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양산박 (7/95)

  

  7. 양산박

  양산박(梁山泊). 수호지(水湖志)의 무대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황하

(黃河)와 운하(運河)가 십자(十字)로 교차하는  길목으로 예로부터 갈대가 

우거져있고 그 안의 수로는 미로처럼 되어  있어 알지 못하는 사람이 들어

갔다가는 살아서 나오지  못하는 곳이다. 이런  천연적인 미로에 인위적인 

기관을 가미한다면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가 될만한 곳이었다. 이 양산박에

는 몇 년 전만 해도 황하에서 알아주는 수적단이 있었지만  백리세가에 의

해 토벌이 되었고 이제는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깊이 판 구덩이에는 칼날이 거꾸로 박혀 있었다. 그 위로 나뭇가지를 얼

기설기 엮은 판이 놓여지고 다시 흙이 뿌려진  뒤 마른 풀로 덮였다. 그러

자 감쪽같이 길의 일부분이 되었다. 

  "당겨라!"

  그 옆에서는 나뭇가지를 옆으로 잡아 당겨  밧줄로 묶고 있었다. 나뭇가

지에는 쇠침을 잔뜩 밖은 통나무가 매달렸다.  줄을 건드리면 통나무가 날

아가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바닥에 쇠못을 거꾸로 박아  놓는 곳도 있었

다. 발에 쇠못이 찔리면  전투력이 급감하므로 매우  유용한 것이다. 그런 

일련의 상황들을 지켜보며 백리인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옆에 서 있는 

백리웅풍이 그런 숙부를 위로했다.

  "사불범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해방이 요동낭인대를 어떻게 끌어 들

였는지는 몰라도 그런 사마외도를 상대로 우리가 패하지는 않을 겁니다."

  백리인군은 씁쓸히 웃었다. 백리세가가 먼저 요동낭인대를 끌어들였다가 

사해방에서 끌어갔음을 백리웅풍은 알지 못하고  있다. 명문백도가 관외의 

낭인들을 끌어들였다면 세인의 지탄을 받기에 충분 것이다.

  "할아버님께서 직접 개방으로 가셨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그러길 바래야지. 제 일진에는 누가 나가 있느냐?"

  "영풍이가 백살대를 이끌고 나가 있습니다."

  "흠."

  백리인군은 침음했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아쉬웠다.  적들은 쉴 틈을 주

지 않고 추적 해오고 있었다.

  '며칠만 더 시간이 있다면……'

  약관인 청년의 등에는 십대의 화살들이 전통에 담겨 있었고 손에는 강궁

에 시위가 메겨져 있었다. 그의 눈은  수로를 향했다. 이곳은 거미줄 같이 

얽힌 수로의 중심으로 백살대가 포진한 곳이다. 피유융! 전방에서 붉은 폭

죽을 매단 화살이 올라왔다.

  "벌써 왔는가?"

  청년 백리영풍은 수신호를 보내 백살대로  하여금 화살을 메기고 기다리

게 하였다. 

  "우리는 저들을 유인하여 갈대밭 가운데에 가둔  뒤 불태워 버리는 것이 

임무다. 첫 전투인만큼 절대로 길게 끌어서는  안된다. 내 명령에 따라 재

빨리 퇴각하는 것을 잊지 마라."

  백리영풍의 말은 나직했으나 두번째 반복하는  말이라 모두 알아듣고 있

었다. 콱! 스칵! 접근을 알리는 갈대 부러지는 소리와 칼로 베어내는 소리

가 사방에서 들리며 점점 커져갔다.  백리영풍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해방

은 배를 타고 진격해 올텐데  왜 이렇게 갈대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긴장 한채 수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정면 갈

대 섬의 갈대가 한꺼번에 무너지고 그 위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들은 긴 장도를 휘두르며 갈대를 베었다. 그들 뒤에 두 명이 한 척의 개미

선을 들고 왔다. 턱턱! 개미선들이 놓여지고  그 위로 갈대가 엮어지는 광

경이 눈에 들어왔다.

  "다리……!"

