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청룡장 (1/95)

  

  1. 청룡장

  

  담장 밖으로 살짝 나온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몇 장의 붉은 잎사

귀를 떨구어 냈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떨어지던  잎사귀는 담장에 찰싹 달

라붙은 담쟁이의 잎과 살짝 부딪쳤다가 다시금 떨어져 내렸다.

  사브락! 사브락! 떨어지는 잎사귀 너머로  담벼락을 따라 경쾌한 발놀림

으로 다가서는 사람이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하얀 피풍의 안쪽으로 빛

바랜 청의를 입은 사내였다. 이목구비가 수려한  청년은 낙엽을 밟는 경쾌

한 발놀림처럼 그의 무장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허리에 매어진 검은 가죽

띠 오른쪽으로 신발 목을 툭툭 건드릴만큼  긴 장검이, 왼쪽으로는 무릎까

지 내려오는 단봉 세 개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의 발걸음을 방해할 만한 

것들이었으나 매우 익숙해 있는지 전혀 움직임는데 지장을 주지 않았다.

  휘이-잉! 청년의 곁으로 한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얇고 하얀 

피풍의가 날리며 바람을 탄 잎사귀들을 살짝 흔들었다. 그 중 하나가 청년

의 단정하고 시원스런 이마를 덮은 푸른 건 위에 잠시 머물렀다 코를 타고 

흘러 내렸다. 그 순간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고, 낙엽은 다시 바람

에 실려 떠나갔다. 담을 따라 걸은지 얼마후, 웅장한 정문이 그 모습을 드

러내었다. 날아갈 듯한 문 위로 '청룡장(靑龍莊)'이란 글자가 깊이 새겨진 

검은 대리석 현판이 드러났다.

  현판 아래로 두 명의 무사가 지켜 서  있었다. 그들의 복장도 이 청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청년을 보자 가볍게 읍했다.

  "소당주님 잘 다녀 오셨습니까."

  "다행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시야

가 훤히 트이며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이 광장은 평상시에는 대외적인 행

사를 하는 곳이다. 정면에 보이는 웅장한  전각과 광장을 둘러싸듯 좌우로 

길게 뻗은 행랑은 내외부를 완전히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이것은 적의 침

공으로부터 아군의 움직임을 노출시키지 않고  적의 빠른 공격을 저지한다

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적이  이곳까지 쳐들어 온 적은 없

었다. 

  전각 정면에 예당이란 현판이 보였다. 장을 통하는 모든 길은 반드시 예

당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었다.  소당주는 예당으로 들어갔다. 

  예당의 넓은 내부에는 수십명이 장부와 주판을 쥐고 조용히 업무를 보았

다. 장부 넘기는 소리와 주판 튕겨지는 소리만 울려댈 따름이었다. 청년이 

들어서자 모두들 일어나서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청년도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의 반은 서가가 차지했는데, 각 서가 마

다 몇 명이 빽빽한 책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책을 정리하던 이들은 청년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단

지 자신들의 일을 변함없이 할 뿐이었다. 

  왼쪽 구석에 놓인  책상에는 중년인이 장부를  보면서 이마를 긁적였다. 

청년은 중년인 앞에 작은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여비가 남았습니다." 

  중년인은 고개를 들어 청년 보고 히죽 웃었다.

  "갔던 일이 잘된 모양이군."

  청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구룡채(九龍寨)의 수적들은 그 화물이 우리 청룡장의 것이라는 것을 알

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제가 도착하기도 전에 화물

을 내놓아 일이 아주 쉽게 끝났습니다."

  "피를 보지않아서 다행이야." 

  예당주 이귀는 기분 좋은 듯 탁자를  두들기다가 당장 눈앞의 일을 처리

해야함을 떠올리고는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에는  은표와 금화 그리고 진

주 세 알이 있었다. 처음 주머니를 건넬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물이었

다. 중년인은 고개를 끄떡였다. 

  "소당주, 자네는 역시 알뜰한 살림꾼이군."

  "별 말씀을.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이따 보세."

  이귀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이마를 긁적이며 조금전의 고민을 계

속했다. 청년은 이층을 가로질러 올라올때와는 다른 문을 열었다. 문 너머

로는 튼튼한 나무로 만들어진 목교가 보였다. 

  목교 아래에는 수십장 깊이의 구덩이와 창검이 거꾸로 밖혀 있었지만 위

장이 잘되어 있어서 마른  땅처럼 보였다. 목교 건너편은  돌을 쌓아 높은 

축대가 성벽처럼 길게 이어졌다. 이곳이  청룡장의 이차 저지선이었다. 유

사시에는 건너편에서 목교를 거두어들일 수 있어서 축대가 성벽 역할을 했

다.  

