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서전 (13/95)

  

  13. 서전

  

  하늘도 땅도 어두웠다. 그에  따라 저 멀리 보이는  바다와 하늘은 어둠 

속 혼돈으로 어우러졌다. 

  항주성 교외 운하를 한  척의 쾌속정이 나는 듯이  가고 있었다. 쾌속정 

위에는 열 명이 쉬임없이 노를 저었다. 선두에 한명이 서 있었는데 어둠속

이라서 그 형체는 잘 보이지 않았다. 배가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서 있는 이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운하를 빠져 나와 바다에 도착

하자 정박해 있는 선단이 보였다.

  크고 작은 배들이 아기자기하게 부두에 메어졌고,  조금 떨어진 곳에 한 

척의 거선이 닻을 내리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거선에서 환한 불빛들이 흘

러나와 새벽의 미명처럼 느끼게 했다. 그 주위에는 몇 척의 작은 순시선들

이 등불을 켜놓고 순찰을 돌고 있었다. 

  거대 전선은 거경방의 거경선이었다. 그 거경선에는 방주의 신호기인 거

경기가 매달려 바람에  펄럭였다. 거경선에 거경기가  매달려 있다는 것은 

그 배 안에 거경방주인 해왕 익득신이 있다는 소리였다. 

  쾌속정이 거경선 가까이 가자 좌우에서 물살을 헤치며 세 척의 소형전선

이 다가왔다. 배 위에는 십여  명이 갈고리와 작살 등을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은 등롱을 들어올리고 외쳤다.

  "정지하시오! 우리는 거경방의 방도들이니 안심하고 배를 멈추시오!"

  노를 젖는 이들이 노젓기를 멈추자 한 척이 쾌속정 옆으로 다가왔다. 등

불을 비추어 안을 확인했다.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

  선두에 서 있던 청년이 고개를 돌렸다. 하얀 백의를 입고 있는 소천이었

다. 소천은 품에서 둥근 옥패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그것을 보자 무사들은 

얼른 허리를 숙였다. 

  옥패에는 한 마리 청룡이 구름 위에서  소요하는 그림이 양각이 되어 있

는 청룡령이었다. 거경방이  청룡장에 상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고, 거경방도들은 그 힘의 역학관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어서 안에다 알려라!"

  "그럴 것 없네. 공식적으로 찾아온 게  아니니까. 일을 번거롭게 만들고 

싶지 않네. 숙부님께서는 안에 계시지?"

  "그렇습니다."

  "길을 비켜주겠나?"

  전선들이 황급히 길을 비키고 거경방도들은 읍을 하였다. 그들은 쾌속정

이 거경선에 닿을 때까지 사라질 때까지 허리를 펴지 않았다. 

  

  "왜 하필 저입니까?"

  단우백은 소천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거경방주가 자네는 경계하지 않을 꺼 아닌가?"

  "그럼 암습을 하란 말입니까?"

  "암습 하란 말은 하지 않았네. 그저  조용히 일이 처리되기를 바랄 뿐이

네."

  소천은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말고는 없습니까?"

  "거경방주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그가 경계하지 않을 사

람은 자네밖에 없네."

  "사실이라면 죽이실 겁니까?"

  단우백은 고개를 돌려 소천을 보며 힘없이 말을 토해 내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거경방주 해왕 익득신 선실에서 나오며 부관을 바라보았다. 

  "청룡장에서 청룡령을 가지고 왔다고? 왜지?"

  멋쩍은 듯이 눈만 꿈뻑이는 부관에게서 시선을 돌린 익득신은 고개를 갸

웃했다. 갑판 위에는 수십 개의 등롱이 켜져 있어 대낮 같이 환했다. 그래

서 사람의 얼굴 표정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익득신의 얼굴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으나 곧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것

은 다분히 표정관리를 하는 수준이었다. 스윽, 사다리를 타고 고개를 내미

는 자를 보고 익득신은 껄껄 웃으며 팔을 활짝 벌였다. 

  "이게 누구인가? 소현질 아닌가?"

  소천은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읍 했다.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하하하. 나야 늘 건강하지."

  익득신은 소천의 몸을 꼭 껴안았다. 까칠한 수염을 얼굴에 비볐다.

  "정말 많이 컸구나! 네가 어릴  때 내 수염이 싫다고  도망갈 때가 어제 

같은데……"

  "저도 그렇습니다."

  "자, 들어가지."

  "예."

  둘이 어깨동무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바람에 뒤에 올라오는 십여 

명을 익득신은 보지 못했다. 선실 벽은  비단 휘장으로 장식 되었고, 푹신

한 침대와 발목까지 빠지는 융단이 아늑함을 주었다. 

  한쪽 벽에는 해도와 각국에서 사들인 진귀한 물건들이 즐비했다. 밤톨만

한 진주알부터 특이한 조각품과 천리경까지 있었다. 소천이 그것들을 유심

히 바라보자 익득신이 어깨를 쳤다.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다 가지게. 하하하."

