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교환 (16/95)

  

  16. 교환

  

  하늘에는 진눈깨비가 펑펑 내렸다. 이렇게 눈이라도 펑펑 내리는 날이면 

신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세상 모르고 즐거워하는 아이들이었다. 

  개봉성 교외의 작은 마을 앞에도 아이들이  시린 손을 호호 불어대며 눈

덩이를 던지며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눈싸움을 하던 

아이들이 돌연 눈싸움을 멈추었다. 그리고 얼른 여기저기서 눈을 긁어모으

더니 두세 개씩의 눈덩이를 들고 마구 고함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야야아! 거지다."

  휙휙휙. 고사리 같이 작은 손으로 내던진 눈덩이는 몇 장 날아가지도 못

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운좋게 날아간 눈덩이가 한 거지의 마대에 맞아 흰 

자국을 남겼다. 아이들은 발밑의 눈을 긁어서 다시 눈덩이를 만들었다. 

  거지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소매를 흔들며  눈덩이들을 받아내었다. 거지

가 눈덩이를 소매로 받아서 다시 되  돌려 던졌다. 퍽퍽퍽. 아이들은 얼굴

과 어깨에 눈을 맞았다. 그러자 와 하는  소리를 내지르고 마을 쪽으로 내

달리기 시작했다.

  거지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양손을 털고 걸었다.  그 거지는 개방의 장

로인 취선개였다. 그는 백리소연이 머물고 있는  장원에 있다가 방의 부름

을 받고 총타로 가는 길이었다. 어린아이들은 던지는 눈을 맞자 호기가 생

겨서 그걸 받아서 되던진 것이다. 아이들이 도망을 치자 괜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더 생각하고 자시고  할만큼 시간이 남아도는 것이 

아니었다. 취선개는 소매를 떨치고 나갔다. 방에서 자신을 부른 것은 무슨 

큰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취선개는 걸음을 빨리 했다.

  개방의 총타는 개봉성 교외에 있는 낡은  관제묘였다. 사실 여기는 일문

의 총타라고 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널따란  벌판에 작은 산을 끼고 황하

를 굽어보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이 관제묘는 낡은 전각 두세 개와 허물어

진 담장만 있었다. 곳곳에 있는 거지  움막들만이 여기가 소위 구파일방중 

하나인 개방의 총단이라는 것을 짐작케 할 뿐이었다. 

  몇 명의 거지들이 따뜻한 양지에서 이를  잡다가 취선개를 보자 얼른 일

어서서 읍을 했다. 취선개는  손을 흔들고 성큼 성큼  계단을 걸어 올라갔

다. 계단 주위에 있는  바위 위에는 거지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단체로 

이를 잡고 있었다. 이들이 하나의 포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개방도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취선개는 담장 안으로 들어가 정면 왼쪽에 있는 작은 

소로를 따라 걸어갔다. 그곳에 가면  장로원이 있었다. 장로원이라고 해서 

특별한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비바람을  피할만한 전각이 다였다. 

그곳에 자신을 부른 건곤신개가 있었다.

  취선개가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건곤개가 심각한 얼굴로 맞이했다. 취선

개는 자기를 왜 불렀느냐고 한바탕 호통을 치고 따질 생각이다. 그러나 건

곤신개가 심각한 얼굴로 앉아있는 것을 보자  그럴 생각이 저 멀리 날아갔

다. 건곤신개의 입가 주름살이 십여 개는 더 생긴 것 같았다. 취선개는 뭐

라고 말을 하려했다. 그때 건곤신개가 휙 하니 종이를 한 장 던졌다. 취선

개는 그 종이를 잡았다.  종이의 감촉이 마치 비단을  잡는 듯이 부드러웠

다. 이런 종이는 매우 귀한 것으로 개방에서는 구경도 하지 못하는 종이였

다. 아마 이 종이 값이면  개방 거지 대여섯 명은  배불리 한끼를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취선개는 그런 값비싼 종이를 건곤개가 왜 내던지듯이 

던졌는지 궁금해했다. 그는 서찰을 펼쳤다.

  글씨는 날아 갈 듯이 보였다. 어디다  내놔도 손색이 없는 명필 같았다. 

문제는 정자로 쓰지 않고 초서체로 썼다는데  있었다. 초서체는 글자를 흘

려 쓴 것 같아서 학문이 짧은 사람은  무슨 글자를 썼는지도 몰랐다. 그러

나 학문을 조금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서로의 학식을 높이 산다는 의미에서 

이런 편지를 주고받고는  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식이 높은 학자들의 

이야기였다. 취선개가 비록 글자를 읽을 수는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

까지나 정자로 쓴 글이었다. 그것도 겨우 천자문이나 뗀 수준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초서체를 들이 민 것은 그를 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취선

개는 그 종이를 구겨서 던지려다가 비싼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내려놓고 탁자를 내리쳤다. 

  "야, 이 빌어먹는 놈아! 너 나한테 감정 있어?"

  건곤신개는 의자를 틀어 앉아 몸을 돌렸다.  그걸 보자 목구멍까지 치밀

어 올랐던 욕이 쑤욱 내려갔다. 아무래도 상황이 매우 심각한 것 같았다. 

  취선개는 옆에 서 있는 젊은 걸개를  바라보았다. 신수개라는 얼굴도 멀

쩡하고 머리에 든 먹물도 많은 위인이었다. 그래서 삼결제자이면서도 장로

원의 일을 도맡아 보고 있었다. 취선개는 그런 신수개를 보았다. 신수개는 

건곤신개를 바라보았다. 취선개의 눈이 빛나며 쓰 하는 소리를 내었다. 이 

소리는 개방 내에서 위험신호로 통하는 소리였다.  신수개는 그 서찰을 다 

해석할 필요가 없이 요점만 찍어서 말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알려 주어야 할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청룡장에서 적천마군을 사로잡았답니다."

  "쓰, 그건 다 아는 사실 아니야?  그것 때문에 강호가 발칵 뒤집혔잖아? 

곧 강호의 동도들을 모아 놓고 척살하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잖아? 그놈 

척살한다고 우리더러 오래는 거야 뭐야?"

  "청룡장에서 삼혈맹과의 휴전을 조건으로 적천마군을 풀어 준답니다."

  "뭐.. 뭐야? 그런 개같은 녀석들이…… 겨우 잡은 마두를 풀어 줘? 내가 

당장 달려가서……"

  취선개는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눈앞에 있는 적천마군을 쳐

죽일 것 같이 손을 치켜들었다. 신수개는 그런 취선개를 보며 말을 했다. 

