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백리세가
반승은 홍균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홍당주님, 이번에야 말로 산동팔마를 단창에 꿴 이야기 좀 해주시오.
산동팔마가 산동에서는 제법 했다는 소리는 나도 꽤나 들었다오."
"운이 좋았을 뿐이오."
홍균은 겸양으로 일관했다. 몇번이나 이런식으로 넘어 갔으나 이번만큼
은 반승의 결심이 남달랐다.
"하하하. 단순히 운만 좋다고 되는 일이 겠소. 사실 산동팔마의 명성은
육가나 백리세가에 못지 않았었소. 그런 여덟 고수를 단창에 꾀었으니 홍
형이야 말로 창왕 이후 최고의 장창 고수라고 할 수 있소. 소공자님께서도
듣고 싶어 하실 꺼요. 않그렇습니까 소공자님?"
소천은 웃으며 홍균을 바라보았다. 홍균은 반승이 남의 무용담 듣기를
좋아하고, 남의 무용담을 자신의 무용담인양 꾸며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
하기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로써는 자랑스러운 일이 아
니어서 말해주지 않았던 것인데, 이번만큼은 쉽사리 물러날 기세가 아니
고, 소천 또한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니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해야
할 듯 했다.
반승은 홍균이 산동팔마를 단창에 꾀뚤었다는 것을 못 믿고 있었다. 자
신이 아는 산동팔마는 홍균이 단창에 꿰뚫을 정도로 허약한 자들이 아니었
기 때문이다. 홍균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산동팔마는 해적 출신과 요동(遼東)에서 건너 온 검객, 양산박(梁山泊)
의 적통(嫡統)이라는 작자 등이 용케 모여 결성되었소. 이들의 무공은 실
로 뛰어나 관부와 백리세가에서 몇 번이고 잡으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를
하였소. 이렇게 되자 기세등등해진 산동팔마는 아예 팔마문이란 문파까지
세워 복수고와 인신매매, 해적질까지 서슴지 않았소. 그러던 어느 날 이들
은 간도 크게 산동포정사가 보낸 공물을 동해상에서 털었소."
"허! 간 덩어리가 배밖에 나온 작자들이었군."
"그 배가 공물선인지 모르고 턴 것이었소. 이일로 산동성 일대가 발칵
뒤집힌 건 불문가지였소. 그들과 원한이 있는 강호인들과 관부에서는 이번
기회에 산동팔마와 팔마문을 쓸어버리겠다며 대대적으로 나섰소. 산동팔마
도 커다란 위험을 느꼈는지 즉각 팔마문을 해산하고 어디론가 숨어버렸소.
그들을 찾기 위해 관부에서는 산동성 주위의 모든 섬들을 뒤졌고 강소와
저 멀리 발해만까지 수색을 했소. 강호의 고수들은 산동성 내를 뒤지며 산
동팔마의 행적을 뒤쫓았지만 끝내 그들을 찾아내지는 못했소. 그렇게 반년
이 덧없이 지나가 모두가 포기 상태에 있을 때 태산의 한 이름없는 산촌에
서 강간사건이 벌어졌소."
홍균의 이야기는 이제 극적이고 긴박감 있는 사건으로 넘어가려 했고,
듣고 있던 반승의 눈이 크게 반짝였다.
"그런 사건이야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니 관부에서도 무림인들 사이에서
도 크게 생각지 않았소. 헌데 마침 일이 되려는지 꽤 이름 있는 고수가 자
신의 고향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그것을 해결하러 가겠다고 태산에 들어갔
소. 헌데 사흘이 지나도록 연락이 오지 않았소. 그 고수와 절친했던 몇 명
이 그를 찾아 태산으로 들어갔고 그들도 실종되었소. 사흘 뒤에야 그들 중
한 명이 피투성이 시체가 되어 태산의 한 어귀에서 발견 되었소. 우리는
몸에 난 흔적을 보고 단번에 산동팔마의 수법임을 알 수 있었소. 산동팔마
는 놀랍게도 반년 동안 태산에 몸을 숨겼던 것이오. 게다가 팔마문까지 재
건할 준비를 끝내 놓고 있었소. 산동팔마는 발각되었음을 눈치채고 태산의
본거지를 미련 없이 버리고 도주를 택했소. 태산 주위에 있던 관부 무사들
과 고수들이 추적하여 공자묘 근처에서 일대 혈전을 벌이게 되었소. 그때
수천의 관부 무사들과 병사들이 동원이 되었고 산동 일대의 고수들은 아마
다 모였다고 하오. 산동팔마는 정말로 무서웠다고 하오. 그들은 악전고투
끝에 그 포위망을 뚫고 도주에 성공하였소. 그때 나는 임정성에 있었는데
산동팔마가 공자묘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로 달려가던 중이었소.