  소천이 손마디를 튕기자 문을 열고 백의  청년이 들어왔다. 백의 청년은 

자신을 바라보는 거경방주를 보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익득신은 자신의 명령도 없이 선실로 들온  청년의 정체가 궁금했다. 행

색을 보아하니 청룡장에서 따라나온 무사 같았는데, 청룡장의 무사들의 규

율은 자신의 수하들보다 엄하면 엄했지 약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명이 없

으면 들어오지 않았다. 

  백의 청년이 태연히 들어와서 자신을 보고  웃자, 익득신은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느낌이 들어 소천을 보았다.

  익득신의 마혈과 아혈, 전신 대혈이 차례로 집혔다. 익득신은 전혀 방비

를 하지 않았고, 소천의 공력이 익득신보다  매우 높았기 때문에 급습으로 

익득신의 혈도를 손쉽게 제압했다. 

  밖에서는 떠드는 소리와  노래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천과 같이 온 

일행들이 거경방의 인물들과 어울려 노는 것  같았다. 나중에 들어온 자는 

선실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헌데 그는 마구잡이로 뒤지는 것이 아니라 선

실의 바닥과 가구들을 두들기면서 소리를 듣고 있었다. 

  몇 군데를 손으로 두들기더니 비단 휘장을 걷고 그 안에 있는 책장을 손

으로 이리저리 만지다가  한곳을 건드렸다. 그러자  책장이 반쯤 돌아가며 

작은 방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청년은 그 안으로 들어가서 각종 서류들과  상자들을 가지고 나왔다. 상

자 안에는 금은 보화와 전표, 은자  따위가 들어 있었다. 서류들을 뒤적거

리더니 한 장 한 장씩 서류를 빼내었다. 

  한 장을 꺼내서 소천에게 건네주었다. 소천은  그것을 받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소천은 그것을 익득신 앞에 내  놓았다. 그때 푸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마리 전서구가 밀실 창가에 앉았다.

  비둘기는 이상함을 느꼈는지 앉자마자 다시 날아올랐다. 그 순간 소천은 

비단 휘장을 길게 찢어 막 날아오르는 비둘기를 휘감아 끌어 당겼다. 소천

은 비둘기의 발목에서 전서를 꺼내 읽었다. 뜻모를 기호들이 나열 되어 있

었다. 

  소천은 전서를 익득신의 코앞에 가져간뒤 익득신의 아혈을 풀었다. 아혈

이 풀렸지만 익득신은 아무말을 하지 않았다.  소천은 무심한 어조로 말을 

물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익득신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소천은 그 전서를 청년에게 주었다.

  "한령주."

  "옛."

  청년은 가볍게 읍을 했다.  오기령주(五旗令主)한충. 청룡장주의 직속으

로 청룡장의 정예 중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오기를 지휘하고 있는 인물이

었다. 오기령은 단우백과  마운룡으로부터 직접 사사를  받아서 그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행동을 한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 실체가 알려진 적은 없었다.  

  "서류들을 모두 지급으로 장으로 보내도록."

  한충은 입을 오므려 가늘고 긴 휘파람소리를  내었다. 잠시 뒤에 창문으

로 한 마리 매가 날아들었다. 한충은 매의 발에 달려 있는 전통 줄을 풀어 

서류들을 묶어서 날려보냈다.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모습이 묻혀져갔다. 

소천은 익득신을 의자에 앉힌 뒤 자신도 그 앞에 앉았다. 

  "한령주. 나가서 지금 거경방의 전선들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아

보게. 또한 비상령을 내리면  시간 내에 얼마나 모을  수 있는지도 알아보

고……"

  "존명."

  한충이 물러가자 소천은 이마를 손으로 받히고  눈을 내리 감았다. 익득

신 또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철썩대는 파도소리와 흘러가

는 바람소리만 들렸다.  간간이 밖에서 떠드는  소리와 뱃사람들의 노랫소

리, 주정소리가 은은히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저 먼 세상의 이야기

만 같았다. 소천은 충혈된 눈으로 익득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엇이 부족하셨습니까?"

  익득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힘도 들어 있지 

않았다.

  "내 수하들은 아무것도 모르네. 아마 알았다면 나를 반대했을 것이네."

  "삼혈맹에서 금제를 가해서 협박을 해왔습니까?"

  익득신은 조용한 어조로 말을 했다. 

  "창 밖을 보고 싶네."

  소천은 이마를 집고 있던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익득신은 고개를 돌

려서 창 밖을 보았다. 보이는 것은 어둠 속 저 멀리 반짝이는 작은 불빛들

이었다. 익득신은 매우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청룡장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 서고 싶었네. 그것뿐이네."

  "야망이 그간의 의리와 정보다도 더 중요했습니까?"

  소천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익득신은 고개를 저었다. 

