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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백리무군 (11/95)

  

  11. 백리무군

  

  다 떨어진 옷에 손에는 죽장을 하나, 등에는 여기저기 기운 마대를 짊어

지고, 허리에는 일곱 번 매듭을 지은  새끼줄이 매달려 있었다. 매듭은 그

가 개방의 제자이고 또한 장로라는 신분임을 뜻했다. 

  그의 얼굴은 매우 우울해 보였다. 그는  백리세가의 식솔들이 납치된 직

후 그들에 대한 추적에 나섰던 개방장로인 취선개였다. 백리세가와는 오랜 

친분이 있는 인물로 백리장천의 죽음을 가장 애석해한 개방도 중 한사람이

었다. 

  취선개가 짊어진 마대는 땅에 끌릴 듯이  늘어져 있었다. 이른 새벽이라

서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적었다. 취선개는 한 거택의 문 앞에 서더니 

죽장으로 문을 세 번 두드렸다. 그리고 다시 두 번을 두드리고 다시 세 번

을 두들겼다. 그러자 문이 열렸다. 취선개가  들어서자 두 명의 거지가 문

을 닫고 읍을 하였다. 

  "장로님을 뵙습니다."

  "백리소저는?"

  "아직 식음을 전폐하고 있습니다."

  취선개가 고개를 끄떡였다. 

  "충격이 컸겠지."

  취선개는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은 개방에 우호적인 부호

의 별장으로 개방에서  잠시 빌려쓰고 있었다.  백리소연이 개방에 있기는 

뭣해서 이곳을 빌려 백리소연이 거처하게 하고 개방의 고수들로 하여금 지

키게했다. 취선개는 한  전각 앞에 멈추어서  나지막한 소리로 백리소연을 

불렀다.

  "질려! 들어가도 되겠는가?"

  "예……"

  힘이 없는 대답에 취선개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보통 여인

의 규방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정면 팔선탁에는 십여송이의 꽃이 꽃혀진 화

분이 보였다. 그 너머 침상에는 창백한 안색의 소녀가 누워 있었다. 

  풀어헤친 머리는 이불 속에 숨었고, 양 볼은 움푹 들어갔고, 두 눈은 붉

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손수건이 꼬옥 쥐어져 있었는데 취

선개가 그것을 보자 얼른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취선개는 가슴이 저며오는 것을 느꼈다. 취선개는  침상 옆에 앉아서 백

리소연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질려. 본 방에서 전력을 다해서 찾고  있으니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삼혈맹이 그 자리에서 손을 쓰지 않은 것은 그분들이 필요했기 때문

이지. 당분간은 모두 무사할 것이네."

  백리소연은 고개만 끄떡였다. 

  "이제는 뭣 좀 먹어야지." 

  백리소연은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고개 젓는  것도 힘이 드는지 가뿐 

숨을 내쉬었다. 취선개는 그런 백리소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 쉬거라. 곧 다시 오마."

  취선개의 말에 백리소연은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았다. 취선개는 뒤

를 자꾸 돌아보다가 문지방을 넘어 섰다.  가을 끝이라 그래서인지 문지방 

앞에 있는 나무들은 모두 헐벗었다. 주위에는 낙엽들이 한없이 뒹굴고, 꽃

들은 이미 시들대로 시들었다. 취선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티 

한점 없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빌어먹을! 어디 있는 거야? 이 친구……"

  취선개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몇 개의 낙엽이 그

의 발잔등 위로 굴러 왔다가 냄새가 나는지 황급히 도망을 쳤다. 

  

  따사로운 햇볕이 내려 쪼이는 시냇물 가에  한 명이 앉아서 발가락을 꼼

지락 꼼지락 거렸다. 벌어진 발가락 사이로  손가락이 쓰윽 하고 지나가고 

시커먼 손톱이 그 위를 박박 긁으면 때가 한 움큼씩 밀려 떨어져 내렸다. 

  손때가 잔뜩 묻은 죽장과 걸래같은 마대가 옆에 따로 놓여져 있었다. 몸 

위로 그림자가 깔리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쥐방울만한 얼굴에는 수염을 뽑아 놓은  듯한 흔적들과 입가에 잔주름이 

보는 이의 눈살을 찌뿌리게 했다. 

  그림자를 이루고 있던 사내의 침이 그의 얼굴에 튀겼다. 

