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육정산(陸靜山)
배는 바람을 타고 운하를 따라 북상하고 있었다. 이 배는 정기적으로 항
주와 제남을 오가며 사람을 주로 실어 나르는 민선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용했다.
일부는 갑판에 앉아 무료한 시간들을 보내기 위해 투전을 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술을 마시기도 했다. 유생차림의 몇 명은 섭선을 흔들며 시를
외우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넓지 않은 배에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지만 기이하게도 앞 갑판에는
새하얀 백의를 걸친 세 남자가 있을 뿐, 누가 쫓아낸 것도 아닌데 모두들
배 고물 근처에 몰려 복작였다.
그들은 청룡장을 떠나온 소천과 주작당주 구겸창 홍균, 인의당주인 반월
도 반승이었다. 소주에서 처음 이 배를 탔을 때만해도 그들은 앞 갑판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끼어 앉아 있었다.
청룡장의 소주 지단주(支團主)가 어떻게 알았는지 마중을 나온 것이 화
근이었다. 장강 하구와 강남에서 배를 몰려면 거경방(巨鯨幇)의 눈밖에 나
면 안되었고, 그 거경방은 청룡장의 그늘 아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승선때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난리를 쳤다. 그 덕분에 앞 갑판은
이들의 독차지가 되고 말았다.
거경방은 강동일대의 수로는 물론, 동해의 해상권까지 장악한 문파였다.
거경방이 동해의 패권과 장강하구의 운송권, 그리고 그에 따른 운하의 이
권을 장악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청룡장의 삼차에 걸친 동해 왜구와 해적
토벌이 큰 영향을 주었다. 청룡장과 왜구와의 첫 대전 발발은 왜구들의 동
해안 노략질이 극성에 달하던 명(明) 건국 초였다.
소천의 사부님이신 청룡노야께서 강동을 지나다가 노략질을 하고 있는
왜구들을 단신으로 쓸어버린 것이 시발점이었다. 그 뒤 청룡노야와 강동의
몇몇 영웅호걸들이 합심하여 민단(民團)을 조직, 대대적인 토벌을 벌였다.
차츰 민단의 세력이 커지자 관(官)에서 예의주시했다. 의심의 눈길이 커
지자 청룡노야는 민단을 해체하여 관과의 충돌을 피하였다.
그 후 청룡노야는 태호가에 은거하며 제자를 키우기 시작했다. 단우백과
마운룡, 서왕이 이때 청룡노야에게 무공을 배우게 되었다.
몇 년이 흐르자 왜구들의 노략질이 다시 심해졌다. 청룡노야 다시 민단
을 부활시켜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오랜 시간을 준비하여 왔던 만큼 이
번에는 매우 신속하고 치밀하게 토벌이 이루어져 단기간 내에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안기며 끝이 났다. 왜구 퇴치가 끝나자 청룡노야는 즉
각 민단을 해체하고 은거에 들어갔다.
청룡노야가 이렇게 한 반면, 그의 대제자인 단우백은 이것을 기화로 민
단을 구성하고 있던 청년들과 왜구들에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을
모아 무공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또한 청룡노야의 명성을 듣고 온 각처의
고수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오늘날의 청룡장을 완성시켰다.
청룡장과 거경방의 인연은 첫 왜구 토벌 때. 몇 척의 전선을 빌려줌으로
써 이루어졌다. 그 당시만 해도 거경방에는 전선이라고 할 것도 없는 초라
한 화물선 몇 척 뿐이었지만, 지금은 중원 최고의 전단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크게 성장하였다.
중원 최고의 전단을 가진 거경방이지만 일차와 이차, 그리고 삼차에 걸
친 대 왜구 토벌전을 청룡장과 함께 참가함으로써 청룡장의 저력을 알게된
몇 안되는 문파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앞으로 계속 동해의 패권을 장악하
기 위해서는 청룡장과의 관계를 돈독히 유지해야 함을 여실히 깨닫게 되었
다.
청룡장의 소주지단주가 배웅을 나온 거물이 누구인지 급히 알아 보았고,
그 인적사항은 즉각 방주에게 연락이 갔다. 그리고 인근에 있던 거경방의
간부들이 급히 달려와 인사를 했다. 그래서 선원들이 호들갑을 떤 것이다.
