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정략결혼
쩔그렁! 쩔그렁! 도에 매달린 환(環)이 걸음에 맞춰 연신 도신(刀身)에
부딪치며 시끄러운 소리를 발했다. 환도는 도집 없이 허리춤에 꽂혀 있었
고 손잡이위에는 털이 수북한 손이 얹혀져 도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을 방
지하고 있었다. 환도를 쩔그렁이며 시끄럽게 걷고 있는 자는 청룡장의 호
법 구환도 진명이었다. 진명은 장주에게서 받은 밀명을 성공적으로 수행을
하였고, 방금 전에는 칭찬을 받고는 어깨가 으쓱해져 호법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후후후, 이번 임무를 잘 완수했으니 앞으로 장주도 나를 다시 생각할
것이다.'
그는 소매를 무섭게 늘어뜨리는 은전의 무게감이 좋았다. 이 번에 처리
한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정도의 은전을 하사한
다면, 앞으로 큰 일을 성사시킬 때, 그 복록이 엄청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명은 흥겹게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호법원의 안 마당에 큼지막
한 바위가 놓여져 있고 그 앞에 한 명의 청년이 웃통을 벗은채 구슬땀을
흘리며 권으로 바위를 내치고 있었다. 저런 무식한 놈이 누군가 하고 살펴
보던 진명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바위를 내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총호법인
소천이었다. 게다가 옆에서는 쌍수곤룡 오익상이 구경하고 있었다. 진명은
쌍수곤룡 오익상에게 다가가 물어보았다.
"오형! 지금 총호법께서 권법을 연마하고 계신 것 맞소?"
"보고도 모르시오?"
"흠. 목각인형이나 폭포에서 권을 수련하는 이들은 많이 보았소. 또 비
단 천으로 연무 하는 자들도 적지 않이 보았소. 헌데 저렇게 바위를 가지
고 한다는 것은…… 게다가 총호법께서는 검법을 연마하신 분 아니오?"
오익상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그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만류귀원(萬類歸元). 무도가 하나로 귀결된다는 소리가 강호를 떠돌기는
했지만 그거야 떠도는 소문일 뿐이었다. 검법과 권법이 상호 보완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수 때의 이야기였다. 검법은 섬세한 손의 움직임을 필요
로 했다. 물론 내외공과 기초, 체력, 정신력 등이 고수가 되는 길이지만
섬세한 손의 움직임도 무시 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헌데 검도 고수
인 소천이 저렇게 바위에 치며 손을 학대하고 있으니 이해하지 못하는 것
도 무리는 아니었다.
'설마 선천지경에 올라선건 아니겠지'
진명은 그렇게 생각하고 바위를 보고는 다시 소천을 보았다. 바위에는
아무런 자국이 나 있지 않은 점이 이상했다. 내공이 없는 이가 쳐도 손에
서 난 땀 정도는 묻기 마련이었고, 내공이 강한 고수가 치면 표면이 부서
지기 마련이었다. 공력이 심후하다면 바위가 움푹 들어가기도 했다. 따라
서 진명은 소천의 일권 일권에 바위가 패였으리라 짐작 했었으나 소천의
손이 끊임없이 바위 위를 때리는데도 멀쩡하기만 했다.
'그럼 공력은 하나도 쓰지 않고 자세만 잡는 것이란 말인가?'
진명은 그렇게 생각 하고 좀 더 지켜보았다. 후우! 소천은 수련이 끝났
는지 호흡을 고른 뒤에 옆에 있는 수건을 들어 얼굴의 땀을 닦았다.
"총호법……"
진명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소천을 불렀다. 소천이 무슨일 인가 싶어
몸을 돌리다가 허리끈 일부가 바위에 부딪쳤다. 순간 거짓말처럼 바위가
모래 알갱이처럼 부서져 내렸다. 그것을 보자 진명과 오익상의 눈이 커졌
다.
"헉!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
무당파의 면장과 같이 음유한 장력은 상대를 가격하면 겉은 멀쩡한데 안
은 산산조각이 나게 되어 있었다. 이런 내가중수법은 내공조예가 상승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더욱 놀란 것은 아무
리 내가중수법이라도 몇시간에 걸친 공격이라면 그 형체가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소천은 전신공력으로 치면서도 그 형체가 유지하게 한 것
이다. 진명은 바위와 소천을 번갈아 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소천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했다.
"진호법님께서 일을 성공리에 끝마치시고 귀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
다. 그래, 갔던 일은 잘 됐습까?"
진명은 난처해 하면서 대답했다.
"예 잘었습니다. 총호법께서도 며칠 뒤에 아시게 될 겁니다. 하지만 장
주님께서 직접 설명을 하신다기에……"
"그렇군요. 소주로 나가 며칠 쉬다가 오십시오. 혼자 가시면 적적하실테
니 다른 호법분들도 대동해서 갔다 오셔도 좋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오익상이 눈을 반짝였다.
"사형께서는 아무 말씀하시지 않을 겁니다. 예당에 가서 여비를 수령하
시고 며칠 놀다가 오십시오. 예당주님께는 이미 부탁 드려 놓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총호법."