  "이 빌어먹는 놈아! 어디 갔다가 인제 온 거야?"

  그는 발싸개로 발을 감쌓다. 

  "너는 내 발싸개보다 못한 놈이야!"

  "뭐, 어쩌고 어째? 네 발싸개는 거저 줘도 안 갖는다."

  그는 쯔쯔 하는 소리와 함께 애처롭다는 표정으로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앞에 서 있는 칩입자도 그 못지 않은 상거지로 취선개였다. 

  발싸개로 발을 싸는 거지는 취선개의 유일한 천적인 건곤신개였다. 개방 

입문을 취선개보다 한달 일찍해서 늘 선배대접을 받고 있었다. 

  개방의 장로 중에서 가장 발이 넓고 정보수집에 뛰어나고 입심이 세다고 

소문이 난 인물이었다. 발싸개로 발을 싸던  건곤신개는 이리저리 몸을 뒤

척이며 말했다. 

  "어디다 뒀더라?"

  "뭐 말이냐?"

  "백리세가의 가주인 백리무군에  관한 건  말이다. 내가  챙겨 두었었는

데……"

  취선개는 그의 옆에 달라붙었다. 

  "뭐? 어디…… 그 빌어먹을 놈이 어디 있다는 거야?"

   취선개가 바싹 다가오자 건곤개는 이마를 탁 쳤다. 

  "아하! 잊어 먹지 않기 위해서 발에다 싸매었었지!"

  그 말에 취선개는 냉큼  발싸개를 낚아채서는 저만치  떨어져서 그 안에 

씌어진 글자들을 읽기 시작했다. 건곤신개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누런 가래가 땅바닥에 떨어지며 덩어리를 이루었다. 건

곤신개는 돌을 들어 그  가래를 직직 문지른 뒤에  돌은 휙하고 내던졌다. 

취선개의 얼굴은 딱딱히 굳어져 갔다. 

  "이게 다야? 이게 네 실력이란 말이야?"

  취선개는 눈을 부릅뜨며 건곤신개를 보았다.  건곤신개는 검지로 콧구멍

을 후볐다.

  "그게 다야."

  취선개는 발싸개를 건곤신개의 얼굴에 내다  던졌다. 턱! 건곤신개는 그

것을 잽싸게 잡아서 자신의 발을 싸기 시작했다. 

  "그 정도는 나도 하겠다. 이 빌어먹지도 못할 놈아!"

  건곤신개는 발을 다 싸매고 말을 했다. 

  "백리무군이 세가를 떠난 것은  삼년 전 봄이었지.  그때는 모두들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는 줄 알았지. 헌데 세가를  떠난 지 사흘만에 백리무군은 

종적이 묘연해 졌네. 한  달이 지나자 모두들 어디서  연공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지. 반년이 지나자 백리세가에서 사람을 풀기 시작했네."

  "그건 강호가 다 아는 사실 아니냐?"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취선개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건곤신개의 

입에서 무언가가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건곤신개는 어험 하며 헛기

침을 했다. 그 꼴을 보자 취선개가 우거지상을 썼다. 

  "그래. 이 빌어먹는 놈아. 내가 잘못 했으니 어서 말을 해봐라. 너는 몸

져누워 있는 소연이가 불쌍하지도 않냐?"

  건곤신개는 혀를 차고 말을 이었다. 

  "너는 왜 백리가주가 왜 갑자기 가문을  떠났다고 생각하느냐? 또 왜 근 

삼년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고 생각하느냐?"

  "거기에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으니까  떠났을 거 아니냐? 일가의 

가주가 어디 몸을 함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무슨 중대한 일

이……"

  거기까지 말을 하던  취선개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건곤신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너는 백리가주가 왜 집을 떠났는지 알아냈느냐? 그랬구나! 알아냈

어."

  취선개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건곤신개는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취선개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이게 누굴 갖고 노나."

  "왜 떠났는지는 알아 내지 못했지만 그때  함께 사라진 사람들의 명단은 

알아내었다."

  "함께 사라져?"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백리가주가 집을 떠난  것을 전후해서 한달 내에 

사라진 사람들을 추적해 놓은 자료를 뒤져보았다."

  "그게 누구냐?"

  건곤신개는 취선개를 바라보며 입을 천천히 열었다. 