소천은 원래 이렇게 남들과 다르게 대접받는 것을 싫어했다. 그렇다고 지
금에 와 저 멀리 있는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도 마땅치 않았기에 묵묵히 자
리를 차지했다.
북상하던 배가 양주 도착하자 사람들이 많이 내리고 탔다. 그들 중 몇
명은 앞쪽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얼른 짐을 들고와서 자리를 잡았다.
갑판장이 와서 뭐라고 하려다가 홍균의 제지로 아무말 못하고 선실로 돌아
가자 뒤에 있던 이들도 자리가 많이 남아 있는 앞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운하에는 어느새 황혼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반승이 소천을 보고 말을 하
였다.
"소공자, 선실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먼저 들어가십시오. 잠시 더 구경을 하겠습니다."
소천은 황혼의 풍경을 감상하고 싶었겠지만 마음대로만은 되지 않을 성
싶었다.
"저기 좀 보십시오!"
홍균이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수십 개의 등롱이 일제히 밀려오고
있었다. 불이 켜진채 품자형으로 세 무리를 만들며 다가오는 등롱은 마치
도깨비불 같았다. 뒤늦게 등롱을 보게된 사람들은 모두들 당황해하기 시작
했다.
그때 갑판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사해방(四海幇)의 영웅들께서 잠시 우리 배에 볼일이 있으신 모양이오.
우리 배는 상납금을 준비해 두었으니 여러분들은 안심하십시오. 그래도 혹
시 모르니 선실로 내려가 계십시오."
갑판장의 말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선실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갑
판장은 사람들을 헤치고 세 명 앞에 왔다. 사람들에게 말할때와 달리 몹시
불안한 얼굴이었다.
"사해방에서 순검(巡檢)을 나온 모양입니다."
사해방은 회수(淮水) 일대의 패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수적 무리였
다. 항주에서 시작한 운하는 북경(北京)까지 연결이 되면서 중원의 대동맥
(大動脈)을 형성하고 있었다.
칠천리가 넘는 운하의 주위에는 수백 개의 성(城)과 읍(邑)이 있고, 하
루에 수백 수천 척의 배들이 오고갔다. 따라서 이들을 노리는 수적들이 있
었다. 운하는 폭이 좁고 내륙과 연결 되어 있어 수적들이 설치기에는 장강
이나 황하처럼 쉽지 않았다. 하지만 길이가 칠천리쯤 되고보면 관부의 눈
을 피해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 틈을 비집고 수십여개의 크고 작은 수적단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세력을 떨치는 곳이 바로 사해방이었다. 사해방은 회
수를 중심으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다.
회수는 황하와 장강 사이에 흐르는 강으로 거대한 호수를 세 개나 끼고
있었다. 그리고 황하와는 달리 수백 수천의 지강과 샛강들이 있고 늪지대
와 갈대밭이 수백 리씩 뻗어 있는 곳들이 많아 숨기에도 용이했다.
회수의 이런 지형 조건 때문에 무수히 행신 수적단들을 사해방은 이 통
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사해방은 녹림문파이긴 했지만 고수들이 많아 강
호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갑판장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배가 속해 있는 선단 연합에서 매년 적지 않은 돈을 사해방에 보내고
있었기에 평소에는 별탈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 모습
을 드러낸 것은 이들 셋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반승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해방이 저렇게 나온 적이 있는가?"
"저희 같은 민선을 노리고 온 적은 없습니다."
갑판장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신들 같은 민선에는 저렇게
크게 무리를 지어 올 필요가 없었다. 작은 배 하나만 보내도 각 선단은 구
품을 올렸기 때문이다.
"세척이군."
멀리 다가오는 배를 보는 소천은 담담했다. 다가오는 등롱은 배에 장대
를 꽃아 그 위에 매단 것으로 어둡고 먼 거리에 있었기에 배는 보이지 않
고 등롱만 보였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등롱이 그냥 떠서 오는 것처럼
알기 십상이었다. 소천이 본 배들 중 두 척은 민선 좌우 측에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있고 한 척은 정면에 있었다.
"배를 멈추어라!"
저쪽에서 소리가 들려오자 이쪽에서는 재빨리 닻을 내렸다. 닻이 물 속
으로 '첨벙!' 하고 빠져들자 좌측의 배가 가까이 오더니 판교(板橋)를 내
려놓았다. 그리고 십여 명의 인원이 배 위에 올라왔다. 선장과 갑판장을
비롯한 십여 명의 수부(水夫)들이 공손히 그들을 맞이했다. 판교를 건너온
사해방 방도들은 선두에 당당히 서 있는 세 명을 보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
다.