  백리영풍은 크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사해방도들은 수로를 따라 진군해 

오는 것이 아니었다. 저렇게 개미선들을 연결하고  배와 배 사이에 갈대를 

덩어리로 엮어 다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진격해오고 있는 것

이다. 이것은 백리세가의 예측을 완전히 뒤엎은 것이다. 따라서 지금 백살

대가 포진한 것은 별 소용이 없게 되는 셈이었다.

  "쏴라!"

  백리영풍의 명령에 백살대는  활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선두의 사해방도들은 화살밥이 되어  수로에 떨어지며 비명을 내질렀

다. 몇 명이 개미선을 내팽개치고  도주했다. 백리웅풍은 가슴을 진정시키

며 상황을 살폈다. 바스락!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왼쪽 백여 장 밖

에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고 개미선들이 내려졌다.  또한 오른쪽 백여 장 

밖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흩어져서 공격해라!" 

  사사삭! 삼십여명씩 좌우익으로 나뉘어 활을 쏘았다. 이번에는 사해방에

서도 방비를 했는지 방패로 막고 있었다. 더이상 억지로 다리를 놓지도 않

고 퇴각했다. 잠시 뒤, 좌우로 백장씩 벌려서 다리가 놓여졌다. 

  "퇴각하라!"

  백리영풍의 판단은 빨랐고, 행동 또한  빨랐다. 좌우 이백장이라면 백명

으로 날개를 펴서 막을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소수의 병력으로 적에게 

포위를 당한다면 전멸은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다. 백리영풍과 백살대가 

퇴각 하자 얼마후, 그들이 있던 자리에 방패를 든 사해방도들이 모습을 드

러냈다.

                                                

  "제 일진이 퇴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백리인군은 보고에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빨리 일진이 무너지다니!"

  백리웅풍의 얼굴도 흙빛이 되었다. 

  "영풍은 어찌되었느냐?"

  "퇴각하신 모양입니다. 갈대밭에는 불이 붙지 않았습니다." 

  "웅풍, 너는 이곳을  지키거라. 이곳에는 한개  대(隊)만 남기고 모두들 

나를 따르라."

  함정을 만들고 있던  무사들이 각기 병장기를  들고 내달려갔다. 얼마를 

갔을까 갈대밭 사이로 나오는 백살대를 만날 수 있었다.

  "숙부님 죄송합니다."

  백리영풍은 고개를 떨구었다. 

  백리인군은 전면을 바라보았다. 십여 개의 노선에서  각기 백여 명은 됨

직한 인원들이 갈대를 헤치며 달려왔다. 선두가 갈대를 베면 그 뒤에 있는 

몇 명이 그것을 묶었다. 그리고 개미선을  놓고, 갈대를 그 사이에 끼워서 

부교를 만들었다. 그렇게 수로에  길을 내면서 진격해  왔다. 역풍 때문에 

불 화살을 쏠 수  없는 상황에서 저런  진격이라면 백리영풍의 백살대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저 안에 천시를 헤아리는 전략가가 있다는 말인가. 사해방에 저런 전략

가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백리인군은 눈물이 핑 도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바람……!"

  백리인군은 엉뚱한 소리를 하면서 손가락을 위로 치켜들었다. 적들은 점

점 다가오고 있었다. 백리인군은 적진으로 몰아치는 거센 바람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화전을 준비해라!"

  그 말에 백살대는 화살 끝에 뭉툭한  솜뭉치가 매달려 있는 화전을 꺼냈

다. 몇 명이 갈대들을 모아 수십 개의 화톳불을 붙였다. 

  "바람…… 제발……!"

  백리인군의 기도가 하늘을 움직였는지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그

것은 백리인군이 있는 쪽에서 사해방도들이 밀려오는 쪽으로 부는 것이다. 

  "쏴라!"

  백살대는 화전에 불을 붙여 갈대밭을 향해  쏘아대기 시작했다. 붉은 불

꽃들이 갈대밭에 떨어지자 불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매우 빠른 속도로 

번져가고 있었다. 타타탁! 갈대가 터져오르는  소리가 폭죽이 터지는 것처

럼 들렸다. 텅텅텅! 불꽃  속에서 개미선들이 내던져지고  그 위에 물먹은 

갈대들이 불길 위로 날아내렸다.  그러자 불길 사이로  길이 생겨났다. 그 

길을 따라 사해방도들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쏴라!"