실력이야 어찌되었든 무림의 큰일에 동참해 보자는 생각이었소. 헌데 공자
묘로 향하는 관도위에서 지쳐 쓰러져 있는 산동팔마와 홀로 맞닥뜨리고 말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그들은 비참 그 자체였소. 이마와 사마, 칠마는 이
미 죽어 있었고 삼마, 오마와 팔마도 생사지경에 놓여 있었소. 일마는 그
런대로 정신이 있었소. 그가 나를 보고 이렇게 말을 했소.
'자네는 누구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나는 구겸창 홍균이라고 하오.'
'홍균. 자네와 아무런 은원이 없는데 왜 우리를 죽이려 하는가?'
'당신들의 악행을 듣고 있자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나왔소.'
'허허허, 그런가? 하지만 자네는 우리와 은원이 있지 않으니 우리가 죽
은 뒤에 함께 묻어 줄 수 있겠나? 우리는 자네가 아는 정도로 그렇게 나쁜
자들은 아닐세.'
'나는 죽은 자들까지 욕보일 만큼 잔인하지는 못하오.'
그때 저쪽에서 이들을 추적한 이들이 오고 있었소. 일마가 그러더군.
'우리를 함께 묻어 주게나.'
그는 그런 말을 남기고 내게 달려들었소. 움직일 수 있는 일마와 삼마,
오마, 육마, 팔마가 한꺼번에 달려들었소. 그저 함께 죽으려는 생각뿐 그
들에겐 공격할 의사도 힘도 없었소. 나는 제정신으로는 그들을 찌르지 못
할 것 같아 눈을 감고 단번에 그들의 목을 끊어주었소. 아무튼 그들이 죽
고 달려온 이들은 시체에게까지 분풀이를 하려 들었소. 그들은 시체를 갈
가리 찢어 까마귀밥을 만들겠다고 떠들어 댔소. 나는 그들과 한 약속 때문
이 아니더라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소. 내가 팔마를 죽였으니 그
시신도 내가 처리하겠다고 하자 모두들 더이상 군말을 하지 않았소. 나는
팔마의 시신을 내가 아는 곳에다 묻어다 주었소. 그곳은 지금까지 나만이
알고 있소. 지금쯤은 모두 흙이 되어 있겠지."
홍균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반승이 입을 열었다.
"그럼 그들이 훔친 공물과 보물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소?"
"그걸 이야기하자면 태산의 사건을 이야기해야겠군."
홍균은 수염을 쓰다듬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태산의 강간사건은 산동팔마가 저지른 일이 아니었소. 그들은 그러고도
남을 위인들이었지만 은신처를 노출시킬 만큼 어리석지 않았지. 팔마문의
총관이 보물을 노리고 치밀하게 꾸민 일이었소. 우선 강간 사건을 벌이고
팔마의 귀에는 가급적 들어가지 않게 하고. 우리들이 모여 있던 연대에서
집중적으로 소문을 퍼뜨렸소. 그곳으로 먼저 간 고수는 다름 아닌 자신이
었소. 그를 찾아 세명이 다시 갔는데 둘은 그의 부하였소. 그들은 다른 한
명을 제압한 뒤 팔마의 무공 흔적을 몸에 남기고 태산 어귀에 내다 버린
것이었소. 그 상처를 보고 산동팔마를 찾아 나선 것이었고. 산동팔마를 죽
이기 위해서 포위공격을 할 때 그들은 산동팔마가 숨겨 놓은 보물을 챙겨
도주 했소."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모르니까 묻지 않소?"
