은 보표들은 얼른 전

각에서 뛰어 내렸다. 그걸 신호로 문가에서 대기하고 있던 흑의 복면

인들이 일제히 안으로 밀려왔다. 보표들은 연환노를 몇 발 쏘고 나서 

각기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보표와 복면인들이 휘두르는 병장기가 허공에서 불꽃을 튀었다. 

  구풍당주는 대전 앞에 우뚝 서 있는 오대숙을 노려보았다.  오대숙

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타핫."

  

  구풍당주는 기합성과 함께 일 검에 승부를 보려는 듯 일도  양단의 

기세로 오대숙에게 날아들었다. 

  

  오대숙의 눈가에 얕은 조소가 어렸다. 츄릿 유성추가 빛을  발하자 

구풍당주는 검을 회전 시켰다. 촤라락. 구풍당주는 유성추를 검에 휘

감으며 회선풍의 수법으로 오대숙의 전신 대혈을 노렸다. 

  

  오대숙은 앞으로 나가며 왼 손에 들고 있던 다른 추를 쏘았는데 사

슬이 빳빳하게 서서 추가 창처럼 변환되어 오대숙의 손끝이 살짝  떨

리는 대로 팔방풍우의 수법을 펼쳤다. 

  

  유성추의 끝이 수십 수백 갈래로 갈라지며 회선풍의 공력을 무산시

키며 구풍당주의 전신대혈을 손안에  넣었다. 구풍당주가 놀라고  할 

사이도 없이 검에 감긴 유성추에 실린 힘이 더해지며 오대숙  앞으로 

끌려 들어갔다. 

  

  구풍당주는 자신이 날아가던 속도와 끌려 들어가는 힘에 의해 유성

추가 만들어 낸 도산검림으로 뛰어 들게 되었다. 구풍당주는 검을 버

리고 육장으로 유성추를 후려쳤다. 퍼퍼퍽. 손바닥이 붉게 물들어 갔

지만 그 경력을 이용해 옆으로 몸을 날렸다. 

  

  "하하하. 검은 가져 가셔야지."

  

  오대숙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오른 손에 들린 사슬을  튕겼다. 

촤라락. 검을 묵고 있던 유성추가 또아리를 풀면서 검은  혈전장으로 

떨어지는 구풍당주에게 날아갔다. 구풍당주는 검이 날아오는  기세를 

느끼고 손으로 감히 잡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땅에 내려서면서  바로 

뒤로 물러났다. 

  

  차착. 좌우에서 보표들이 휘두르는 도기가 구풍당주를 노렸다.  구

풍당주는 뇌려타곤의 수법으로 땅을 굴러 수하들이 있는 곳까지 굴러

갔다. 

  

  그때 뒤에서 와아아 하는 함성이 들렸다. 구풍당주는 이를  악물었

다.

  

  '결국 공은 십이비월당으로 넘어 가는 구나.'

  

  벌떡 일어선 구풍당주 옆으로 십이비월당주가 나란히 섰다. 십이비

월당주의 옷은 갈갈이 찢겨져 있었고 검을 잡은 손잡이는 피로  물들

었다. 

  

  "비월당주."

  "함정이오. 우리가 당했소."

  구풍당주는 십이비월당 소속의 무사들을 일견했다. 일 백에 달하던 

십이비월당의 무사들의 숫자가 이삼십으로 줄어 있었고 그 나마 부상

을 당하지 않은 이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이 둘이 더  이야기를 

나눌 사이도 없이 뒤에서 밀려들어온  보표들이 이들의 방진을 뚤고 

들어와 살수를 펼쳤다. 이들의  수준은 구풍당주의 수하들이  맞서던 

내 원의 무사들과는 질적으로 틀렸다. 

  

  이들이 진정한 정예들이었던 것이다. 보표라고 쉽게 보았던 십이비

월당의 무사들은 기관과 함정이 가득한  전각 사이로 유인당해서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나마 이들이 살아서 이곳에 합류한 것은 십이 

비월당주의 헌신적인 희생의 대가였다. 하지만 그 노력도 여기가  한

계였다. 십이비월당원들이 입은 충격은 급속도로 구풍당으로  전염되

었고 보표들의 공격을 제대로 막아 내지 못했다. 수하들이  연속적으

로 쓰러지는 것을 본 구풍당주는 이를 악물었다. 

  

  "퇴각하라."

  구풍당주는 그런 명령을 내리며 서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수하

들은 물론 십이비월당주도 서쪽으로 날아갔다. 

