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동해 대해전
하늘에 어슴푸레한 기운이 걷히면서 양주성에는 새벽 안개가 자욱히 피
어오르기 시작했다. 양주에 안개가 많은 이유는 주위에 강과 호수가 많기
때문이다. 장강이 양주의 남쪽을 지나갔고 운하고 동쪽을 거기다가 성안
곳곳까지 운하가 놓여지고 주위에는 크고 작은 호수들이 수십여 개가 되었
다.
양주성 밖 교외에 한 명이 안개에 소매를 적시며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
다. 그는 주위를 한번 더 둘러보았다. 약간 통통한 얼굴이 밉지 않은 사해
방의 동해단주인 왕정이었다. 그는 양주성 내외와 그 근처는 눈을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주위를 기울여야만 했다. 왜냐하면
오늘은 왕정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뒤에는 그를 따라
서 움직이는 무수한 수하들이 있었다.
수풀을 헤치고 왕정이 멈추어 선 곳은 작은 운하 앞이었다. 그 운하 앞
은 안개가 자욱히 끼어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왕정은 앞에
청룡장의 양주 지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정은 심호흡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습을 하기에는 최적의 조건
이었다. 운하도 수공에 능한 자신과 수하들을 위해서 있는 것 같았고 거의
매일 끼다시피 하는 새벽 안개도 오늘 자신들을 위해서 특별히 짙게 낀 것
같았다.
왕정은 비도를 꺼내들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승산은 충분하다고 생각했
다. 하지만 자신을 여기에 보내야 한다고 우긴 북해단주인 이극상의 까닭
모를 웃음이 마음에 걸렸다.
요즘 들어 방주께서는 이극상을 중히 여기시고 다른 삼단주는 자주 만나
주지도 않고 있었다. 왕정은 그것이 백리세가와의 양산박 대전에서 보여준
활약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때 불가항력이었지만 패배를 했
었고 이극상은 대승을 거두었지 않았는가? 왕정은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였
다. 이번에 공을 세우면 방주도 자신을 다시 생각하리라고 다짐했다.
왕정은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양주성의 지리와 수운은 훤하기 때문에 수
하 이백을 아무런 무리 없이 여기까지 끌고 온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적의
턱밑에까지 칼을 들이 댄 이상 승리는 자신들에게 있었다. 그때 무슨 소리
가 그들의 머리 위에서 났다. 왕정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자 왕정은 공격신호를 보냈다. 이백명은 운하로 아
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들어갔다. 마치 솜이 물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왕
정도 조용히 운하를 건넜다. 평상시라면 청룡장의 지단 정문에서 이러한
행동이 보여야 하지만 지금은 안개가 자욱히 깔려 있는 시점이었다. 운하
의 반대편에 올라온 왕정은 비도를 움켜쥐었다. 수하들이 다 올라왔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왕정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공격하라!"
와아아 와아아 하는 함성과 함께 이백여 무사들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텅텅. 몇 명의 무사들이 정문을 두들겨 보았지만 정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
다. 그러자 준비해 온 갈고리를 담벽 위로 내던졌다. 이 갈고리들은 배에
서 쓰는 것으로 다른 배에 내던져서 걸고 당겨서 붙이는 데 쓰는 것이다.
터터턱. 갈고리들이 담벽 위에 걸리고 사해방도들은 거기에 매달린 줄을
타고 담장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청룡장의 저항은 없었다. 왕정
은 멋진 신법으로 발을 굴러서 삼장이나 되는 정문 위에 올라섰다.
장원 안은 안개가 깔려져 있었고 전각의 지붕들만 드문드문 모습을 보였
다. 그리고 작은 담장이 중앙 전각 앞에 바로 놓여져 있었다. 왕정은 왜
전각 앞에 저렇게 작은 담장을 만들어 놓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이을 사이도 없이 사해방의 무사들이 담장에서 무사히 내려서서 병
장기를 휘두르며 달려 나갔다. 왕정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청룡장이라서 별 거 있는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별것도 아닌 것이 그
동안 강동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구나! 으하하 으하하."
그때였다. 왕정이 낮은 담장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담장 사이의 틈이 조금 벌어지더니 길다란 장창이 비집고 나왔다. 왕정은
앙천광소를 터뜨리느라 그것을 보지 못했다. 안개 속에서 청룡장 양주지단
주 사량환은 정면을 바라보았다. 적의 수효는 약 이백여명. 그들 대부분은
정문 담장을 넘어 들어왔다. 사량환은 혀를 찼다.
'병법의 기본도 모르는 놈들!'
그리고 자신의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전면에 이십여 명의 방패수들이 사
람 키만한 방패를 들고 하나의 벽을 만들고 서 있었다. 그 뒤에 이십 여명
의 장창수들이 장창을 방패 앞으로 내밀었다. 그 뒤에 있는 육십여 명의
단궁수들이 짧은 단궁에 시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단궁의 굵기는 어른 새끼손가락만했고 그 길이는 사람 팔뚝 길이만했다.
장거리 사격을 하지 못하는 대신에 단거리에서는 백발백중과 한치 두께의
철판도 꿰뚫을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단궁은 단병접전에 능한 왜구들
과 싸우면서 개발이 된 것이다. 왜구들은 특유의 괴성을 지르며 장도를 휘
두르며 달려들어 일대일로 싸움을 벌이는데 능수능란했다. 또한 갑주를 걸
친 이들이 있어 어지간한 화살로는 큰 상처를 주지 못했다. 그래서 왜구들
과 일대 일로 싸우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며 적들을 섬멸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바로 이 집단전법과 단궁이었다.
지금 사량환이 펼치고 있는 진법은 가장 간단한 방어진법이었다. 전면에
는 이십 명의 방패수들이 방패막이로 상대의 공격을 저지하고 장창수들은
그런 방패수들을 보호하여 적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하는 것이 목적
이었다. 그리고 나서 이 단궁수들이 단궁을 쏘아 적들을 괴멸시키는 것이
다. 이것은 왜구들과의 싸움에서도 큰 성과를 보았었다. 이 진법의 약점은
적의 숫자가 아군 보다 배정도 많아서 주력으로 정면을 견제하고 좌우로
돌아서 공격을 해오면 아군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
서 사량환은 장원 안에서 적을 기다린 것이다. 이 장원 안에서는 적들이
우회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적들이 그물 안에 들어온 이상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적들은 어느새 방패 앞까지 들
이닥쳤다. 사량환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쏴라!"