"그들은 운이 없었네. 보물을 챙기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평소 산동팔마
를 휘하에 두려던 한 세력의 눈을 벗어나지는 못했지."
"삼혈맹?"
반승의 외침에 홍균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 셋은 삼혈맹도들에 의해 황하가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네. 보물
은 삼혈맹이 챙겨서 사라졌지."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강호에는 알려지지 않았소이까?"
"그건 그 세 명을 죽인 게 삼혈맹이기 때문이지. 산동의 개방분타가 이
사실을 알았지만 강호에 공표(公表) 하지 못했네. 나도 나중에 몇 명의 지
인(知人)을 통해 들었지. 어떤 이들은 이들 셋이 삼혈맹에 투신을 했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죽었을 것 같네. 삼혈맹은 배신자를 살려두는 곳이 아
니거든."
반승은 동감을 표했다. 배가 제령성에 도착하자 새로 탄 사람들로부터
갈대밭의 전화(戰禍)에 대해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사해방과 백리세가의 싸움이었습니다. 사해방이 먼저 야간공격을 감행
했으나 집결해 있던 백리세가의 무사들에게 패해 도주를 했지요. 이번에는
백리세가에서 추격에 나섰습니다. 사해방도들이 배를 타고 도주하자 백리
세가도 나루터에 매어져 있던 배를 타고 추적했습니다.사해방도들은 강 반
대 편 갈대밭에 도달하자 뿔뿔이 도망갔고 백리세가의 무사들은 계속 추격
에 나섰지요. 하지만 그게 함정이었습니다. 갈대밭을 포위한 채 잠복해 있
던 사해방도들이 백리세가 무사들이 타고온 배까지 탈취 한 뒤 갈대밭에
불을 지른 거지요. 사방에서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백리세가의 무사들을
하나하나 격살해 나갔지요. 몇몇 고수들만 포위망을 뚫고 살아난 모양입니
다. 아마 관군이 출동하지 않았다면 사해방이 양산박까지 쳐들어갔을 겁니
다."
어디서 그런 상세한 소식을 들었는지 장한은 꽤나 자세히 알고 있었다.
반승이 일전의 은전을 손에 쥐고 물었다.
"자네는 어찌 그리 소상히 알고 있나?"
장한은 머리를 긁적이며 은전을 받아 들었다.
"소인도 제령성의 객점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헤헤, 소인같은 무지렁
이가 강호 영웅분들의 싸움을 구경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사해방에서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트리는 걸껄세."
"왜요?"
"고도의 심리전이지. 양쪽에서 저울질을 하던 군소문파들에게 백리세가
가 기울고 있으니 그들을 돕지 말라고 던지는 일종의 경고지."
"헌데 사해방이 왜 갑자기 그런 전투를 벌인걸 까요?"
"언젠가는 터져야 할 것이 터진 것뿐이네."
홍균의 말에 소천은 고개를 끄떡였다.
"우리에게 보여주려 벌인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천의 말에 둘은 해연이 놀랐다.
"왜요?"
"우리가 백리세가와 손을 잡으면 사해방으로서는 뒤에도 강적을 두게되
는 것이니 백리세가와의 싸움에 투입된 주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지요."
"그럼 총호법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장주님께서 백리세가와 손을 잡으
실 것 같습니까?"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백리세가가 여기서 더 몰락
한다면 사해방의 세력은 급신장할 겁니다. 대사형은 사해방의 그러한 성장
을 달가워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백리세가가 몰락했다 하나 안찰사 소
속의 관병들을 움직이게 한걸 보면 아직 여력이 남아 있어 사해방에게 쉽
게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관병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라면 전투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간을 벌어보자는 것 같습니다. 각 문파에 협조를 요청하고 각종 인맥
과 자금을 총동원하여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전을 벌일 준비를 할겁니
다. 사해방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하겠지요."