  "대신 삼혈맹에서 백리세가의 식솔들을 풀어 준답니다."

  취선개는 부라린 눈을 풀었고,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신수개를 바

라보았다. 그리고 신수개의 멱살을 잡아 쥐어흔들었다. 

  "그런걸 왜 빨리 말하지 않았어?"

  신수개는 얼굴이 벌개지며 캑캑거렸다. 

  "내려놔!"

  건곤신개의 나지막한 말에 취선개는 신수개를  내려 놓았다. 건곤신개의 

음성에서 평소에는 찾아 볼 수 없는 위엄이 담겨져 있었다. 

  '떠그랄!'

  취선개는 속으로 그렇게 말을 하고 건곤신개를  바라보았다. 건곤신개는 

몸을 돌려 취선개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청룡장에서 그날 우리더러 나와 달라는군. 백리세가의 이소저도 우리가 

보호하고 있고, 개방과 백리세가의 친분도  두터우니까 우리더러 백리세가

의 식솔들을 맡아 달라는 서신을 보내왔네."

  취선개는 건곤신개의 말에 힘없이 어깨를 떨구었다. 개방이 특별히 백리

세가와 친한 건 아니었다. 단지 개방의 장로인 자신이 백리세가와 오랜 친

분이 있었기 때문에 남들에게 그렇게 비추어  진 것이다. 백리세가의 식솔

들을 떠 맡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부담되는 일이었다. 우선 삼혈맹이나 

사해방과의 관계도 그러했다. 개방은 천하에 제자들을 두고 있었고 그것은 

사해방의 영역에도 마찬가지였다.  백리세가의 식솔들을  다 받아들인다면 

개방과 사해방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 될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이치

였고, 그것은 사해방 영역권에 있는 개방도들의  안위와 직결이 된 문제이

기도 했다. 취선개는 투덜거리며 말을 했다. 

  "제기랄, 나 혼자 하면 될 거 아니야?"

  "그런 차원이 아니야. 지금  백도의  인물들은 모두들  적천마군이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있네 이런 때에 우리가  적천마군을 풀어주는 일에 일익을 

담당한다고 해보세. 그 비난이 다 어디로 가겠나? 모르긴 몰라도 사방에서 

비난이 퍼부어질 걸세."

  취선개는 입에 발동이라도 걸린 듯이 침을 튀기며 말을 했다. 

  "빌어먹을! 제놈들이 잡은 것도 아닌데 왜 남의 밥상에 감놓아라 배놓아

라 그래? 그렇게 죽이고 싶으면 지가 나가서 잡아죽이지. 남이 잡은 걸 가

지고 왜들 그래 정말?"

  "그만큼 삼혈맹에 대한 공포와 원한이 큰 것이네. 그리고 청룡장이 적천

마군을 죽여서 줘서 삼혈맹과  철천지원수가 되어 서로  피를 흘리는 것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고……"

  건곤신개는 말끝을 흐렸다. 건곤신개는 백도  군웅들의 마음에는 후자가 

더 강렬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강호의  강대문파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힐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취선개

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방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

  건곤신개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매우 괴로운 표정이었다.

  "장로회의에서 방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네. 개방은 의와 협을 걷는 

방파라고, 큰 손해를 본다고 하더라도 의와 협을 잃지 않으면 개방은 무너

지지 않지만 아무리 작은 의와 협이라도 그것을 저버린다면 개방은 그날로 

문을 닫게 될 거라고 말이야."

  취선개는 반색을 하며 말을 했다. 

  "그래서?"

  "자네가 가 주어야 겠어."

  "어딘데?"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야. 우선 청룡장으로 가봐. 정예 일백을 뽑아 줄 

테니까."

  "일백이나?"

  "그럼 개방이 한번 행사를 벌이는데 그 정도도 안보내냐? 넘쳐나는게 사

람인데."

  

  단우백과 소천 상관평은 장강일대의 수운과 물살이 거의 완벽히 나와 있

는 지도를 보았다. 지도 위에는 작고  귀여운 깃발들이 꽂혀 있었다. 하나

는 푸른 색 기였고 하나는 붉은 색 기였다. 푸른 기는 청룡장의 세력을 뜻

하는 것이었고 붉은 기는 삼혈맹의 세력을  뜻하는 것이다. 상관평은 붉은 

깃발들을 가리켰다.

  "현재 삼혈맹과 사해방은 양주 북쪽 사십리 지점에  진을 친 채 더 이상 

미동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로서는 동해의 우회침투가 좌절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장강을 도하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저희 장의 거의 모든 전력이 장강에 투입이 된 상태입니다. 그들도 그것을 

아는지 더 이상의 무력 도발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의 협상 제안이 사실이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일단은 삼혈맹으로서도 장강을  도하하자면 대대적인 출혈

을 감수해야 하니까 꺼려 될 겁니다. 거기다가 낙양의 지단이 반혈맹에 의

해 붕괴되었다고 합니다. 뒤에 적을 두고 앞의 강적을 쳐서 공멸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으리라고 봅니다."

  단우백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때 문 쪽에서  한 명이 올라왔다. 작은 키

에 다부진 몸을 하고 있는 서왕이었다. 서왕은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단우

백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좋은 소식이 있는가?"

  "대사형 싸움은 이제 끝을 내도 되겠소이다."

  "그럼 저쪽에서 구체적인 협상안을 제시해왔습니까?"

  상관평의 말에 서왕은 고개를 끄떡였다. 

  "예. 협상은 양주에서 하고 그 대표로는 사해방주를 보내겠답니다."

  단우백은 미소를 지었다. 삼혈맹과의 싸움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모전을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단우

백의 미소를 보고 상관평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했다.

  "흠. 저들이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계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거

경방을 불러 들여 장강에 수비를 더욱 두텁게 해야 합니다. 또한 청룡단을 

양주로 보내서 저들의 도발에도 대비를 해야 하구요."

  단우백은 상관평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 쪽 협상 대표로는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소?"

  "저쪽에서 사해방주가 나온다면  이쪽에서는 청룡당주님이  가장 적당할 

것 같습니다."

  "청룡당주님라면 저도 찬성입니다. 예리성 당주님은 강호 경험도 풍구하

고 그 명성이 사해방주와도 뒤쳐지지 않으니 손색없는 분이십니다."

  소천의 말에 단우백은 고개를 끄떡였다. 상관평은  소천을 보고 말을 했

다. 