  목교와 이어진 길을 가다보면 연무장이 나왔다.  청년은 땀을 뻘뻘 흘리

며 연무에 열심인 사내들을 보고 힘이 나는 것을 느꼈다. 

  장원은 몇 개의 가산과 인공호수가 있을  정도로 넒었다. 하지만 장내에

서는 절대로 말을 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장주 이하  전 인원이 청년처럼 

걸어 다녀야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불평하지 않았다. 청년이 느

릿한 걸음으로 한참을 걸어 다다른 곳은  장원 내 남서쪽에 위치한 청룡당

이었다. 청년이 도달하자 몇 명의 무사들이 맞이하였다. 

  "무사히 다녀 오셨습니까?"

  "별 일 없었지?"

  "예."

  청년은 고개를 끄떡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의자에 앉아 서류들을 

훑어 보는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간단한  서류들로 급료수령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나머지는 잡비 내역서 등이었다. 이것은  그가 없는 보름 동

안 별 일 없었다는 증거들이었다. 

  "무상님께서 당주님이 귀환하시면 들러 달라고 하셨습니다."

  "사형이?"

  "예."

  '하기사 요즘  사형 얼굴이   많이 굳어졌지. 대사형  때문일  꺼야, 아

마...'

  

  청년은 눈살을 살짝 찌푸린채 전각을 나서 무전(武殿)에 이르는 길을 따

라 가는 동안에도 변함 없었다. 그동안 몇  명의 무사들이 인사를 하고 지

나갔지만 그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무전 연무장에는 사십 중반의 얼굴이었지만  벗은 상체에는 이십대의 잘 

발달된 근육이 움클 거렸다. 근육질의 팔과 함께 움직이는 그의 검은 격식

(格式)에 얽매이지 않고 유유자적 흐르고자 하나 어딘지 모르게 파탄을 드

러냈다.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사형, 검에 지나친 화기(火氣)가 실려 있습니다."

  청룡노야라는 전대기인의 제자이며, 청룡장의 무상(武相)이자 장주의 사

제 중 한 명인 마운룡은 노기 서린  얼굴로 검을 거두며 돌아보았으나, 곧 

막내 사제인 소천임을 알고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술을 준비해 두었네."

  마운룡은 소천의 대답도 듣지 않고 후원으로 향했다. 

  

  작은 연못과 잘  어우러진 정자에는 벌써부터  술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먼저 자리한 마운룡은 소천이 앉기 무섭게  자신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른 

뒤 바로 잔을 비웠다. 그리고 다시 잔을 채워 거푸 석 잔을 마시고서야 비

로소 소천에게 잔을 채워 주었다. 소천은 잔을  받아 들고 슬쩍 입가에 대

어 보았을 뿐 금새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운룡을 바라보았다.

  "이 청룡장은 누가 세운 건가?"

  "사부님이십니다."

  "그런데 사형이 아주 말아먹으려고  하고 있어! 그러니  내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천은 더욱 신중해진 얼굴이 되었다.

  "사부님께서 계시지 않을수록  사형제가 합심하여 장을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부님이 지난 오 년간 아무런  소식도 없으시지만 그분의 공력

과 능력이라면 앞으로 백년은 더 사실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어쩌면 어

디선가 신공을 창안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부님께 사형제들의 분

열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마운룡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투고자 하는 것이 아니네. 나 또한 사형과 협력하여 장을 번창시키고 

싶네. 그러나. 그러나 말일세. 사형이 먼저  우리 사제들을 견제하고 있으

니 어쩌란 말인가! 더욱 분통 터지는 일은 모두들 사형을 장주라고 부르는

데, 사부님이 장주의 직위를 양위하신 것도 아닌데 어찌 스스로 장주라 칭

할 수 있단 말인가! 사형은 공공연히  사부님을 태상장주님이라 말하고 있

으니!"

  "그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인의당(仁義堂)이라는 것을  만들어 강호의  고수들을 포섭하여 

자기 수족처럼 부리고 있다네. 어제는 내가  사형을 만나러 가는데 새파란 

것들이 사형의 명이라며 앞을 막는 거였네. 생각 같아서는 단 칼에 날려버

리고 싶었지만 꾹꾹 참았어. 헌데 더 가관인  것은 내가 왔다는 것을 알면

서도 나보다 늦게 온 인의당의 당주는  만나 주면서 내게는 시간이 없다고 

내일 오라는 거였네. 하하하! 사형은 변했어.  예전의 친근하고 대형 같던 

사형이 아니야."

  마운룡은 술을 들이켰다. 소천은 묵묵히 그런 사형을 지켜 보고 있을 따

름이었다. 마운룡은 다시 한 잔의 술을 마시더니 한숨을 토해 내었다.