제남에 닿은 것은 제령을 떠난 지 이틀 뒤였다. 이곳이 종점이라 판교가
내려지자 배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리느라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느긋하게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내리는 소천 일행은 청의로 갈아
입었고 백색 피풍의를 둘렀다. 그리고 모두 푸른 건을 쓰고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소천이 허리에 단봉 세 개와 장검을 찬 것에 비해 반승은 반
월도를 차고 있다는 정도였다. 소천 일행이 내려서자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던 몇 명의 백의무사들이 정중히 맞이하였다. 그들 중 선두에는 눈썹이
굵고 턱이 각져 있으며 코는 우묵하여 전체적으로 굴강해 보이는 인상을
풍기는 약관의 청년이 있었다.
"백리웅풍입니다. 먼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소천은 가볍게 답례를 취했다.
"염려 덕분에 별 탈 없이 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환대를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세가까지 타고갈 마차를 준비하였습니다. 먼저 오르시지요."
백리웅풍은 마차를 가리켰다. 사두마차로 일견하기에도 고급스런 마차였
다. 소천 일행은 사양치 않고 마차에 올랐다. 그들이 마차에 오르자 무사
들도 말 위에 올랐다.
"출발!"
백리웅풍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차와 기마는 일제히 내달았다.
일행이 제남성을 벗어나 태산 쪽으로 한 시진(時辰) 가량 내달렸을 때
태산의 한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장원이 눈에 들어왔다. 송대 양식의 정문
은 그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백리세가는 수목에 정성을 많이 들였는지
장원 안팎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은 거목들이 즐비하고 정문을 통과
한 이후에는 울창하게 조성된 수림이 길 좌우로 늘어서 있었다. 마차는 몇
개의 문을 통과해서 전각 앞에 도달했다. 전각 앞에는 인물들이 나와 있었
다. 홍균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소천과 반승이 내렸다. 전각 앞
에서 기다리고 있는 분들은 하나같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었다. 소천은
가볍게 읍을 했다.
"무림말학 소천입니다."
"허허허, 늙어 빠진 노물들이오."
"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갑시다."
전각 주위에 청년들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을 호송해온 백리웅풍이 유
일한 청년이었다. 소천은 대전의 가운데로 나가 정면에 앉아 있는 노인을
바라보며 예를 취했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땋아 올려 상투를 틀고 비녀를
꽂고 있었다. 그리고 하얀 수염이 중단전까지 내려와 백의와 조화를 이루
고 있었다.
"무림말학 소천이 백리 노가주님을 뵙습니다."
"허허허. 강남에 뛰어난 청년 고수가 있다고 하더니…… 명불허전(名不
虛傳)이외다."
"황송할 따름입니다."
소천은 노가주가 권하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백리 노가주 백리장천. 한
때는 천하 오대검수로 손꼽히는 일대 검객이었다. 검을 놓고 은거에 든 지
십수년이 지났다고 알려져 있었는 바 오늘 소천을 맞기 위해 백리세가의
주인 자격으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이다. 소천은 백리노가주를 보자 이맛살
을 살짝 찌뿌렸다가 폈다.
'흠. 강호에서 현 가주인 백리무군이 신공을 연마하기 위해 폐관중이라
는 소문이 떠돌고 있지. 하지만 세가가 존폐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폐관을
깨고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홍균은 백리세가의 원로고수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하북과 하남, 산동
일대에서 수십 년간을 돌아다니면서도 얼굴 한번 보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었다. 그런 원로고수들이 모두 이 자리에 나와 있었다.
'생각보다 심각하군.'
청룡장은 막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강남의
몇몇 인사들뿐이었다. 백도에서는 청룡장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짙었다. 그
리고 백리세가의 노가주라면 구파일방의 장문인 보다 반 배분 높은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구파의 장문인이 와도 직접 기다리면서 맞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소천은 강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출내기였다. 그래서
소천이나 홍균, 반승 정도의 사절에는 가주가 직접 환대를 하는 것도 과례
(過禮)였다. 그런 면에서 백리세가의 노가주가 직접 자리에 나와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이들에게는 큰 영광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뒤집어서
말하면 그 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이야기도 되었다. 백리세가는 노가주가
직접 나서서 새파란 애송이를 대접해야 할 정도로 위협을 받고 있다는 말
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소천은 내심 가슴이 철렁했다.