  "총호법께서도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아무래도 절정고수가 한 분 계시

는 것이 심리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소천이 포권을 취하며 대답을 하자 상관평은 섭선을 흔들었다. 

  "그리고 저도 갈까 합니다. 장주님과  무상께서는 이곳을 지키고 계십시

오. 이미 주위의 진세는 총호법께서 완벽히 하셨기 때문에 별 걱정은 하지 

않지만 저들이 이곳이 빈틈을 타서 자객들을 보낼까 염려가 되옵니다."

  "하하하. 문상께서 그리도 걱정을  해주시니 이 몸은  정말로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아무런 걱정을 마십시오. 소사제. 문상님을 잘 보호해 드리

게"

  "네. 사형."

  

  양주에서 제일 유명한 객점은 소평루였다. 평범한  이름의 이 객점은 이

름만 평범한 객점이었다. 그 독특한 맛과 다양한 음식 그리고 저렴한 가격

이 특징이었다. 그래서 늘 사람들이 붐볐다. 또한 후원에는 양주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별원이 따로 있었다. 이곳을 애용하려면  하루에 수백 냥의 은

자를 내야 했다. 하지만 그 대접은 황실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양주에서 돈푼께나 있는 사람들은 무슨 행사를 할 때 이곳 

소평루의 후원을 애용했다. 그런 날이면 소평루는 손님들에게 공짜로 소면

을 제공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겨우 소면을 제공하는 것 가지고 생색을 낸

다고 하지만 소평루의 소면은 소평루에서 가장 맛좋은 음식이었다. 그래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음식이기도 했다.

  오늘은 소평루에서 큰 행사가 있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소

평루의 주위에 있는 객점들과 점포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그 이유는 소평

루 앞에 펄럭거리고 있는 두 개의 깃발 때문이다. 둘 중 하나만 걸려 있었

다면 약간 담이 있는  사람들은 왔겠지만 다른  하나의 깃발은 강호에서도 

행세 깨나 한다는 양주의 명숙들도 그  깃발이 사라질 때까지 집에 쳐박혀

서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할 정도로 위력이 있었다. 그 깃발은 다름 아닌 삼

혈기였기 때문이다. 아마 삼혈기가 출현하고 그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들 무사한 곳은 이 소평루가 처음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은 예

외적으로 소평루 삼층에 차려져 있었다.

  소평루의 삼층은 사면이 확 터져 있어 주위가 일목요연히 들어오는 곳이

다. 청룡장에서 이곳을 회담 장소로 잡은 것도 그런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

다. 길목 요소요소에는 청룡장의 무사들이 잠복해 있었다. 말이 회담이요, 

협상이지 일이 수틀리게 되면 이곳은 혈전장으로  화할 것이 분명했다. 그

래서 순식간에 조직적으로 병력을 움직이기 위해서 이곳으로 잡은 것이다. 

  삼층에는 탁자가 모서리가 없는 사각 모양을 했다. 탁자 위에는 온갖 미

주가효들이 즐비하게 놓여졌다.  남면한 자리와 상대가  되는 자리는 각기 

큰 태사의가 놓여져 있었다.

  사각으로 이루어진 자리의 동쪽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그 둘은 삼혈기

를 들고 온 사해방주 악일비와 북해단주  이극상이었다. 그들 앞에는 이번

에 청룡장의 협상 대표로 나온 청룡당주 예리성이었다. 예리성은 악일비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럼 협상대표가 방주님이 아니시란 말이오?"

  "원래는 내가 협상을 맡기로 했지만 나야 사해방을 대표 할 뿐이 아니겠

소? 이번 협상은 우리 사해방과 청룡장의  협상이 아닌 삼혈맹과 청룡장의 

협상이 아니겠소? 먼저 이런 입장을 전했어야  하는 건데 시간이 촉박하여 

전하지 못하였소이다. 이 악모가 사죄를 표하오."

  예리성은 악일비가 그렇게  까지 말을  하자 더 이상  추궁하지 못했다.   

그러나 저들의 협상대표가 바뀐 것은 이쪽에서 볼 때 큰 일이었다. 모두들 

협상 대표로 사해방주인 악일비가 나온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걸

맞는 만반의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헌데  사해방주 악일비는 자신이 협상

대표가 아니라 먼저  온 선발대라는 것이다.  악일비가 협상대표가 아니라 

선발 실무진으로 왔다면 협상대표는 그보다 격이 높은 사람일 것이 분명했

다.

  예리성은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번 일은 자신이 결정

을 할 문제가 아니었다. 

  

  상관평은 예리성의 말을 듣고 섭선으로 머리를 두드렸다. 

  "한방 먹었군."

  상관평은 뒷짐을 진  채 방안을 서성였다.  협상당사자를 모른다는 것은 

이쪽으로서는 큰 손해였다. 협상대표로 나오는 자의 성격, 무공정도, 영향

력에 따라서 그 대응방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렇게 큰 건의 협

상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정보였다. 그런 정보를  삼혈맹은 단순한 꾀로 차

단을 하는 것이다. 상관평은 팔짱을 꼈다.  평소 이런 경우라면 협상을 파

기하고 재 협상 준비에 들어가는 것이 타당했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파기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협상파기를 한다면 그것은 곧 대혈전의 시

작을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삼혈맹도  그것을  노리고 이렇게 

나오는 것이 분명했다. 

  '도저히 거절 할 수 없는 상태를 만들고 협상에 임한다. 쉽지 않겠어!'

  상관평은 뒷짐을 지고 잠시 오락가락 하다가 예리성을 보았다. 

  "총호법님을 모셔오게."

  상관평은 지금 협상 대표로  나설 만한 인물은  소천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여기 양주에는 청룡당주보다 높은  사람은 둘이 이지만 자신

이 전면에 나서서는 안되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무공으로는 사해방주도 벅

찰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강호는 귀계독계가 난무하지만 결국에는 무공

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만약 협상이  결렬되고 여기서 싸움이 벌어진다

면 도망쳐 나오기도 힘들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룡당주보다 높고 지금 

양주에 있는 청룡장의 고수 중에 가장  강한 소천이 얼떨결에 협상 대표를 

맞게 된 것이다.

  소천의 손에 자신이 해야할 협상 내용들이  빽빽이 적혀 있는 서류가 들

려졌다. 뭐가 이렇게 많은지  뜻도 잘 모를  구절들이 수두룩했다. 소천은 

서류들을 한번 보고 후원에서 상관평에게서 협상의 태도를 교육받았다. 