오익상은 껄껄거리며 진명의 어깨를 잡았다.
"진형, 그만 갑시다. 소주의 미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소이다. 허허
허."
소천이 저만치 가자 진명은 손으로 소천의 치던 바위를 쳤다. 퍽퍽! 바
위는 모래알갱이가 흩어지듯이 부서져 내렸다.
'내가중수법이 극상승에 이르면 천근 거암도 일장에 가루로 만든다고 했
는데 총호법은 그러한 경지까지는 가지 못했구나! 하지만 당금 강호에 이
정도의 손속을 보일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총호법이 이러할진대 장주의
무공수위는 어느 정도일까?'
소천은 옷을 걸쳐 입고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총호법이란 자리는 꼭 해
야할 일이 있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매일 이른 아침부터 정오까지는 습관대
로 무공연마를 하였고 오후에는 장원의 돌아가는 제반 사정을 살폈다. 소
천이 거처로 돌아와보니 나갈때만 해도 분명히 닫아놓았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원에서 자신의 거처에 이렇게 무단으로
들어 올 수 있는 존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소천이 들어가자 의자
에 앉아 있던 한 명의 청년이 몸을 일으켰다. 소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청운! 연무가 끝났느냐?"
반갑게 청년의 손을 잡았다. 쭉 뻗은 검미에 성목이 반짝이고 부드럽게
흐른 턱선에 여자처럼 붉은 입술이 가로 놓여 약간 유약해 보이는 이 청년
이 바로 청룡장의 소장주인 단청운이었다. 삼 년 전 사문의 검법인 청룡팔
검식(靑龍八劍式)을 연마하기 위해 폐관(閉關)에 든 뒤로 만나지 못했었
다.
"소사숙 덕분에 많은 얻음이 있었습니다."
"하하하. 내가 뭘…… 그러고 보니 그 동안 부쩍 컸구나!"
소천은 단청운의 어깨를 두들겼다. 삼 년 전 폐관에 들 때만해도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 한 어린애였는데 지금은 훌쩍 커버려 제법 어른 티가 났
다. 소천은 그것이 대견했다.
"차를 가져오너라."
"예."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가 다과(茶菓)를 가져왔다. 시녀가 물러나자
소천이 입을 열었다.
"그래, 부모님은 뵙고 오는 길이겠지?"
"예, 지금 막 뵙고 오는 길입니다."
대답하는 단청운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단청운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숙께서 아버님 좀 말려 주십시오!"
차를 들다가 약간 멍한 기색으로 단청운을 바라보았다.
"아버님께서 저더러 백리세가의 소저와 혼약을 하라고 합니다."
소천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차가 약간 쓴 듯이 얼굴표정이 살짝 변했다.
'백리세가라.'
"네 생각은 어떠하냐?"
"모르겠습니다."
단청운이 고개를 돌렸다. 소천은 그런 단청운을 보며 말을 하였다.
"좋아하는 아가씨라도 있는 거냐?"
"그런 건 아니지만 아직은 혼인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직 사
숙께서도 가례를 올리시지 않았는데……."
"하하하 나도 아직 생각이 없다. 그리고 백리세가에는 혼기가 찬 소저가
셋이 있는데 그 중에서 대소저는 이미 정혼을 한 곳이 있고, 흠…… 이소
저는 강호에 이름이 크게 나 있는 여협객이라고 하더구나. 나도 보지는 못
했지만 그 미모와 재주가 매우 뛰어나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네 신부감으
로 부족함이 없다고 사형께서 생각을 하시는 모양구나. 나는 어디까지나
네 편이다. 대사형도 네 뜻에 반하는 일은 하시지 않을 게다. 젊은 나이에
는 강호를 떠돌며 많은 영웅호걸들과 여인들을 만나 보는 것도 좋은 일이
지. 그럼 내가 대사형을 한번 만나 보마."
"그래 주시겠습니까?"
"물론이다. 그전에 네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보자꾸나."
"예."
단청운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무장에 선 단청운은 호흡을 가다
듬고는 장검을 빼들어 청룡팔검식의 일초를 펼쳤다. 용이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는 듯한 청룡단수의 초식이었다. 바다가 햇살을 반사해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듯, 단청운의 검에서 반사되는 빛이 사방으로 뻗으며 현란한 광
채를 뿌렸다. 뒤이어 청룡팔검법의 초식들이 연달아 펼쳐졌다. 면면부절
흐르는 빛의 줄기는 검과 몸이 하나되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처럼 타올랐다. 그리고 사그라드는 불꽃 속에 단청운이 가
볍게 내려섰다. 짝짝짝! 소천은 손뼉을 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많이 터득 했구나. 대단한 성취다."
"사숙님에게 비하면 아직 멀었습니다."
"사부님께서 계셨다면 너에게 많은 지도를 해주셨을 텐데…… 지금 계시
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숙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뭐 아는 게 있느냐? 이사형을 찾아가 뵙거라. 나름대로 얻는 바
가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나는 이 길로 대사형을 찾아가 뵙겠다."