사량환의 명령에 장창수들은 일제히 몸을 숙였다. 피피핑. 무수한 단궁
이 방패 사이를 뚫고 나갔다. 병장기를 마구 휘두르며 달려들던 사해방도
들은 안개 속에서 날아오는 단궁에 맞아 나뒹굴었다.
"아이쿠! 억! 으악!"
앞이 쓰러져도 뒤에서는 계속 달려왔다. 다시 단궁의 소나기가 쏘아지고
선두 한 무리가 고슴도치가 되어서 쓰러졌다. 그러는 사이 일부는 정면으
로 달려들어 방패에 대고 병장기를 내리쳤다.
텅텅텅. 병장기들이 방패에 맞아 퉁겨져 나오고 장창들이 방패들 사이에
서 찔러왔다. 사해방도들은 그런 장창을 내치기도 했고 피하기도 했다. 그
러나 뒤에서 날아오는 단궁들은 피할 수 없었다. 왕정은 수하들이 계속해
서 쓰러지자 잘못됐다는 판단을 했다. 그의 장점 중 하나가 잘못됐다는 생
각이 들면 바로 물러난다는 데 있었다.
"퇴각해라!"
그는 그렇게 외쳤다. 그 말을 들은 사해방도들은 몸을 돌려서 도주를 하
기 시작했다. 하지만 높은 담벽이 그들을 막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정문
에는 철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뒤에서는 단궁들이 끊임없이 날아왔다.
사해방도들은 독 안에 빠진 쥐가 된 것이다. 왕정은 정문에 내려서서 수하
가 가지고 있는 도끼를 뺏어 들어 자물쇠를 내려쳤다.
까강. 자물쇠에 엮여 있던 쇠사슬이 잘리자 왕정은 문을 열었다. 그때까
지 살아 남은 사해방도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달리기 시작했다. 왕정도 그
들 틈에 끼어서 내달렸다. 사량환은 그렇게 무수한 시체를 남기도 도주하
는 사해방도들을 보며 혀를 찼다.
"그 정도 실력을 가지고 본 장을 치려 했다니…… 내가 싸워 본 중 가장
싱거운 상대였어."
그때 한 명의 무사가 말을 했다.
"추적할까요?"
"안개가 자욱하고 또한 이 일대에는 운하와 호수들이 널려 있네. 저들은
수공에 강하니 우리가 함정에 빠질 수 있지. 또한 저들은 선봉대이네. 병
법을 아는 자라면 곧 이차 공격을 해올 것이네. 우선 사실을 장으로 지급
으로 알려 응원을 청하고 주위에 함정과 기관을 만들게. 또한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고 사망자들은 묻어주게. 무엇보다도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되
네. 그리고 우리에게 저들의 동태를 알려 준 어부에게는 극비리에 후사하
는 것을 잊지 말고."
"존명!"
무사는 읍을 하고 물러났다. 너른 마당에는 사해방도들이 토해내는 신음
성이 새벽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스윽. 한지가 도신을 타고 내리면서 얇은 포가 떠졌다. 원래 얇은 한지
인데도 포를 뜰 수 있다는 것은 도를 쥔 사람의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그 도를 쥐고 있는 손은 매우 거칠었다. 그 손은 포가 떠진 한
지로 도신을 한번 더 닦고 도집에 넣었다. 도집을 한쪽에 둔 육정산은 육
능풍을 보고 물었다.
"도(刀)란 무엇이냐?"
"모르겠습니다."
육능풍의 대답에 육정산은 고개를 끄떡였다.
"너의 말이 옳은 대답이다. 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하는 작자들은
정작 도(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도법에 뛰어난 이들
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네가 나에게 물어 보아라."
"그럼 도라는 건 무엇입니까?"
"도(刀)는……"
그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육정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침에
는 자신을 찾거나 부리지 말라고 몇 번이고 다짐을 해두었는데 이렇게 찾
아오자 눈살을 찌푸린 것이다.
"무슨 일이냐?"
"장주님께서 긴급한 비상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장주님께서?"
"그렇습니다."
육정산은 고개를 갸웃했다.
"알았다. 곧 가겠다."
"지금 즉시 오셔달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명령이라……!'
육정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기로 단우백은 명령이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았다. 일반 무사들이라면 몰라도 각 당의 당주급이나 그가 영입한
고수들에게는 부탁이나 청원을 했다. 물론 그것도 명령이라면 명령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대놓고 명령을 한 적이 없었다. 육정산은 도를 들고 문을
열고 나갔다. 육정산은 육능풍을 보았다.
"오늘부터는 도(刀)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거라. 답을 찾으면 정식
으로 육가도법을 전수해 주겠다."
육능풍은 육가도법을 전수해 주겠다는 말에 기뻐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예. 할아버지."
청룡대전으로 향하는 육정산은 고개를 갸웃했다. 각 당의 당주들은 물론
이고 평소에는 빈둥대며 돈이나 퍼질러지게 쓰는 인의당의 고수들과 일반
무사들의 수장 격인 대주들까지 몰려가고 있는 것이다.
육정산이 청룡대전에 들어갔을 때 청룡대전에는 수십여 명이 앉아 있었
다. 육정산은 그 중에도 상석에 자리를 잡고 있는 육대 당주의 자리에 가
서 앉았다. 육정산이 자리에 앉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청룡대전 안에 있는
의자들이 모두 찼다. 의자들이 모두 차자 상관평과 서왕이 양쪽에서 나와
상석에 있는 의자 옆으로 나와서 섰다. 육정산인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것
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장주님께서 나오십니다."
중인들은 일제히 일어나자 육정산도 얼떨결에 일어났다. 평상시에는 장
주가 먼저 와서 기다리며 자신이나 다른 당주들이 들어오면 일어서서 반갑
게 맞이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일어나는 것이 어색했다.
서왕이 나온 오른쪽에서 단우백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육정산은 그것을
보고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서왕이 나오는 오른쪽은 중원에서는 흉사
나 전쟁시에 사용하는 문이었다. 그래서 단우백이 평상시에 대전을 드나들
때는 상관평이 나온 왼쪽을 이용했다.