  "무엇보다도 이쪽의 심리를  읽히면 안됩니다. 그리고  꿀려서도 안되고 

오만해서도 안됩니다."

  소천은 상관평의 모순되는 듯한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떻게 하고 있으라는 겁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있으십시오. 그게 승부의 관건입니다. 이 협상도 무공

의 겨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먼저  흥분하는 쪽이 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꼭 받아야 할 것은 받고 내주어야 할 것은 최소화하는 것이 협상의 

중요성입니다. 정 안되시거든 협상을 미루십시오.  그들의 상황을 봐서 다

시 계략을 짜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허면 저들에서는 누가 나올까요?"

  "아무래도 사대마군이 나올 것 같습니다."

  상관평의 말에 소천은 고개를 끄떡였다. 한  무사가 급히 들어와서 보고

를 했다. 

  "전방 정찰조로부터의 긴급 서신입니다."

  상관평은 고개를 갸웃하며 몇 장의 서찰을  받았다. 상관평은 그것을 펼

쳐 읽고는 연거푸 서찰들을 뒤집었다. 그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져갔고 그

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자 소천은 놀랬다. 

  하늘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 상관평이라고 생각을 했

다. 조조의 팔십만 대군을 세 치 혀로 날려버린 제갈량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은 인물이 상관평이었다. 그런 그가  식은땀을 흘린다는 것은 일

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뜻이었다. 

  "문상.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각 정찰조가 보내온 정보들입니다. 사해방이  양주 외각의 수로를 점령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동혈랑대가 양주 벌판에 전진 배치되어 있고, 삼

혈맹도 양주 외각에서 그 모습들을 모이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양주는 완

전히 포위된 상태입니다."  

  소천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럼 협상은 없다는 것입니까?"

  상관평은 서찰들을 꼭 쥐었다. 그의 입술은  굳게 닫혀 졌다. 소천은 상

관평이 생각을 하게 잠시 놔두었다. 침묵은 둘 사이를 넘어서 저 하늘까지 

차고 오른 것 같았다. 상관평의 입이 열렸다. 

  "우선 협상을 해오긴 해올 겁니다. 하지만 어떤 트집을 잡아서라도 사단

을 일으킬 생각입니다. 그들이 몇 명이나 이끌고  오는지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상관평은 무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서 청룡당주님과 청룡단주를 불러와라."

  무사는 읍을 하고 물러났다. 잠시 뒤에  청룡당주 예리성과 청룡단주 동

방후가 왔다. 둘은 가볍게 예를 취했다. 상관평은 둘을 보고 정색을 했다. 

  "지금은 장주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제가  장주님을 대신해 청룡령을 

내리겠습니다."

  그 말에 둘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손을 머리위로 모아 올렸다. 

  "청룡령을 받습니다."

  "청룡당과 청룡단에 비상갑호 무장령을 내린다."

  "존명."

  둘은 군말 없이 명령을 받고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나자 소천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했다.  

  "꼭 그래야 합니까?"

  비상갑호 무장은 한마디로 동귀어진을 각오한  무장이었다. 소천은 상관

평을 바라보았다. 상관평의 안색은 어두워져 있었다. 

  "어쩌면 제가 허를 찔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삼혈맹은 양주에서 승부

를 띄우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천마군의 목숨을 담보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물러서기보다는 차라리 그를  희생시켜서 저희들을 꺾으려

는 계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첫 목표가 있다면……"

  상관평은 소천을 바라보았다.  소천은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들이 첫 목표는 물론 협상을 하러  나온 청룡장의 수뇌부들일 것이 분명

했다. 적을 잡는데는 머리부터 잡아야 그  희생이 줄어든다는 것은 삼척동

자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삼혈맹의 첫 공격목표는 소천인 것이다. 

  "소평루에 설치된 일차 경계를 푸십시오.  어차피 싸움이 벌어진다면 저 

혼자 빠져 나오는 것이 편합니다."

  "알겠습니다. 저쪽 수뇌가 움직이는 즉시 공격하겠습니다."

   그때 한 무사가 들어와 보고했다. 

  "삼혈맹도들이 양주성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 수는 무려 일백이라

고 합니다."

  "일백?"

  상관평은 눈살을 찌푸렸다. 일백이라면 그의  예상이 맞은 것이다. 삼혈

맹은 양주에서 끝장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탐된 적들보다도 

더 많은 적들이 어디선가 숨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삼혈맹의 정예들이 총

출동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청룡장이 양주에 배치한 인원이 사백이었다. 

적의 유인술에 말리지 않기 위해서 병력을  장강에 분산해놓은 것이다. 헌

데 적은 그 허를  치고 들어온 것이다. 순간  상관평은 머리가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상관평은 벌떡 일어났다. 

  "총호법! 시간을 최대한 끄십시오. 그리고……"

  상관평은 무사를 보며 말을 했다. 

  "입이 무거운 자로 오십을 엄선해서 지단에  집결 시켜라 지금 즉시. 그

리고 나도 지단으로 가겠다. 모든 작전지휘는 내가 직접 하겠다."

  "존명."

  무사가 물러나자 상관평은 소천에게 읍을  하고 호위무사들과 함께 몸을 

피했다. 그는 청룡장의 병력을 지휘해서 앞으로  일어날 돌발사태에  대비

를 해야 했다. 상관평은 금방이라도 일대 혈전이 벌어질 것처럼 느껴졌다. 

적들도 호락호락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느꼈

다. 그 대가는 아마도 소천의 죽음이  될 가능성이 컸다. 저쪽에서 협상당

사자로 보내겠다던 사해방주가 선발로 왔을 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 것인데 

성하지맹(成下之盟. 일종의 항복으로 성을 포위당해서  곧 함락을 당할 성

의 성주가 성문을 나와서 적의 장수와 맺는 평화조약. 이 성하지맹은 성이 

함락당하지 않고 평화협정을 맺어 전쟁을  끝낸다는 것뿐이지 항복이나 마

찬가지였다.)을 맺는다는 기쁨으로 잠시 정신이 팔렸던 것이다.  

  '협상을 미끼로 유인해서 공격을 한다.'

  상관평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쪽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적

의 타격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상관평은 그  방법을 물론 알고 있었다. 하

지만 그것은 소평루 안에 있는 동료들의 목숨도 함께 날려 버릴 것이다. 

  

  소천은 주먹을 쥐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어쩌면 내일 뜨는 해를 볼 수 없을 지도 모르겠구나!'