'대사형은 백리세가의 상황이나 살피고 오라 했는데 이들의 표정을 보니
당장이라도 혼례를 기정 사실화 하고 우리의 힘을 빌리려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명분도 마땅치 않은데 이들과 손을 잡는다는 것도 무리다. 게다가
나는 청운이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닌가? 어렵다 어려
워!'
"허허허. 소공자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오?"
백리장천의 말에 소천은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소천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댔다. 백리세가의 노옹들은
그 모습을 보고 담담한 미소만 지었다. 백리장천은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
었다.
"차나 한잔 들면서 마음을 가라 앉히시게나."
백리장천은 찻잔을 퉁겨 날려보냈다. 잔은 일직선으로 날아오고 있어서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쉽게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소천은 손을 뻗어
서 잔을 가볍게 받았다. 일순 묵직한 내공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소천
은 미리 방비를 했기 때문에 쉽게 받을 수 있었다. 헌데 내공이 끊이지 않
고 점점 더 강대해지는 것이다. 소천은 곤욕스러운 얼굴을 취했다. 손님의
입장으로 반격을 하기도 그렇고 이렇게 밀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내
력을 더욱 돋구었다. 백리장천의 얼굴에 일순 놀람의 빛이 일면서 일 성의
공력을 더했다. 하지만 소천은 요지부동이었다.
'노부의 칠 성 공력을 받아내다니 젊은 나이에 정말 대단하구나!'
백리장천은 호승심이 일어 일 성의 공력을 더해 팔 성 공력으로 올렸
다. 소천은 백리장천의 공력이 높아지자 은근슬쩍 일 푼의 힘을 거두었다.
백리장천은 소천의 손이 살짝 밀리는 것이 느껴 지자 껄껄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셧다.
"일찍이 청룡노야께서 무도의 한 거봉을 이루고 계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평소 원모(遠慕)해 마지 않았는데 이렇게 고제를 만나게 되니
정말로 기쁘기 한량 없구려. 젊은 나이에 그만한 성취라면 이후 무림에서
도 손꼽히는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십 년 내에 천하제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네. 허허허!"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아니야! 내 일찍이 그대 같은 성취를 이룬 젊은 기재를 본적이
없네. 앞으로도 자만하지 말고 매진을 해주기 바라네."
"명심하겠습니다."
백리장천은 소매를 쓸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나이가 들어 그런지 오래 앉아 있기가 힘들구먼. 허허허. 노구는 물러
갈 터이니 젊은이들끼리 잘 사귀어 보게나."
백리장천이 일어서자 소천도 일어섰다. 전각 안의 인물들이 모두 일어섰
다. 백발이 성성한 백리세가의 원로들은 모두 백리장천을 따라 나갔다. 대
전 안에는 백리웅풍과 삼십대의 중년인만이 남았다. 백리장천이 나간 곳으
로 한 명의 소녀가 입이 퉁퉁 부은 채로 들어왔다. 백의를 걸치고 머리에
는 예쁜 나비장식을 꽂고 있었다.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 그리고 서늘한
눈매는 아래 초롱한 눈망울이 자리했다. 튀어 나온 입술이 그 매력을 더욱
높이는 것 같았다.
"인사드리거라. 청룡장에서 오신 분들이다."
이 소녀가 백리세가의 둘째 소저인 백리소연이었다. 한 자루 장검으로
황하 일대를 누비며 협명을 쌓아 올린 여협이 이런 어리광을 부릴줄은 몰
랐다. 백리소연은 입술만 삐쭉 내밀고 자리에 앉았다. 들어선 이후부터 자
리에 앉은 지금까지 고개를 돌린 채 소천 일행은 쳐다 보지도 않았다. 숙
부인 백리인군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연은
입술만 오물거렸다. 백리인군이 소천쪽을 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직 어려 그런지 이렇게 철이 없답니다. 하하하!"