사해 방도 하나가 뭐라고 하자 선장이 작은 소리를 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사해 방도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쿵쿵 거리며 다가선 녹색 건
을 두른 장년인이 소천 일행 앞에 서서 포권례를 취해보였다.
"사해방의 총관인 거력패도(巨力覇刀) 웅삼(熊三)이라 합니다. 본방 내
부에 사소한 일이 있어 잠시 배에 탄 사람들을 조사하고자 하니 양해 바랍
니다."
반승은 이들이 노리는 것이 자신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자 약간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반월도 반승이라고 하네. 이쪽은 구겸창 홍균 홍대협. 이분은 소
공자시네."
반월도 반승과 구겸창 홍균은 사해방주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인물
들이었다. 거력패도 웅삼은 의외의 거물들이 배에 타고 있는지라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존성대명은 익히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뵙게되니 삼생의 영광인가
합니다. 세 분께 폐를 끼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방 내의 일을 집
행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많은 양해를 바랍니다."
"조용히 처리해 주게"
반승의 대답에 그는 고개를 돌려 수하들을 보았다. 갑판에는 선실에서
올라온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찾아라!"
그 말에 사해방도들은 사람들을 헤집고 다녔다. 몇 명은 선실로 내려갔
다. 평소라면 이런 기회에 몇 푼의 은자나마 챙기던 사해방도들이었지만
총관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물품은 챙기지 않았다. 일 다경(茶
頃)이 지나자 몇 명의 무사들이 총관에게 와서 고개를 저었다. 거력패도
웅삼은 반승에게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사해방도들이 자신들의 배로 질서정연하게 건너 가자 사해방 전선은 운
하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행객들은 옷가지와 짐들이 널부러졌지만
아무도 불평 하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에도 사해방도가 있을 수 있기 때문
이었다. 목숨을 온전히 보전하고 재물을 빼앗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봅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번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반승의 말에 소천은 고개를 저었다.
"사해방의 일은 서사형께서 주시하고 계십니다. 그보다 사해방의 전력이
제법이더군요. 사해방이 백리세가와의 접전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도 무
리가 아니더군요."
"그렇게 보셨습니까?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고수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
니다. 총관이라는 거력패도만 해도 일류고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본 것은 고수가 아닙니다. 그들의 선단 배치와 무사들의 움직임,
조직력 등을 본 겁니다. 일대일 대결은 비무 때나 하는 거지, 실제 세력과
세력 간의 전투는 집단전 형태로 나타나는 겁니다. 강호에 일대일로는 연
달아 백여 명의 무사를 상대 할 수 있는 고수라 할지라도 숙련된 무사 여
러명이 펼치는 검진을 당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백리세가가 사해방과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전투 방식의 차이 때문입
니다. 백리세가야 고수들이 나서서 몇 수만 펼치면 사해방의 오합지졸들이
뿔뿔이 흩어지리라 생각 했을 겁니다. 사해방의 조직력은 보통이 아닙니
다. 누가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수하무사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였습니
다. 서너명씩 조를 지어 일부는 갑판에서 사방을 감시했고, 선실로 내려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온 조, 수부들을 조사한 조, 우리를 상대 하기 위해
서 포진한 조, 배의 기물을 조사한조. 어느조 하나 말소리를 내는 것을 듣
지 못했습니다. 모두들 누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조직이라면 고수 몇명이 나서서 위세를 보인다
고해서 승리 할 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백리세가는 지금 사해방의 조직전
에 말려 고전을 하고 있을 껍니다. 아무래도 백리세가는 우리와의 혼담보
다 집단전법에 대해서 관심이 더 있을 것 같군요."
집단전법(集團戰法). 무림의 각파에 비전(秘傳)으로 내려오는 검진(劍
陣)과 다른 것으로 병법(兵法)에 가까웠다. 검진은 구성원의 내공수위, 수
련 정도에 따라서 위력이 달라진다.
집단전법은 간단한 병장기 조작과 명령체계만 서면 당장 실전에 써먹을
수 있었다. 물론 검진의 치밀함, 교묘함과 위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
서 병사를 부리는 병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병법이 수천 수
만의 대군을 운용하는 묘미라면 집단전은 수십 수백 명을 운용하는 방법이
었다.