  소천은 땅을 보며 걸었다. 그리고 소평루의 정문으로 걸어가려다가 삼층

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주인은 바로 자신이었다. 주인은 주인답게 행

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적들을 문 앞에 까지 배웅을 나갈 필요는 없는 것

이다. 

  '처음부터 기죽을 필요는 없어.'

  소천은 스스로 그렇게 다짐을 했다. 그가 이층에 올랐을 때 두두두 하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붉은 물결이 몰아쳐 왔다. 대로를 가득 메우고 몰아쳐 

오는 붉은 물길은 가히 일대 장관이었다. 백여 필의 전마에는 붉은 혈의를 

입고 있는 삼혈맹도가 보였다. 그들은 장도를 차고 네 대의 마차를 호위하

고 있었다. 소천은 이층 난간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삼혈맹도들의 움

직임은 절도가 있었다. 

  '녹녹치 않겠구나!'

  소천은 주먹을 쥐었다. 기마대가 소평루의 정문  앞에 멈추어 서고 마차

들도 그 앞에 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소천

은 그들을 보고 저으기 놀라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백리세가의 가솔

들이었다. 안색이 창백하고 힘이 없어 보이는  중년인은 분명 전에 보았던 

백리인군이었다. 목발을 집고 마차 안에서 나오는 청년은 백리웅풍이었다. 

그의 왼쪽 다리가 허전해 보였다. 그 옆에는 병색이 완연한 백리영풍이 내

려섰다. 두 소녀도 내려섰다. 그들은  백리세가의 대소저와 삼소저인 소소

와 소취일 것이다. 백의를  입은 십여 명의  노인들과 무사들도 내려섰다. 

그들의 몰골은 모두 초췌해 있었지만 험한  꼴은 당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천의 시선은 마지막 마차에 가서 멈추었다.  장도를 든 중년인이 마차의 

문을 열고 공손히 읍을 했다.

  소천의 눈이 커졌다. 장도를 든 중년인의  기도가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

다. 소천은 단지 그의 걸음걸이 하나만으로도  그가 고수라고 불릴만한 자

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고수가 저렇게 공손히 문을  연다면 저 마차 

안에는 정말로 거물이 있는 것이다. 그때  이층의 계단을 통해서 사해방주

와 북해단주 이극상이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하나의 

손이 먼저 빠져 나왔다. 손은 피에 담았다 뺀  듯이 붉었다. 소천은 그 손

을 보자 가슴이 쿵쾅 뛰는 것을  느꼈다. 소천은 창틀을 움켜쥐었다. 그가 

쥐고 있던 창틀이 부서져 나가고 있었지만 소천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소천은 그 손의 임자를 알고 있었다. 아니 안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한번

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정말이지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있었다. 

  그의 발이 나왔다. 검은 색 가죽신과  붉은 옷자락이 먼저 보였다. 그의 

머리가 나왔다. 소천은 그의 머리카락을 한올 한올 볼 수 있었다. 그의 머

리카락은 피보다 붉은 혈색이었다. 스윽, 그의 고개가 들어 올려지고 소천

과 눈이 마주쳤다.

  소천은 그의 눈에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피보다 붉은 혈안을 가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혈마였다. 소천의 등줄기에서 땀이 베어 나오

기 시작했다. 소천은 그의 눈에서 눈을  떼고 싶었다. 소천은 이를 악물었

다. 소천은 숨까지 가빠 오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마도제일인이었다. 무

림인들은 모두 그가 정사를 통틀어 가장 강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

지만 백도인들은 그를 무림제일고수라고 부르지 않고 마도제일인이라고 불

렀다. 그렇게 해서라도 무림제일고수가 마도인이라는  수치를 떨쳐 버리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순간 소천은 혈마의 실체를 알 것 같았다. 

그가 왜 마도 제일고수로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소천은 그때 사부의 생

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사부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혈마를 능히 꺾을 수 있었을 텐데.'

  소천이 알고 있는 사부는 혈마처럼 강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약

해 보였다. 소천의 사부는 강함이 드러나지  않았다. 차밭을 메고 있는 것

을 보노라면 늙은 농부 같았고, 긁을 일고 있으면 학자 같았다. 그리고 무

엇보다도 검을 들고 있어도 전혀 검을 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소천은 그

게 신기했지만 왜 그렇게  되는지는 알지 못했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자

도 장검을 들고 있으면 상대는  그가 검을 들고 있다고  의식을 하게 되는 

것이 정상이었다. 헌데 소천의 사부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소천은 사부

가 검을 들고 자신을 겨누고 있어도, 사부가  검을 들고 있다는 생각을 종

종 잃어버리게 된 기억들을 떠올렸다. 소천은  사부의 그런 모습이 환상처

럼 눈앞에 투영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소천의 가슴은  점점 평온해 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소천은 혈마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소천의 얼굴

이 점점 본래의 색을  찾아가자 혈마는 그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 그것은 

미미한 웃음처럼 느껴졌다. 

  '조소인가?'

  소천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

니었다. 소천은 삼층에 올라와서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 지금은 거리를 

둔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 거리가 몇 장밖에  안돼서 혈마나 자신 같은 고

수들에게는 바로 옆에 서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종

이 한 장 차이를 두고 싶었다.

  삼층까지 올라온 이는 단 둘이었다. 혈마와 도를 든 적혈마군이었다. 그 

둘을 따라 백리세가의 식솔들이 올라왔다.  백리세가의 인물들은 적혈마군

의 손짓에 따라 한쪽  탁자에 주르륵 앉았다. 소천은  일부러 그들을 보지 

않았다. 아니 한눈을 팔 사이가 없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자는 혈마였다. 

소천은 혈마에게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앉으시지요."

  혈마는 자리에 앉기 전에 백리세가의 식솔들이 앉은 앞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원래는 청룡당주와 청룡단주 양주지단주가 동석할 

자리였지만 소천은 그들을 모두 내보냈다. 아무래도 적은 일전을 각오하고 

온 것 같았다. 그렇다면 병력을 지휘할 지휘관들이 이곳에 몰려 있다는 것

은 좋지 않은 것이다. 대신 죽을 각오로 올라온 두 명의 무사만 소천의 만

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등뒤에 섰다. 그들의 손은 장검에 가 있어 언제라도 

뽑힐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천이나 그걸  보고 있는 혈마나 그 둘

이 이 안에 있는 삼인의 고수에게는 별 효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적천은?"