단우백이 오른쪽 문으로 서왕을 앞세우고 들어왔다는 것은 장에 흉사가
있음을 단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이다. 게다가 단우백은 평소와 달리 하얀
피풍의에 청의무복을 입고 검은 가죽신을 신었다. 머리에는 검은 건을, 허
리에는 장검을 차고 반대편에는 무릎아래까지 내려오는 단봉을 세 개나 차
고 있었다. 이 모습은 청룡장의 정무사들이 경비를 설 때나 순찰을 돌 때
하는 복장이었다.
육정산은 그제야 서왕과 단우백에게서 느꼈던 이상함을 알 수 있었다.
바로 검은 건이었다. 육정산은 청룡장에 들어와서 검은 건을 쓴 사람을 보
지 못했다. 서왕과 단우백이 검은 건을 쓴 것을 보고 놀라는 것은 육정산
뿐만 아니었다. 다른 당주들과 대주들은 눈을 부릅떴다. 그들은 검은 건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우백은 자리에 앉지 않고 서
서 말을 하였다. 그의 말은 매우 나직했으나 힘이 가득 차 있었다.
"사해방과 삼혈맹이 본 장을 치기 위해서 남하 중이오."
중인들은 해연이 놀랬다. 특히 인의당의 고수들은 졸린 듯한 눈을 번쩍
떴다. 삼혈맹이라니…… 그 공포의 삼혈맹이란 말인가? 인의당의 고수들은
안절부절못해 했다. 그러나 육당의 대주급 인물들은 눈에서 신광을 토해내
고 있었다. 단우백은 인의당의 고수들을 보고 다시 결의에 찬 대주들을 바
라보았다. 상관평은 섭선을 흔들어 주위를 환기 시켰다.
"하지만 첫 전투에서 우리는 적들을 섬멸하는 쾌거를 올렸습니다. 양주
지단에 쳐들어온 사해방과 삼혈맹의 연합병력 이백 명을 모두 주살했습니
다."
상관평은 사실을 약간 부풀렸으나 개의치 않아 했다. 지금은 사실확인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기를 고양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룡단이 이미 장강에 방어진을 친 상태입니다. 각 분타와 지단
의 병력 또한 장강에 집결을 할 것입니다. 또한 거경방의 전 전선이 항주
에서 북상 중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장강으로 나아가 맞서 싸운다면 사해
방과 삼혈맹을 장강에 모조리 수장을 시킬 수 있습니다."
상관평의 말이 끝나자 단우백이 장검을 높이 치켜 들었다. 그것은 그의
처소에 모셔져 있던 장검이었다. 나이가 좀 대주들과 당주들은 그 장검을
보자 오체투지했다.
"청룡신검을 뵙습니다."
그것을 보고 육정산과 인의당의 고수들은 저으기 놀라고 있었다. 청룡장
의 대주와 당주들이 오체투지를 하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특히 청룡장의
당주급들은 단우백의 수하라기보다는 동지에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그 검의 내력을 아는 사람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 검은 태상장주가 사용
하던 애검으로 청룡장의 상징이었다. 그 검 아래 얼마나 많은 왜구들과 해
적들이 베어진지 모를 정도였다. 당주와 대주들은 단우백에게 오체투지를
한 것이 아니라 그 검 앞에 오체투지를 한 것이다. 중인들이 어떠한 판단
도 할 사이가 없이 단우백의 입에서는 거침없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당주!"
"옛."
사인과 사개당에 속한 대주들은 단우백의 정면 앞으로 나와서 읍을 했
다.
"지금 즉시 사개당을 이끌고 장강으로 나아가 청룡단을 지원하도록 하시
오."
"존명!"
사인과 사개당에 속한 대주들은 읍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다른 인원은 지금 나와 함께 무석분타로 가서 후방을 맡도록 하겠소.
집법당주께서는 장원에 남아서 장원을 지켜 주시오. 또한 예당주께서는 후
방지원이 끊이지 않도록 해주시오."
육정산과 예당주 이귀는 읍을 했다. 단우백은 바람을 일으키며 정문을
향해 나갔다. 쩔쩔매고 있던 인의당의 고수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얼굴은 검푸르게 죽어 있었다. 인의당 고수들은 육정산을 흘겨보았다.
육정산은 담담한 얼굴로 나가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
려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후방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는 것 같았다. 병법을 아는 자라면 적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한 특수공작조를 보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소수정예로 이루어진 그
런 조직을 말이다. 육정산은 장도를 움켜쥐었다
'이젠 물러설 곳이 없다.'
시리도록 파랗게 빛나는 하늘 아래 너른 강물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검푸른 물살을 헤치며 여섯 척의 전선이 흘러갔다. 밤을 도와 태호에서 이
곳 장강 하구까지 온 청룡단의 청룡선이었다. 배는 모두 검게 칠해져 있었
고 세폭짜리 돛이 바람을 받아 한껏 부풀었다. 돛대 위에는 청룡기가 바람
에 펄럭였다.
청룡단주 동방후는 선두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판에는 여섯 개의
검은 칠을 한 상자가 좌우로 세 개씩 배치가 되었다. 그 상자들은 갑판에
고정이 되게끔 상자 좌우에는 높은 턱이 만들어져 있었다. 동방후는 약간
어두운 얼굴로 그 상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돌렸다.
푸드득. 한 마리 전서구가 배 갑판에 내려섰다. 동방후는 그 전서구에서
서찰을 꺼내 읽었다.
<오늘 아침에 양주지단이 급습을 당하였음. 그러나 적들은 일백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음. 사개당이 출전했음. 지휘본부는 무석분타임. 거
경방의 전선이 총호법의 지휘하에 북상중임. 정위치를 지킬 것.>
동방후는 서찰을 꾸욱 움켜쥐었다. 서찰대로라면 곧 저들의 대대적인 장
강 도하가 시작 될 것이다.
창밖으로는 파아란 바다가 펼쳐지고, 몇 마리 기러기들이 창밖을 맴돌았
다. 햇살은 창을 통해서 실내를 밝게 비추었다.
선실 안에서 거경방 수뇌부들이 탁자에 놓인 해도를 보고 있었다. 절강
과 강소의 해안이 자세히 나와 있는 해도였다. 해도에는 각종 섬들도 자세
히 표기가 되어 있었다. 장강 하구에 여섯 개의 푸른 점이 찍혔다. 소천은
그 점들을 가리켰다.