  

  "흥 어딜"

  오대숙은 냉소를 터트리며 서쪽  담장 위로 날아올랐다.  오대숙의 

눈이 반으로 줄어들며 싸늘한 한 광을 뿌렸다. 촤르륵. 유성추가  땅

으로 떨어지는 것 같더니 비사처럼 날아올라 맨 앞의 구풍당주를  노

렸다. 구풍당주가 장력으로 유성추를 쳐내자 유성추는 그 힘으로  옆

에 있는 흑의 복면인의 팔과  가슴을 관통했다. 차차창. 복면인들은 

자신의 앞으로 날아오는 유성추를 힘껏 처냈고, 유성추는 그 힘을 이

용해 다른 자들의 몸을 관통해 버렸다.

  

  "막지 말고 피해라."

  

  구풍당주의 외침에 흑의복면인들은 분분히 사방으로 물러났다.  흑

의복면인들의 대오가 흐트러지자 보표들은 일제히 각개 격파에  들어

가 뒤쳐진 자들을 주살했다.

  

  "담장을 넘어라."

  

  구풍당주는 그렇게 명령을 했지만 담장 앞에 서자 잠시 주춤  거렸

다. 자신은 담장을 뛰어 넘을 수 있지만 수하들은 적의 예봉을  피해 

넘기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십이비월당주가 벽에 등을 대고 양팔을 잡아 단전에 대었다.

  

  "타고 넘어라."

  

  구풍당주는 무겁게 고개를 끄떡이고 가장 먼저 담장을 넘었다.  그

걸 본 십이 비월당의 무사들이  일제히 벽에 등을 붙이고 손을  모았

다. 구풍당의 무사들은 약간 주저를 하는 것 같더니 한 명이  비월당

주의 손을 밟았다. 비월당주는 손을  살짝 살짝 튕겨서 담장을  넘기 

쉽게 해주었다. 그것을 본 구풍당의 무사들은 그들의 몸을 타고 담장

을 뛰어 넘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이 빠져나가자 보표들은 일제히 남

은 십이비월당의 무사들을 향해 칼날을 모았다.

  

  "너희들은 어서 담장을 넘어 가라."

  

  십이비월당주가 앞으로 달리며 내리는 명에 무사들은 일제히  칼을 

앞으로 해서 달려나갔다. 

  

  "이야아."

  

  보표들과 십이비월당의 무사들이 격돌을 하고 쌍방간에 피가  튀었

다. 

  

  유성추를 휘둘러 수하들을 독려하려던 오대숙은 기이한 느낌을  느

끼고 중문을 바라보았다. 

  

  보표들도 무엇을 느꼈는지 혈전을 멈추고 오대숙의 앞으로  집결을 

해서 웃옷을 벗었다. 그들은 피보다 붉은 상의를 입고 있었다.  이들

은 순식간에 자신의 방위를 점하고 진세를 구축했다.

   

  문이 열렸다. 원래 열려져 있던 문인데도 흡사 이 둘이 열고  들어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앞서 들어오는 자는 키가 난쟁이 만하고  왼

쪽 눈두덩이가 오른쪽 눈두덩이보다 배는 두꺼우며 장도를 품고 있는 

광도였다. 그 뒤로 허공을 걸어오는 풍도가 무엇이 좋은지  싱글거렸

다. 풍도의 뒤로는 구풍당주의 인솔하에 오와 열을 갖춘 무사들이 들

어왔다. 십이비월당주와 수하들은 풍도의 뒤로 가서 시립했다.

  

  '고수.'

  

  오대숙은 손끝에 잡힌 유성추가 뜨겁게 달구어 지는 것 같았다. 

  광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오대숙 십장 앞에 섰다. 풍멸은 그  옆

에서 허공에 뜬 채 두 발을 계속 휘저었다.  

  오대숙은 포권을 취했다.

  

  "삼혈맹 산서지단주 비사영추 오철중이오."

  광도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광도라고 하네."

  "나는 풍멸."

  풍멸이 한 걸음 나서려고 하자  광도가 도를 살짝 옆으로  내렸다. 

풍멸은 손을 저으며 뒤로 반보쯤 물러났다.

  "주변을 정리하려던 것뿐이었네."

  "삼혈맹에서는 이곳을 매우 중시했나 보군 자네 같은 친구를  보낸

걸 보면." 

  "나는 그저 이류의 인물일 뿐이오."