청룡노야가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집하고 보니 대부분 일
반인이었다. 일반인들에게 무예를 가르치기는 해야겠는데, 시간은 없고,
검진을 만들자니 실력이 부족하고, 병진을 만들자니 사람은 적고, 할 수
없이 어정쩡하긴 하지만 검진과 병진의 중간형태인 집단전법이 만들어졌는
데, 이게 의외로 쓸모 있어서 다듬고 다듬었더니 진짜 쓸만한 전법이 되었
다.
당시 왜구들은 일반 해적떼도 있었지만 왜의 본토에서 패권싸움에서 밀
려 바다로 나온 영주들이 많았다. 영주들이 거느린 병사는 수백차례의 전
쟁을 통해서 다져진 이들었다.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었기 때문에 악만
남아 있었다.
강호의 방식대로 일대 일로 싸우거나 관군의 병법으로 대적한다면 민단
이 패할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래서 열 명, 이십 명, 혹은 오십 명이 한
사람처럼 움직여 싸우는 소단위 전술법을 만들었다. 청룡장은 이러한 집단
전법으로 왜구들을 크게 물리쳤다.
그 후 단우백은 이 전법으로 무사들을 훈련시켜 절강과 장강 하구 일대
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거나 흡수 할 수 있었다.
청룡장은 지난 수십 년간 집단전법을 발전시켜 하나의 체계를 세운지 오
래였다. 이 집단전법은 청룡장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은 사람들은 운용의
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주작당주인 홍균도 집단전에 관해서는 휘하 대
주들이 처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무림인들은 이러한 방법이 정도에 벗어 난 것이라며 청룡장을 정사 중간
의 문파에서부터 백도의 탈을 쓴 마도라고까지 지칭했다.
청룡장의 집단전법을 흉내만 낸 녹림의 집단전법이 있었다. 정교함과 위
력에 있어 현저한 수준 차이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관군이나 백도 고수들과
의 싸움에서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어, 집단 전법에 대한 비난이
더욱 거셌다.
민선이 회하를 거쳐 서주에 도달한 것은 이틀 뒤였다. 소천 일행은 서
주에서 일단 배에서 내렸다. 서주에서 만날 사람이 있었다. 소천은 그가
반승과 절친한 사이로 새로이 영입하려는 고수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소
천 일행은 저 멀리 보이는 서주성을 바라보았다. 서주는 너른 화중평원의
중앙에 자리한 군사 교통의 요충지였다. 서주는 유비가 도겸에게 찾아가
몸을 의탁했던 곳이었다. 이곳은 전란의 시기가 찾아 오면 서로 차지 하려
고 들어 예로부터 많은 싸움이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한낱 과거지사일 뿐
지금은 평화로운 시대였다. 세 명은 서주성이 목적지가 아니었기에 성내로
들어가지 않고 옆길로 성을 비껴갔다. 서주성 옆으로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었는데 냇물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들여다 보던 소천이 고개를 갸
웃하며 반승에게 물어 보았다.
"냇물이 왜 이렇게 검은 겁니까?"
"위쪽에 큰 노천 탄광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물이지요. 바람
이라도 한번 불면 천지를 암흑 속에 가두어 버린답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
들은 백의를 입지 않지요."
반승은 어깨를 살짝 털었다. 그 말을 반증이라도 하듯 검은 가루가 묻어
나왔다. 느끼지 못하는 사이 탄가루가 그들의 몸에 묻기 시작한 것이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더니 허언이 아니었군요."
소천의 말에 일행은 가볍게 웃을 수 있었다. 검게 변색된 길이 나타났
고, 그 위로는 석탄을 실은 마차들이 쉬임없이 오가고 있었다. 탄광으로
이르는 검은 길을 피해 작은 길로 들어선 뒤 얼마후 그들의 앞에 구릉이
나타났다. 반승은 산이라 했지만 소천이 보기에는 조금 큰 구릉에 불과했
다. 달리 생각해보면 평야지대인 화중에서는 산이라 부를 만 했다. 산구비
를 돌아 가다보니 아까 본 검은 석탄물과 달리 매우 맑고 깨끗한 물이 흐
르는 계곡이 나타났다. 계곡의 좌우에는 나무들이 빽빽히 솟아 있었고 가
지마다 잎들이 무성했다. 산 능선 하나 차이인데 딴 세상에 온듯한 느낌이
었다. 어느새 햇살이 잎들 사이에 길게 누웠고 계곡의 아래쪽에는 천수답
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수십여호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보였
다.