"지금 청룡장에서는 청룡단으로 이곳에 장강 저지선을 마련하였소. 오늘
새벽에 양주지단이 공격을 받았지만 쉽게 격퇴를 했다고 합니다."
해도를 보고 있던 이들은 고개를 끄떡였다. 사해방이 양주를 공격한 것
은 사리에 맞는 일이었다. 양주는 장강도하에 가장 필요한 요충지였기 때
문에 양주의 확보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양주지단에 연연해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지단과 분타를 하나씩 점령하여 들어오는 것은 삼혈
맹의 전법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삼혈맹은 그 동안 적대문파의 총본산을
공격 섬멸하여 분타와 지단들이 자체적으로 와해되게 하였다. 와해되지 않
는 곳은 다시 섬멸작전을 펼쳐서 각개 격파에 들어갔다. 이것이 지난 수십
년간 변함이 없는 삼혈맹의 전법이었다. 소천은 말을 이었다.
"저들이 장강을 도하하면 요동낭인대를 상륙시켜서 분타들을 견제하며
남진하고, 사해방과 삼혈맹은 운하를 따라 태호까지 쳐내려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강남의 곳곳에서 대대적인 혈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랬다. 상관평이 걱정을 하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요동낭인대
의 육상전투력은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가 되었다. 그들이 강남에 무사
히 상륙을 하고 삼혈맹의 고수들이 운하를 따라 병진을 한다면 청룡장의
전력만으로는 막아내기 힘이 들 것이 분명했다.
운하는 폭이 좁아 목을 막고 있으면 사해방의 선단을 충분히 막을 수 있
었다. 그러나 운하를 막는다는다는 것은 중원의 동맥을 막는 것이었고, 그
것은 관부에서 허락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요동낭인대는 육
상으로 진격하기 때문에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할 경우 운하봉
쇄는 그 실효를 거두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청룡장은 요동낭인대와 삼혈맹
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장강에서 일전을 벌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북진합시다!"
거경방의 수뇌부들은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좌목이었다. 좌목은
해도를 집어갔다.
"강소에서 장강을 도하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요. 강줄기가
무려 팔백여 리에 달하고 있소이다. 사해방의 인물들도 이곳의 수로는 눈
을 감고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오. 현재 우리의 전력으로 장강을 봉쇄한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오."
소천은 좌목을 보며 물었다.
"우리가 북진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이오?"
"저들은 배후가 위협을 받게 되어서 함부로 장강 도하를 하지 못할 것이
오. 그러는 사이 해남도에 간 전단을 불러온다면 충분히 장강을 방어할 수
있소이다."
"좌타주의 말씀에 일리가 있지만 현재 우리의 전력으로는 적의 배후를
공격하지 못하오. 게다가 이 거경선이 운하로 들어가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은 불문가지요."
"누가 운하로 들어간다고 했소?"
좌목은 좌중을 쓸어보았다.
"이 회수의 입구를 막고 기다리는 것이오. 흥! 사해방도들이 처내려 온
다면 우리가 모조리 수장을 시켜 버립시다. 더군다나 이 근처에 무인도가
있으니 우리가 점령해서 기지로 삼는다면 사해방은 함부로 경거망동을 하
지 못할 것이오. 그리고 장강에서 혈전이 벌어지고 장강 도하가 시작되면
우리도 이 해안일대의 사해방 조직들을 쓸어버립시다."
좌목은 그렇게 말을 하고 중인들을 바라보았다. 중인들은 좌목의 말에서
어떤 의미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일단 동해로 나가 적의 후방을 교란한다
면 장강에서 적 주력과 부딪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즉, 이쪽의 손해는 최
소화할 수 있고 생색은 생색대로 낼 수가 있는 것이다. 거경방의 수뇌부들
은 소천의 안색을 살폈다. 결정은 소천이 내려야 했다. 그래야 전투가 끝
나도 청룡장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소천은 그 말
을 듣고 고개를 끄떡였다.
"좋습니다. 북진합시다. 지금 전선이 모두 몇 척입니까."
"거경선 한 척에 중형전선 열 척입니다. 이 정도면 본 방 전력의 삼분지
일밖에 되지 않지만 바다에서는 무적입니다."
"그럼 즉각 진군을 합시다."
수십여 척의 전선이 돛을 내리고 바닷물을 헤치며 나갔다. 지금 바람이
역풍이 불기 때문에 돛을 내리고 노를 저어서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파아
란 하늘과 검푸른 바다가 수평선을 그리며 만났다.
적천마군은 바다를 넋 놓고 보았다. 그는 바닷가에서 바다를 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 망망 대해에 나와서 바다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어디
를 둘러보아도 푸른 물결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는 옆에 서 있는 악
일비를 보며 물었다.
"악방주. 바다는 늘 이렇게 포근하고 조용하오."
"바다는 여자와 같습니다. 이렇게 포근하고 무엇이든지 받아 줄 것 같다
가도 한번 변덕을 부리면 산 같은 파도를 불러일으키고 무서운 폭풍으로
몰아쳐 옵니다. 대군께서는 바다를 처음 보십니까?"
"이렇게 나와서 보기는 처음입니다. 이렇게 나와서 바다를 보니 정말 좋
소이다. 헌데 언제쯤 태호에 도착을 하겠소?"
"오늘밤이면 가능할 겁니다. 역풍이 불어 한 두 시진 정도는 늦어질 것
같습니다. 파도가 심하지 않아서 배멀미를 하는 사람이 적어서 다행입니
다. 파도가 심했다면 큰 곤욕을 치를 뻔했습니다. 모두가 하늘이 우리를
돌본다는 증거입니다."
적천마군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때 수평선 저 너머에 하나의 점이 보이
기 시작했다.
"방주 저 점은 무엇이오? 이 근처에 섬이 있었소?"
악일비는 그 점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요. 이 근처에는 섬은 없는데요."
그 점은 점점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악일비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때
였다. 수부 한 명이 악일비를 보고 소리 쳤다.
"거경선입니다."
악일비는 눈살을 찌푸렸다.
"거경선이 여기에는 왜 나타난다는 말이냐? 그들은 여기에 나타나서는
안된다."
그는 의아한 듯이 악일비를 보았다.
"방주님. 방주님께서는 전에 거경선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저건 틀림
없는 거경선입니다."
일순 악일비의 얼굴이 살짝 바뀌었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잠시 잘못 본 모양이다. 거경선이구나. 각 선단에 경계태세를 내리도록
하여라."