  혈마는 소천을 보지 않고 적혈마군을 보고 그렇게 말을 했다. 혈마의 이

러한 행동은 소천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소천은 분노하지 

않았다. 적혈마군은 성큼 한발 나섰다. 

  "대군께서는 어디에 계시오?"

  "우린 아직 협상을 시작하지 않았소."

  적혈마군은 냉소를 하였다. 소천은 힐끗  백리세가의 인물들을 바라보았

다. 그들은 모두 삶을 체념한 듯했다. 몇  명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소

천은 눈을 돌려서  적혈마군을 보았다. 적혈마군의  입에서 냉막한 어조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인질을 데려왔으니 그쪽도 인질을 내놓기 바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아직 싸움 중이오.  협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소."

  "이들이 모두 죽어도 좋다는 말이냐? 이들이 여기서 죽으면 결국에는 청

룡장이 죽이는 것이 될 테니…… 하하하. 정말 볼만하겠구나!"

  "누가 할 소리? 이분들은 아직 귀측의  인질들이오. 그리고 여기서 그분

들에게 손을 대는 순간 전쟁은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오."

  소천은 마음이 점점 차분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사형 마운룡이 다탁

을 치우며 보여주던 글귀가 생각이 났다. 사부가 남겨준 일곱 글자였다. 

  '생사일여 여여 화(生死一如 如如 華)라!'

  소천은 생사일여라는 말이  생각이 나자 마음은  완전한 평정을 찾았다. 

혈마는 소천이 평정을 찾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소천의 눈

은 지금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눈앞에서  태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마른

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지가 않았다. 

  '저토록 어린 나이에 저런 평상심을  얻다니 대단하구나! 강남에 청룡노

야라는 고수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저런 고수를 키워낼   정도였다

니…… 한번 찾아가서 겨루어 보아야겠다.'

  혈마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혈마는 아직까지  소천을 적수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혈마는 소천의 사부인 청룡노야에 생각이 맞추졌다. 그

라면 지난 수십 년간  느껴왔던 갈증을 풀어 줄지  모르는 일이었다. 일대 

일로 자신과 겨룰만한 고수.  그것이 혈마가 찾아  헤맨 화두였다. 혈마는 

나직이 말을 하였다. 

  "적천을 데려와라. 그럼 이들을 곱게 넘겨주겠다. 그리고 당분간 청룡장

을 치지 않겠다."

  그 말에 놀라는 것은 소천이 아니라  적혈마군이었다. 이곳 양주에서 결

단을 내고 청룡장의 본거지로 쳐들어가기로 모든  계획이 짜져 있었다. 그

런데 혈마는 청룡장을 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혈마의 한마디는 태산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가 치지  않겠다면 정말로 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당분간이라는 조건을 달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작 놀란 것은 

소천의 대답이었다. 소천은 무심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는 아직 협상을 시작하지 않았소."

  처음에 했던 그 말이 토시 하나 틀리지 않았다. 혈마는 두 눈을 빛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눈빛의 광채만으로도 심장이  멈추어 버릴 것 같았다. 

눈빛의 광채도 눈동자처럼 붉은 혈광이었다. 혈마의 입에서 느긋한 목소리

가 흘러 나왔다. 

  "거절하면 너는 죽는다."

  그의 말에는 아무런 살기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혈마 같은 사람

의 이런 한마디는 천명이 죽이겠다고 달려들며 소리치는 것보다 더 위압적

이었고 힘을 싣고 있었다. 아직까지 혈마가  죽이려고 마음먹은 사람 중에 

죽이지 못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사일여.'

  소천은 이 말을 되뇌었다. 그러자 뛰는 가슴이 금새 가라앉았다. 

  '어차피 생과 사는 칼날의 한 끗 차이가 아니던가!'

  소천은 차가운 어조로 입을 얼었다. 

  "나는 죽을 지 모르겠소. 하지만 그 대가로 여기 온 삼혈맹도 중에 오직 

혈마 당신을 제외한 전 인원은 뼈를 묻어야 할 것이오."

  적혈마군은 소천의 말에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혈마의 앞에 서 있는 적

혈마군이 느끼는 살기는 자신들이 죽는다는 소천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었

다. 수십년동안 강호를 누벼 오면서 죽음은 늘 그의 옆에 있었다. 그가 한

기를 느끼는 것은 소천이  혈마의 면전에서 대놓고  혈마라고 부른데 있었

다. 당금 천하에 그 누구도 혈마를  대놓고 불러대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게다가 혈마 당신이라니……!

  어쩌면 오늘 양주는 피에 잠기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적혈마군은 마

도를 걷지만 피에 미친  살인귀는 아니었다. 그래서 필요  없이 많은 피를 

흘리는 것은 꺼려했다. 그러나 소천은 화약고에 불을 당기고 있는 것이다. 

혈마는 고요한 눈으로 소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내 십초를 받아낸다면 자네 조건을 수락하겠다."

  소천은 간단히 고개를 저었다. 

  "싫소."

  훗 하며 혈마는 실소를 내었다.

  "알고 보았더니 자네는 겁쟁이였군."

  소천은 피식 웃었다. 

  "뭐라고 해도 좋소이다. 지금 나는 당신과  싸우지 않고 도망을 갈 것이

오. 왠지 아시오?"

  혈마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여기가 높다고 생각해 보시지는 않았소? 그리고 우리가 왜 여기를 회담

장소로 잡았는지 의아해 본적은 없소이까?"

  소천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혈마가 공격해 온다면 큰 손해를 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소천은 고개를 돌렸다. 혈마는 공격하지 않고 같이 

고개를 돌렸다. 서로는 마치 친한  친구처럼 사이좋게 보였다. 적혈마군의 

얼굴도 옆으로 돌려졌다. 백리세가의 인물 두 명도 고개를 돌렸다. 소천은 

그것을 보며 눈을 빛냈다. 적혈마군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몇 군데 골목

에 각기 십여 명의 혈의인들이 검은 물체로 자신들을 겨누고 있었다. 적혈

마군은 금새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전에 한번  호되게 당한 바 

있는 화포였다. 

  "저걸로는 나를 어쩌지 못한다."

  혈마는 소천을 보며 말을 했다. 소천도 방긋 웃었다. 

  "물론이오. 하지만 당신 부하들도 다 피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저 

화포를 삼혈맹에 사용했다는 완벽한 증거와 그것을 증인해 줄 인물들도 있

소이다. 하하하. 성내에서 저걸 쓰는 무림 집단이라 재미있지 않겠소이까? 

하하하 하하하."

