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요동낭인대
안개가 사방에 자욱했다. 배의 돛들은 그 안개에 젖어 축축 늘어지고 팽
팽하던 밧줄도 느슨해졌다. 두터운 안개로 인해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악일비는 그러한 운해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부하들에게 말했다.
"이제 곧 안개가 걷힐 것이다. 출정준비를 서둘러라!"
악일비는 오랜 경험으로 이런 안개는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금방 사라진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해방도들은 각기 쇠노와 투석기 등 전투 기구와
돛과 닻, 밧줄, 기름먹인 솜과 화섭자 등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해가 중
천에 떠오르자 안개는 점점 걷히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푸른 물결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악일비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요동만을 떠난 백리세가의 요동낭인대가
도착할 때가 된 것이다. 자욱했던 안개가 걷히면서 십여 척의 거대한 범선
이 보였다. 선단은 안개 때문에 악일비가 이끌고 있는 사해방의 전선을 보
지 못한 채 등을 보였다.
악일비는 그 배들의 깃발을 확인했다. 펄럭거리는 깃발에는 백리세가의
상징인 백목련이 그려져 있었다. 악일비의 입에서 거침없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출진하라!"
백리제군은 안개 낀 바다를 바라보았다. 요동의 낭인대를 설득, 포섭하
고 다시 은밀히 배를 마련해서 오늘까지 온 것이 꿈만 같았다. 밤이 깊어
갈 때면 자신들은 연운항에 도착을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림의 역사는
새로 쓰여질 것이 분명했다. 백리제군은 양 주먹에 힘을 주었다.
'이제야 말로 백리세가가 웅비 할 때이다. 사해방을 쓸어버리고 청룡장
을 쳐서 운하 동쪽을 모두 장악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백리세가
는 무림오대세가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서게 될 것이고, 또한 천하 무
림이 앙복하게 될 것이다. 이제 그 영광을 위한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백리제군 옆으로 한명이 다가왔다. 요동낭인대의 대장 격인 요동혈랑 나
가라추였다. 나가라추는 여진족으로 장백산의 이인(異人)으로부터 도법을
전수 받아 요동일대에서는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고수였다. 나가라추는 그
큰 입으로 씨익 웃었다.
"중원은 이제 얼마나 남았소이까?"
백리제군은 서투른 한어가 귀에 거슬렸지만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늘밤이면 도착할 꺼요. 아마도 환영이 대단할 것이외다."
"하하하. 그렇지요. 이 요동의 혈랑이 가는데…… 하하! 하하하!"
"우욱!"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배
옆으로 물보라가 터져 올랐다. 그리고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슈샤샥!
슈샤샥!' 하는 소리와 함께 쇠노들이 덮쳐와 갑판과 돛대, 사람할 것 없이
관통해버렸다.
"크아악!"
첫 비명성이 터지고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퍽퍽!'하는 소리와
함께 돛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갑판위로
튀어 올랐다.
"한 척도 남기지 마라!"
악일비의 외침에 사해방도들은 더욱 기세 등등해서 화전과 쇠노 투석을
날려대었다. 백리세가의 배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고 사람들은 물 속으
로 뛰어 들었다.
"으하하! 으하하!"
악일비는 통쾌하게 웃었다. 바다에서는 아무리 헤엄을 잘 쳐도 오래 버
티지 못하는 것이다. 바다는 호수와 강과는 다른 것이다. 강 물의 흐름은
일정해서 그 흐름을 타면서 옆으로 조금씩 나가다 보면 강이 굽이치는 목
에서 뭍으로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바다는 어디로 가나 망망대해 뿐이
다. 섬을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
었다. 따라서 물 속으로 몸을 날려 불길과 화살은 피했다고 하지만 얼마
못 가 죽고 마는 것이다.
"거리를 유지해라."