  "우리와 삼혈맹과의 오랜 관계를 아는가?"

  "알고 싶지 않소."

  오대숙의 단호한 선언에 광도는 눈을 꿈뻑였다. 

  "대맹주가 악구패라는 건 알고 있겠지?"

  "계집처럼 잡담이나 하러 오셨소?"

  "아깝군. 일세의 영명이 땅에 뭍이게 되었으니 말일세."

  오대숙은 유성추를 늘어뜨리며 수하에게 전음을 보냈다.

  

  '내가 공격을 시작하면 좌우익을 돌파해 중문으로 나가라.  너희들

이 좌우익을 돌파하면 저들도 약간의 틈을 내보일 것이다. 그때 나도 

탈출을 하겠다.'

  

  유성추는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혈의인들

이 좌우로 갈라섰고 흑의복면인들도  패를 나누었다. 중문과  전각을 

잊는 직선 통로에는 오대숙과 광도 풍멸만이 존재했다. 단 둘로 진영

의 핵인 중군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유성추의 끝이 오대숙의 삼장 앞에 멈추었고, 중간의 사슬이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빠르게 도는 것 같더니 순식간

에 두개와 세 개의 줄로 연결  된 듯이 보였다. 풍멸은 광도의  뒤로 

반걸음을 더 물러났다. 딸깍. 광도는 도집에서 도를 살짝 뽑았다. 

  

  유성추의 회전은 속도가 점점 더해지고 하나의 원이던 것이  두개, 

네 개, 여덟 개로 늘어 나더니  흡사 줄의 굵기가 몇 배로  불어나고 

길이가 그 만큼 짧아 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야아."

  

  오대숙이 공세를 아직 펼치기 전에 좌우에 있던 삼혈맹도들이 일제

히 흑의복면인들의 좌우익을 공격했다. 흑의 복면인들은 오대숙의 유

성추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재빠른 반격을 하지 못하고  급급

히 물러나야 했다. 

  

  탓. 오대숙의 몸이 떠지고 유성추가  한줄기 빛처럼 폭사했다. 슈

릿. 광도가 뿌린 도광에 그림자가 옆으로 밀려났다. 파아악.  광도의 

어깨에서 붉은 피보라가 치솟아  올랐다. 오대숙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츄릭. 허공에 떠 있던 오대숙의 몸은 유성추가 관통한 광도의 어깨

로 천천히 나아갔고, 그의 두 다리는 조금 빠르게 땅으로 떨어졌다. 

  

  "지단주님."

  

  흑의복면인들을 괴멸적으로 몰아 붙이던 삼혈맹도들이 일제히 부르

짖었다. 

  

  "와아아."

  

  이들은 함성과 함께 광도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광도가  어깨

를 관통한 사슬을 도로 베자 허공에서 천천히 날아오는 듯한  오대숙

의 몸이 땅으로 급속히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삼혈맹도들의  공세가 

광도의 전신에 작열했다. 

  

  파라락. 풍멸의 좌우 소매가 떨리고 바람이 암기가 되어 광도를 덮

치던 삼혈맹도들의 전신을 낭자했다. 파파팍. 삼혈맹도들의 주요  사

혈이 보검에 베어 진 듯 한 상처를 내며 쓰러졌다. 

  

  "쳐라."

  

  구풍당주는 풍멸이 더 손을 쓰기 전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존덕문도들은 삼혈맹도들을 강하게 몰아 붙였다. 

  광도가 몸을 돌리자 풍멸이 그 옆으로 바싹 붙었다.

  

  "상처는 어떤가?"

  "그럭저럭."

  

  풍멸은 뒤에서 들리는 격전음에 고개를 돌리며 광도의 어깨를 집었

다.

  

  "조금 도와주어야 할 것 같은데……."

  "공포는 스스로 극복하는 게 좋지."

  "하기사. 이 개 당이 일개 지단을 섬멸하지 못하고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아 우리에게 구원을 받았다는 건 대덕 그에게는 좀  충격이

겠지."

  "그런 말은 아니야."

  "알아 안다구. 너는 저들이 이번 일전에 당한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회복하기를 바라는 거지?"

  "남쪽에 간 대덕과 일현(壹賢)이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잘 하고 있겠지. 당금 천하에  누가 대덕과 자웅을 겨룰 수  있겠

나. 우리 둘이라면 몰라도." 

  광도는 대답대신에 자신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를 손으로 만졌다. 

  "사십 년만에 보는 내 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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