  만약 저것을 양주성내에서 쓰게 된다면 그것은 관군의 출동으로 이어 지

게 될 것은 뻔한 이치였다. 아무리 무림과 관부가 서로 묵시적인 불간섭을 

인정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림인들끼리 싸울 때의 이

야기였다. 성내에서 화포가 터지는 사건은 역모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 파

장은 삼혈맹은 물론 청룡장까지 크게 미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청룡장

은 그것을 각오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의미하

는 배수진이기도 했다. 이것이 상관평이 말한 비상갑호 무장령이었던 것이

다. 하지만 소천의 웃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혈마의 한쪽 손이 의식인지 무의식인지 그의 붉은 머리에 닿았다. 그 순

간 백리세가의 인물들이 있는 곳에서 두  명이 퉁겨져 오르며 소천을 공격

해 들어갔다. 그것은 전광석화였다. 한 명은  두 자루 단창을 휘두르고 있

었고 다른 한 명은 극으로 소천을 후려쳐갔다. 단창을 휘두르는 자는 오대

마군 중 한 명인 지옥마군이었고 극을 쥐고 있는 자는 악인마군이었다. 둘

의 병기가 소천의 사혈을 노리며 밀려왔다. 

  소천은 화포를 보기 위해서 그 둘이 고개를 돌렸을 때 의심을 품고 경계

를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은 삶을 체념한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 둘은 호기심을 느끼고 고개를 돌

린 것이다. 그것은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소천은 대갈일성을 지르며 탁자를 뒤집어엎어서  이들에게 내던졌다. 와

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접시들이 날아가고  탁자보가 허공을 가렸다. 피피

핑. 두 개의 단창과 극이 탁자보를 베어갔다. 그  순간 그 뒤에 있던 소천

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피피핑. 소천의  검은 수십 개로 분산이 되면서 

탁자보를 꿰뚫었다. 따다당. 단창과 극이 소천의 검과 부딪쳤다.

  소천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고 상대의 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적천마군과의 싸움에서는 없던  능력이었다. 생과 사에  마음을 두지 않자 

적의 공격과 진퇴가 명확히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의 허점도 보였

다. 하지만 그 허점에 검을 집어넣을  수는 없었다. 적은 둘이었고 허점을 

적에게 내줄 만큼 약한 하수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삼혈맹의 오대마군 중 

둘이었다. 지옥마군의 단창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소천을 공격해왔다. 두 

개의 단창은 연달아서 소천을 찔렀다. 악인마군은  극을 들고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소천의 틈을 노렸다. 소천은 장검으로 두 개의 단창을 막으며 악

인마군에게도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다 소천은  쓰러진 탁자를 밟고 올라

서면서 수세를 공세로 전환했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는 것을 깨달은 것

이다. 소천의 검이 무수한 환영을 그리며 지옥마군을 공격해가자 지옥마군

은 눈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단창을 휘둘러서 막았다.

  지옥마군이 물러서자 악인마군이  괴성을 지르며 소천을  공격해 들어왔

다. 악인마군의 공세에 소천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가일층 증가했다. 그러

나 보이는 창보다 보이지 않는 화살이 상대하기 더 힘든 법이었다. 악인마

군이 공격에 가담하여 매서웠지만 그냥 뒤에서 서서 허점을 노리는 것보다

는 심적 부담이 적었다. 소천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다. 악인마군이 공

격권 안에 들어서자 소천은 마음편이 둘을 상대  할 수 있었다. 탁자 사이

의 공간은 이들의 병장기로  만든 환영들이 가득 찼다.  멀리서 보면 마치 

인형극의 인형이 무대 위에서 한바탕 뛰고,  날으며 싸우는 것 같았다. 그

러나 당사자들은 일초 일초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또한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편하지 못한 것은 불문가지였다.  상관평은 손에 땀을 쥐

고 소평루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빨리 나와! 빨리 나오란 말이야!'

  상관평은 소천이 나올 때까지 화포를 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상

황이 더 악화가 된다면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는 것이다. 수하들을 풀어서 

알아본 양주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성의 외곽은  완전히 포위가 되어 있

었다. 아무래도 적은 전력을 다 기울인 것 같았다. 이런 때에 승리를 하기

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한가지 희망이 있다면 적의 수뇌

부를 잡는 것이다. 그리고 적의 수뇌부는 지금  자신이 만든 그물 안에 들

어와 있었다. 이제 화포에 불을 당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천

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순식간에 수십 초가 흘렀다. 지옥마군과 악인마군은 초수가 흐를수록 초

조해졌다. 천하의 오대마군 중 둘이 협공을  하고 있는데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혈마님을 앞에 두고서 

말이다. 원래 이 둘은 협상에 나오는  청룡장의 수뇌부들을 기습 제압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원래는 청룡장의 수뇌부  다수를 공격하기 위해서 둘

이 위장해서 들어온 것이다. 둘은 소천을  공격하는데는 한 명으로도 충분

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둘이 동시에 소천에게  달려든 것은 소천을 간단

히 제압해서 이곳에서 빠져나가서 적천마군과  교환하기 위함이었다. 결코 

이렇게 오랫동안 드잡이질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러나 둘의 합공에

도 소천이 쉽게 패할 것 같지는 않았다.

  돌연 소천의 검세가 강해지면서 둘을 몰아쳐 갔다. 지옥마군과 악인마군

은 그 기세에 세발짝 정도 물러났다. 그러자  소천은 뒤로 몸을 날려서 자

신이 앉았던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가르침을 주어서 고맙소이다."

  지옥마군과 악인마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새까만  후배를 두고 둘이서 

협공을 했는데도 승기를 잡지 못했다는 것  때문이다. 둘은 다시 달려들려

고 했다. 이번에는 죽는 한이 있어도 승부를 가를 생각이었다.  

  "그만!"

  나직한 소리가 그들의 발을 멈추었다. 지옥마군과 악인마군은 신속히 물

러나서 혈마의 뒤에 시립했다. 

  소천은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싱글벙글 웃으며 혈마를  보며 말을 했

다. 

  "협상을 시작할까요?"

  혈마는 소천을 바라보았다. 혈마는 소천이 보여준 실력에서 자신의 판단

에 착오가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청룡장은 소천의 말대

로 여기 온 삼혈맹의 고수 중에 자신을 제외한 전원을 죽일 능력이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여기 온 고수들이 모두 죽는다면 삼혈맹은 그 원기를 회복

하기 위해서는 십여 년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전에 백도의 공격으로 무너

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백도라는 강적을 놔두고 청룡장을 치는데 전력의 

사 할 정도를 희생시킬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소천과 협상을 해

야 했다. 자신들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상황을 조성해서 물러서야 했다. 그

런 점에서 혈마는 판단이  빨랐다. 그런 그의 판단이  오늘날 이만큼 까지 

삼혈맹을 키웠던 것이다. 

