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그것은 밑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한명이
들어섯다. 그도 어둠에 동화가 되어 있었다. 주위에 있는 나무와 화원의
꽃들도 모두 어둠속에 뭍혀 있었다. 그 형체만 흐릿하게 보이는 전각. 형
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는 전각을 향해 갔다. 몇걸음 걷다가 그대로
멈추었다. 주위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몸은
그 자리에 얼어 붙은 듯이 못밖혀 있었다. 덜컹 전각의 문이 열리고 한명
이 뛰처 나왔다. 그리고 그뒤를 다른 한명이 따라 나왔다. 먼저 나온 이는
청년이었다.
화아악 주위가 빛무리에 휩싸였다. 그리고 사방의 풍경이 변했다. 보이는
것은 온통 검은 산뿐이었다. 그곳에 흐릿하게 보이는 동굴이 있었다. 그는
동굴로 다가갔다. 그러나 동굴은 계속해서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아니 가
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허걱"
창왕은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는 땀을 닦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머리를 털었다. 기
억에 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악몽을 꾸었다는 아련한 생각만 남
아 있었다. 창왕은 군막밖을 바라보았다. 군막입구가 바람에 펄럭이며 빗
물이 들이치고 있는 것이보였다. 그리고 지붕에서는 빗소리가 대장간 망치
질 소리처럼들렸다.
"혈마와의 대전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 그런가 몸이 말이 아니군."
창왕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호흡을 조절하였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풀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창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소리는 바로 앞에서 부르는 것 같지 않은가"
창왕은 군막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그 소리가 수백리 밖에서 부
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왕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몇 명의 무사들이 순
찰을 돌다가 창왕을 보고 예를 갖추었다. 창왕은 그들을 보고 말을 하였
다.
"이소리가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아는가"
그말에 무사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을 하였다.
"무슨 소리를 말씀하시는건지"
"아 아니다."
창왕이 손을 젖자 그들은 읍을 하고 물러났다. 창왕은 다시 귀를 귀울였
다. 그의 귀에서는 풀피리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설마. 나를 부르는 소리란 말인가?"
창왕은 손을 들었다. 그러자 군막안에 있던 장창이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혀
들어갔다. 그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
백리무군을 비롯한 군웅들은 탁자위에 놓여진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반 토막난 장창이었다. 그냥 보기에는 참으로 평범한 창이었다. 그러나 그
창의 임자는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바로 창왕 언무외였기 때문이
었다. 그의 실종. 그리고 다음날 발견된 부러진 창. 중인들은 얼굴을 굳혔
다. 군웅중에서 유일하게 혈마를 상대 할 수 있다고 믿은 인물이었다. 그
런 그가 실종 되고 그의 병장기만 부러진채 발견된 것이었다. 언가의 가주
인 언정일과 언정연은 약간 멍한 표정으로 그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리
무군은 장창을 들어 한곳에 두고 중인들을 보며 말을 하였다.
"창왕 언무외 노선배님께서는 단신으로 혈마를 상대하러 갔던 모양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혈마를 상대해야 할 것입니다."
중인들은 고개를 끄떡였다. 백리무군은 조용한 어조로 말을 하였다.
"아직 이 사실을 공개하지 마십시오. 이사실이 외부에 유출되기 전에 총공
격을 펼쳐야 합니다. 그리고 청성파와 청룡장에게 전서를 보내서 포위망을
풀라고전하십시오. 그리고 각 지대에게도 빠른 시일내에 본대화 합류하라
고 하십시오. 작전의 개념을 포위섬멸에서 근거지 탈환으로 바꾸겠습니
다."
군웅들은 소리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
"이겼습니다."
동방후는 그렇게 말해놓고도 멋적은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소천이 안을 바라보았다. 안에는 교묘히 위장된 동굴이 있었
다. 그리고 그 동굴안에는 버리고간 취사도구와 식량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었다.
"독이 사방에 뿌려져있습니다."
소천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고하자 한명이 그렇게 말을 하였다. 소천은
고개를 끄떡이며 주저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밖을 바라보았다.
좌우 산 능선을 따라 펼쳐진 원시림이 한눈에 들어왔다.
"좋군"
소천은 그렇게 말을 하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동굴 아래는 아름드리 나
무들이 병풍처럼 가로 막혀 있었다. 그래서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 할 만한 곳이었다. 게다가 동굴 입구만 막으면 가까이서도 찾기 어려
울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온 소천은 동방후를 바라보며 말을 하였다.