  

  "환상수 종명, 신기수사, 신안 낭리백, 천약성수 하백 등입니다."

  소천은 그렇게 말을 하는 상관평을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과연 문상이 모르는 일이  있을까? 도대체 문상의  능력은 어느 정도일

까? 저런 능력으로 대사형  밑에 있다는 것도  의문이군. 그 머리만으로도 

능히 천하를 놓고 뭇 군호들과 다툴만한 인물이다.'

  소천은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 옆에 있던 서왕이 바로 반박했다. 

  "문상. 백리가주가 실종되기 전 후 한달 사이에 그들 네 명만 사라진 것

은 아닐 겁니다. 헌데  어째서 문상께서는 그들 네  명이 백리가주와 함께 

사라졌다고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상관평은 그런 질문이 들어오리라는 것을  알았는지 섭선을 부치며 웃었

다. 

  "몇 가지 연관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환상수 종명은 백리무군과는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그의 자랑은 비도술이지만 그보다는 경공이 뛰어납

니다. 백리무군이 어떤 일을 한다면 이  종명은 빼놓지 않을 겁니다. 무엇

보다도 강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니까 사라져도 누구하나 이상

하게 여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서왕은 상관평의 말에 약간 언성을 높이며 질문을 했다.

  "하지만 신기수사나 신안 낭리백 등은 백리무군과 일을 같이 할 만큼 친

한 사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이들을 집어넣은 것은 이들은 현 강호에서 잠적할 어

떤 이유도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백리가주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강호에서 자신의  분야에는 각기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간 인물들입니다. 신기수사는  기관토목과 진법에서, 신안은 

추적술과 한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 기억력에서, 천약성수는 의술에

서 모두 일가를 이룬 대가들입니다. 누군가가  비밀리에 무슨 일을 진행시

키고 싶다면 이들보다 더 좋은 인재들은 구하지 못할 겁니다."

  단우백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며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이것은 그

가 심사숙고를 할 때 늘 하는 버릇이었다. 그러다 상관평을 보고 물었다. 

  "그들의 실종…… 아니 잠적은 무슨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시오?"

  상관평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이유는 잠적한 이들과 삼혈맹만이 알고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단우백과 서왕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게 우리 청룡장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겁니까?"

  소천의 질문에 상관평은 섭선을 흔들며 대답했다. 

  "저는 그가 반혈맹주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반혈맹주라면 

무림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될 겁니다. 백리세가를 

섬멸한 것에 대한 보복을 하겠지요. 그리고  그가 반혈맹주가 아니라고 하

더라도 그의 잠적은 충분히 관심을 가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추적반을 가

동해 놓았지만……"

  상관평은 말끝을 흐렸다. 삼혈맹이 추적을 했다가 실패를 했다면 자신들

도 성공을 하리라는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다.  성공을 장담하지 못하는 일

을 언급하는 것은 상관평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누가 그를 추적할 수 있겠습니까?"

  서왕은 자못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상관평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지

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삼혈맹도 그를 추적하지 못하니까 본가를 쳐서  인질들을 잡은 게 아니

겠습니까?"

  인질까지 생각이 가자 서왕은 이마를 탁 쳤다. 

  "아이쿠! 그럼, 정말로 큰 건이군요. 삼혈맹이 인질을 잡아서 쓸 생각을 

하게 할 정도라면요."

  단우백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치다가 주먹을 쥐었다. 

  "문상.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된다는 것이오.  반혈맹과 삼혈맹과 격돌을 

하게 되면 난세가 오는 것이 아니오? 난세가 오기에는 지금의 천하는 너무 

조용한 편이 아니겠소?"

  "팽팽한 균형으로 이루어진 평화라면 한 축이 무너지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져들게 되는 겁니다. 조만간 강호에 일대 피바람이 불게 될 

겁니다. 먼저 당하는 쪽은 삼혈맹이 될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소?"

  "생색만 내면서 모두 지쳐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어차피 같은 

백도에서 인정도 안 해주는 곳이니 삼혈맹을 칠 때, 우리더러 오라는 소리

는 안할 겁니다. 둘이 피터지게 싸우게 놔두는 겁니다. 그 뒤에는 본 장의 

독존천하가 자연스럽게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소천은 입을 굳게 다물었고, 단우백은 희미한 미소를 띄었다. 서왕은 싱

글벙글이었다. 상관평은 그런 세 명을 보며 힘주었다. 