  핑핑핑! 백살대의 화살이 날아갔다. 텅텅텅! 방패에  맞아 물 속으로 들

어가기도 하고 사람 머리를 관통하는 것도 있었다. 풍덩풍덩! 불밭을 통과

한 사해방도들은 그대로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불길은 하늘높이 치솟

아 오르기 시작했다. 불쑥!  물 속에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피피핑! 

수십 개의 화살이 일제히 쏘아지고 그 자는 고슴도치가 되어 물 속으로 가

라 앉았다. 백리인군이 힐난조로 명령했다. 

  "화살을 아껴라!"

  사방에서 다시 사람들의 얼굴이 드러났다가 재빨리 사라졌다. 

  핑핑핑! 화살이 쏘아지고 다시 몇 구의  시신들이 떠올랐다. 촤아악! 물

살이 갈라지며 십여 명의 사해방 무리가 아미분수자(峨嵋分水刺)를 휘두르

며 상륙했다. 하지만 백리세가의 무사들에 의해  저지 되었다. 챙챙챙! 병

장기가 부딪히고 물 속에서는 다시 수십 여명이 뛰쳐나왔다.

  "쳐라!"

  백리인군의 명령에 백살대와 백리세가의 무사들이  달려들었다. 물 속에

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을 때였다.  두두두! 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요란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라니?"

  이곳은 운하의 한가운데였다. 이런 대대적인  말발굽소리가 들려올 턱이 

없었다. 푸하악! 불길을 뚫으며 한 명이  장도를 휘두르며 그 모습을 드러

내었다. 그는 곧추 선 수염에 부리부리한 눈을 하고 있다.타오르는 불길마

저 그의 좌우로 갈라서는 듯했다. 

  요동혈랑의 등장이었다. 풍덩! 그는 말과 함께 물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뒤를 이어 불 속에서 인마가 계속 뛰쳐나왔다. 

  어떤 말에는 꽁지에 불이 붙은 채, 어떤  말은 사람과 인마가 통째로 불

길에 휩싸여 물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불길에 휩싸이

지 않고 달려들어왔다. 그들은 요동낭인대였다. 

  다리는 요동낭인대를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이다.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는 

낭인대를 보자 백리인군은 전의를 상실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입에서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퇴각하라!"

  백리세가의 무사들은 급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요

동낭인대를 도와주는 꼴이었다. 요동낭인대가 물 속에  있을 때는 그 전력

을 다 발휘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백리인군은 간과한 것이다. 

  물위로 오른 말들은 일제히 정렬 하기  시작했다. 불길은 점점 수그러들

고 있었고 요동낭인대의 일 천여 무사들은 도열을 끝마쳤다. 그 옆에는 사

해방의 무사 팔백 여명이 아미자를 쥐고 있었다.

  "이 단주! 우리가 먼저 진격을 하겠소. 여기까지 길을 트시느라 수고 하

셨소이다."

  북해단주 이극상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냉랭한 

웃음을 떠올렸다. 

  "조심하시구료."

  요동혈랑은 장도를 들어 전면을 가리켰다. 

  "진격하라!"

  두두두! 두두두! 기마대는 일제히 수풀을 헤치며 내달았다. 수풀 사이에

서 장창이 날아오고 화살이  날아왔다. 몇 명이  맞아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 뒤의 낭인대는 그것을 피하며 진격해 갔다. 

  요동낭인대는 말 위에서는  무적이라고 불리울 만했다.  그 뒤를 천천히 

따르는 북해단주 이극상도 그렇게 느껴졌다. 챙챙챙! 퍽퍽! 백리세가의 무

사들과 요동낭인대의 무사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곳곳에서 혈전을 벌였다. 

하지만 수적인 열세와 사기에서 밀리고  있는 백리세가의 무사들은 요동낭

인대의 적수가 아니었다. 

  백리인군은 뒤로 퇴각하면서 전열을 살피고 있었다. 저들의 공세는 파상

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백리세가의 무사들은 계속 밀리고 있었다. 이대

로 간다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전멸할 것이  확실했다. 히히힝! 말소리와 

함께 한 명의 낭인이 도를 휘두르며  백리인군의 목을 쳐왔다. 파악! 백리

인군의 몸이 떠오르고 낭인의 도를 검으로 쳐갔다. 