  "소현질……"

  익득신은 소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죽어 있었다. 방금 전

까지 보여주던 호탕한 기는  다 어디로 갔는지  어두운 회색동자만 초점을 

잃은 채 소천을 바라보았다. 아니 소천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

는 청룡장이라는 괴물을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익득신은 천천히 입을 열

었다.

  "현질은 누군가의 그늘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힘든 일인지 모를 

걸세. 나는 닭머리가 될지언정 소꼬리가 되고 싶지 않았네."

  소천은 눈을 내리감은 채 이마를 집고 있던 손으로 얼굴을 받혔다. 소천

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그렇게 앉아만 있었다.

  

  평원은 끝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어둠 속에 보이는 지평선과 그 지평선

의 끝에서 보내 오는 듯한 불빛이 방향을 잃지 않게 해 주었다. 

  평원의 곳곳에 꼴을 베어 쌓아 놓은 마초들 사이로 수십 명이 빠르게 움

직였다. 흑포를 뒤집어쓰고 있어 어둠 속에  동화가 되었고, 발 소리도 나

지 않았다.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휙휙, 그들은 마초 더미와 더미를 오가면서 사방을 경계했다. 이들의 움

직임이 거의 동시에 멈추었다. 그들 앞으로 몇 필의 기마가 달려오고 있었

기 때문이다.

   두두두. 어둠의 침묵을  깨고 말들은 마초들  사이를 누비며 내달렸다. 

흑포인들은 마초 더미에 몸을 바싹 붙였다. 말들은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

르는지 그들이 있는 마초 더미로 가까이  왔다. 흑포인들은 각기 병장기를 

꺼내었다. 

  두두두 두두두, 네 필의 말은 흑포인들이 붙어있는 마초 더미를 스쳐 지

나갔다. 그들이 지나가자 흑포인들은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내달렸을까. 희미하던 불빛들이 점점  밝게 빛나고, 마구간이 길

게 늘어선 곳에서 말들의 울음소리가 천지적막을 가르고 있었다. 

  딱딱이를 치면서 야경을 도는 야경꾼들의  모습도 어렴풋이나마 보였고, 

여기저기 처진 말뚝과 목책이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건물과 전각들이 보

이자 한 명이 떪떠름한 소리를 냈다. 

  "맹주. 정말로 이곳 낙양마장이 삼혈맹의 지단이란 말씀이오? 나는 도저

히 믿을 수가 없구려."

  중인들 대부분이 동조 하는 모습이었다. 이들은 복우산맥의 줄기를 타고 

급히 내달려 온 반혈맹도들이었다. 그들은 한 명의 흑포인을 보았다. 그는 

단호한 눈빛으로 중인들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낙양마장에는 수백여 명의 무사들이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삼혈맹도

가 아닙니다. 그들의 무공수위는 높지 않아 별 상처 없이 제압을 할 수 있

습니다. 우리가 무사진을 뚤고 낙양마장주를 제압한다면 삼혈맹이 그 모습

을 드러 낼 껍니다."

  중인들은 저으기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흑포인은 그들을 보며 힘주어 말

했다.

  "믿기 힘드실 지 모르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한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냐?"

  중인들은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딱딱이를  들고 있는 네  무

사들이 보였다. 중인들 사이에서  한 명이 그들을  향해서 날아갔다. 그의 

손에는 긴 장창이 잡혀져 있었다. 네 명은  각기 병장기에 손에 갔지만 아

무도 병장기를 뽑을 수 없었다.

  투투툭. 네 명은 등롱과 딱딱이를  떨어뜨리고 쓰러졌다. 모두들 혈도가 

집혔다. 그것을 본 흑포인이 소리쳤다. 

  "자 어서 갑시다. 저들이 방어를 하기 전에요."

  선두의 흑포인이 먼저 신형을 날리자 중인들은 마지못해서 따라 나섰다. 

여기저기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리며  안에서 사람들이 두리번거리는 소리

가 나기 시작했다. 흑포인들이 담장을  타고 넘으면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본 마장 안의 무사들은 고함과 징을 쳐댔다.

  "도적들이다!"

  "복우산의 산대왕들이 내려왔다!"

  징징징 징징징! 요란한 징소리가 마장 안에 울려 퍼지고 너른 마장의 곳

곳에서 병장기를 든 무사들이 뛰쳐나왔다. 그들은  고함을 치면서 뛰기 시

작했지만 신법을 펼쳐서 담장을 뛰어 넘고  나는 듯이 달리는 이들을 추적

하지는 못했다.

  사사삭, 수십 여명의 검수들이 그들의 정면을 막아섰다. 이들은 제법 훈

련이 잘 되어있는지 검진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중인들은 눈에 차지 않

는지 병장기를 휘두르며 대적하지는 않았다. 창왕 언무외만이 앞서 달리며 

기합성을 터뜨렸다. 