밥짓는 연기들이 산봉우리 아래로 흩어지고 어디선가 새울음소리들이 마
을에 손님이 오는 것을 알리는 듯 울어대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관제묘
가 오랜 풍상을 이기고 자리해 있었다. 그 앞에는 몇 명의 꼬마들과 계집
아이들이 흙장난을 치고 있다가 낯선 이방인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반승이
고개를 숙여 한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는 육노인의 친구들이란다. 육노인이 어디 사는지 이야기 해줄 수
있니?"
아이는 손가락으로 마을 뒷편을 가리켰다. 반승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
어 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세 명은 마을 구석에 있는 작은 오두막 앞에 다
가갔다. 반승은 목청을 가다듬고 소리를 질렀다.
"육가야! 나 반승이 왔다!"
덜컹, 문이 열리고 한 명의 사내아이가 고개를 삐쭉 내밀었다.
"할아버지는 호수에 가셨는데요. 누구시죠?"
아이의 몇마디의 말도 힘들다는 듯이 땀을 흘렸다. 그리고 몸은 전체적
으로 말랐는데 두 눈에는 생기조차 감돌지 않고 있었다.
"나는 반승이라고 한다. 네 조부와는 오랜 친구지. 여기서 기다려도 되
겠느냐?"
아이는 말할 힘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삶은 감
자 몇 개를 쟁반에 담아 가지고 왔다.
"찬거리가 마땅치 않습니다."
"아닙니다."
소천은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 삶은 감자 하나를 입에 가져갔다. 헌데 껍
질을 벗기지도 않고 한입 베어 물었다. 그것을 보자 아이는 약간 의아한
듯이 바라보았다. 껍질을 벗기지 않은 감자는 떫어서 보통 사람들의 입맛
에나 맞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삶은 감자가 이곳에서는 귀한 주식이기는
했지만 행색이 멀쩡한 사람들이 맛있게 먹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었
다. 소천은 전혀 거리낌없이 다시 한 개를 들었다. 이번에도 껍질을 벗기
지 않고 천천히 씹었다. 그것을 보자 반승이 물었다.
"왜 껍질을 벗기지 않으십니까?"
소천은 웃으며 감자를 다 먹었다.
"어릴 때 생각이 나서요."
홍균도 하나 들고 입에 넣었다. 소천은 입가를 소매로 스윽 닦고 소년에
게 포권을 했다.
"소천이라고 합니다."
소년은 약간 놀라면서도 침착하게 예를 갖추었다.
"육능풍이라고 합니다."
"나는 홍균이라고 하네. 자네 조부님을 뵌 적은 없지만 영명은 익히 들
어 알고 있다네."
어느새 해가 완연히 지고 긴 그림자가 문가에 늘어섰다. 육능풍은 반색
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홍균과 반승은 문가를 바라보았다. 반승은 씨
익 웃었다.
"오랜만이군."
문가에 선 긴 백발에 얼굴살이 쭈끌쭈글한 노인의 굳은살이 깊게 박힌
투박한 손에는 망태기가 들려있고 어깨에는 낚시대가 걸쳐 있었다. 노인은
아무말 없이 안으로 들어와 망태기와 낚시대를 문 옆에 내려놓고 반승과
홍균 소천을 바라보았다. 소천은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청룡장의 소천이라 합니다."
"구겸창 홍균입니다."
그 말에 노인의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구겸창 홍균…… 산동팔마를 단창에 꿰뚫었다는 그 구겸창 홍균 말이
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들어들 가시오. 오늘은 잉어를 잡았소이다."
"허허허, 물이 좋은 놈이군."
반승은 망태기에서 아직 팔팔뛰는 몇 마리의 잉어를 보고 군침을 삼켰
다. 스윽! 작은 소도가 잉어회를 뜨기 시작했다. 한쪽 면만 회를 뜨는데,
가벼운 손짓에 비늘이 벗겨지고, 껍질이 벗겨지고, 뼈가 발라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잉어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생기가 넘쳐 보였다. 그것은 그의 소도가 잉어의 혈을 베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소천은 묵묵히 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절정에 이른 검객이다. 이 정도 고수가 이런 궁벽진 산골에 은일자중
(隱逸自重)해 있다니 강호에는 역시 기인이사들이 많구나!'