  까앙! 도가 밀리며 낭인의 어깨에 허점이 생기자 백리인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낭인의 어깨를 걷어찼다. 낭인은  옆으로 쓰러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백리인군은 말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좌우에서 다시 두 개의 도가 날아왔

다. 백리인군은 몸을 뒤로 누웠다. 두 개의 도가 그의 눈앞을 스치며 지나

갔다. 주위에는 온통 기마병들 뿐이었다.  백리인군은 말안장을 차고 오르

며 나무위로 뛰어 올라 큰 소리를 내었다.

  "퇴각하라! 퇴각하라!" 

  "죽여라! 한 놈도 살려서 보내지 마라!"

  요동혈랑의 거친 음성이 쩌렁 쩌렁 울리고  있었다. 백리인군은 뒤를 돌

아보았다. 말 위에 탑처럼 앉아있는 요동혈랑은 장비의 현신을 보는 것 같

았다. 백리인군은 몸을 빼내었다. 곳곳에서 살아남은 백리세가의 무사들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 뒤를 요동낭인대가 바싹 추격하고 있었다.

  

  동해 단주 왕정은 심호흡을 깊이 했다. 저 멀리 보이는 양산박에서 치솟

아 오른 불꽃은 적들이 곧 이곳으로 도망쳐 온다는 신호였다. 그는 이백여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사슬과 낫, 투망과 장도로 완전 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사슬로 걸고, 낫으로  베고, 투망을 던져서  잡고, 나머지는 도로 

해결 할 것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완벽한 진세였다. 한가지 단점이  있다면 예상 외의 방

향에서 쳐들어온다면 위력이 급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들은 저쪽 양산

밖에서 오기로 되어 있었다. 오늘 전공에 따라 논공행상이 이루어 질 것이

다. 제발 거물(巨物)이 걸려라. 왕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호흡을 가다듬었

다. 사사삭! 경쾌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온다!"

  왕정은 자신의 애병인 비도를 움켜쥐었다.  사사삭! 발소리는 더욱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헌데 그 들려오는 곳은  양산박 쪽이 아니었다. 바로 뒤

쪽이었다. 왕정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첫  단말마가 터져 올랐다. 

그것은 왕정의 생각이 맞다는 소리였다. 

  먼저 공격 한 쪽은 왕정의 수하들이었다. 가장 후미에 있던 사해방의 도

부수(刀斧手)들이 수십 여명의 거지들이 떼거지로 몰려오자 겁을 집어먹고 

먼저 공격을 한 것이다. 기습을 눈치채지 못한  두 명의 거지가 피를 뿌리

며 쓰러졌다. 그러나 다른 거지들은 잽싸게  몸을 빼 내었다. 적들의 기습

은 빨랐지만 거지들은 두  명의 희생자만 내고 몸을  피한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거지들의 무공수위가 녹녹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적이다!"

  한 거지의 외침에 다른 거지들이 일제히  타구봉을 빼들었다. 거지들 사

이로 백의를 입은 노인들이 몇이  앞으로 뛰쳐나왔다. 도부수대(刀斧手隊)

는 함성을 지르며 내달려갔다. 그들에게는 승승장구를 하던 기억이 아직까

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백의 노인들의 손에서 검이 폭출하자 그러한 생각

들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아니 영원히 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목에서, 

가슴에서, 미간에서 피가 솟구쳤다. 사해방의 도수부대는 정말로 어이없게 

무너지고 있었다. 왕정은 노인들이 백리세가의  최고배분을 가진 원로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빌어먹을……!'

  왕정은 내심 몇번이고 그 소리를 되뇌이며  몸을 뒤로 빼냈다. 그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낫부대와 사슬부대가  달려갔다. 수십 개의 낫

이 허공을 날고 사슬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허나 노검수들의 검이 휘둘

러지자 수수깡 처럼 잘리고 튕겨져 날아갔다. 

  "퇴각해라! 황하 쪽으로 물러나라!"

  퇴각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왕정의 수하들이  황하 쪽으로 내달렸다. 

왕정은 정신이 없었다.

  '황하까지만 가자. 물 속이라면 싸울 만 하다.'

  뒤에서 들려오는 부하들의 비명성을 들으며 내달리고 있었다.