  "탓."

  파파파. 수십 수백 개의 창영이 난무를 하면서 검수들의 검을 쳐내기 시

작했다. 따다당 따다당. 그 창영이 스치는 곳마다 검이 허공으로 날아올랐

다. 

  "죽기 싫으면 모두 꺼져라."

  검수들은 그의 무위에 혼비백산을 해서 등을 돌리고 도주를했다. 뒤에서

는 함성과 함께 수십 명이 각종 병장기를 들고 달려왔다. 

  "자, 갑시다."

  중인들은 맹주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내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하나

의 담장을 넘자 수십 명이 한 전각앞 마당에  질서 정연히 도열해 있는 것

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회의를  입고 장도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한 명이 전각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전각의 문 앞은 기단이 

있어 회의인들보다 위에  있게 되는 셈이었다.  그래서 중인들에게 전신이 

드러나 보였다. 비단장삼을 걸쳐 입고  약간 배가  나온 후덕해 보이는 인

상이었다. 그는 수염을 매만지며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이 거평산이 평소에 원한 진 것이 없는데 강호의 협객들께서 이렇게 야

심한 시각에 방문을 하신 것은 어떤 연유이신지요?"

  그의 당당한 목소리에 중인들은 움찔거렸다. 허나  한 명이 성큼 나서서 

거평산을 바라보며 소리 쳤다. 

  "거평산! 나는 반혈맹주다. 네가 삼혈맹의 낙양지단주임은 이미 알고 있

다."

  거평산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흐흐흐.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소?"

  "물론이다."

  중인들 사이에서 창왕 언무외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거평산을 향해 날아

갔다. 회의를 입은 도수들은 일제히 몸을 날려서 언무외를 막아갔다. 무수

한 도들이 허공에서 장막을 형성하며 장창을  막았다. 하지만 장창은 마치 

한 마리 용처럼 도산검림을 누비며 쏘아져 왔다. 도객들은 그 창의 기세에 

사방으로 퉁겨져 떨어져 내렸고 거평산의 눈은 급격히 확대가 되었다. 

  당금 천하에 장창 한 자루로 자신의  수하들의 검막을 뚫고 들어올 사람

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그것에 생각이  미치자 거평산의 잎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창왕 언무외!"

  거평산이 외치는 도중에도  장창은 그를 향해  쏘아져 나왔다. 거평산은 

쌍수를 휘두르며 장창의 권역을 비껴날려고 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창왕 

언무외를 상대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평산의 양손이 새파

래지면서 주위에 얼음이 얼 것 같은 냉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중인들은 그

것을 보자 경악성을 터뜨렸다. 

  "청강마수!"

  무림삼대수공 중 하나인 청강수에 살기를  가미시킨 것이 청강마수였다. 

원래는 청강수라는 도가의  비전이 마도에 흘러들어가  청강마수로 변질이 

된 것이다. 중인들은 거평산이 펼치는 그 한  수로 맹주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중인들이 경악성을 터트릴 사이도 없이 회의 도객들이 도

를 휘두르며 달려 들어왔다. 사방에서 낙양마장의 무사들이 꾸역꾸역 밀려

오기 시작했다. 중인들도 이제 병장기를 힘주어 꼬나쥐기 시작했다. 

  거평산은 쌍수를 휘두르며 창왕 언무외의  창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

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몸은  창영에 가려졌다. 뒤로 

물러나던 거평산은 등뒤에 기둥이  와서 닿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창이 

그의 눈 앞에서 찔러 왔다. 거평산은 뇌려타곤의 수법으로 장창을 피했다. 

  그 순간 장창은 그대로 기둥을 꿰뚫었다. 그 기둥은 아름드리 나무의 원

목으로 세운 것인데도 장창에 그냥 관통이 된 것이다. 그틈을 타서 거평산

은 전력을 다해서 창왕 언무외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쌍수에는 자신의 필

생 공력이 담겨져 있었다. 창왕 언무외는 눈가에 미소를 띄우면서 뒤로 물

러났다. 거평산은 그런 언무외의 눈을 바라보면서 무언가 잘못이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창왕의 양손은 비어 있어서 큰 손해를  보는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눈가

에는 승자의 빛이 어려 있었다. 거평산은  순간적으로 공력을 거두려고 했

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판단에서 오는 자신도  모르는 행위였다. 그때 

그는 등에서 가는 경기를 느낄 수 있었다.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한 경

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화끈한 느낌을  동반했다. 그리고 푹 하는 소

리와 함께 자신의 가슴에서 붉게 물든 창머리가 삐죽 튀어나오더니 계속해

서 빠져 나갔다. 길다란 장창은 그의  몸에서 신속히 빠져나오더니 창왕의 

손에 가서 쥐어졌다. 거평산은 자신의 상처를 보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창왕 언무외를 바라보았다. 

  "이기어창이라는 것도 있었소?"