악일비의 외침에 깃발이 올라가고 전선들은 백리세가의 범선과 거리를
유지한 채 쇠노와 화살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백리세가의 범선들은 점점
고슴도치가 되어가고 있었다. 애초 사해방은 수십 년 동안 운하의 패권을
놓고 수백 차례의 전투를 해본 자들이었고, 요동낭인대는 배를 거의 처음
타보는 자들이었다. 게다가 사해방은 빠른 전투선인데 비해서 백리세가의
배는 느린 범선이었다.
싸움은 이미 결판이 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요동낭인대들이 배 위에
서 칼을 휘두르며 고함을 치고 있었지만 그것은 자기를 죽여 달라는 신호
와도 같은 것이다.
사해방의 전선들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화전과 쇠노를 쏘아대자 범
선들도 원형으로 돌면서 방어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몇 척이 불길
에 휩싸여 있었고 바다에는 살려달라고 아우성 치는 사람들의 비명성으로
애끓고 있었다. 백리제군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저들이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았지? 어떻게……? 본가의 수뇌부만 아는
사실인데……"
"이(二)가주! 그건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니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여기서 빠져나가 살 수 있느냐는 것이오."
요동혈랑은 백전노장 답게 사태를 직시하고 있었다. 적이 어떻게 길목에
매복해 있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적의 공격을 받고 있는 이상 어떻게
살아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요동혈랑은 배 안에 타고 있는 자신의 부하
들을 살폈다. 몇 명은 쇠노에 관통 되어 여기저기 널부러졌지만 대부분은
장도를 빼들고 은폐물에 숨어 눈을 번뜩이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요동혈랑은 입술을 깨물었다. 문제는 적선에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있었
다. 적선은 멀리서 화살만 쏘아대며 빠른 속도로 자신들이 탄 배의 근접을
허락하지 않았다. 거리로 보아 경공을 써서 건너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백리제군이 타고 있는 배도 점점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이까?"
"지금은 저들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수밖에 없소이다."
요동혈랑은 그렇게 말을 하고 수하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수하들은 그
신호를 받자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한 명이 품에서 삼각 소기를 꺼내
흔들었다. 그러자 저쪽 배에서도 요동낭인대원들이 삼각기를 흔들었다. 그
것을 본 백리제군은 요동혈랑을 바라보았다.
"무슨 신호요?"
요동혈랑은 차가운 눈으로 백리제군을 바라보았다. 백리제군은 요동혈랑
의 달라진 눈빛에 본능적으로 가슴을 보호했다. 그 순간 요동혈랑의 쌍수
가 백리제군의 가슴을 가격해 갔다. 백리제군은 뒤로 몸을 빼냄으로써 요
동혈랑의 쌍수를 막아내며 대갈일성했다.
"배은망덕한 놈!"
"강호란 원래 그런 게 아니겠소? 둘 중에 하나라도 살아야 할 것 아니
오?"
요동혈낭은 도를 뽑아 백리제군을 공격했다. 그 순간 요동낭인대의 무사
들이 백리세가의 인원들을 주살하기 시작했다. 밝은 대낮의 푸른 바다 위,
불타는 배 위에서의 혈전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악일비도 요동혈랑과 백리제군의 사투를 보면서 공격 중지 명령을 내렸
다. 사해방도들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상황을 주시했다. 선상 반란은
전 선단에서 일어났다. 요동낭인대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들은 기
습으로 기선을 제압했다. 요동혈랑과 그의 수하들은 가차없이 백리세가의
무사들을 베어갔다. 요동낭인대와 백리세가 간의 싸움은 요동낭인대의 완
승으로 끝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게거품을 물고 저항 하던 백리제군도 요동낭인대의 공격에
점점 지쳐갔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도세에 백리제군이 정신 없는 사이 요
동혈낭의 도가 그의 배를 갈랐다. 모든 범선들은 이제 대부분 불길에 휩싸
여 있었다. 요동혈랑이 단전에 내공을 모아 소리쳤다.
"이보시요! 우리는 돈에 팔려온 낭인대입니다. 우리는 백리세가와 아무
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렇게 투명장을 바치니 우리를 받아 주십시요."