"자 듭시다."
반승은 젓가락을 들어 고기 한점을 척 입에 넣었다. 그리고 마을에서 사
온 술을 혼자 훌쩍 마시는 것이었다. 육노인은 아무말 없이 팔딱거리는 잉
어만 바라보았다. 반쪽의 살점이 떨어 나갔는데도 잉어는 아직도 팔딱이고
있었다. 곤란해 진 것은 소천과 홍균이었다. 원래 반승이 육노인을 설득해
서 장으로 영입하기로 되어 있었다. 헌데 반승은 혼자 자작만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반승이 탁하고 술잔을 내려놓고 육노인을 물끄러미 바
라보았다.
"나는 자네가 이렇게 평화로이 사는지 몰랐네."
육정산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짓을 했다. 육능풍은 문을 열고 밖으
로 나갔다. 실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우리가 자네를 찾은 이상, 그들도 조만간 찾아 올 걸세."
"그렇겠지."
"자네 혈육이라고는 저 아이 하나 뿐인가? 아들도 살아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병으로 이년 전에 죽었네."
그렇게 말하는 육노인의 얼굴에 회한이 서려 있었다.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단지 팔딱거리는 잉어의 꼬리치는 소리만 크게 들릴 뿐이
었다. 반승은 술을 한잔 들이킨 뒤 육노인을 가슴께를 보았다.
"본 장에 명의가 한 분 계시다고 들었네. 그리고 그들과 싸울만한 저력
이 있네."
육노인은 하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소천은 잉어를 바
라보고 있다가 소도를 빼들고 잉어를 뒤집었다. 모두가 소천의 행동을 물
끄러미 지켜보았다. 반대쪽은 아직 비늘도 벗겨지지 않은 채였 다. 스스
슥!, 슥슥! 소천의 손에 들린 소도가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럼에도 껍질이 벗겨지고 뼈가 발라지고 작은 살점들로 나뉘어 지는 것이
순서대로 정확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잉어는 살이 모두 없어지고도 펄떡거
렸다. 육노인의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소천이 보인 솜씨는 평범한 한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육노인은 소천을 바라보았다.
"저의 세 분 사형 중 두 분은 저보다 회를 치는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한 분은 이런 재주는 없지만 이 잉어를 통째로 가루 내어 먹을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육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반승이 회를 한점 집어먹고 말했다.
"기회는 다시없네. 산동육가도법(山東陸家刀法)을 이대로 사장시키기에
는 너무나도 아깝지 않은가?"
산동육가. 현 산동의 패주는 백리세가이지만 십여 년 전만 해도 제남에
자리잡은 백리가와 청도 일대를 주무대로 하는 육가가 양대거산으로 존재
했다. 양가의 세력은 백중지세였다. 헌데 십년 전 육가는 하루아침에 멸문
당하고 말았다. 삼혈맹의 기습 공격 때문이었다.
산동 육가의 가주였던 육정산이 그의 친우였던 복마대협이 삼혈맹의 고
수들에게 주살 당하자, 삼혈맹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을 강호에 던졌다. 그
결과는 비참했다. 육가의 식솔 삼백구십오 명중 삼백구십이 명이 죽고 육
정산 삼 부자만이 기적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육정산은 십년 전의 혈겁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의 아들이 팔
년간의 투병 끝에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고 손자가 폐인이 된 것
을 보면서 복수의 칼날을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혼자 남
았다면 장도 한 자루를 들고 삼혈맹의 고수들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그의
발을 묶은 것은 유일하게 살아 남은 손자였다. 자신이 없다면 하루라도 연
명하기가 힘들 정도로 병이 골수에 박혀 있었다. 반승은 육노인의 얼굴 표
정이 살짝 변하는 것을 보았다.
"자네가 죽으면 손자는 누가 보살필 건가? 우리 청룡장에는 자네 두 조
손이 기거할 만한 집들이 많이 있네."
"늙은 노구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 말에 반승은 육정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사이에 홍균은 처음으로
회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아까부터 군침이 돌던 것이었다. 그는 잉어회가
이렇게 맛있는지 몰랐다는 듯이 거푸 몇 점을 집어먹어서 반승의 눈총을
사야 했다. 사 인은 반승의 고리눈에 모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서주에서 배를 탄 일행은 다시 북상했다. 이번에는 모두 남의를 입었다.