  "노가주, 그들을 추격하지 마시오! 지금은 양산박으로 달려가는 것이 중

요하외다."

  선두에서 갈대잎 위를  밟으며 사해방도들을 주살하던  백리장천의 손이 

멈추었다. 그의 검이 멈추자  주위에 있던 십여 명의  원로들 또한 살육의 

손길을 멈추었다. 

  "취장로, 매복이 있는 듯 하니  우리가 먼저 손을 써  길을 터 놓겠소이

다."

  "알겠소."

  개방의 취장로는 고개를 끄떡였다. 

  사사삭! 백리세가 인원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내달리렸다. 바람과 갈대

잎들이 그들을 스치며 격렬한 신음성을 토해냈다. 개방장로 취선개는 휘하 

거지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부상자나 중상자 사망자는?"

  "사망자 둘. 부상자는 없습니다."

  "좋다. 사망자는 표식을 해두고 나머지는 어서 가자."  

  취선개가 내달리자 백여 명에 이르는 거지들도 함께 내달리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표흘한 것이 모두 개방에서 엄선한 고수들 임을 알 수 있었다.

  백리웅풍의 백의는 혈의로 변한지 오래였다. 그의 왼쪽 어깨에는 부러진 

장도가 박혀 있고, 옆구리에도  검상이 나있어 연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백리웅풍은 옆구리를 지혈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살아 남은 인원은 고작

해야 백여 명 안팎이었다. 서너군데 부상을 입지 않은 자가 없었다. 슉슉! 

앞에서 한 명이 달려왔다. 백리웅풍은 장검을 힘겹게 들었다. 그러다 달려

오는 자를 보고 반색을 했다.

  "영풍이구나!"

  백리영풍의 얼굴은 매우 창백해져 있었다. 

  "형!"

  백리영풍은 웅풍의 앞에 내려서면서 힘없이  무너졌다. 영풍의 등뒤에는 

한 자루 장도가 박혀 있었다.

  "영풍아! 영풍아!"

  백리웅풍은 영풍을 잡아  흔들었다. 하지만 백리영풍은  움직일 줄 몰랐

다. 슈아악! 백리웅풍은 왼쪽 몸을 ㅎ는  살기에 영풍을 안고 누웠다. 퍽. 

하나의 화살이 그의  어깨에 박혀 들어갔다.  백리웅풍은 정면을 바라보았

다. 언제 달려왔는지 수백 기의  기마가 밀려오고 있었다.백리웅풍은 영풍

을 짊어지고는 몸을 피했다. 뒤에서는 함성이 계속해서 밀려왔다.

  "퇴각해라! 개방으로 간다."

  백리웅풍의 말에 모여 있던  무사들은 눈물을 흘렸다.  한때, 아니 며칠 

전 만해도 무림오대세가의 하나로 천하의 추앙을 받던 백리세가였다. 이렇

게 패퇴 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감상에 젖어 있

을 때가 아니었다. 무사들은 몸을 돌렸다. 울분을 참지 못한 세 무사가 함

성을 지르며 기마대로 달려갔다. 백리웅풍은 그것을 보고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그들의 몸은 장도에 의해 난자당한  채 쓰러지고 있었다. 백리웅풍은 

고개를 돌리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개방…… 개방까지만 가자!'

  무사들은 무사들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과 사람의 발걸음은 큰 

차이가 있기 마련이었다. 하나둘씩 무사들이 쓰러져가고 하늘과 땅은 점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백리웅풍은 구릉을 넘어 내달리다가 앞에서 날아오

는 강력한 기운에 몸을 뒤집으며 일검을  내뻗었다. 파악! 그의 검세는 매

우 빨랐다. 하지만 날아오는 자의 공력은  매우 뛰어나 백리웅풍의 검세를 

옆으로 흘리면서 장검 손잡이까지 잡아챘다. 

  '이 초식은 본가의 공수입백인(空手入魄刃)'

  백리웅풍은 자신의 검을 잡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자애스런 미소를 

띄고 있는 백리장천이었다.

  "할아버지!"

  백리웅풍은 무너지듯이 무릎을 꺾었다. 

  "노가주님!"