"몇명이나 있었나?"
"이십명 정도였습니다."
"이십명이라..."
소천은 그렇게 말을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보이는 것은 거대한 원시림의 숲뿐이었다.
'숨바꼭질을 하자는 건가. 그렇게 되면 시간이 너무 길어지는데... 혈유가
원하는게 시간벌기인가. 인근 백여리에 이십명의 감시병력이라. 흠 이상한
일이야.'
이관으로 돌아온 소천은 지도를 다시 펼쳐 들었다. 수천리에 걸처서 동서
로 뻣어 있는 남령산맥. 삼혈맹도들이 이 남령산맥에 의지해서 저항을 계
속한다면 십년이가도 토벌이 불가능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삼혈맹의 총타를 점령한다고 해도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일
이었다. 사람만 남아 있으면 총타는 다시 세우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자
파 본산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어서 그 본산과 생사를 같이 하는 이들을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다. 그 본산이 무너지면 그 파가 무너진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삼혈맹은 과감히 총타를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본 혈유라면. 지도를 살피던 소천은 이마를 집었다.
'그가 노리는게 도데체 무엇인가?'
소천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누르고 눈두덩이를 비볐다.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것 같았다.
"총호법님 접니다."
"아 육노야 들어오시지요"
예하는 나직한 소리와 함께 육정산이 들어왔다. 그는 약간 어두운 안색으
로 말을 하였다.
"반혈맹에서 소양으로 오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
곳의 실정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소양까지는 수백리 산
길이어서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 거리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
도록 삼혈맹에서 놔둘지 의문이구요."
"그래도 가야 겠지요. 여기서 이렇게 있다간 정말로 고립되어 고사당할 껍
니다. 우리더러 오라는 것은 포위섬멸작전을 포기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근 오백리내에 우리를 도와줄 곳은 한군데도 없게 되는 겁니다."
"으음"
육정산은 의자에 앉은 뒤 굳은 입술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푸른깃발 하나
가 외로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화르륵 목책이 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백호대원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며칠밤을 전전긍긍하면서 세운 목책이었다. 그런 목책을 한달도 되지 않아
서 자신들의 손으로 태우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동방후는 오대주를
불러 선발의 임무를 맏겼다. 오대주와 수하무사 오십명이 먼저 길을 떠났
다.
푸르른 숲을 아래로 하고 바위로 이루어진 능선을 따라 무수한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이동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긴 뱀이 물살을 헤치고 나아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커다란 바위와 바위들 사이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
였다가 사라지고 다시 보였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동을 하고 있
었다. 선두에 선 일대의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묵직해 보이는 짐들
을 하나씩 짊어지고 있었다. 대오의 중간까지는 짐들을 진채 장검을 빼들
고 이동을 하고 있었다. 그뒤에는 짐에 허덕이는 이들이 연신 땀을 딱으며
뒤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맨 후미에는 장검을 빼든 이들이 후방을 감시하
며 이동하고 있었다.
"정지 휴식"
그소리가 들리자 대오의 중앙을 구성하고 있던 이들이 주저 앉았다. 그리
고 바위 틈새의 그늘로 몸을 움츠려들었다. 해를 받은 바위는 달구어질대
로 달구어져 있어서 땀이 떨어지는 족족 증기로 만들어 날려 버렸다. 그래
서 인지 바위 그늘이 더욱 시원해 보였다. 오익상은 그 큰 몸집답지 않게
땀을 적게 흘리고 있었다. 오히려 풍파나 진명이 땀으로 옷을 적시고 있었
다. 백호대원들의 등작에는 허연 소금기가 배어나 있었다. 백호대원들과
각 대의 청룡단원들을 살피고온 천일정이 소천앞에 서며 말을 했다.
"더 이상의 주간 행군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모두들 지쳐 있습니다. 이런
더위에는......."
천일정의 말에 소천은 주위를 살펴 보았다. 사방에 보이는 것은 산줄기줄
기마다 뻣어 있는 원시림 뿐이었다. 소천은 나뭇가지를 꽃아 그 모양을 보
고 동서남북을 정한 뒤 지도를 펼쳤다. 그러나 지도와 지형이 맞지 않았
다. 사실 이런 전인미답의 오지에 지도가 제대로 되어 있으리라고는 생각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지도가 있어서 대강의 거리와 방위를 제대로 집
을 수 있었다. 소천은 지도를 접고 다시 주위를 살피더니 동방후를 불렀
다. 동방후는 바위들을 차고 오면서 주위를 살폈다.