  "지금은 힘을 모아둘 때입니다. 장주!  만금을 아끼시지 마시고, 스스로 

낮추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 동안 황금을 긁어모으고 무사를 양성하여 

힘을 키운 것은 오늘같은 날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강호의 뭇 영웅호걸

과 효웅들은 오직 한가지를  못했기 때문에 패배의  쓴잔을 들이킨 것입니

다. 기회가 올 수록,  사람이 모일수록 낮추십시오. 그럼  그들이 무림 제 

일인자의 자리를 가져다가 장주께 바칠 것입니다."

  단우백은 굳게 다문 입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알겠소이다. 내 만금을 아끼지 않겠으며 스스로 낮추는 것을 게을리 하

지 않겠소이다. 사제들과 문상께서 도와주신다면 천하에 못할게 무엇이 있

겠소?"

  소천은 얼굴을 더욱 굳혔다. 자신의 대사형은 이제  돌아 올 수 없는 다

리를 건너고자 하는  것이다. 야망이라는, 무림제일인자라는  야망의 다리

를…….

  

  산길은 누가 다듬었는지 매우 깔끔했다. 가을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주위

의 나무들이 가벼워 보였고, 산새들은 재잘대며 잘도 떠들었다. 

  사람이 가까이 지나가는데도 놀라서 뛰어 오르는 새들은 보이지 않았다. 

정돈된 길을 따라가자 차밭에서 한 명이 바구니를 들고 차 잎을 따는 것이 

보였다.

  소천은 빙그레 웃었다. 자신이 어릴 때는  이곳에서 사부님이 저렇게 차

를 따고 계셨었다. 지금은 이사형이 차를 따고 있는 것이다. 

  백포와 입가에 서린 잔잔한 미소까지 사부를 빼다 박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소천은 한가로이 소일을 하고 있는 이사형을 담담한 눈길로 보았다. 

  이사형의 일을 방해 하지 않기 위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도 담장을 

손보아서 그런지 매우 깨끗해 보였다. 

  그때 그의 어깨를 툭  치는 손이 있었다. 소천은  해연이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전에도 이렇게 자신의 어깨를 쳐주던 손이 있었다.

  "사부님!"

  하지만 그 손의 임자는 마운룡이었다. 마운룡은  환한 웃음을 띄면서 소

천의 등을 감쌌다. 

  "내가 직접 볶아  놓은 차가  있네. 아직 나도  그 향을  맛보지 않았는

데…… 알고 보았더니 사제를 위한 것이었군. 하하하!"

  "행복해 보이십니다."

  "다 버리게. 이제서야 사부님께서 여기에서 이렇게 차나 가꾸면서 왜 그

렇게 즐거워 하셨는지 알 것 같네."

  차에는 여덟 가지 맛이  있다고 한다. 산뜻하고,  감칠맛나고, 달고, 시

고, 짜고, 맵고, 떫고, 쓴 여덟 가지 맛이다. 

  한번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맛과 향과 색이 계속 

변했다. 처음에는 산뜻하며 달다가 나중에는 맵고 쓰게 되는 것이다. 그래

서 어떤 이들은 차의 맛을 인생에 비유하기도 한다. 

  소천은 차를 그냥 물 대용으로 마셨지  그 깊은 맛을 음미하지 못했지만 

마운룡은 달랐다. 마치 차가 전부인양  그렇게 조심스럽게 차를 다루었다. 

마운룡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사제도 나이가 좀 들면 차 맛을 알 것이네, 지금은 아마 산뜻하고 담백

한 것만 느낄 것이네."

  "그렇습니다."

  마운룡은 훈풍을 입에 물며 고개를 끄떡였다. 

  "나도 젊었을 때는 그랬네. 하지만 맛을 아는  척 하곤 했지. 그래서 사

제의 솔직한 점이 부러웠네."

  소천은 고개를 돌리는 마운룡을 보며 정색 했다. 

  "제가 여기 온 것은 사형께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묻고 싶은 게 무엇인가?"

  "사형께서는 백리무군, 백리가주를 만나 보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한

번 겨루어도 보셨다구요?"

  "그랬었지."

  "그는 어떻던가요?"