"존명."
파라락, 한 개의 붉은 기가 올라가자 선단이 산개하기 시작했다. 적천마
군은 의아한 얼굴로 악일비를 보았지만 악일비는 개의치 않았다.
"아무래도 일이 틀어진 모양입니다."
적천마군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거경방이 청룡장을 배신한다는 것에
회의적이어서 별 반 놀라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적은 한 척의 초대형 거선과 십여 척의 중형 전선을 거느리고 있었다.
아군은 그들보다 선박 면에서도 세배는 많아 보였다. 게다가 이쪽에는 오
대마군이 모두 있지 않은가! 이 정도 전력차이라면 싸움은 해보나 마나였
다. 적천마군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칼날을 세우기에는 좋은 상대군.'
"적이다!"
돛대 위에서 망을 보던 이의 외침에 거경방의 전선들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천은 갑판으로 나와 전방을 살폈다. 선단을 이루던 배들이 넓
게 산개하며 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전선은 자신들보다 몇 배는 많
아 보였다. 소천은 근심이 되는 표정으로 옆에 선 좌목을 바라보았다.
"좌당주 승산이 있겠습니까?"
좌목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적 주력과의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 동해
로 왔는데 그 곳에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헤
벌쭉 웃었다. 여기는 자신들의 터전인 동해의 한가운데였다. 여기는 관선
들은 절대로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었다. 이럴 때 공을
세운다면 청룡장에서도 자신들을 달리 볼 것이 분명했다.
"바다에서 왜 거경방이 제왕인지 보여드리지요."
좌목은 수부들을 보고 소리 쳤다.
"전기를 올려라! 그리고 전속력으로 전진하라."
파라락, 검은 깃발이 치솟아 올랐다. 열 척의 중형전선은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갑판 위에는 몇 명만 남고, 다른 이들은 좌목을 따라 갑판에서
내려갔다. 소천은 갑판 위에서 앞을 바라보았다. 적 전선들이 사방으로 흩
어져서 쇠노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슈슈슉! 퍼억 퍼억. 하나 두 개씩 쇠노가 갑판에 떨어지며 여기저기 박
혀 들어가고 부셔버렸다. 소천은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서 쇠노들을 피했
다. 거경선은 점점 빠른 속도로 나가기 시작했다. 거경선의 정면에 사해방
의 전선이 한 척 들어왔다.
소천은 그 전선의 사람들이 비명성을 내지르며 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요동을 쳤다.
그리고 푸하악, 물길이 치솟아 올라 갑판 위에 떨어졌다. 부서진 배의 조
각들이 갑판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소천은 몸을 뒤로 피하고 검을 휘둘러서 날아오는 배 조각들을 잘라 버
렸다. 거경선은 사해방의 전 선단 중앙을 돌파해 나갔다. 사해방의 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거경선은 이내 그 큰 덩치를 돌려서 다시 다른 전선을
향했다. 그 사이 배의 속도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사해방에서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전선들로 하여금 거경선을 둘러싸게 하였다. 사해방의 전선들
은 좌우로 편 날개를 접어서 거경선을 둥글게 포위하기 시작했다. 사해방
의 배들은 점점 포위망을 조여왔다. 그리고 무수한 강전들을 쏘아 대기 시
작했다.
휙휙휙. 갈고리가 던져져서 거경선의 좌우 난간에 걸렸다. 그 밧줄을 타
고 한 명이 나는 듯이 날아왔다. 수 많은 삼혈맹도들이 갈고리를 당기면서
줄을 타고 배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소천은 비스듬한 줄 위를 밟으며
날아오는 자를 보았다. 그는 피보다 붉은 혈의를 입고 양손에는 두 개의
륜을 들고 있었다. 그는 두 개의 륜을 소천을 향해서 내던졌다.
그때였다. 덜컹덜컹! 배의 삼분지 이쯤 되는 부분에서 작은 문들이 열리
고 그 사이로 검은 물체가 고개를 내밀었다.
소천은 두 개의 륜을 쳐내며 뒤로 물러섰다. 그 륜에 실린 공력이 보통
이 아니었다. 적천마군은 두 개의 륜을 잡고 거경선 위에 내려섰다.
콰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허연 연기가 거경선의 주위에서 뿜어져 나왔
다. 사해방의 배들이 불길에 휩싸이고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비명성
들이 천지를 뒤덮었다. 그도 잠시 비명성을 화포들이 잡아먹으며 배들을
불태웠다.
그 소리에 적천마군은 저으기 놀랐다. 그것은 소천도 마찬가지였다. 하
지만 둘은 놀라고 있을 사이도 없었다. 강적이 앞에 있는 것이다. 소천은
화포연기를 뚫고 날아올라서 적천마군을 향해서 검을 날렸다. 적천마군은
륜을 휘두르며 소천과 맞섰다. 촤촤촤, 소천의 검이 스치는 곳마다 기둥이
잘려져가고 갑판 위에 있던 물건들이 부서지며 치솟아 올랐다.
화포에 부서지는 사해방의 전선들의 배 조각들이 불이 붙은 채 갑판위로
무자비하게 떨어져 내렸다.
두 개의 륜을 번갈아 날리며 소천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둘은 서로
에게 저으기 놀라고 있었다. 화포는 계속해서 터지고 있었으나 둘은 아무
런 소리도 듣지 못하는 듯 했다.
적천마군의 륜이 다시 손에 들려지고 소천은 몸을 날려 검으로 적천마군
을 찔렀다. 적천마군은 양손을 교차해 륜을 들고서 소천이 가까이 올 때까
지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순간적으로 멈춘 동작이었다.
거경선이 장거리에서 화포를 쏘아 사해방의 전선들을 격침시키지 않고
이렇게 단거리까지 적선을 유인한 것은 화포의 정확성이 매우 떨어졌기 때
문이다. 좌목은 거경선을 이끌고 적선의 포위망에 스스로 뛰어들어 적을
유인 일대 타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경선에서 화포가 터져 나오고 사해방의 전선들이 불길에 휩싸이자 남
은 거경방의 전선들이 빠른 속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적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몰아 붙이는 것이 승리의 관건임을 거경방은 잘 알고 있었다. 과
연 사해방의 전선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각 배마다 사해방의 수상객들이 타고 있었지만 그것은 배의 기초적인 운
용과 항해에 관한 제반사항을 위한 꼭 필요한 인원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
서 이들은 배 밑에서 노를 젓거나 갑판에서 돛을 사용하고 좌우 배와의 연
락과 거리유지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해방의 지휘관들이
탄 배들은 거경선에 붙어 있어 다른 배들에는 수전을 해본 사람들의 매우
적었다. 워낙 많은 배에 분산배치를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것이다. 그래
서 배 위에 있는 대부분의 전투병력은 삼혈맹이나 요동낭인대의 무사들이
었다.