요동혈랑은 백리제군을 쳐 올렸다. 고개를 떨군채 축 늘어진 몰골로, 가
슴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요동혈랑은 단칼에 백리제군의 목을 쳤다. 붉
은 피가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며 바다 위에 뿌려졌다. 배는 점점 불타오르
고 있었고 요동혈랑의 등은 뜨거워지고 있었다.
"사해방주! 우리는 방주를 도와 백리세가를 치겠소이다. 살려 주시오,
사해방주!"
악일비는 요동혈랑의 말에 적이 마음이 동하고 있었다. 요동낭인대를 접
수한다면 자신의 세력은 배가(倍加)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살려 주기에는
어딘가 꺼림직한 곳이 남아 있었다.
위험에 처하자 자신들을 사온 자들을 가차없이 배신하는 저 모습에 섬뜩
함마저 일었다. 하지만 직접 백리제군의 목을 베지 않았던가? 자신들을 배
신하고 백리세가로 갈 수는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지 않았는가? 악일비
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 불길이 거세진 배 위에서는 요동낭인대 대원들이 바다로 뛰
어들어 사해방의 전선으로 헤엄 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부서진 돛을
잡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파도에 밀려 그들은 점점
흩어지고 멀어질 뿐이었다.
요동혈랑도 더 참지 못하겠는지 바다로 뛰어 들었다. 그가 뛰어들자 배
위에 남아있던 자들이 모두 뛰어 내리기 시작했다. 악일비는 바다 위에서
고개만 내민 요동낭인대를 보았다. 저들을 일일이 죽일 필요도 없이 이대
로 떠나기만 해도 모두 고기밥이 될 것이 분명했다. 자신들은 거의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바닷속에 있는 요동혈랑이 얼굴의 물기를 쓸
어내고 다시 소리쳤다.
"사해방주! 백리세가의 진정한 주력은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
데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지 않으시오? 그들을 우리가 제거해 주겠소
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중원내의 발판일 뿐이오."
요동혈랑의 말은 악일비의 구미를 당겼다. 저들은 어차피 일회용이었다.
백리세가와의 싸움에서 살아남는다면 산동의 작은 구역을 떼어 주어도 상
관은 없을 것 같았다. 악일비는 고개를 끄떡였다.
"배를 내려라!"
수십 척의 소형선박들이 내려지고 바다를 헤치며 요동낭인대의 무사들을
끌어 올렸다. 모두 바닷물을 먹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얼굴이 퍼래져
벌벌 떨고 있기도 했고 화상을 입은 흔적이 보였다.
요동혈랑의 모습도 그와 진배없었다. 철퍼덕하고 새하얀 물방울들이 발
밑으로 산산이 부서지며 떨어지고 있었고 허리에 찬 장도 끝으로 물이 쉬
임없이 흘러 내렸다. 머리와 수염이 물에 젖어 엉망친창으로 헝클어져 있
었다. 그러나 번쩍이는 두 눈만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오금을 저리게 할 정
도였다. 거구의 몸으로 한쪽 무릎을 구부리며 장도를 뽑아 갑판에 박고 고
개를 숙였다.
"과거를 묻지 않고 이 몸을 받아 주시니 앞으로 견마지로(犬馬之勞)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악일비는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어둠을 버리고 밝음을 택했으니 다행한 일이오."
악일비는 요동혈랑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요동혈랑의 고개가 더욱 숙
여졌다. 악일비는 갑판에 부복해 있는 요동낭인대를 보고 외쳤다.
"자! 이제 우리는 한식구다. 백리세가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사해천하를
이룩하자!"
"와아아! 와아아!"
전 전선에서 함성이 터져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불타던 배들이 바닷속
으로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어느새 붉은 노을이 사해방의 전선들을 비추
기 시작했다.
"진군하라!"
사해방주 악일비의 말에 전선들이 일제히 낙조를 바라보며 진격하기 시
작했다.
산동성의 지도를 놓고 동서남북의 사해단주와 요동낭인대주 요동혈랑이
자리하고 있었다. 악일비는 지도의 하얀 점들을 가리켰다.