  마운룡은 소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천은 심유한 마운룡의 눈을 보

며 미간을 살짝 모았다. 표가 나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얼굴이 좁아지

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제."

  "예, 사형."

  "사제는 대사형을 아는가?"

  소천은 입을 다물었다. 대사형을 아느냐고?  소천은 사형제중 그 누구보

다도 대사형과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소천을 대사형의 아내인 백연

연이 키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소천의 기초도  대사형인 단우백이 잡아 

준 것이다. 소천은 대사형에 대해서 잘 안다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

다. 청룡대전에서의 일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때 대사형은 평소의 자

상하던 대사형이 아니었다. 야망아. 그랬다. 야망에 불타오르는 그런 모습

이었다. 그것은 소천이 평소 알던 대사형이 아니었다.  

  '내가 대사형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소천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대사형을  모르고 있었다. 십수년을 같이 

지내 온 대사형에 대해서 말이다. 불현듯 마음이 무거워 지는 것 같았다. 

  "사제. 그럼 사제는 사제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사형은 꼭 사부님 같군요."

  마운룡은 빙그레 웃었다. 

  "나는 여기서 나에 대해서 많이 돌이켜  보았네. 그런데 나는 아직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더군. 사제는 어떤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

는가?"

  소천은 다시 침묵에 잠기었다. 잠시 숙고를 하였다.

  "사형의 말씀은 꼭 선문답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남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하네. 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람들이 남에 대해서 얼마나 알겠는가?"

  "사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허면 백리가주의 인상에  대해서라도 말씀을 

해주십시오."

  "그게 왜 사제에게 중요한가?"

  "백리세가주가 반혈맹주일거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니

지만 그분이 반혈맹주라면 곧 강호에 피바람이  불 것입니다. 그전에 그분

에 대해서 알아두면 앞으로 대처를 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마운룡은 빙긋이 웃었다. 

  "사형은 요즘 어떤가?"

  소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은 다탁 위에 머물러 있었다. 

  "사형은 야망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저로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사제는 왜 나서서 대사형을 막지 못하는가? 내가 알기론 사제의 무공은 

대사형에게 밀리지 않을 텐데……?"

  "저는 대사형과 싸울 수 없습니다."

  "사제 자신의 야망 때문은 아니고?"

  소천은 고개를 들어 마운룡을 정면으로 보았다. 

  "저는 야망이 없습니다. 저는 쭉 뻗어 누울 자리와 하루 세 끼를 거르지 

않고 먹을 양식과 가끔 친구를 만나서 이렇게 차나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

기를 나누며 살고 싶을 따름입니다. 제 소망이라면 그 정도입니다."

  "하하하 하하하. 그럼 지금 왜 그렇게 살지  않은가? 자네는 지금이라도 

그렇게 살 수 있네."

  소천은 얼굴이 벌개지며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손과 

발이 안절부절하며 떨자 마운룡이 손을 그의  어깨에 얹어 주었다. 소천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제가 생각하는 것은 소박한 삶이지.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산다

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네. 세상에는 쭉 뻗어 누울 자리가 없이 자는 사람

들이 부지기수고 하루에 두끼도 못 먹는  사람들이 태반이네. 그런 실정이

니 누구와 같이 앉아서 한담할 시간도 여유도 없게 된다네. 더군다나 강호

에서 사제처럼 산다는 것은 꿈에 불과할지도  모르네. 내가 원하지 않더라

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 와서 시비를 걸고 평화를 깰 것이기 때문이

네."

  마운룡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고요한 눈으로 소천을  보며 말을 이었

다. 소천은 멀뚱멀뚱해하며 마운룡을 보았다.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서 시내를 이루고, 시내들이 모여서 강을 이루고, 

호수를 이루어 결국에는 대해로 가는 것이네.  사제의 마음속에 있는 욕망

도 마찬가지이네. 억눌린 작은 욕망들이 모여서  하나의 커다란 욕망이 되

는 것이네. 또한 작은  욕망들이 자라나서 커다란  욕망이 되지. 사람들은 

그 욕망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다가 그렇게 사라져 가

네. 욕망은 막거나 성취한다고 해결 되지  않지, 지켜보기만 하게나. 불가

에서는 이것을 관(觀)이라고 하지. 욕망들을 지켜보는 것은 처음에는 매우 

괴로운 일이네. 하지만 하다보면 마음이 평온해 진다네."