"동방단주"
"네"
"여기서 휴식을 취한다면 어디가 좋겠는가 집어보게?"
동방후는 즉시 몇개의 계곡을 가리켰다.
"저런 곳에 물이 있을 것 같습니다. 계곡도 있으니 쉬어가기는 안성맞춤입
니다."
소천은 고개를 저었다.
"쯥 그래서 내가 아직 자네에게 전권을 위임하지 못하는 것이네. 계곡에
물이야 있겠지. 그러나 갑자기 폭우라도 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저희는 훈련이 잘되어 있어서 폭우는 문제가 없습니다."
동방후의 자신에 찬 목소리에 소천은 고개를 다시 저었다.
"무릇 산에서 만나는 것들중에 가장 무서운게 무엇인지 아는가?"
소천의 말에 천일정이 대답을 하였다.
"사람이 아니겠소.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니 말이오. 하하하 하하"
"천호법님의 말씀이 맛습니다. 무법천지인 이런 산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
질지 모르지요. 하지만 산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산 그자체 입니다. 사람
들은 그것을 잊고 있지요."
소천은 그렇게 말을 하고 동방후를 보며 몇곳을 가리켰다.
"일대와 이대는 저곳 능선에서 전방을 경계하며 휴식을 취하도록하고 삼대
와 사대는"
소천은 각대에게 산줄기의 팔부 능선에 위치할 것을 명했다.
살랑살랑 섭선이 바람을 일으키며 학창의를 날렸다. 그와 함께 몇가닥 머
리카락도 귀밑에서 그네를 탔다.
"호오 대단하군. 아마도 당금 병법가 중에서 저 친구를 이길만한 이는 몇
안되겠군. 지세를 읽는 눈에 병력배치까지 어느 한군데 나무랄데가 없어.
정말로 여기서 제거를 하고 싶게 만드는군."
착 섭선을 접은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새파랗게 물들고 있었다.
"정말로 아쉽군.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인데 말이야 아쉬워 아쉬워.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껀가"
그는 고개를 흔들고 숲속으로 걸어갔다. 몇 명의 혈의무사가 그뒤를 따랐
다.
짐을 들고 이동을 하던 한 명이 손을 들어 얼굴을 긁더니 하늘을 바라보았
다. 그리고 어하는탄성을 내질렀다. 방금전까지 구름 한 점없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들면서 작은 세우를 뿌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천일정은 붉
은 볼을 들어 하늘을 보며 외쳤다.
"제기랄 폭우야. 총호법님 이대로는 각 방어구역까지 도달하기전에 모두들
물귀신이 될껍니다. 어떻게 할까요?"
"바위와 바위 사이에 기름천을 대어 사람이 들어 갈 수 있게 만들라고 하
십시오. 그리고 배수로를 만들어서 그곳에는 물이 흘러들지 않게 하고요.
빨리 하면 모두들 비를 맞지 않아도 될껍니다."
소천의 명이 즉각하달되자 선봉의 일대와 후발의 일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들 자신 근처의 바위에 천을 치기 시작했다. 바위와 바위를 가로지르며 지
붕을 만들고 그 틈바구니에 다시 천을 내려뜨린 뒤 바윗돌로 눌렀다. 그리
고 그 주위에 작은 배수로를 팠다. 배수로가 다 완성되어갈 무렵 하늘에서
는 굵은 빗방울이 쏱아지기 시작했다. 선봉에서 십여명이 사방으로 척후를
나가고 후발에서도 십여명이 사방으로 척후로 나갔다. 그외의 나머지는 주
위의 바위에서 비를 맞으며 바위 사이에 천을 쳐대었다. 이들도 모두 틈바
구니에 들어갈때까지 소천은 비를 맞으며 가장 높은 바위위에 서 있었다.
빗방울이 그의 옷자락을 흘러서 바위를 적시며 떨어졌다. 육정산과 천일정
과 하연적 풍파 진명이 그뒤에 섯다.
"이제 들어가시지요."
"오랜만에 비를 맞아 보고 싶군요. 모두들 들어가서 쉬십시요."
소천의 말에 천일정은 배시시 웃었다.
"하하하 소공자께서는 어떤때 보면 어린아이 같습니다. 하하하. 아참 이런
기후에는 음식들 쉬 상합니다. 소금에 절인 음식이 아니고 곧 상할 것 같
은 것은 모두들 먹게 하는게 좋겟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배도 고플텐데요. 이번 비는 곧 그치겠지요."