  "청룡장을 과소평가 한 것을 인정한다. 적혈."

  "옛."

  "수하들을 물려라."

  "존명."

  적혈은 읍을 하고 물러났다.  혈마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붉은 눈으로 

소천을 보았다. 

  "언제고 자네 사부님과 한번 겨루어 보고 싶네.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

겠는가?"

  "사부님께서는 오 년 동안 소식이 없으시오. 아마 신공을 연마하시는 것 

같은데 아직 돌아가시지는 않으셨을 테니  사부님이 돌아오는 대로 삼맹주

님의 의견을 전달하도록 하겠소이다."

  혈마는 피식 웃었다.

  '그런 중요한 정보를 아무렇게나 흘리다니 아직은 어린애군.'

  군소 문파는 물론 대 문파에서 일류고수  한 명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

났다. 청룡장의 최고고수라고 할 수 있는 청룡노야가  오 년 동안 장을 비

우고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 하는 건  큰 실수 였다. 삼혈맹이 청룡

노야가 있는 청룡장을 칠 때와 없는 청룡장을 칠 때 기하는 신중함이 다르

다는 것을 소천은 잠깐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없어도 있다고 큰소리치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쯤 의심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공격이 늦어지

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청룡장은 시간을 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

천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몰랐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소천

은 아직 강호 경험이 부족한 것이다.

  소천의 협상 요구를 다른  주제로 잠시 바꾸어  주도권을 쥐려는 혈마의 

계책은 성공을 한 것이다. 또한 현 청룡장의 상황과 소천의 계략을 꾸미는 

수준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혈마 능력과 소천의  경험 부족이 만들어낸 

상황이었다. 이제 상황은 소천이 주도하는 것에서 혈마가 주도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소천은 어렵게 얻은 협상 주도권을 혈마의 말 한마디에 넘겨

준 꼴이 되고 말았다. 혈마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했다. 

  "자네는 무림인으로는 어울리지 않아. 어디  조용한데 가서 글이나 읽으

며 살게나."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군요."

  "자네 스스로 허락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소천은 움찔 놀랐다. 마운룡 이사형이 자신에게  해준 말을 혈마에게 다

시 듣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때는 아무말도 못 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대

답을 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천은 고개를 끄떡였다. 혈마는 몸을 돌렸다. 

  "이번 싸움은 이 정도로 하지. 청룡장을 인정해 주겠다. 적천은 바로 보

내라."

  지옥마군은 소천을 보며 분이 풀리지 않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근처에 우리 고수들이 있으니까. 다른 염려는 말고 그냥 보내라. 청

룡장 무석분타의 정문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 책임

이니까 안심하고 보내라."

  소천도 더 이상 조건을 달수가 없었다. 확전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위

로를 해야 했다. 여기서 싸움을 벌이고 화포를 쓴다는 것은 정말이지 최악

의 상황에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혈마는 이미 소평루를 나선 

뒤였다. 소천은 삼층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혈마가  마차에 타는 것을 

바라보았다. 혈마는 소천을 보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소천은 그의 미소에서 이번 협상은 자신이 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천은 자신이 아무런 요구조건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메어

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을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

다. 그리고 혈마의 미소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혈마는 처음부터 확전할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어쨌든 

그들은 이번 협상에서 큰 이득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랬다. 혈마는 이번에 확전을  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단지 이번의 

무력시위로 혈마는 두 가지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청룡장의 사기를 떨어

뜨림과 동시에 삼혈맹도들에게는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다. 이 계획

은 반만 성공했다. 삼혈맹도들의 사기는 어느  정도 올렸지만 청룡장의 사

기를 떨어뜨리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동해의  패전으로 삼혈맹도들에게는 

청룡장에 대한 공포가 일기 시작했었다. 혈마는  그것을 알고 이번 무력시

위로 이길 수 있지만  사정상 잠시 접어주는 것으로  인식을 시킨 것이다. 

또한 협상에서도 최소한의 것만 내주고 최대한의 이익을 챙긴 것이다.

  청룡장이 요구하려고 했던 불가침 조약이나  사해방이 가지고 있는 동해

의 염전은 삼혈맹 쪽에서  어느 정도 양보를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력시위로 청룡장 쪽에서 협상 안건을 꺼내 보지도 못하게 한 것이다. 그

냥 서로의 인질을 교환하고 혈마로부터  청룡장을 인정하겠다는 그 단순한 

한마디만 해준 것이 다였다. 삼혈맹으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최선

의 결과를 끌어낸 것이다. 

  멀어져가는 삼혈맹의 무리들을 보며 소천은 얼굴을  점점 굳혔다. 저 멀

리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 상관평이나 청룡장의 무사들은 보이지 않았

다. 단지 점점 작아지는  삼혈맹의 그림자가 그에게는  커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소천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청룡장이 아닌 문파였다면 

협상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을 소천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올 때처럼 질풍같이 사라졌다. 그들이  양주성을 벗어 나자 상관

평은 골목마다 배치되어 있던 무사들을 즉각  재배치했다. 청룡장의 전 무

사들은 양주 지단으로 달려갔다. 저들이 물러간  것은 공격을 준비하기 위

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상관평은  우선 화포부터 옮겼다. 거리에서 공

공연히 화포를 들고 다닐 수 없는 것은 삼혈맹이나 청룡장이나 마찬가지였

다. 다행히 아무도 나와보는 이들이 없어서  나무상자로 가린 화포는 들키

지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화포 운반조는  혈의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나

중에라도 잘못되면 삼혈맹에 뒤집어씌우면 되는 것이다.

  소천은 고개를 돌려서 백리세가의 인물들을 바라보았다. 두 여인은 얼굴

을 가리고 흐느꼈고, 백리인군은 멍하니  천정만 보았다. 백리영풍은 파리

한 안색에 기침을 해대었다. 백리웅풍만 목발을  집고 일어나서 포권을 취

했다. 그의 발목은 전에 삼혈맹도들에 의해 잘려진 것이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별 말씀을……"

  소천은 마주 포권을 취했다. 노인들과 젊은  무사들 몇몇도 일어서서 예

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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