  "허허허. 이기이검도 있고 이기어도도 하는데 장창이라고 못할 건 뭐 있

는가? 병장기의 명칭이나 그 크기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일세."

  거평산은 그런 창왕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의 몸이 쿵 소리를 내며 

무너졌기 때문이다. 하기사 심장이 꿰뚫리고 살아  남을 사람이 어디에 있

겠는가? 창왕은 전장을 보고 소리 쳤다. 

  "거평산이 죽었으니 우리는 모두 물러갑시다.  내일 날이 밝으면 모두들 

진상을 알 것이오."

  창왕의 말에 원진을 구축한 채 방어에만 몰두하던 이들이 일제히 도객들

에게 달려들었다. 창왕 언무외는 그들의 포위망  돌파를 돕기 위해서 도객

들을 공격했다. 도객들이 구축하고 있던 포위망은  안과 밖에서 협공을 당

하자 금새 한 곳이 뚫렸다. 중인들은 그곳으로 급히 내달았다. 

  도객들이 달려들자 언무외가  장창을 휘둘러 그들을  막았다. 수백 개의 

창 머리가 순식간에 주위를  뒤덮자 도객들과 무사들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창왕 언무외는  중인들이 담장을 다 넘은  것을 보고 광소를 

터뜨리며 외쳤다.  

  "하하하 하하하! 거평산은 삼혈맹의 주구였다.  모두들 거평산이 가지고 

있던 재화들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고향으로 내려가라. 내일까지 

이곳에 남아있는 자들은 나 창왕 언무외가 용서치 않으리라."

  언무외는 대갈일성을 터뜨리고  담장을 넘어 내달렸다.  저 멀리 달리고 

있는 자들을 따라 잡기 위해서 신법을  최대한 펼쳤다. 남아있는 무사들은 

창왕 언무외의 말에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도객들은 급히 어디론가 달려

갔다.

  

  수십 척의 전선은 어둠을 벗삼아 회수의  물길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깃발은 올라가있지 않았고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흡사 유령선처

럼 배들은 그렇게 회수의 물결을  타고 있었다. 그 중  한 배에는 한 명이 

바람을 맞으며 혈포를 휘날렸다. 주위가 어둠에 잠겨 있어 혈포의 색은 선

명히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오히려 더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한줄기 바람

이 그 의 뺨 위를 스치자 뺨 위에 나 있는 검흔이 꿈틀거렸다. 저벅 저벅, 

한 명이 그 옆으로 걸어와서 그를 바라보았다. 

  "대군께서는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적천마군은 그를 바라보았다. 훈훈한 미소를 띄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사해방주 악일비였다. 적천마군은 뺨에 난 검흔을 쓰다듬으며 말을 했다. 

  "이 흔적을 남긴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소."

  악일비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누가 그런 흔적을 남겼습니까? 물론 그자는 죽었겠지요?"

  적천마군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어둠 때문에  수면이 보이지 않는 강

물에게 시선을 주었다. 악일비도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에 악일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하외다. 대군 제가 대군의 아픈 데를 건드린 모양이군요."

  "아니오. 방주의 잘못이 아니오. 이 상처는 산동육가의 가주였던 육정산

에게 당한 상처요."

  악일비는 해연이 놀라며 말을 했다. 

  "그럴리가요? 육정산은 강호에 그렇게  명성이  알려진 고수가 아니었는

데요? 그가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악일비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육정산의 명성에는 

삼혈맹의 치욕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천마군은 별로 모욕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고수들이 적지  않게 있기 마련이오. 육정산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이었소. 정말로  대단한 인물이었소.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을 만큼."

  적천마군은 흐릿한 별들이 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어둠 

천지라 작은 별들이 희미한 빛을 힘겹게 토해내었다. 악일비는 더 이상 묻

지 못하고 옆에 서서 전선들이 나아가는 것만 바라보았다. 이제 모래 저녁

이면 사해방은 초거대 방파로 급성장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해방의 주인

은 바로 자신이었다. 악일비는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파라라 파라락. 책장이 바람을 일으키면서  넘어갔다. 그 책장을 넘기는 

손은 여인의 손처럼 매우 고왔다. 그  옆에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는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바로 단우백이었다.  책장을 넘기고 서류들을 뒤적

이는 사람이 바로 상관평이었다. 상관평은 서류들을 훑어보고 다시 비밀문

자로 씌어진 전서들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정보가 부족합니다. 사해방과  그 배후세력인 삼혈맹이  곧 움직인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어디로 올지는 아직 부족합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한 명의 청년이 들어섰다. 그 청년은 청의무복에 백색

피풍의를 걸치고 검은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청룡장의 정무사라면 누구나 

하는 복장이었다. 하지만 머리의  두건은 푸른 건이 아닌  검은 건을 쓰고 

있었다. 청룡장에서 검은 건을  쓰는 경우는 전투에  나갈 때였다. 청년은 

청룡단을 이끌고 있는  동방후였다. 양산박에 모습을  드러내었던 두 청년 

고수 중 한 명이었다. 동방후는 읍을 했다.