"이것이 백리세가의 주요 사업장과 거점들이오. 저들은 아직 우리가 자
신들의 주력을 섬멸한지 모르고 있소이다. 해서 그들은 개방과 연합하여
우리를 치기 위해 제령에 집결하고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공성계를 써서 저들은 유인한 다음 이대도강의 계책으
로 일망타진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북해단주 이극상의 말에 동해단주 왕정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니까 요동낭인대를 상륙하게 하여 우리가 백리세가의 지원군을 섬
멸한 것을 모르게 한 뒤에 적의 주력을 끌어들여서 포위 섬멸하자는 것이
아니요?"
"그렇습니다."
악일비는 싱긋 웃으며 요동혈랑을 바라보았다. 요동혈랑은 아무말도 하
지 않고 있었다. 악일비는 다시 지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촉박하네. 게다가 대대적인 전투를 벌여야 하는데 관부에서 참
는 것도 한계가 있네."
"그렇다면……?"
"제남의 본가로 진격할 것이네."
악일비의 말에 사해단주들은 눈을 크게 떴다. 요동혈랑은 고개를 끄떡였
다. 요동혈랑은 이번 공격전이 자신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충정을 아직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유인
전을 펼치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컷다.
"이번에 저의 충심을 다시 한 번 보여 드리겠습니다."
"백리세가의 본가에는 최소한의 경비병력만 남아 있을 테고. 백리노가주
와 몇 명의 고수가 남아 있기야 하겠지만 모두들 늙어빠진 자들이네. 백리
세가의 본가 무너진다면 하북 팽가가 얼씨구나 하고 황하 이북을 장악하려
들 것이네. 그리고 개방도 백리세가를 다시 대할 것이네. 본가를 무너뜨리
고 양산박으로 진군하여 그곳에서 백리세가의 주력을 친다면 승리는 우리
의 것이다."
그 말에 북해단주 이극상의 고개를 갸웃하였다.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관부에서 허락을 하겠습
니까?"
"누가 황하를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는가?"
산동성 남쪽 해안의 작은 어촌은 어둠을 끼고 잠들어 있었다. '컹컹컹!'
개짖는 소리가 요란히 울리자 잠에서 깬 어민들이 몽둥이를 들고 집밖으로
나왔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한때는 이 산동도 왜구들의 노략질이 횡
행하던 곳이었다. 때문에 깊은 밤의 개 짖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몽둥이들
을 들고 나온 것이다. 마을 옆 백사장에 수십 개의 등롱이 켜져 있었고,
수십 척의 배들이 오가면서 사람들을 끊임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대형 전선들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마을촌장의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아주 어릴 때에 겪었던 기
억이 주마등 같이 스쳐 지나갔다. 불붙는 마을과 사람들의 비명성 그리고
괴상한 옷차림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던 자들……
'난리야! 난리가 난 거여!'
수백 수천은 됨직한 인원들이 각기 병장기를 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은 한 시진이 채 못 되서였다. 마을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
었다. 그리고 배와 사람들이 사라지자 모두들 가슴을 쓸어 내렸다. 다행히
저들의 목표가 마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촌장 어른, 관아에 신고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날이 새거든……"
저들이 이 마을을 노린 게 아니라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사람들은 불안과 초조에 잠 못 이루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어린아이들
이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만 마을을 시끄럽게 할 뿐이었다. 날이 밝자
촌장은 배들이 상륙했던 자리로 가보았다. 그곳에는 물결만 일렁일 뿐 그
많은 인원이 상륙해서 내륙으로 들어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은
말끔했다. 보이는 것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 파아란 하늘과 바다였다. 촌장
은 지팡이로 모래사장을 한번 내리쳤다. 모래가 튀어 올라 촌장의 얼굴을
때렸다.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네. 여기 아무런 흔적도 없지 않은가?
관가에 가보았자 우리만 욕됨을 당할 것이네."