"열대성 폭우라 한 두시진후면 그칠껍니다."
"한 두시진이라?"
오익상은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옆에서 절인고기를 뜯던 하연적
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천일정인 양볼을 부풀린채 입안에 있는
고기를 우물거렸다. 그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앞의 형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주위는 점점 어둠속으
로 함몰되어가고 있었다. 천일정과 하연적이 공력을 운기했다. 척 하는 소
리와 함께 군막이 걷혀졌다. 그러자 빛방울이 사정없이 안으로 들이쳤다.
들어선 이는 급조한 도롱이를 걸치고 초립을 쓰고 있는 육정산이었다. 도
롱이를 쓰고 있었지만 전신은 이미 빗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소천 공자님은?"
육정산은 안을 보고 말을 하였다.
"잠시 주위를 둘러 보신다면서 나가셧습니다. 어떻습니까?"
오익상의 말에 육정산은 고개를 저었다.
"대단히 지독한 폭우야. 삼장 앞이 보이지 않네. 빗소리 때문에 다른 소리
는 일체 들리지 않네, 이럴 때 적이 기습을 해온다면 전멸을 면치 못할걸
세"
"저들도 이런 빗길에는 능선공격이 힘들겠지요."
천일정과 하연적이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도롱이를 어깨에 걸치고 초
립을 쓰고 밖으로 나갔다. 육정산은 웃옷을 벗어 한쪽에 놓고 바위에 등을
기대었다. 그의 상체 여기저기에 난 상처들이 화섭자의 불빛 아래 꿈틀거
렸다.
"상처들이 많으시군요? 언제 그렇게 다치셧습니까?"
육정산은 풍파의 말에 껄걸 웃으며 상체를 바라보았다.
"십년전에"
그렇게 말을 하고 눈을 내리감았다. 한시진 넘게 폭우속을 헤집으면서 주
위를 순찰했기 때문에 몸이 조금 피곤해져 있었다.
"얼마가 지났지?"
"날이 밝은 걸 보니 예닐곱시진은 이곳에서 묶여 있었던 것 같군"
진명의 말에 풍파가 대꾸를 하였다. 둘은 턱을 괴고 앉아서 아직도 비가
내리는 밖을 바라보았다. 툭툭 이제는 천장에서도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기름먹인 천 사이로 빗물이 배어서 흘러드는 것이었다.
"제기랄 정말로 지독한 비야. 그리고 비가 내리는데도 몸이 끈쩍끈적하지"
진명은 몸을 몇번 긁다가 군막을 열고 나갔다. 촤아아 쏱아지는 빗줄기가
전신을 강타했다. 몸이 시원해지면서 숨도 상쾌했다. 진명은 크게 심호흡
을 하고 구환도를 한번 툭 친 뒤에 밖으로 나갔다.
몇 개의 진영을 지나자 무사들이 부산을 떠는 모습이 보였다. 청룡단의 무
사들이 각기 병장기들을 쥐고 조별로 집합하고 있었다. 진명은 무슨 일이
터진 것을 직감하고 앞으로 달려갔다. 사사삭 사사삭 청룡단의 무사들이
무장을 완전히 같춘채 각기의 방어진을 피면서 나아갔다. 그 사이 백호대
원들은 이리저리 소란을 떨면서 능선위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촤아아 폭우가 검날위를 지나며 둘로 갈라져 땅에 뿌려졌다. 청룡단의 척
후가 자리하고 있는 곳에는 한명이 서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이
걷힌 그 자리에는 붉은 줄기가 형성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산맥이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협곡은 푸른 허물을 벗은채 붉은 토사로 뒤덥혀 있엇
다. 그 붉은 토사는 산 아래까지 이어져 있었다. 산 아래의 거목들은 뿌리
채 뽑혀서 사방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 길이가 무려 수십리에 달하고 있엇
다. 협곡 곳곳에 크고 작은 상흔들이 나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전진을
하고자 했던 길목에는 몇구의 붉은 천조각이 어렴풋이 보였다. 소천은 진
명을 보고 고개를 끄떡였다. 진명은 도를 뽑아들고 몸을 가볍게 날렸다.
네명의 무사가 그뒤를 따랐다. 봉우리주위에 있던 이들 십여명이 전진배치
되면서 장창을 준비했다. 그뒤에는 삼십여명이 단궁을 든채 천천히 내려가
기 시작했다.