  "청룡단의 출정준비가 모두 끝이 났습니다."

  단우백은 동방후에게 명령을 내렸다. 

  "즉각 청룡선을 이끌고 장강으로 가게."

  단우백의 말에 상관평이 말을 더 붙였다. 

  "장강 하구에 진을 치고 있으되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장주님의 명령이 없

이는 움직이지 말게. 설사 장강 상류의  분타와 지단들이 공격을 받는다고 

해도 말일세."

  "그건……?"

  동방후는 뭐라고 반문을 하려고 하였다. 단우백은 동방후에게 부언했다. 

  "동방단주의 마음은 아네.  하지만 지금은 비상시국이네.  아마 제 일차 

왜구와의 대전보다 더 심한 전투가 될 걸세.  어쩌면 자네들은 물론 본 장

의 무사들은 한 명도 살아 남지 못할지 모르네."

  동방후의 안색이 딱딱히 굳어졌다. 당금 천하에서 자신들을 섬멸할 만한 

곳이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평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은 더욱 그의 가슴을 옥죄었다.

  "천기각에 가서 일급병기를 받아가게."

  동방후는 떠듬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것까지 사용해야 합니까?"

  일급병기, 아니 천기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 천기각

에서도 비밀리에 취급하는 병기가 있었다. 동방후는  그게 무언지 알고 있

었고 어떻게 쓰는지도 알고 있었다. 청룡단에도 그것을 쓸 줄 아는 인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동방후는 일급병기까지 써야 한다는 말에 더  이상 아무말 하지 않고 읍

을 하고 물러났다. 일급  병기를 써야 한다면  그만한 위기라는 뜻이었다. 

일급 병기는 청룡장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

다. 

  

  소천은 비틀거리며 선실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동쪽 하늘에 새벽별이 

떠올랐다. 거경선의 갑판 위에는  아직도 서너 명이 술판을  벌인 채 술을 

먹었고, 그 옆에는 몇 명이 골아 떨어진 채  누워 있었다. 선실 안에서 굵

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매우 커서  밖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들

을 수 있었다.  

  "소현질! 어디가? 같이 한잔 더 하자구."

  소천은 손을 흔들며 선실 밖으로 나와서  난간을 잡고 바닷물에 대고 왝

왝대기 시작했다. 한쪽에서 술을 먹고 있던 자들이 낄낄대고 웃었다. 소천

은 난간을 잡고 다시 왝왝 거렸다.  그때였다. 선실 안에서 돌연 고함성과 

물건이 부딪치는 소리,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자들이 몸

을 일으켜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 무언가 풍덩 빠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선실 문이 병장기에 의해 부서져 나가고  실내가 환히 드러났다. 실내는 

여기저기 비단이 찢겨져 있었고 곳곳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 

한 명이 가슴을 부여잡고 벽에 기대어 있었다. 중인들이 우르르 달려갔다. 

  "방주님!"

  "자객이다. 자객이야!"

  중인들 중 몇 명은 밖으로 나가서 쓰러져 있는 무사들을 깨웠다. 소천은 

중인들을 헤치고 얼른 익득신의 상처를 지혈했다.  소천은 혼절해 있는 익

득신의 맥을 잡더니 전신의 혈도를 집기  시작했다. 익득신은 고개를 들며 

뭐라고 하려다가 다시 혼절을 했다. 밖에서 소란이 계속 되었다.소천은 익

득신을 침상에 눕히고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어서 자객을 추적해서 잡으십시요. 그리고 극비리에 비상경계령을 내려

서 전 무사들을  집결시키십시오. 이 사실이  밖으로 흘러나가면 방주님의 

체면에 크게 손상이  가니 휘하 무사들도  전혀 알지 못하게  하셔야 합니

다."

  중인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가서 수하들을 진정시키고 바

닷물로 뛰어든 자객을 찾기 위해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소천은 창 밖

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한령주가 알아서 도망을 치겠지.'

  소천은 부상을 당한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익득신을 바라보았다. 

  '익숙부! 한 며칠 푹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뀌어 있을 겁니다.'

  소천은 익득신의 가슴에 난 검상에 금창약을 발라주며 그렇게 속으로 말

했다. 익득신이 자객에게 당했다는 것은  소천이 짜낸 계획이었다. 거경방

이 아무리 청룡장의 그늘에 있다고는 하지만 청룡장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문파는 아니었다. 게다가 거경방주인 익득신을  포로로 잡은 것은 아

무리 설명을 해도 단기간 내에 납득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소천

은 부득불 이런 꾀를 생각해 낸 것이다.

  익득신을 부상을 입혀 며칠  실신을 하게 하고  그것을 자객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운 것이다. 그 자객은  물론 오기령주 한충이  변장을 한 것이다. 