촌장의 말에 마을 사람들도 고개를 끄떡였다. 이렇게 사해방과 요동낭인
대의 상륙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산동의 한 어촌 마을에 상륙한 사해방과 요동낭인대는 밤을 도와 태산으
로 내달렸다. 하지만 마을에서 태산까지는 수백리였다. 또한 태산에서 그
들이 목적하는 제남까지도 수백리의 길이었다. 총 팔백리의 길. 아무리 빨
리 달린다 하더라도 오일은 걸리는 거리였다. 게다가 천 수백이나 되는 무
사들이 떼거지로 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사해방은 가는 길
목에 한곳을 방문하기로 했다.
척! 산동평마장의 주인인 왕대인의 잠을 깨운 것은 목 언저리에 있는
싸늘한 감촉이었다. 그것은 바로 장도였다. 밖에서는 말의 울부짖음과 사
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짤그랑! 금붙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이 정도면 될 꺼다. 모자라면 나중에 사해방으로 와서 청구하도록!"
사해방이라는 말에 눈과 귀가 번쩍였다. 사해방이라면 백리세가의 적이
아니던가? 저벅저벅! 장도를 든 사내는 문을 열고 나갔다. 싸늘한 새벽공
기가 왕대인의 가슴과 머리를 서늘하게 하였다. 왕대인의 가슴이 마구 뛰
었다. 이 사실을 빨리 백리세가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과 자신이 살아야 한
다는 본능이 머릿속에서 마구 교차되었다. 말 울음소리는 잦아들고 있었고
언제 나타났는지 하인들이 자신의 문 앞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빌어먹을 놈들!'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는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것들
이 적들이 몰려간뒤 몽둥이를 들고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는 것을 보자 화
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저들을 치도곤 하는 것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왕대인은 몸을 일으켰다.
"어서 백리세가에 이 사실을 알려라."
"예."
하인들이 허리를 굽실대었다.
두두두! 두두두! 새벽의 여명과 함께 무수한 인마가 내달렸다. 아침 일
찍 일을 나온 농부들은 황급히 논둑으로 몸을 숨겼고 작은 마을의 사람들
은 집안으로 꼭꼭 숨어 들어갔다. 가죽옷을 걸쳐 입고 장도를 찬 채, 부리
부리한 눈과 수염들을 휘날리며 내달리고 있는 수백의 무사들이 보였기 때
문이다. 그들의 기마술은 매우 놀라워 수백 마리의 말들이 한꺼번에 내달
리고 있음에도 꼭 한사람이 움직이는 것 같이 보였다. 그들이 지나가자 사
람들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 다시 수백 여명의
인마가 달려왔다. 사람들은 다시 비명을 지르며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이번에는 창문을 쬐끔 열어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가고 다시
수백 여명이 달려오고 있었다. 헌데 이들은 말을 잘 타지 못하는지 여기저
기 흙먼지 투성이였고 연신 욕지거리를 해대었다. 우당탕탕! 한 마리 말에
서 한명이 마을 가판(架板)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다른 기마는 그를 돌보
지 않고 내달렸다. 아니 돌볼 정신들이 없었다.
악일비는 앞서 달리는 요동낭인대를 보며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만약 육지에서 저들과 맞섰다면 우리는 뼈도 추리지 못했겠구나!'
그 옆에는 요동혈랑이 빠르게 말을 몰고 있었다. 물론 그로서는 매우 천
천히 몰고 있는 셈이었다.
"밤낮을 도와 달린다면 내일 밤이면 도착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무리를 해도 되겠소이까?"
북해단주 이극상의 말에 요동혈랑은 고개를 끄떡였다.
"우리 형제들은 달리는 말 위에서 먹고 잘 수 있으니 문제 없습니다. 지
금쯤이면 백리세가에서도 사태를 알아챘을 테니 빨리 갈 수록 승산이 높아
지는 겁니다."
북해단주 이극상은 뒤를 바라보았다. 뒤에는 점점 뒤쳐지는 사해방 수하
들이 보였다. 운하와 장강 하구 일대에서는 무적을 자랑하는 사해방이건만
마상 위에서는 형편없는 몰골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해방도들도 말을 못
타는 편은 아니었지만 요동낭인대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악일비는 정면
을 바라보았다.