  "권력과 부가 사람을 변질시킨 거야. 예전의 사형은 그렇지 않았어."

  마운룡은 눈을 빛내며 잡고 있던 술잔을  내던졌다. 가볍게 던진듯한 술

잔은 연못을 가로질러서 나무 그늘을 덥쳤다. 그늘에서 한 명이 훌쩍 뛰쳐 

나왔다. 술잔을 피하기 위한 행동인 듯  했으나, 술잔은 눈이 달렸는지 빙

글 선회하여 그 자의  미간을 노리며 덮쳐 들었다.  그 자는 혼비백산하여 

뒤쪽으로 뛰었다. 몇 번이고 공중제비를 돌며 피하던 그가 '털썩' 땅에 주

저앉자 그제서야 술잔은 추격을 멈추고 다시 마운룡의 손아귀로 돌아왔다.

  털썩 주저 앉아버린 중년인은 몹시 놀란 듯 했다. 잠시 후 그는 몸을 일

으키더니 손으로 엉덩이를 털며 주절거렸다.

  "사형은 나를 잡으려고 작정을 하셨소?"

  육 척이 조금 못되는 키에 배가 적당히 나와 있었고, 짧고 굵은 팔과 다

리는 마치 고무공을 연상케  했다. 목은 굵지만 ㅉ아  보이지 않았고 눈은 

가느 다란 실눈이었다. 그러나 눈에서 흘러나오는 신광만큼은 매우 매서웠

다. 그가 바로 청룡노야(靑龍老爺)의  네 제자 중  세 번째이자, 청룡장의 

총령으로 있는 서왕이었다.

  핑! 그는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연못의 가운데 있는 연잎을 밟고서 정자

에 내려섰다.

  "사형의 등평도수(登萍渡水) 신법은 매우 뛰어납니다."

  서왕은 헤벌쭉 웃으며 큰 주먹을 뻗어 술병을 움켜쥐고 벌컥벌컥 들이마

셨다. 입가로 흘러내린 술을 소매로 쓰윽 닦아낸 서왕은 소천을 보고 히죽 

웃었다.

  "너 승진하겠더라."

  "예?"

  소천은 서왕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룡당주로 영전한지 일년

도 안되었건만 다시 승진이라니? 그리고 이제는  승진 할 곳도 없었다. 있

다면 총령(總領)이나 무상의  자리였다. 그 자리는  이미 자신의 사형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마운룡이 쌍심지를 켜며 서왕을 노려 보았다.

  "무슨 소리냐?"

  "대사형이 막내사제는 나이가 어리나 무공이  뛰어나고, 같은 사부 아래 

동문 수학 한 처지에 당주의 직위에 머물게 하는 것은 마음이 평안치 않다

고 합디다. 그래서 백호당주(白虎堂主)를  청룡당주로, 백호당주에는 주작

당주(朱雀堂主)를, 주작당주에는 인의당의 당주인 구겸창(鉤鎌槍) 홍균(洪

鈞)을 임명한다고 합니다." 

  마운룡은 코웃음을 쳤다.

  "흥! 사형이 이제는 너까지 경계 하는구나.  그게 사제들의 수족을 잘라

내고 장의 요직에 자신의 심복을 심겠다는  의도가 아니고 뭐냐? 백호, 주

작당주는 사형의 수하들이었고 구겸창 홍균은  사형이 외부에서 포섭한 인

물이 아니더냐? 흥! 그래 소사제에게는 어떤  직함이 주어진 다더냐? 보나

마나 명예직이겠지?"

  서왕은 술병을 비우고 나서야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떡였다.

  "사형의 신통(神通)은 정말로 광통방통(廣通旁通)하외다."

  마운룡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서왕은 안주 몇 점을 집어넣고 우물 거

리며 말을 이었다.

  "총호법(總護法)에 봉한다고 하더이다."

  큽! 술을 입가에 가져가던 소천은 목에 걸렸는지 소매에 술을 토해냈다. 

마운룡은 고개를 저었다.

  호법이라는 자리는 강호에 명망이 드높은 인물을  받아들일 때, 주는 명

예직이었다. 때문에 문파(門派)의 호법은 그 문파와  별 상관 없는 경우가 

많았다. 문파 내 에서 잔뼈가 굵어 올라가는 자리는 보통 장로(長老)로 문

파의 원로로써 대접  받는 자리였다. 청룡장에서도  장로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소천의 호법 임명은 여러모로 보나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었다. 