  마운룡은 다탁을 들어서  옆에다 놓고 마루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몇 

자가 씌어져 있었다. 그 글자들은 소천도  익히 아는 글자였다. 한때는 이 

글자를 놓고 사형제들과  머리를 싸맨 적도  있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겨두고 가신 글이었기 때문에 무슨 무공 구결이나 행적에 대

한 단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달도  못 가서 모두들 두손을 들

은 적이 있었다. 소천은 그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생사일여 여여 화(生死一如 如如 華)라!"

  모두 일곱 글자였다.  이중에서 생사를 하나같이  하라는 말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무인이라면 모름지기 생과 사를 동일하게 보아야 할 필요

가 있었다. 삶에 집착한다면 무공을 버리고 깊은 산골에 숨어살아야 했고, 

죽음에 너무 집착한다면 삶이 너무 황폐해 질 것이다. 

  여여(如如)와 화(華)의 의미는 알지 못했다. 소천의 사형제들은 이 일곱 

글자를 파자로 만들어 이리저리 대입을  해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아무것

도 알아 내지 못했었다.

  마운룡은 그 일곱 자를  소천의 앞에 내민 것이다.  소천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마운룡은 개의치 않았다. 소천은 다시 마운

룡을 바라보았다. 마운룡의 얼굴에는 나무의 그림자가 해를 가려주고 있었

다. 소천은 돌아갈 시간이 다 된 것을 느끼고 마운룡을 바라보며 물었다.

  "백리무군은 어떤 사람입니까?"

  마운룡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아직도 그 의문을 버리지 못했군."

  마운룡은 소천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했다. 

  "자네가 대사형을 보듯이 나도 그렇게 백리무군을 보았네. 됐는가?"

  소천은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자신이 단우백 대사형을 야망아로 

보듯이 마운룡 이사형이 백리무군을 야망아로 보았다는 뜻인지, 아니면 자

신이 대사형을 알지 못하듯이 마운룡  이사형도 백리무군을 알지 못한다는 

뜻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소천은  더 물으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

만 마운룡이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사제! 이 말을 잊지 말게. 생사일여 여여 화(生死一如 如如 華)."

  "예. 사형. 그럼 그만 가보겠습니다.  이렇게 사형과 이야기를 나누어서 

매우 보람된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럼 다행이네."

  소천은 읍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형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 소

천은 가슴이 무거워 지는 듯 했다.

  파아란 하늘에는 흰 깃털 구름이 붉게 물들어 가고, 살랑이는 바람이 건

을 잡아 흔들었지만 소천은  백리무군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묻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 아이라면 내가 잘 아네."

  육정산은 연무장 한쪽에 턱 하니 걸터앉았다.  그 앞에는 육능풍이 웃통

을 벗은 채 구슬땀을 흘리며 도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육능풍이 연습하는 

것은 기초적인 자세로써 산동 육가도법을 익히기 위한 기본기였다. 소천은 

그런 육능풍을 보다가 육정산을 보았다.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가  마흔이 좀 안되었을 때였네. 백리

장천의 생일날이었을 꺼야. 몇  살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말일세. 

어쨌든 그 녀석 어렸을 때는 지기를 싫어했지. 한번은 본가의 도법이 자기

네 검법과 비교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단신으로 내게 찾아와서 도전

을 했었네. 하하하. 어찌나 똘망똘망하던지 아들로  삼고 싶더군. 장천 그 

친구의 얼굴을 생각해서 혼을 내서 보낸 적이  있었네. 어릴 때는 혼도 좀 

나봐야 하는 것이지. 그 친구 그것  가지고 두고두고 서운해하더군. 그 녀

석 크면 복수하겠다며 주먹을 쥔 게 정말 귀여웠네. 하하하."

   육정산은 그렇게 말을 하다가 눈물을 찔끔 닦아 내었다. 소천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런 때는 그냥 듣고 있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나중에 커서 내가 그때 일을 꺼내니까. 껄껄 웃기만 하더군. 그리고 내

가 재차 묻자 이렇게 말을 하더군.'다음에는 육숙부님의 손주 녀석을 제게 

보내십시오. 제가 따끔하게 교육을 시켜 드리겠습니다.' 정말로 좋은 녀석

이었네. 게다가 태산을 좋아해서 여러 번 태산을 같이 올랐었네. 혼자서도 

많이 올랐는지 태산을 손바닥 보듯이 알고  있더군. 특히 제천단에 올라가 

보기를 좋아했어. 예전에 황제들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곳 말이네. 그곳

에 서면 마음이 탁 트인다더군."