요동낭인대는 거경선들이 다가오자 얼른 엄폐물 뒤에 숨었다. 그들에게
는 사해방에게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배 위에서 칼을 들고 아무리 용을
써봐야 화살밥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해전을 경험하지 못
한 삼혈맹도들은 육박전을 기대하며 장도를 뽑아 들었다. 그들은 거경선이
가까이 오면 그 배 위에 올라서 거경방도들을 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들은 사해방도들이 뭐라고 외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저 멀리서
다가오던 거경선들은 더욱 무서운 속도로 진격해 오면서 하늘 가득히 화살
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퍼퍼퍽. 배의 한쪽에 질서정연히 도열해 있던 삼혈맹도들은 그 화살에
맞아 나뒹굴기 시작했다. 화살을 피해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지만 좁
은 배 갑판에서 수십 여명이 마음껏 움직일 공간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그
들은 보기 좋은 표적이 되어 강전과 쇠노에 꿰뚫려 쓰러져 갔다. 삼혈맹의
고수들 중 몇 명은 병장기를 휘둘러 화살을 막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
지나 자기 한 몸 지키기에 급급했다.
적혈마군도 도를 휘두르며 화살을 막아 보지만 주위에서는 계속 비명성
이 터져 나왔다. 일순 화살의 세례가 멈추었다. 그리고 적혈마군이 타고
있는 배 앞으로 거경방의 전선이 몰아닥쳐왔다. 그 배 위에서는 아무도 보
이지 않았다. 그 순간 사해방도들은 일제히 바다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적
혈마군은 그것을 보고 눈을 다시 돌렸다. 거경방의 전선은 어느새 코앞까
지 다가왔다.
"미친……! 같이 빠져 죽자는 건가?"
하지만 적혈마군은 거경방의 전선과 사해방의 전선의 차이를 알지 못하
고 있었다. 사해방은 내륙 운하의 운송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 나무
가 판자로 되어 있어 배의 두께가 거경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거경선은 선두로 달려오고 있는데 사해방의 배는 측면을 내 주고 있었다.
적혈마군의 눈앞에는 앞에 크고 긴 못들이 박혀 있는 거경방의 전선이
성큼 다가왔다. 적혈마군은 배를 박차고 몸을 날렸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적혈마군이 타고 있던 배가 반쪽으로 갈라지면서 거대한 굉음을 내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적혈마군은 거경방의 전선 위에 내려섰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타올랐
다. 그 배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수하들이 다수 타고 있는 것이다. 선실 문
이 열리고 장병을 든 거경방도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그들이 보기
에 적은 한 명뿐이었고 자신들은 수십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상대가 적혈
마군임을 알지 못했다. 적혈마군은 대갈일성을 내지르며 장도를 휘둘렀다.
거경방도들이 들고 있던 병장기들이 잘려져 나가고 팔다리도 함께 잘려
져 나갔다. 십여 명이 추풍낙엽으로 쓰러지자 나머지 거경방도들은 선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적혈마군은 선실로 들어서는 두셋을 베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장창들이 마구 찔러왔다. 타타탕, 도로 장창을 쳐내고
적혈마군은 뒤로 몸을 날렸다. 좁은 공간에서 필사적으로 찔러대는 장창을
피해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해방도들도 선실 문
에서 나오지 않았다. 적혈마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망망대해 여기 저기서 화살과 쇠노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쪽에
서는 거경선이 불을 뿜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여기서 이렇게 손을
놓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적혈마군은 얼굴이 벌개지며 괴성을 내질렀
다.
"으아아 으아아!"
적혈마군은 물위에서 자신이 이렇게 무력한지 몰랐다. 육지라면 여기 있
는 거경방도들을 단신으로 다 죽일 수 있을 것 같건만 배 위에서는 그 무
위가 다 별무소용이었다. 바다에는 빠진 사람은 많이 있건만 그의 눈에 보
이는 사람들은 두셋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 사이에 물살에 실려 사방팔
방으로 떠내려 간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 아니 전원이 다 물 속에 빠져
죽을 것이 뻔했다. 적혈마군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빨을 꽈악 깨물
었다. 자신의 배에 있던 자신의 수하들에게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때
풍덩풍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혈마군은 선미로 날아갔다. 그쪽에서 고물 칸의 창문을 뚫고 수십 명
이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들은 모두들 밧줄로 서로를 묵고 각기 부유물질
들을 부여잡고 있었다. 적혈마군의 상대가 안된다고 판단하고 배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이다. 적혈마군은 도를 잡고 뛰어 내릴려고 생각을 했다. 그때
저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물속으로 뛰어 들면 안되오."
적혈마군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시혈마군이 탄 배가 점
점 가까이 왔다. 시혈마군 옆에는 한 명이 초조한 듯이 서 있었다.
"밧줄을 던질테니 잡게나."
시혈마군은 그렇게 외치고 끝에 갈고리를 묵은 밧줄을 내던졌다. 적혈마
군은 갈고리를 잡자 저쪽에서 시혈마군이 당기기 시작했다. 적혈마군은 배
를 박차며 몸을 날렸다.
적혈마군이 타고 있던 거경선에서 거대한 폭음과 함께 화염이 치솟아 오
르며 불이 붙은 채 가라앉기 시작했다. 밧줄을 타고 신법을 펼쳐서 시혈마
군의 배에 날아 내린 적혈마군은 그것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시혈마군의 옆에는 북해단주 이극상이 서 있었다. 그는 가슴을 쓸어 내리
며 말을 했다.
"거경방에는 배마다 일정한 화약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사시에 적에게
배를 남겨주지 않는다는 율법에 따라 배를 버릴 때는 자폭시키게 되어 있
습니다. 정말 큰일날 뻔했습니다."