멀리서 확인된 붉은 천조각은 사람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거리에서
조각으로 보일정도의 크기라면 그것은 한 사람의 넒이와 폭은 될 것이었
다. 진명은 가볍게 산을 내려갔다. 그럼에도 발이 미끄러워 넘어질 뻔하였
다. 타타탁 빗물에 젖은 바위를 밞으며 내려와 붉은 천 근처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으깨어진 한구의 시신이 있었다. 바위에 눌린채 죽어 있는 이로
핏방울은 보이지 않았다. 진명이 그 시신을 바라보는 사이 네명의 무사가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수색에 들어갔다. 그들이 수색에 들어가자 십여명의
무사가 다시 그 자리에 내려와 주위를 경계했다. 반시진의 수색으로 주위
십여리를 뒤졌고 서너구의 시신을 추가로 발견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널려
있는 암기와 터저버린 독탄의 흔적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삼혈맹이 이곳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폭우 때문에 퇴각한 모양입니다."
동방후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소천에게 보고를 하였다. 소천은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비가 우리를 도왔군"
천일정의 말에 오익상은 가슴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을 도운거겠죠. 우리와 맛섰다면 모두 죽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하하
하 하하하"
오익상의 웃음에 모두들 따라 웃었다.
"자네의 웃음이 비를 그치게 했군"
육정산은 젖은 오익상의 어깨를 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어느새
파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
스윽. 옷자락이 륜을 타고 내려갔다. 그러자 륜에 묻어 있던 붉은 핏
덩이들이 옷자락에 쓸려 흘러 내렸다. 그래서 검은 륜의 색깔이 선명
히 드러났다. 륜의 여기저기에는 이빨이 빠져 있었다. 적천마군은 그
런 자신의 륜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파아아 륜에서 뻣어 나온 붉은
기운은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저멀리 지고 있는해. 적천마군은 그
것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지면 싸움은 시작되는 것이었다.
소수로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이 치고 빠지기
였다. 이 전법을 쓰기 위해서는 몇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우선 그곳
지리에 밝아야 했다. 그리고 빠른 기동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또
한 도망갈 곳이 있어야 했다. 깊은 산속이라면 더없이 좋았다. 삼혈
맹도들은 이곳 지리에 밝았고 또한 빠른 기동력도 있었다. 그리고 무
수한 원시림과 고산준령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삼혈맹은 지리적
이점을 크게 안고 들어갔다.
<사천당가. 이가주 당악. 고수 십여명. 일급무사 칠십이명. 암기와
독으로 무장했음. 집결전에 반드시 제거할것.>
꾸낏. 적천마군은 그 종이를 구겼다. 그리고 수하들을바라보았다.
삼십명의 혈살대가 전부다였다. 그 숫자로 당가의 백에 달하는 정예
무사들을 치고 빠져야했다. 그것은 다른 사대마군도 마찬가지인 상황
이었다. 숫적인 열세. 무엇보다도 일류고수가 백도에 비해서 턱 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은 남령산맥안이고 자신들에게는
혈마가 있다는 것이었다. 적천마군은 혈륜을 부여잡고 천천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서 삼삼오오 조를 나눈 혈살대가 하나
의 점으로 모이듯이 모이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둠은 그들을 모두
삼켜 버렸다.
스슥. 륜을 거의 소리를 내지 않으며 날아갔다. 그래서 망을 보던 당
가의 한 무사가 목이 잘려서 쓰러졌다. 그것을 옆에 있던 무사가 보
고 어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도 다른 륜에 의해 목이 잘려졌
다. 피피핑 수십대의 불화살이 군막주위에 떨어지고 불길이 일기 시
작했다. 군막에서 수십 수백여명이 병장기를 들고 뛰처나오기 시작했
다. 적천마군은 륜을 휘두르며 닥치는 데로 배었다. 사천당가의 무사
들이 암기통을 꺼냈지만 사방에서 당가의 무사들과 삼혈맹도들이 혼
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암기를 쏘지 못했다. 그때 호통소리와 함
께 몇 명의 당가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이 마구잡이로 뿌
려대는 암기는 신기하게도 삼혈맹도들만 맞추고 있었다. 그들이 모습
을 드러내자 전세는 금세 삼혈맹의 열세로 돌아섯다. 적천마군은 그
들을 보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파파파 삼혈맹도들도 그것을 신호로
뒤로 몸을 빼었다.