또한 소천이 갑판으로 나왔을 때 안에서 큰 소리로 부른 것은 익득신이 아

니라 오기령주인 한충인  것이다. 그때 익득신은  혈도가 집혀져서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의술에 밝은  이가 익득신의 맥을 

잡았다면 그리 큰 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겠지만  소천이 다른 이들을 

물리치고 맥을 잡았기 때문에 그것도 위장을 할  수가 있었다. 이 모든 것

은 소천이 익득신과 나이를 떠나서 막역한 사이라는 것을 거경방도들이 알

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천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내쉬고 이

불을 덮어 주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원!'

  

  저 멀리 검은 물결이 하늘과 섞여서 요동을  쳤다. 하늘 위에는 몇몇 별

들만이 남아 외로이 반짝였다. 그 바다 위에는 하나의 섬이 웅크리고 있었

다. 그리고 그 섬을 향해서 수십  개의 불덩이들이 모여 들어갔다. 불덩이

들은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하나의 도형을 그리며  나갔다. 그 도형들은 수

십여 척의 소형 연락선들이  거경선으로 가고 있으니  공격을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 배 위에는 지급 귀환령을  받고 오는 거경방도들과 수뇌부들

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거경선 주위에 철통같은 경계망이 펼쳐진 것을 보

고 불안감을 느끼며 배 위에 올라왔다.

  배 갑판은 깨끗이 닦여져 있었고 수십  개의 삼각 깃발들이 사방에서 나

부꼈다. 거경방의 수뇌부는 깃발들을 보고 안색을 확 바꾸었다. 저 깃발들

은 전투시에 사용하는 신호기들이었다. 배와 배  사이는 거리가 멀어서 징

소리나 북소리로도 의사전달이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대낮에는 깃발로 신

호를 삼았고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삼았던 것이다. 중인들 수군대었다. 

그때 나이가 든 노인이 조용히 말했다.

  "왜구라도 처들어 온 모양이오."

  중인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떡였다. 왜구들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오지 않

고서는 이 일대에서 거경방을 위협 할만한  조직은 없었다. 물론 청룡장은 

제외를 하고 말이다. 

  "모두들 출전준비를 서둘러라. 어서!"

  키를 잡고 있던 수장이 소리를 치자 모두들 배에 돛을 내리고 닻을 올렸

다. 그리고 노를 젖기 위해서 갑판 아래로 내려가고 병장기를 꺼내놓고 쇠

노의 줄을 당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배는 순식간에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선실 안에 들어온  수뇌부는 해연이 놀랐다.  침상에는 익득신이 혼절한 

채 누워 있었고 바닥에는 아직 지우지  못한 핏자국이 보였다. 회의탁자의 

상석에는 소천이 우울한 기색으로 앉아서 막 들어온 이들에게 자리를 권했

다. 소천이 상석에 앉아 있었지만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

을 깨고 소천이 입을 열었다. 

  "방주님께서는 오늘 새벽 삼혈맹의 자객의 급습을 받고 혼절을 하셨습니

다. 다행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십니다."

  "아!"

  중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몇  명은 삼혈맹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그 삼혈맹의 놈들 늘  눈에 거슬렸소이다. 우리와  영역이 같지 않아서 

그 동안 참고 지내왔는데 이자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 왔으니 본때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전력은 육상에서는  그리 큰 힘을  보이지 못하오. 우리 

힘만으로는 삼혈맹에 복수하기에는 벅차오."

  "이번 일은 모두 저희 청룡장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중인들의 시선이 모아지자 소천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삼혈맹은 우리 청룡장을 치기 위해서 사해방과 손을 잡고 공격해 올 준

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럴 수가……?"

  중인들의 여기저기서 탄성들이 터져 나왔다. 소천은 얼굴을 더욱 찌푸렸

다. 

  "삼혈맹이 사해방과 손을 잡고 쳐들어오면 우리 청룡장의 힘만으로는 버

티기가 힘이 들어 이렇게 익숙부님을 뵙고 도움을 청하려고 왔는데 익숙부

님은……"

  소천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손 사이로 파묻었다. 그리고 어깨를 들

썩였다. 더 이상은 거짓말을 하기가 힘이  들었고 얼굴이 붉어졌기 때문에 

고개를 파묻은 것이다.  그러나 중인들은 소천이  오열에 복바쳐서 눈물을 

흘리는 줄 알고 가슴이 모두들 찡해졌다. 

  한명이 벌떡 일어났다. 오른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는 자로 넒은 얼굴에 

덥석한 수염이 자랑인 모습이었다. 그는 늘 오른 눈의 상처를 영광의 상처

라며 자랑하고 다녔기 때문에 좌목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삼혈맹이 사해방과 손을 잡은 것은 청룡장을 치기 위함일 것이오. 그러

나 사해방이 삼혈맹과 손을 잡은 것은 우리 거경방을 치기 위함이오."