청룡장의 규정에 장의 세력권 밖으로 나갈 때는 청의나 백의를 입도록 되
어 있었다. 예외적으로 비밀 임무나 신변보호를 위해 기타 복장이 허용된
다는 조항이 있기에 세 명은 남의로 갈아입었다. 반승은 자신의 일이 쉽게
풀려 얼굴에 웃음기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육정산은 그곳의 생활을 정리
하고 수일 내로 장을 방문하겠다고 했다.
반승은 천리전서(千里轉書)로 육정산의 합류 소식을 장으로 보고 했다.
아마도 장에서는 고수들을 보내 극진히 환대할 것이 분명했다. 육정산은
삼혈맹의 포위망에서 살아 남은 최초의 인물이자 최후의 인물이었다. 삼혈
맹의 포위 기습공격을 받은 문파의 소속원은 어김없이 모두 주살 당했다.
포위 당한 상태에서 아들과 손자를 데리고 탈출한 육정산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룡장에서는 그런 육정산의 능력외에도 그의 명성과 덕망이 더욱 절실
히 필요 했다. 육정산은 곧은 성품과 불의와 타협치 않는 강직함, 의(義)
를 위해 희생할줄 아는 의협심(義俠心)을, 가문을 멸문지경에 이르게 하면
서까지 실천해 보여줌으로써 그를 강호에 몇 안되는 진정한 협객(俠客)이
라 불리우게 하였고, 많은 강호인들에게 경외받고 있었다.
청룡장으로써는 육정산의 가입으로 백도로부터 받고 있는 백도안의 사마
외도라는 오명이 많이 희석되길 바랬다.
서주를 떠난 배는 제령에 못 미쳐 멈추었다. 주위에는 이미 십여 척의
배들이 닻을 내린 채였다. 이곳은 운하가 넓어지는 곳으로 원래는 회수의
강줄기 중 하나였다. 좌우의 폭이 하도 넓어 그 끝이 서로 보이지 않을 정
도였다. 때문에 운하 폭이 좁아 수십 척의 배들이 멈추어 있는 것은 아니
었다. 강의 동쪽 갈대밭에 떠 있는 두척의 관선 때문이었다.
저쪽 갈대밭은 불에 타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매캐한 살 타는 악취가 바
람에 실려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역질을 자아내게 했다. 갈대밭에는
몇 명의 관인들이 이리 저리 움직이며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
쪽에 몰려들어 그 불타버린 갈대밭을 바라보았다. 소천 일행도 십여리에
걸쳐 불타버린 갈대밭을 바라보았다.
"의도적으로 불을 지른 것 같군요."
"여기서 이렇게 싸울 수 있는 곳은 사해방과 백리세가밖에 없을 껍니
다."
홍균이 소천의 말에 대답 하였다. 앞에 있는 배들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관군이 한척씩 조사하여 보내는 식이었다. 잠시 뒤 소천이 탄 배에도 한
척의 관선이 가까이 와서 뭐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줄사다리를 내려 그들
이 올라 올 수 있게 하였다. 몇 명의 관리들이 배 위에 오르기 무섭게 갑
판에는 사람들이 짐들을 가져다 놓고 늘어섰다.
산동제형안찰사(山東提刑按察司) 소속의 관리들로 어지간한 무림인도 우
습게 보는 관부무사들로 구성 되어 있었다. 대부분이 오랜 포쾌(捕快) 생
활을 한 자들이나 포두(捕頭) 중에서 유망한 사람들을 추려 뽑았고 군부의
무장들도 끼어 있어 그 위세가 대단했다. 그들은 수사관 생활과 관리의 우
월의식이 몸에 배었는지 양민들을 마구 다루었다.
짐들을 헤집고 사람들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곤 했고 돈 푼 깨나 있
어 보인다고 여겨지면 괜한 트집을 잡아 공공연히 뇌물까지 받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무관이 다가왔다.
"여행증과 호패(戶牌), 신분증명서."
그는 간결한 어조로 말 하였다. 당시에는 일반 포쾌들도 양민들에게는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일반 포쾌가 아닌 제형
안찰사 소속의 무관이었기에 더욱 목이 뻣뻣한 자들이었다. 포쾌의 무례한
언행에 소천의 눈쌀이 찌푸러들자 홍균이 재빨리 나섰다.