소천은 빙그래 웃었다. 저렇게 투정을 부리는 것이 꼭 대사형의 딸 소하
같았다. 단소하도 자신의 마음대로 안되면 저렇게 투정을 부리다가 엉엉
울기까지 했다. 백리인군은 침을 삼키며 말을 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소이다."
그 말에 소천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대사형은 왜 나를 보냈을까? 그리고 문상은 왜 나를 보내는 것을 막지
않았을까? 설마 이런 사태를 알지 못했던 걸까?'
백리인군은 소천의 안색을 살피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귀장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소이다."
소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백리인군이 자신의 체면이나 가문
의 체통을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말을 할 때에는 그만한 절박감이 담겨져
있었다. 게다가 이런 회담에 이소저까지 참가 시켰다는 것은 이소저를 청
룡장에 보낼 생각이 굳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저희 장에 구체적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즉각적인 출병이오."
"출병을!"
홍균과 반승은 서로 바라보았다. 즉각적인 출병. 그것은 청룡장과 사해
방의 전면전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무수한 피를 요구하는 끔찍한 일
이기도 했다.
"불가합니다. 이번 싸움은 저희들에게는 정당한 명분도 실익도 없습니
다."
"사해방은 녹림의 무리들이오. 게다가 우리는 곧 사돈지간이 될 사이가
아니겠소? 그렇다면 명분은 이미 선 것이고. 실리야 청룡장이 사해방을 병
탄한다면 그 세력이 급신장할텐데 그만한 실리가 어디 있겠소?"
"혼인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입니다. 오늘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혼
담을 결정 짓고자 함이 아닙니다. 저희 장주님이나 저는 소장주의 결심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정략적인 결혼
을 추진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백리세가가 지금 어려움에 처해있다고
해서 이렇게 말하는 거라 생각지는 마십시오. 우리와 사해방은 아무런 은
원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력을 넒히기 위해 아무런 은원도 없는 문파를 공
격하지는 않습니다."
백리소연은 눈을 반짝이며 처음으로 소천을 바라보았다. 백리웅풍은 고
개를 떨구었다. 백리인군은 무심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소천은 말
을 이었다.
"지금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사해방과의 휴전회담 주선이나 사해
방의 총공세를 며칠 미루어 줄 수 있는 정도입니다. 양쪽간의 혼담 문제는
당사자간의 의견으로 남겨두겠습니다."
"총공세를 미룬다면 며칠정도 확보가 가능하시오?"
"오십일정도……"
백리인군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백일…… 백일만 그들의 발을 붙잡아 주시오. 대신 이것을 드리겠소."
백리인군은 하나의 도를 들어 올렸다. 도. 그것을 보는 반월도 반승의
눈이 커졌다.
"신도(神刀) 자하(紫霞)!"
도를 든 자들이라면 한번쯤 가져보고 싶은 신병 자하. 구십 년 전 전무
림의 학살자였던 혈천작(血天爵) 쿠챠호가 쓰던 신병이었다. 쿠챠호는 원
황실에서 중원의 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키운 인물이었다.
그는 한 자루 장도를 들고 대강남북(大江南北)은 물론이요 세외를 오가
며 원 황실에 반기를 든 무림고수들을 척살했다. 그때 그가 황제로부터 받
은 것은 장도 하나와 영패 하나뿐이었다.
그가 받은 영패는 이품(二品) 이하 지방관들과 각 행성(行城) 주둔병 중
일만, 그리고 관에 딸린 고수들을 마음대로 이용 할 수 있었다.
그의 손에 수백여 명의 무림명숙들이 죽어갔다. 그리고 수천 무림인이
그의 휘하에 몰려들었다. 살기 위해서……. 그는 휘하로 투항한 이들은 죽
이지 않고 우대를 하여 자신의 세력을 넓혀갔다.