  중인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떡였다. 사해방과는  오랫동안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한 적이 많았지만 궁극적으로 두 문파는 서로 이름이 다른 문

파였다. 또한 그 세력권이 바다와 운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쪽의 밥그릇이 커지면 다른 한쪽은 작아질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사해방

의 영역이 커져서 가뜩이나 불만이 많던  거경방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한

마디씩 해대기 시작했다. 좌목의  옆에 앉아 있던 자가  큰 소리로 떠들었

다. 

  "그렇소이다. 사해방이 백리가를 무너뜨리자 이제는 우리의 영역을 탐낸 

것이오. 게다가 우리와 청룡장의 관계를 사해방은 잘 알고 있소이다. 청룡

장이 공격을 당하면 우리가  당연히 나가서 도울  것을 알면서도 청룡장을 

공격하려는 삼혈맹을 돕는다는 것은 우리를 적대시하겠다는 뜻이오."

  "이 기회에 사해방을  쓸어버리고 강소 운하와  회수의 수로권을 우리가 

장악을 합시다."

  "삼혈맹도 초토화 시켜 버립시다!"

  "방주님의 복수를 해야 하외다!"

  사람들은 분분히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모두들  주먹을 불끈 쥐고 

탁자를 치거나 허공에서 마구 흔들어 대었다. 어떤 이는 적이 앞에 있기라

도 하는 듯이 고함을  쳐댔고 탁자를 장력으로  내쳐서 부셔버리기까지 했

다. 탁자가 부서지고 쪼개지건만 중인들의  성토는 끝나지 않았다. 거경방

은 목소리가 커야 용기가 있고 이렇게 손짓발짓을 해야 용맹하다고 보이는 

줄 아는 것 같았다. 소천은 나직한 소리로 말을 하였다. 

  "그럼 누가 지금 이 난국을 조정해서 헤쳐 나가실 겁니까?"

  중인들은 침묵을 하고 서로 기색을 살폈다. 좌목이 다시 나섰다. 

  "부방주님께서 계시다면 당연히 부방주님께서 맡아야 하지만 지금 두 척

의 거경선과 다섯 척의 전선을 이끄시고 해남도로 교역을 하러 떠나셨습니

다. 예상보다 일찍 떠나서 지금 그 선단을 회항시킨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 다음은 여기  있는 이분들이 모두  우열을 가리기 힘든  위치에 계십니

다."

  그 사실은 소천도  알고 있었다. 거경방주가  평소보다 일찍 부방주에게 

두 척의 거경선과 선단을 주어  해남도로 보낸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

다. 우선 거경방의 부방주가 친 청룡장파였고  그들이 주로 활동하는 무대

가 장강하구와 동해였기 때문에 동해에서  움직이는 사해방의 종적이 쉽게 

발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천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

다. 중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염소수염을 하고 잔  주름진 얼굴을 한 

노인이 소천을 보았다.

  "우리들 중 누가 위에 선다면 서로  용납하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청룡장의 소공자님께서 맡으신다면 누가 승복을  하지 않겠습니까? 청룡장

의 소공자님은 방주님의 의현질로 아드님이나 마찬가지이신 분입니다."

  소천은 얼굴이 화끈해지며 고개를 돌려서  익득신을 바라보았다. 익득신

은 아직 혼수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소공자께서는 해전에도 밝으시니 우리가 모두 승복

할 수 있을 겁니다." 

  중인들은 앞을 다투어 소천을 추대했다. 그것은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

못 되면 소천에게 모든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바다에서 선박을 

지휘하는 것은 각 전선의 선장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인 지휘권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고 그 책임은 소천에게  지우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천은 자리에 일어나서 가볍게 예를 취했다.

  "방주님께서 쾌차하시고 부방주님께서 해남도에서 돌아오실 때까지만 잠

시 지휘를 맡겠습니다. 우선 방의 전력을  장강 하구의 거경방 전략기지로 

집결을 시키십시오. 단 이 일은 극비를 요하는 일이니 비밀엄수를 지켜 주

시기 바랍니다. 또한 방주님은 저희 청룡장으로  보내어 명의의 치료를 받

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중인들이 일어나서 모두들 읍을 하였다. 

  푸드덕 푸드덕. 수십여 마리의 전서구들이 날이 밝아오르는 붉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하늘과 바다는 모두 붉게  물들었다. 저 멀리 시뻘건 태

양이 무서운 속도로 치솟아 올랐다. 바다는  붉게 타오르며 부글부글 끓었

다. 소천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거경방주 익득신

을 실은 쾌속정이 저 멀리 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배에는 청룡장에

서 데려온 무사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익득신은 비밀리에 청룡장까지 

데리고 갈 것이다. 타는 바다 한가운데로 거경선과  그 주위에 세 척의 전

선이  포말을 일으키며 전진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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