폭음과 함께 다른 한 척의 배가 폭발했다. 그것은 다른 거경방의 전선이
었다. 그리고 그 배 위에 올라가 있던 삼혈맹도들과 요동낭인대의 시체들
이 조각조각나서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는 것이 보였다. 비명성은 들리지
않았다. 그 소리가 들리기에는 폭음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적혈마군은 그
제야 해전이 육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소천의 검이 그의 눈앞까지 다가오자 적천마군은 륜을 십자로 교차하면
서 륜과 륜 사이의 안쪽 공간에 소천의 검을 옭아 매었다. 이 수법은 적천
마군의 필생의 수법으로 적의 병기를 륜과 륜 사이에 묵어두고 그의 회전
각으로 상대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수법이었다. 적이 병장기를 놓고 뒤로
물러서면 후속적인 륜의 공격이 용서치 않는 것이다. 이 수법으로 강호의
무수한 명숙들을 상대했고 그들을 죽인 바가 있었다. 적천마군의 몸이 뒤
집어 지면서 소천의 머리를 향해서 발이 내려찍혀졌다. 그 순간 검은 소천
의 손을 떠나 앞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소천의 몸이 뒤로 물
러섰다. 그것을 보자 적천마군은 불현듯 한쪽 뺨이 쑤셔오는 것을 느꼈다.
십년전에도 이와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적은 병장기가 손에 없었
고 자신은 륜을 들고 있었다. 한번만 내려치면 적의 목을 벨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날아온 장도에 자신의 얼굴을 내주어야만 했다. 상
대는 자신의 함정에 걸린 순간 이기어도를 펼쳐서 자신의 뒤를 공격한 것
이다. 공격을 하다가 그것을 느끼고 피했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얼굴
한쪽이 베어지는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적천마군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뒤집었다.
"육정산."
과연 검은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적천마군은 그 검을 막지 않고
옆으로 몸을 돌려서 갑판 위에 내려섰다. 척. 검은 소천의 손에 다시 잡혀
들어갔다. 둘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적천마군의 혈포는 바람이 불
지도 않았는데 펄럭거렸고, 소천은 냉정한 눈길로 적천마군을 바라보았다.
적천마군은 두 개의 혈륜을 들고 외쳤다.
"너는 육정산과 어떤 관계냐?"
"당신이 적천마군이구려."
적천마군은 오른쪽 뺨에 난 상처를 씰룩이며 소천을 노려보았다.
"그렇다. 내가 적천마군이다."
"소생은 청룡장의 소천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흥. 그런다고 오늘 네가 무사 할 줄 아느냐?"
"하하하. 뭘 착각을 하고 계신 모양인데 사해방의 전선들은 이미 저 멀
리 도주를 했을 꺼외다."
그러나 적천마군은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고수에게 있어 한순간의 방
심이나 시선의 분산은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반쯤 잘려져 있던 돛이 바람에 펄럭이며 적
천마군의 시야를 가렸다. 그 순간 소천이 떠올랐다. 적천마군은 뒤로 물러
서며 두 개의 륜으로 전신을 보호했다. 파악, 소천은 돛을 가르며 적천마
군을 베어왔다. 적천마군의 륜이 무수히 움직이며 소천의 검을 막아갔다.
까가강 까가강! 륜과 검이 부딪치면서 무수한 불꽃을 퉁겼다. 척, 소천
의 몸이 뒤집혀 지면서 십여 장 정도 물러났다.
어느새 화포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연무도 바람에 날려가고 있었다. 주
위의 푸른 바다와 십여 척의 전선만 보였다. 그 전선들은 모두 돛을 내리
고 있었다. 올 때는 돛을 올리고 바람을 타고 올라왔기 때문에 돛이 내려
져 있다는 것은 퇴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둘은 그런 것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둘의 정신은 오직 상대에게만 멈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배가 기우뚱하면서 한쪽으로 쏠렸다. 적천마군은 순간 중심을 잃고 옆으
로 살짝 몸이 기울어졌다. 소천은 그걸 노치지 않았다.
그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적천마군은 그 순간 중심을 잃었기
때문에 전신 공력을 다 쓸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서 소천은 배 위에서도
연마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중심을 잃지 않았다. 그 차이는 매우 작은 차
이였으나 고수들의 싸움에는 그 작은 차이로 생사가 갈라지는 것이다.
파파파. 륜과 검이 부딪치면서 적천마군은 십여 보를 물러났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밑이 꺼져 들어갔다. 적천마군은 한쪽 발이 빠지자 얼른
다른 발에 힘을 주어 뒤로 물러섰다. 소천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 해
서 몰아쳐 갔다. 까가강. 륜과 검이 부딪치고 적천마군은 다시 뒤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적천마군은 아래가 허전함을 느꼈다. 이곳은 육지가 아니
었다. 공간이 한정이 되어 있는 배였다. 적천마군은 발등을 찍고 날아 올
랐다. 하지만 정면으로 나무판자가 날아와서 륜을 휘둘러 막아야 했다.
퍼억. 나무판자는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지만 적천마군은 위로 솟구치
지 못하고 밑으로 떨어져 내려야했다. 슈욱 풍덩. 적천마군이 물 속으로
떨어지자 물기둥이 솟구쳐 올라왔다.
푸우, 적천마군은 수면 위로 올라와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보이는 것은 망망대해와 저 멀리 자신을 조롱하듯이 있는 거경선
뿐이었다. 수력답공으로 수면을 차고 올라서 날아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
었다. 적천마군은 륜을 움켜쥐었다.
'이대로…… 이대로 바닷물 속에 빠져 죽어야 하는가? 천하가 좁다고 느
끼는 이 적천이……!'
적천마군은 바닷물이 의외로 차다는 것을 점점 느끼기 시작했다.
거경방의 전선들은 거경선이 적진 한 가운데 뛰어들어 화포로 몇 척의
배를 날려버리자 신이 나서 공격해 들어갔다. 그들이 그 동안 싸워온 적들
은 화포 몇 방이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을 쳤기 때문이다. 헌데 이들은 그
렇지 않고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게다가 배가 근접하면 삼혈맹의 고수들이
거경방의 전선들에 올라와서 무자비한 살수를 벌였다. 이들과의 대전에서
큰 피해를 보았고 특히 오대마군이 올라오면 거경방의 전선들은 속수무책
이었다. 그래서 오대마군 중 두 명이 올라온 두 척의 전선을 버리고 급히
퇴각한 것이다.