'크악 으악'
적천마군은 뒤에서 들리는 비명성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비명
성들은 바로 자신의 수하들이 내 지르는 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파파파 적천마군의걸음이 더욱 빨라지고 삼혈맹도들
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당악을 비롯한 당가 고수들은 적천
마군의 뒤를 바싹 쫒았다. 그러다 우뚝 멈추어 섯다. 적천마군이 지
나가는 나무위에 한명의 혈영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보다 붉은
혈의. 그 혈의보다 붉은 양손. 양손보다 붉은 두눈. 당가 고수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대로 멈추었다. 그순간 혈의가 펄럭이며 허공에
서 흐릿한 잔상을 그려 내었다.
당악은 허리춤 암기통에서 암기를 꺼내어 사방으로 뿌렷다. 그것은
동료들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혈마였다.
자신이라도 살고 봐야 할 일이었다. 다른 이들도 제각기 자신들이 살
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무공을 펼쳤다. 까가강 따다닥. 그러 햇기 때
문에 서로간의 공세가 얽혀서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또한 서로
간의 공격이 얽혀서 헛점이 잠시 드러났다. 그들은 그 헛점을 바로
감출 수 있는 능력들이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혈마였다. 붉은 막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고 그들중 몇
명은 병장기들을 휘두르며 달려나갔다. 푹. 한명이 먼저 고꾸라졌다.
그리고 다시 한명이 쓰러졌다.몇 명이 몸을 돌리며 혈마를 가르키다
가 넘어졌고, 당악은 몸을 돌리며 암기통에서 암기를 꺼내었다. 그의
손을 타고 무수한 암기들이 흘러내렸다. 그의 입이 벌어지면서 함성
인지 비명성인지 모를 고함이 소리없이 터저 나왔다. 그의 양팔은 축
늘어진채 몸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악의 고개가 천천히 앞
으로 꺽여지면서 땅에 얼굴이 닿았다. 저쪽에서는 함성소리와 함께
무수한 백도군웅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스스스 혈마의 신영이 흐릿해
지더니 붉은 잔상만 주위에 남기고 사라졌다. 적천마군과 그의 수하
들도 어디로 같는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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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 때문에 먼거리에 있던 청성파와 청룡장을 비롯한 십여개 지대
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청송자의 말에 백리무군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들이 참가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더 이상은 총공격을 멈출수가 없었다. 당가의 주력
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 알려지기 전에 작은 승리라도 해서 사기를 키
워 놔야 했기 때문이었다. 백리무군은 지도를 펼쳐들었다.
"이 일대는 주위가 가파른 산맥이 형성이 되어 있어서 대군을 이끌고
넘기에는 요원합니다. 단지 이 협곡만이 대군을 이끌고 이 산줄기를
통과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적들도 그곳을 알겠지요."
"그래서 삼혈맹은 이곳을 지킬 껍니다. 때문에 우리가 공격을 해야
합니다."
백리무군의 말에 중인들은 고개를 끄떡였다. 한쪽에 앉아 있던 협개
나정호도 고개를 끄떡였다. 어차피 원정을 온 처지에 지형의 유리를
얻고 싸우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와아아 와아아"
거대한 함성을 지르며 수백이 넘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정신을 집중하고 바라보는 곳은 하나의 협곡이었다.
그 협곡안에 그들을 수십년 동안 공포에 떨게한 삼혈맹의 총단으로
가는 길이 있는 것이었다. 이제 오늘에서야 모두들 그 공포와 정면대
결을 하는 것이었다. 산천을 뒤덥는 인의 물결은 파도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고수들은 단번에 십수장씩 몸을 날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본대와 고수들간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고수들은 경쟁적으로 먼서 앞으로 나아갈려고 힘을 쓰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협곡이 점점 험해지자 고수들의 발걸음도 조금씩 늦추어 졌
다. 삼혈맹의 발악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협곡은 점점 좁아져서
십여명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폭이 좁아졌다. 그리고 좌우로는 안
으로 굽은 형태의 절벽이 자리잡고 있었다. 선두에서 달리던 이들은
그곳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한명이서 능히 수천대군을 막아 설만한
곳이었다. 고수들은 사방을 경계하면서 천천히 나아갔다. 병목지역을
지나자 너른 공터가 보였다. 그리고 그 공터에는 예상외로 아무도 없
었다. 선두의 고수들이 수신호를 보낸 뒤 앞으로 내달아갔다. 그 신
호에 군웅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내달았다.