그는 투항한 고수들을 거느리고 태행산맥에 제천신궁(制天神宮)이라는
무림문파를 창건했다. 쿠차호는 제천신궁을 세운 뒤 전 무림의 복속에 나
섰다. 황하 이북을 휩쓴 그가 멈추어 선 곳은 소림사였다.
쿠차호는 단신으로 소림사에 도전을 했다. 소림사에서는 두 가지 조건을
내걸고 그의 비무신청을 받아 들였다. 쿠차호가 패했을 시 더 이상의 학살
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제천신궁은 무림 위에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쿠차호는 그 조건에 흔쾌히 승낙을 하고 자신도 조건을 내걸
었다. 소림사에서 내세운 고수가 패했을 때 소림사의 대웅전 불상을 원 황
실에서 기증한 금불상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그는 소림사 승려의 안내로 몇 명의 고수만 대동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반나절 뒤에 그 혼자 하산 했다. 그리고 제천신궁으로 들어갔다.
그때 적지 않은 수의 군웅들이 제천신궁을 떠났다. 제천신궁의 위협에서
목숨을 구하고자 억지로 붙어 있던 이들이었다.
헌데 그들이 떠난 것 이상의 수가 쿠차호를 따랐다. 권력의 맛을 안 이
들, 그리고 나름대로의 야망을 품은 이들이 쿠차호를 따라 제천신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제천신궁은 무림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삼십여년동안 이어진 제천신궁의 군림시대를 마감한 것은 명교(明敎)를
주축으로 한 중원무림연합이었다. 그때 이후로 신도 자하를 본 인물은 없
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이것은 혈천마궁의 멸망에 참가 하셨던 증조부님이 얻으신 겁니다. 그
뒤 본가에 비전(秘傳)되어 내려 왔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빛을 볼 때가 된
것이겠지요. 허허허. 쿠차호가 쓰던것이기는 하나 이 도의 원래 주인은 송
대의 일대 협사였다고 합니다. 꺼려하시지 않는다면 이것을 예물로 드리고
싶습니다만……"
백리인군의 말에 소천은 홍균을 바라보았다. 홍균은 아무 생각 없는 표
정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대전 안에는 백리웅풍과 삼십대의 중년인만 남았다. 백리장천은 차를 들
면서 백리인군을 바라보았다. 백리인군의 안색은 평온했다. 위기를 느끼고
있는 사람의 안색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의 고요함이 어려 있
는 듯했다. 백리장천은 찻잔을 내려놓고 말을 하였다.
"그들이 사해방을 백일동안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백리인군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생각해도 백일은 무리일껍니다. 사해방에서 거경방과 청룡장의 눈
치를 보면서 손을 쓰겠지요. 그 기간만 벌어도 승산은 충분합니다. 지난
며칠간 사해방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것만 해도 큰 성과입니
다. 처음부터 그들의 힘은 기대하지 않고 세운 작전 아닙니까? 하지만 지
금으로써는 하루를 버는 것만으로도 큰 이득입니다. 보름 뒤면 요동에 가
있던 가솔 이백과 일대의 낭인 일천이 도착합니다. 그들만 도착한다면 사
해방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부와 마찰이 생기겠지만 예를
크게 보이면 됩니다."
백리장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일이 이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황하 이북의 행태는 어떠
하더냐?"
"팽가는 오히려 더 조용해진 느낌입니다. 어부지리를 단단히 노리고 있
는 모양입니다. 다행인 것은 개방에서 협조적인 답변이 왔습니다."
"그들은 떠났느냐?"
"예. 그리고 무엇보다 소연이를 청룡장에 보내지 않게 되어 다행입니
다."
"그럼 보낼 생각이었느냐?"
백리인군은 미소만 가볍게 지었다. 백리장천 수염을 쓰다듬었다.
"청룡장의 소장주가 소천이라는 아이의 반만 되어도 소연이의 짝으로는
부족함이 없을게다."
"청룡장이 지금은 약간의 득세를 하는지 몰라도 그것은 잠시 피고 지는
안개꽃 같은 겁니다."
백리장천은 하얀 백발을 좌우로 가볍게 저었다.
"오늘 보니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