다행히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든 자들은 다른 전선에서 구조를 할 수
있었다. 거경방은 자신들이 패했다는 생각은 아무도 가지지 않았다. 사해
방의 전선들도 예닐곱 척이 화포에 날아갔고, 무수한 인명이 바다에 빠져
죽었기 때문에 손실 면에서 본다면 거경방의 승리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
래서 거경방도들은 승리의 함성을 터뜨렸다.
소천은 전 선단을 그곳에 정지시키고 전서구를 날렸다. 사해방이 더 이
상 추격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그들도 자신들의 피해를 수습하기 바쁠
것이다. 소천은 저 멀리에 떠 있는 적천마군을 바라보았다. 좌목이 그 옆
으로 왔다.
"화포 몇 방으로 확실히 보내버릴까요?"
소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죽이기에는 아까운 인물이오. 생포합시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우리가 저자를 생포해서 귀환을 한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모두 거경
방을 우러러 볼 것입니다."
좌목의 눈이 번뜩였다.
"방법이 있기는 있습니다."
촤아악. 고기잡이용 그물이 길게 늘어졌다. 적천마군은 거경선이 긴 그
물을 내리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거경선은 그물을 내려놓고 적천
마군의 주위를 크게 돌기 시작했다. 적천마군은 저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
지 그제야 알았다. 그물로 자신을 물고기 잡듯이 잡으려는 것이다. 거경선
이 한바퀴를 크게 돌고 처음 던져 놓았던 부표를 잡아 끌어당겨 올렸다.
점점 그물이 모아졌다. 적천마군은 륜을 들어 그물을 자르려고 하였다. 그
걸 본 소천의 큰 소리로 외쳤다.
"적천마군! 그물을 끊으면 화포를 쏘겠소. 나도 당신같이 위험한 인물을
그냥 두고 떠날 마음은 추호도 없소이다. 화포에 맞아 죽을 건지 잠시 굴
욕을 참고 살 건지 선택을 하시오."
적천마군은 륜을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소천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물이 적천마군을 옭아매자 무수한 투망들이 던져졌다. 하지만 그것만으
로도 안심이 안되었는지 몇 명의 수상객들이 바닷물 속으로 뛰어 들어서
쇠사슬로 외각에서부터 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포는 적천마군을 겨누
고 있었다. 적천마군이 조금만 이상하게 움직이면 바로 발사를 할 것이다.
같이 있는 동료들이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게 모두를 위하는 일임을 거경
방도들은 잘 알고 있었다.
적천마군은 눈을 내리 감았다. 수상객들은 그의 몸에 쇠사슬을 완전히
감고 배 위에 올라왔다. 그제야 거경방도들은 그물을 당기기 시작했다. 그
물에 당겨져서 적천마군이 배 위에 올라오자 거경방도들은 함성을 내질렀
다. 소천은 적천마군의 전신대혈을 집어나갔다. 적천마군은 눈을 감고 입
을 굳게 다물었다.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지고 있었고 저녁 노을이 배 위에
붉은 비단을 깔면서 내려앉았다.
<전선 아홉 척 침몰. 사망자 사해방 이백칠십오명. 요동낭인대 일백사십
구명. 삼혈맹 이백십이명. 총 육백삼십육명 사망. 실종 일명 적천마군.>
선실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에 벽에 걸린 해도가 기울었
지만 실내에 있는 누구하나 돌아보지 않았다. 정면 의자에 눈을 감고 있는
혈마의 붉은 얼굴은 무표정 그 자체였다. 그 좌우로 사대마군과 사해방주,
요동낭인대가 자리했다. 혈마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적천의 생사는 확인을 하지 못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거경선에 오른 것을 본 자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 뒤는 알
수가 없습니다."
"거경선에 적천을 상대할만한 고수가 있었던가?"
중인들은 침묵을 했다. 거경선이 거기에 나타난 것은 정말로 이들에게는
충격이었다. 단지 거경방의 출현으로 작전에 구멍이 생겼다는 것만은 아니
었다. 바다 위에서는 자신들의 무공이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자괴
감과 화포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이 겹쳐져 있었다. 그들이 본 화포의 위력
은 그야말로 경천동지였다. 고수들은 날아오는 화포를 보고 몸을 날려 폭
발 반경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배는 그렇지가 못했다. 배는 피할 수
가 없는 것이다. 배가 화포에 맞아 부서져서 망망대해에 빠지게 되면 날고
기는 무공도 아무짝에 쓸모가 없었다.
혈마는 눈을 떴다. 그의 혈안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승패는 병가지상사이다. 모두들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 우리는 적을 너
무도 몰랐다. 적은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는 전력과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
다. 그것이 우리의 패인이다. 그리고 해전에 어두웠던 것이 결정적인 패배
의 요인이다. 그 동안 본맹은 천하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오늘의 일
전으로 모두들 뼈를 깎는 다는 자세로 새로 태어나기 바란다. 그리고 이
번 일에서 손을 뗀다. 사해방주!"
"옛."
"청룡장주에게 가서 적천마군과 백리세가의 식솔들과 바꾸자고 전해라.
적천의 능력으로 보아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울러 당분간 휴전을 바란
다고 전해라."
사대마군은 저으기 놀랐다. 백리세가의 식솔들은 대맹주의 명령으로 감
금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대맹주의 명령으로 감금이 되어 있는 사람은 혈
마라고 할지라도 마음대로 풀어 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삼혈맹은 칼을
빼면 승부를 보았다. 휴전이라는 단어는 삼혈맹은 알지도 못하는 말이었
다. 적혈마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리세가의 식솔들은 대맹주님의 명으로 안가에 이송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휴전은……"
혈마는 손을 들어 적혈마군의 말을 끊었다.
"큰 형님께서도 이해를 하실 것이다. 청룡장주는 야망이 큰 자이니 거절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조건도 붙이면 들어주도록 하라. 내게는 백리세
가의 식솔들 보다 너희들 한 명이 더 소중하다. 그리고 지금의 후퇴는 전
진을 위한 것이다."
사대마군이 일제히 일어나 읍을 하였다. 사해방주와 요동혈랑도 일어나
읍을 했다. 삼혈맹이 지난 수십 년간 무림의 공포로 존재한 것은 결코 우
연이 아님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혈마는 눈을 내리 감고 소매를 떨쳤다.
그러자 사대마군과 악일비 요동혈랑은 조심스럽게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