  살아남은 무사들도 무릎을 꺾었다. 십여 명의  노인들은 갈대잎 위에 서

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요동낭인대가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백리장

천은 백리웅풍의 등에 업혀 있는 백리영풍을 한 손으로 가볍게 안아들고는 

추궁과혈(推宮過穴)을 해주었다. '끄응!'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백리영풍

의 눈이 떠졌다가 다시 감겨졌다. 백리장천은 백리영풍을 뒤로 밀 듯이 던

졌고 대기하고 있던 노인의 품에 안겼다.  백리장천은 기마대의 선두에 서 

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한 마리 늑대 같은 사내. 바로 요동혈랑이었다. 요

동혈랑은 타는 눈으로 백리장천을 바라보았다.  백리장천의 입가에 씁쓸한 

고소가 매달렸다. 어차피  일회용으로 데리고 온  것이기에 아무런 애착도 

없었고 믿지도 않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자신들을 위협하는 

칼이 되자 후회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너무 때늦은 후회였다. 백리장

천은 장검을 빼들었다. 

  "일자투를 하자면 할텐가?" 

  백리장천의 말에 요동혈랑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강하오. 게다가 나는 당신이 원하는 조건을 이행할 위치에 있지 

않소. 미안하게 되었구료. 나를 부른 것은 그대들인데…… 배신은 원래 한

번으로 족한 것 아니겠소?"

  그 말에 백리웅풍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백리장천은 고개를 끄떡였다.

  '배신이라니…… 무슨 말인가?'

  백리웅풍은 고개를 들어  백리장천을 바라보았다.  백리장천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제군은 어찌 되었느냐?"

  "고통없이 보내 드렸소."

  요동혈랑의 무심한 어조에 백리장천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인군이…… 그 아이는?"

  "나도 모르오. 워낙 격전중이라서 이제 그만 시작합시다."

  요동혈랑은 백리장천의 뒤를  바라보았다. 백리장천의  옆으로 취선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요동혈랑은 장도를  옆으로 뉘었다. 그러자 일대

의 기마대가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잠깐!"

  휘리릭! 한 명이 그들 사이에 내려섰다. 북해단주인 이극상이었다. 백리

장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극상은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이극상은 취선

개를 보며 말을 했다.

  "개방의 취장로님을 뵙습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할 사이가 아닌 것 같소."

  "하하하. 그런가요? 헌데 개방은 지금 어떤 입장이십니까?"

  그 말에 취선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극상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 싸움은 어디까지나  운하의 이권을 놓고  백리가와 우리 사해방이 

싸우는 것입니다. 개방도 이번 이권 싸움에 끼어드실 작정이십니까?"

  "우리는 대의를 위해서 왔을 뿐이네. 흥!  자네들은 외인까지 끌어 들여

서 백리세가를 핍박하고 정도에서 벗어난  싸움을 벌였으니 우리가 끼어들

어도 될 것이네."

  

  "하하하! 개방의 장로님께서 정보가 느리시군요.  이 요동낭인대는 백리

세가가 끌어들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도중에 생각을 바꾸어 우리에게 투

신을 했지요. 그러니 먼저 외인들과 결탁 한 것은 백리세가입니다. 우리는 

개방과의 싸움을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에는 대의명분이 우리에게 있는 것 같군요." 

   취선개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였다.

  '제기랄! 이럴  때에  건곤신개가 있었다면  그럴싸하게  반박을 해줄텐

데…….'

   그는 평소에 아웅다웅하던 건곤신개가 불현듯  생각났다. 그 작자의 구

수한 입담이라면 저 미운 작자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텐데……. 하지만 그

는 지금 없었다. 취선개는 잠시 생각 하다가 말 했다.

  "그렇다면 싸움을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것이 어떻겠나?"

  이극상이 대뜸 반색을 표했다.

  "하하하. 개방에서 보증을 서 주신다면야 더 바랄 나위가 없지요."

  그 말에 취선개는 속으로  아뿔싸 하고 외쳤다. 일단  보증인이 되면 그 

사안에 대해서 어느 정도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 즉, 이 자리에서 백리세

가와 사해방과의 어떤 식으로든지 협정이 맺어지면 자신이 나서서 그 협정

이 이행여부를 감시하고 조정을 해주어야 했다.  게다가 저들은 자신이 아

닌 개방을 걸고 넘어가지 않은가? 취선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백리장천

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기마대 뒤에는  아미자를 들고 있는 사해방도

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했다. 백리장천은 스르르  눈을 내리감았다. 