"이상합니다."
건곤신개가 방주인 협개 나정호를 보며 말을 하였다. 나정호도 고개
를 갸웃했다. 자신이라면 아니 병법을 모르는 이들도 저 협곡을 포기
했다는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
이 나정호는 앞 사람과 부딧칠뻔 했다. 건곤신개는 앞을 바라보았다.
앞서 달려가던 군웅들은 누가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모두 한순간
에 멈추어 섯다. 그래서 뒤에서 달려오던 이들이 앞사람의 등에 몸을
부딧치기도 하였다. 협곡안을 메우던 함성은 어느새 잦아 들고 있었
다.
한명. 단 한명이 그곳에 서 있었다. 붉은 장포를 나부끼며. 옆 모습
이 보였다. 핏물보다 붉은 얼굴. 그리고 두 눈동자마저 붉었다. 군
웅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터저나오는 외침.
"혈마"
파아아 혈마의 신영이 단숨에 수십장을 도약해 날아왔다. 그의 몸은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아무런 미동도 없이 날아오고 있었다. 가장 선
두에 서 있던 아미파의 고수들이 계도를 빼들고 혈마를 향해서 달려
갔다. 그것을 신호로 청성파와 남궁세가의 고수들이 달려나갔다. 파
파파 혈마의 옷자락이 떨리고 병장기와 양단된 몸 수십구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사방에서 무수한 혈영들이 몰
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들 선두에는 사대마군이 병장기를 휘두르고 있
었다. 그러자 군웅중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함정이다. 도망쳐라."
그 소리가 들리고 수십명이 일제히 몸을돌려서 도주하기 시작했다.
파파파 파파파 혈마의 몸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백도의 뭇 고
수들을 격살하였다. 그것을 본 백도의 군웅들은 전의를 읽고 도주를
하기 시작했다. 명문대파의 제자들은 자신들을 이끌고 온장문인이나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외의 인물들은 너 나할 것 없이 등을
보이고 도망을 치고 있었다. 개중에는 겁에 질린 명문대파의 제자들
도 끼어 있었다. 화산파의 제자들 몇 명이 도망치는 것을 보고 청성
파의 제자들 몇 명도 도주를 하였다. 개방주 협개 나정호는 그것을
보며 소리쳤다.
"도망치지 마라. 도망치지 마라"
나정호의 말에 개방도들은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다른 군
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무너지는 둑방처럼 등을 돌리고 있었다. 크
악 으악 그들 배후에서 비명성이 들려왔다. 건곤신개는 앞쪽을 바라
보았다. 좁은 협곡. 그곳을 통과하려는 수천의 군웅들이 서로 밟고
밟히며 비명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부르르 나정호는 몸을 떨었다.
"이럴수가"
"이게 함정이었어"
건곤신개는 이마를 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서 한쪽에서 아직도 도
살을 하고 있는 혈마를 바라보았다. 군웅들이 힘을 합하여 싸운다면
혈마가 아무리 대단해도 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군웅들은 지금 겁에
질려 있었다. 그래서 저항이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었다. 개방도들은 군웅들에게 밀려났다. 그들은 절벽에 몸을 붙인채
정면을 바라보았다. 파아아 순식간에 십여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
다. 그리고 시야가 확트이며 광활한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듯한 혈의
인이 들어왔다. 스윽 그의 고개가 돌려지고 피빛 두 눈동자가 나정호
의 눈속을 파고 들었다. 나정호의 전신이 가늘게 떨렸다. 건곤신개와
취선개가 팔을 벌리며 나정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개방도들이 인의
장막을 치며 개방주 나정호주위를 메꾸었다. 그들은 모두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서로의 떨림을 느끼고 있었다.
퍼퍼퍽 퍼퍼퍽 사방에서 삼혈맹도들이 기세가 올라서 백도군웅들을
주살하고 있었다. 혈마의 두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나정호는 학
질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그렇게 떠는 표정으로도 그의
두발은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양팔을 들어 개방도들을 헤치
며 앞으로 나아갔다. 개방도들도 그를 붓잡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취선개만이 같이 따라 나왔다. 건곤신개는 뒤로 물러서면서 몇몇 개
방도들의 옷자락을 잡아 정신을 차리게 한 뒤 뭐라고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협개 나정호는 혈마의 십여장 앞에 섯다. 주위에서는 여전
히 비명성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혈마는 나정호를 바라보았다. 그리
고 고개를 돌려서 주위를 살폈다.