"제명형 제대인께서는 안녕하신가?"
그의 말은 크지 않았지만 배 안에 있던 무관들은 모두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제명형은 산동의 권력자중 한 명으로 산동 순무(山東巡撫)였
다. 안찰사(按察司)는 산동 순무가 지휘하는 곳 중 하나였다. 그가 제명형
을 거들먹거리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림은 당연한 일이었다. 관리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한 이들이었다.
무관들의 시선이 홍균에게 모아졌다. 그중 한 명이 놀라며 성큼 달려와
포권을 취했다.
"구겸창 홍균 홍대협 아니십니까?"
홍균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네. 헌데 자네는 제 도독(都督) 휘하 막장 중 몇 번째이지?"
"제가 어찌 감히 순무대인 휘하 막장에 들 수 있겠습니까? 홍대협께서
산동팔마를 단창에 꿰뚫으신 신위에 대해서는 순무대인께 익히 들었습니
다."
"순무대인이라…… 그 사이 또 승진을 하셨구만. 허허허! 다 지나간 이
야기지."
그 무관은 더욱 허리를 숙였다.
"순무대인께서는 홍대협을 매우 우러러보고 계십니다. 이곳까지 오셨으
니 순무대인을 한번 뵙는 것이 어떻겠는지요?"
홍균은 피식 웃었다. 과거 제명형은 자신 더러 관계에 투신을 하라고 몇
번이고 조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관계의 생리를 잘 알기에 일언지하에 거
절 한 적이 있었다.
"흠. 자네들은 일을 잘 처리하고 있군. 내 나중에 제대인을 뵙게 되면
자네들의 공로를 아뢰도록 하지."
그 말에 몇 명의 무관들은 얼굴이 상기되었고 몇 명은 손을 덴 것처럼
놀랬다. 제명형 순무대인은 청백리였기에 검문을 핑계로 몇푼의 은자를 챙
긴 자신들의 행동이 귀에 들어간다면 자리 보존이 힘들게 될 것이었다. 생
각이 여기까지 미친 것은 몇 명의 고참 무관들 뿐 이었다. 신참들은 자신
들의 공로를 순무대인이 알아준다는 말에 들떠 있었다. 홍균 앞에 있는 무
관은 살짝 얼굴 빛을 바꾸며 웃음을 흘렸다.
"저희 같은 무관들이야 모두 봉록을 축내지나 않으려 노력 하지요. 순무
대인께서 아신다면 크게 치하 하시겠지만 공이 없는데 상만 크면 오히려
남들의 비웃음을 살까 두렵습니다."
"허허허. 자네의 생각이 그렇다면야…… 헌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 강호의 수적들이 서로 난동을 벌인 모양입니다. 수십 명이 죽고 지
나가던, 정박중이던 배도 몇 척 부서졌습니다. 더 큰 혈전이 벌어지는 것
을 막기 위해서 안찰사께서 직접 출병을 명하셨습니다. 이 일대는 저희들
외에도 연대에 있던 수군 일천이 황하의 운하 입구까지 배치되어 있습니
다. 그리고 제령성에 보군 오천이 증원되었습니다."
"호오! 그렇게나 많은 병력을 움직이다니 정말로 큰 일이군."
"그렇습니다. 더욱 큰 일은 몇 몇 불순분자들이 이것을 기화로 민심을
흐트려 놓으려는 모양입니다. 안찰사께서는 그것을 사전에 막고자 운하 일
대를 항해하는 배들에 대한 검문검색을 강화하기 시작한 겁니다."
"흠. 그럼 철저하게 검문을 하게. 불순분자들을 그냥 놔둘 수야 없지 않
은가. 헌데 자네 이름이 뭔가?"
"무관 윤충이라 합니다."
"내 기억해 두지."
홍균은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윤충은 허리를 더 숙였다. 그러다가 이
마가 바닥에 닿을 것 같아 보였다. 무관들은 더 이상 무례하게 굴지 않고
빠르게 수색을 마치고 통행패를 내주었다. 그들은 다음 배로 자신들의 배
를 몰아갔다. 운하에는 하루에도 수백 척의 배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이 열 배로 불어나서 바삐 움직여도 모자랄 만큼 상납금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다른 조들이 들쑤시기 전에 많은 배들을 검문할수록 이
들에게는 이득이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날렵함과 신속함이 보
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