승산은 없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실컷 적들을 죽이다가 

자신도 피밭에 몸을 뉘이는 일 뿐이었다.  나이든 자신과 원로들이야 죽는

다고 해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대로 백리세가의 대

가 끊기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손이  있는 한 백리세가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백리장천은 눈을 번쩍 떴다.

  "좋다. 본가의 모든 가업을 넘겨주겠다.  단 인군이를 돌려주기 바란다. 

죽었다면 시체라도 넘겨라!"

  "개방에서 보증을 서시겠습니까?"

  취선개는 백리장천을 바라보았다. 백리장천은 가볍게  몸을 떨면서 고개

를 끄떡였다. 취선개는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취선개가 고개

를 끄떡이자 이극상이 소리쳤다. 

  "애들아! 모셔와라!"

  '옛!' 하는 복명 소리와 함께 두명이 들것을 들고 왔다. 들것 안에는 백

리인군이 온통 피에 절은채 누워 있었고 두 개의 장도가 몸통에 박혀 있었

다. 그러나 아직 숨을 쉬고 있는지 가슴의 기복이 뚜렷하게 보였고 눈까지 

껌뻑이고 있었다. 백리장천은 단번에 날아가 백리인군을 붙잡았다. 백리인

군은 눈을 껌뻑였다.

  "녀석……. 살아 있었구나!"

  백리인군은 눈을 껌뻑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럼."

  이극상은 몸을 돌렸다. 그 옆에 요동혈랑이 바싹 붙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소. 왜 후환을 남겨 두는 것이(요)?"

  이극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었소. 하북팽가가 황하  이북의 백리세가의 기업들을 접수하

기 시작했소이다. 이곳에서 백리세가의 최고수들과  드잡이질을 한다면 승

리한다 해도 우리의  피해가 극심할 것이오.  게다가 개방도들의 성격으로 

보아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오.  여기서 개방도들을 주살한다면 그

것은 곧 천하제일대방을 적으로 돌리는 결과를  낳게 되오. 그렇다면 우리

는 죽 쒀서 개준 꼴이 되고 마는  것이오. 그리고 대주 번거롭겠지만 지금 

황하 이북의 산동 땅으로 가주시오." 

  "알겠소이다. 헌데 방주님께서는 어디에 계시오?"

  "청룡장에서 장강 하구는 물론이고 양주까지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빼

았았소. 그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부랴부랴  손을 쓰고 있는 중이오. 하지

만 상황이 어려울 것 같소."

  그 말에 요동혈랑은 눈을 부라리며 한 손으로 가슴을 치며 말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맡기시오. 우리가 싹 쓸어버리겠소이다."

  이극상은 실소를 흘렸다. 이극상의 웃음에 요동혈랑은 의아한 표정을 지

었다.

  "왜 웃으시오? 대신 황금이나 두둑이 넣어 주시오."

  "청룡장은 강남에 있는데 그 강남은 온통 물바다요. 이런 기마대가 힘을 

못쓴단 말이오. 게다가  청룡장에는 중원 최고의  전투선단을 가지고 있는 

거경방이 있소이다. 지금 우리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오. 팽가나 잘 막아 주

시오."

  "알겠소이다."

  요동혈랑은 고개를 끄떡였다.

  

  사해방과 요동낭인대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두 사내중 하나가 돌아

보며 입을 열었다.

  "동방단주, 어떻게 보시었소?"

  "그들의 기마술은 우리보다 한 수  위였소이다. 하지만 집단전에는 조금 

약한 것 같았소. 어쨌든  무시 못할 자들이오.  게다가 그들의 공격대오를 

보니 전술에 밝은 자가 있는 것 같소이다. 그자를 주시해야 할 것이오."

  "그렇더군요. 그들이 양산박을 공격할 때  갈대밭 사이로 길을 내리라고

는 생각하지 못했소이다."

  "어쨌든 사태가 예상외로 끝이 났소."

  "그만 장으로 돌아가서 보고를 합시다."

  "그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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