등을 보이고 살기 위해서 협곡을 빠져 나가던 백도무림인들중에서 고
수 몇 명 몸을 돌려서 삼혈맹도들에게 저항을 하였다. 고수들이 저항
을 하자 삼혈맹도들의 공세도 잠시 주춤거렸다. 파악 혈마의 신영이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붉은 기운이 스치는 곳에서는 여지없
이 피보라가 일었다. 삼혈맹도들과 맛서 싸우며 후방을 지키던 몇몇
고수들이 쓰러지자 군웅들은 더욱 광기어린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타
넘으며 협곡을 빠져나갈려고 아우성을 쳐댔다. 그리고 삼혈맹도들은
그들의 등에 화살을 있는대로 퍼부어대었다. 그러나 그들은 개방도들
을 공격하지 않았다. 개방도들은 협곡의 한쪽에 반원진을 친채 떨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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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군막안에는 수십여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천근의 무
게를 지고 있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마에 식은 땀을
흘리고 있기도 했다. 대패. 삼혈맹의 타도를 외치며 진격해온 이래
첫 대패였다. 그것도 싸움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당한 패배였
다. 중인들은 모두들 자신들이 겁을 먹지 않았다면 패하지 않았으리
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혈마의 모습을 본 순간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모두들 공포에 질려 있었다. 백리무군은 굳은 얼굴로 중
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전의를 상실한 표정들이었다. 싸움
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과 사기였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모두 사기를 잃어 버리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라면 백전백패는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었다. 백리무군은
한쪽에 앉아 있는 소천과 육정산을 바라보았다. 청룡장과 청성파는
며칠간 내린 비 때문에 합류가 늦어졌다. 그래서 협곡대혈전이 있은
뒤에 합류를 하였다. 그때 한명이 벌떡 일어나며 청룡장을 향해 손가
락질을 하였다. 그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귀파는 왜 아무런 피해가 없소?"
그말에 소천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고 육정산은 눈을 빛냈다. 중인
들의 시선은 일제히 소천과 육정산에게 모아졌다. 그랬다. 청룡장은
이번 대전에서 거의 피해가 없었다. 그래서 모두들 분해 하는 것인지
도 몰랐다. 그는 더욱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하였다.
"지금 귀장이 삼혈맹과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파다하오. 이에 대한
진상을 밝히시오."
그말에 백리무군이 두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은
큰 기복을 일으키고 있었다. 바로 형산파의 장로인 명현자였다. 명현
자의 말에 몇 명이 일어서서 동조를 하며 일제히 청룡장을 성토했다.
그때였다. 딸깍 하는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매우 나직했
지만 중인들의 고함성을 뚤고 그들의 귀를 울리기에는 충분했다. 그
순간 중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난 곳을 주
시했다. 살짝 뽑힌 도. 그리고 반쯤 감긴 눈. 그 눈은 명현자를 바라
보고 있었다. 명현자는 육정산과 눈이 마주치자 싸늘한 기운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감도는 것을 느꼈다. 무당파의 청송자는 그 모습을
보고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사숙께서 부상을 당해 후송되지 않으셨다
면 뭐라고 한마디 하셧을 것이었다. 그는 지금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신분으로는 나설 수가 없는 자리였다.
그때 백리무군이 손을 들어 명현자를 제지했다.
"이것은 삼혈맹이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백리무군에게 쏘아졌다. 백리무군은 협개 나
정호를 보며 말을 하였다.
"개방도 이번 협곡 전투에서 거의 피해가 없었습니다."
그말에 협개 나정호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백리무군은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개방이 삼혈맹과 손을 잡았다고 생각하지는 않
을 껍니다. 이번 삼혈맹과의 대전에서 피해가 큰 곳은 사천당가. 청
성파. 아미파. 하북 팽가. 남궁세가입니다. 혈마가 직접 쳐들어와 헤
집거나 삼혈맹의 고수들이 집중적으로 공격한 곳이지요."
그말에 중인들은 입을 굳게 다물거나 고개를 끄떡였다.
"그외에는 그리 큰 피해가 없었습니다. 아 물론 그렇다고해서 그분들
께서 열심히 싸우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 삼혈맹은 우리를 갈
라 놓기 위해서 선별적인 공격을 감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는 그런 삼혈맹의 간계에 속아 넘아가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말에 협개 나정호가 일어서서 말을 하였다.
"다음에는 우리 개방에서 나서서 선봉에 서겠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