소천은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청룡대전으로 향했다. 지금 이 시각
이라면 대사형은 집무를 보고 있을 것이다. 단우백은 서찰을 접어 탁자 한
쪽에 밀어 넣고는 들어오는 소천을 바라보았다.
"제가 방해 된 것은 아닌지요?"
"방해될게 무어 있나. 그렇지 않아도 청하려던 참이었네. 앉게."
"예. 헌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청운이는 보았는가?"
"예."
단우백은 탁자 위에 있던 잡다한 것들을 한쪽으로 밀치고서 양 팔꿈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아 손으로 깍지를 꼈다. 그리고 소천을 지긋이 바라보았
다. 소천이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단우백이 먼저 말을 꺼냈다.
"부모의 마음이란 다 똑같은 것이네, 나는 그 아이가 좋은 짝을 만나기
를 바랄 뿐이네."
"하지만 당사자의 마음에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식의 정략 결혼
은 청운이에게 한평생 짐만 될 겁니다."
단우백은 실소를 흘렸다.
"조금 와전된 모양이군. 나는 아직 혼사를 결정하지 않았네."
"그럼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백리세가에서 우리에게 혼담을 제의해 왔네. 물론 공개적인 것은 아니
고…… 신응표국(神鷹驃局)의 오국주가 중간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있지."
"소주 신응표국 말입니까?"
"그렇네."
신응표국은 소주의 명문표국으로 국주인 신응 오응원은 무당파의 속가제
자였다. 그는 장강과 대운하를 주요 노선으로 표국을 운영해 왔다. 백리세
가는 산동(山東) 제남에 있었고 신응표국의 화물이 그곳을 무수히 지나다
녔다. 따라서 신응 오응원은 그 지역 실력자인 백리세가와 평소 안면을 익
혀둔 터였다. 물론 그의 기반이 소주에 있기 때문에 청룡장에도 인사를 자
주 다니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 신응표국에서 중매인으로 나서게 되었
다.
"어찌하실 겁니까?"
단우백은 대답 대신 탁자 한쪽에 접어둔 서찰을 건네주었다. 서찰의 내
용은 백리세가의 근래 동향을 일목요연하게 적어둔 것이었다. 그 서찰을
읽어본 소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홍무(洪武) 삼십오년 십일월 십삼일- 백리세가가 운영하는 철광 붕괴.
사망자 사십구명. 부상자 팔십 오명 발생.
동월 이십 구일- 백리세가 고수 세명이 하북 팽가의 도객들과 시비 끝에
격투. 두명 사망. 한명 부상. 이일로 팽가와 백리세가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었음.
영락 원년 일월 십구일- 사해방(四海幇)과 산동 운하 수로권을 놓고 제
령에서 격돌. 사해방이 패배해 퇴각했지만 백리세가도 막대한 피해를 입
음.
이월 이십 사일- 백리세가가 운영하는 제남표국(濟南驃局)이 운송하던
표물이 털렸음. 은자 이만 냥이 넘는 거액임.>
소천은 서찰을 건네주었다. 단우백은 그것을 받아 다시 탁자의 한쪽에
두었다.
"아직 강호에는 이러한 사실들이 알려지지 않았네."
"하지만 곧 알려지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래서 우리와의 혼사를 서두르고 있는 것이네."
"강호의 명문대파들은 우리의 급성장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며 이류 문파
니 정사중간이니 하면서 매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명문가중 명문가인
백리세가가 우리에게 혼담을 청해온 것은 석연치 않습니다. 더군다나 백리
세가는 오대세가 중 하나입니다. 이런 일이 부담이 되기는 하지만 백리세
가의 저력으로 본다면 굳이 정략결혼을 해가면서 까지……"
단우백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자네는 천생 무인일세."
"무슨 말씀이십니까?"
"백리세가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닐세. 그나마 아직
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자네 말마따나 오랜 역사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
력과 명문의 자부심이었네. 하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에 다다랐지. 오죽했
으면 명문대파들이 홀대하는 우리 청룡장과 혈연을 맺으려 하겠는가?"
"사형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백리세가의 둘째 소저라면 청운의 짝으로 모자라지 않는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가주었으면 하네."
"백리세가를요?"
"저쪽에서 생각하고 있는 소저가 누구인지, 그리고 백리세가의 현 상황
이 어떠한지, 조건이 뭔지도 알았으면 하네. 그리고 이소저의 품행에 대해
서도 알아보고."
소천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제게 맞지 않는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주작당주와 인의당주가 자네를 도울 걸세. 자네는 가는 길만 조심하면
될 걸세."
"제가 백리세가의 소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
까?"
"자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더 이상 진행시킬 필요는 없네. 우리 청
룡장은 반드시 백리세가와 손을 잡아야 할 만큼 허약한 곳이 아니니까 말
이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한번 가보지요. 하지만 최종 결정은 청운에게
맡겨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지."
소천은 단우백이 의외로 쉽게 승락하는 것을 보고 가슴 한구석으로 이상
하게 생각했지만 일단 읍을 하고 물러나왔다. 마음 속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으나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