'내일. 내일이다. 사해방의 이름이 천하에 울려퍼지는 날이!'
푸드득! 푸드득! 수십 마리의 전서구들이 날아 내렸다. 그 전서구에는
화급을 요하는 붉은 천이 매달려 있었다. 수십 개의 손이 전서통에서 전
서를 빼내 읽고는 급히 안으로 옮겨졌다.
<사해방 무사들이 산동평마장에서 말 이천 구백 마리를 강탈해갔음.>
<요동낭인대가 사해방과 동행중임.>
<태산에 당도했음.>
우직! 백리인군이 일어 서면서 내려친 손바닥에 의해 탁자를 파고 들어
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다. 어떻게…… 어떻게
……"
백리인군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문의 정예는 지금 제령에 집결하느라
본가는 텅 빈 상태였다. 본가를 내팽개치고 도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
다. 백리세가의 본가는 그 어떤 곤란과 위기에도 꿋꿋이 버텨온 자부심이
었다. 하지만 대적은 이미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은 자신이 세가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빠른 결정을 내려야 했다.
백리인군은 단호한 어조로 외쳤다.
"퇴각한다. 모든 것을 소각해라! 세가의 전력을 양산박으로 집결 시켜
라! 노가주님께는 내가 찾아가 뵙겠다."
"존명!"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갔다. 아직 해가 뜨려면 이른 시간이었지만 어두운
하늘과 땅 사이에 붉게 타오르는 광야(曠野)가 있었다.
수백여 칸의 건물들이 한꺼번에 타오르면서 주위 십리를 밝게 비추고 있
었고, 뜨거운 열기가 하늘과 땅에 깔린 어둠을 몰아내며 빛을 뿌리고 있었
다. 그 광경은 십리 밖에서도 보이고 있었다. 꾸역꾸역 모여드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다. 악일비는 그 광경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그 옆에 늘어선
사해단주들과 요동혈랑도 고개를 끄떡였다. 악일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리세가에도 두뇌가 있기는 있었군."
요동혈랑은 말 갈기를 쓰다듬었다.
"지금 즉시 저들을 추적해야 합니다. 시간을 끌면 사방에서 구원군들을
끌오 올 껍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이 당합니다."
동해단주 왕정이 인상을 ㅆ다.
"무슨 말이오? 백리세가는 이제 본거지를 잃었소. 한마디로 둥지 잃은
새가 되었다는 말이오. 이제 어느 누구도 백리세가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
오."
"그렇지가 않아. 백리세가를 등에 업고 우리를 쳐서 이익을 보려는 곳이
있기 마련이네. 그리고 이런 식의 결말은 나도 원하지 않아. 왕단주!"
"옛."
"이단주가 선단을 이끌고 황하를 거슬러 오면 제남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합세하여 양산박으로 오게. 백리세가는 그곳으로 집결할 꺼야. 말
은 두고 가게."
"존명!"
방주의 명령에 따라 일대의 무사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옆의 무사들에게
말고삐를 전해주고 제남으로 갔다.
"요동혈랑!"
"옛."
"이백 기를 엄선하여 각기 두 필의 말을 주어 적들을 추적하게하고 나머
지 삼백을 추려 뒤를 지원하도록 하게."
"존명!"
그들은 거침없이 내달려갔다. 남은 오백여 인원은 악일비의 지휘하에 진
군하기 시작했다. 후방에 일백기를 남겨두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
였다. 악일비는 가슴 한구석이 뿌듯해져 옴을 느꼈다. 근 이천에 가까운
병력을 이렇게 움직여 보게 되다니 꿈만 같았다. 백리세가만 병탄하면 그
것을 발판으로 천하에 웅지를 펼칠 수 있으리라. 악일비는 그러한 생각을
하며 말을 몰아갔다.
"이제 천하는 나 악일비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악일비는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스스로 다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