  육정산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벌떡 일어나 고함을 쳤다. 

  "인석아! 도를 쥔 손에 힘이 너무 들어  갔잖아? 조금 된다고 힘을 주면 

안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느냐? 초식에 기교를  부릴 생각을 하지 말고, 단 

한 동작이라도 정확히 할 생각을 해라."

  육능풍은 머리를 긁적이다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얼굴에서 입이 조금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소천은 그런 육능풍의 마음을 조금 이해했다. 처

음 무공을 접하게 되면 지겹고 따분한 기본기보다는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

는 초식에 연연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실전에서 초식의 화려함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오직 충실한 기본기만이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육능풍은 그런 육정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벼운 소리로 대답을 했

다.

  "예."

  그리고 다시 연습에 들어갔다. 육정산은 혀를 찼다.

  "어쩜 그렇게 죽은 제 애비를 닮았는지  몰라. 처음부터 멋진 초식만 펼

치려고 하니 말이야."

  "그분은 누구를 닮았는데 그렇습니까?"

  소천이 웃으며 말을 하자 육정산도 껄껄 웃었다. 

  "날 닮았지. 허허. 녀석도 내  속을 무지 썩혔고, 나도  내 아버님 속을 

무지 썩혀 드렸었네."

  그런 말을 하면서 육정산은 얼굴에 웃음기를  거두었다. 어느덧 해가 져

서 주위가 어둑어둑 해져 오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숙이고 발 끝으로 땅바닥에 알아 볼 수 없는 글자들을 쓰더니 고개를 들고 

소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네. 언제였던가 기억은 확실치 않네. 

아마 가을이었을 걸세. 백리무군 그 아이가 아직 가주가 되지 않았을 때였

네. 그때 한창 쌍십절을 준비하느라 모두들 바쁠 때였지. 그때 백리세가가 

운영하는 전장에 도둑이 들은 적이 있었네.  그때는 강호에서 제법 유명한 

대도였지. 그는 백리세가의 전장에서 은자 천여 냥을 훔쳐서 달아 났었네. 

무군 그 아이는 그것에  대노해서 그 대도를 추적했네.  무려 일년이 넘게 

그 대도를 추적해서 결국은 목을 베어 왔네.   그 뒤로 백리세가의 전장을 

털려는 대도는 없어졌지. 내가  나중에 그 사건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었

네. 그 은자 천냥 때문에 일년을  허비했느냐고……. 그러자 그 녀석이 이

렇게 말하더군.'은자 천냥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저희 가문이 누구에게 

침범을 당했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안 사실이네만 무군 그 아이가 대도를 찾아 낸 것은 육개월이 좀 못돼서였

네. 누가 그 아이를  음해(陰害)하려고 한 건지 모르지만  무군 그 아이는 

그때 손을 쓰지 않고  다시 반년동안 대도를  추적하면서 유희를 즐겼다고 

하더군."

  "유희를요?"

  "그렇네. 대도는 백리무군이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도주를 하기 시

작했네. 하지만 꼬리가 계속  밟히니까 얼마나 애가  탔겠는가? 그 대도가 

죽은 것은 백리무군이 손을 써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자살을 했다고 하더

군. 공포 속에 사느니 자살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네. 확실한 

것은 아니네. 그때 백리무군은 강북제일미와 결혼을  앞두고 있어 그를 시

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네."

  전각의 긴 그림자는 진해 지면서 다시 작아 지기 시작했고, 하늘에는 별

들이 그 얼굴들을 내밀고 있었다. 전각의 창문마다 불이 켜지고 순찰을 도

는 무사들의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말을 마

친 육정산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서 육능풍을 보고 소리 쳤다.

  "이 녀석아! 그만 하고 들어가자."

  "조금만 더하고요."

  육능풍의 대구에 육정산은 고개를 끄떡이며 처소로 몸을 옮겨갔다.

  "소공자는 안 들어가시오?"

  "좀 더 밖에 있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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