  소천은 입맛이 썼다. 요즘 들어 장의 청년 무사들이 점점 자신을 우상처

럼 여기고 있어 걱정스러웠으나, 대사형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경계

해 올줄은 몰랐다. 소천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서왕은 할말이 끝났다는 듯 술병을 비우는데 열심이었다.

  "아무래도 사형과 담판을 지어야겠구나."

  마운룡이 장검을 집어들고 일어서자 서왕이 힐끔 바라보았다.

  "대사형을 이길 수 있겠소?"

  "내 비록 실력이 모자라 진다 하더라도 더 이상의 굴욕은 참을 수 없다. 

대사형은 지금 우리를 의심하며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내 소속에 있던 오

기령(五旗令)과 청룡단(靑龍團)을 자신의 직속으로  해놓은 것으로도 불안

하여 이제는 막내사제의 수하들마저  자신의 휘하에 거두려  하는 게 아니

냐? 오늘 내가 나서면 나  하나 죽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있다간 우리 모두 대사형의 손에 당하고 말 것이다."

  "사형. 말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니오?"

  서왕이 눈을 부라리자 마운룡은 코웃음을 쳤다.

  "흥! 네가 요즘 들어 장 밖으로 자주 나다니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소

주(蘇州)와 항주(杭州)의 미녀 십여 명을 첩으로 들였음은 이미 장원 안에 

소문이 퍼져 있다. 너는 그 돈이 어디서 났는지 말할 수 있느냐?"

  서왕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서왕이 일어서자 자연스럽게 마운

룡을 막아서는 모습이 되었다.

  "제기랄! 그래! 난 대사형에게 붙었소.  대사형은 무공도 뛰어나고 자질

도 좋소. 게다가 사람 부리는 수완도  좋소. 아마 사부님이 계셨더라도 대

사형에게 대권을 넘겨주셨을 것이오. 헌데  사형은 뭐요? 무공도 대사형에

게 뒤지고, 사람부리는 수완도 뒤떨어지면서 불평불만만 하고 있지 않소."

  마운룡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비켜라! 너와는 싸우고 싶지 않다."

  "제기랄! 그럼 사형은 누가 이 청룡장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

오? 결국은 사형도 이 청룡장의 주인이 되고 싶은 게 아니오?"

  마운룡은 발로 서왕을 내찼다. 그 발길질은  매우 신속 정확했다. 퍼억! 

서왕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피할 수 없었던  서왕은 그 충격에 뒤로 날아

갔지만 빙글 제비를 돌아  척하니 땅에 내려섰다.  부르르. 서왕의 움켜쥔 

주먹이 떨리며 가는 눈이 더욱 가늘어 졌다. 아까의 장난기는 온데간데 없

고 매서운 살기만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빌어먹을 사형, 어디 한번 해봅시다. 오래  전부터 사형의 검이 얼마나 

진전 되었는지 보고 싶었소이다."

  "뚫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다. 그  동안의 정리를 생각해 

너와 싸우지는 않겠다. 네가  주지육림에 빠져 있을 동안  나는 뼈를 깎는 

수련을 해왔다. 장담하건대 대사형과 싸운다면 그 누구도 승부를 예측하지 

못할 것이다. 사제, 너는 내 적수가 아니다."

  서왕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으나 대적은 하지 않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소천이 둘을 말렸다.

  "우리는 사형제(師兄弟)입니다.  사부님께서 보시면  뭐라고 하시겠습니

까? 두분 모두 노여움들 푸십시오."

  마운룡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관두자, 관둬."

  마운룡은 정자에서 신형을 날렸다. 그는 연못  위를 스치듯이 그냥 날아 

저쪽 숲으로 뛰어 들었다. 

  그 광경에 서왕은 눈에서  기광을 토했다. 그 자신은  연못 위의 연잎을 

밟고서야 정자에 도달했는데 마운룡은  단 번에 날아 간  것이었다. 그 한 

수만으로도 서왕은 자신과 사형의 실력차이를 알 수  있었다. 몇 년 전 마

운룡의 수준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마운룡은 지난 몇 년간 정말로 뼈

를 깎는 수련을 거듭해온 것이었다.

  서왕은 소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쉬고 내일 형수님을 찾아가 뵈거라. 네게는 어머님 같은 분이시

니 너를 보면 기뻐하실 게다."

  힘없이 말을 마친 서왕이 몸을 돌렸다. 소천은 돌아선 사형의 체구가 더 

왜소해 진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아렸다. 지난 몇 년간 마운룡과 소천의 

실력이 급등한 반면 서왕의 무공은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서왕 사형

의 방황은 그로인한  소외감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때는 다정했던 

사형제들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가슴이 답답했다.

                                                

  아침부터 비라도 한바탕 내릴 것 같이 구름들이 잔뜩 끼었다. 바람도 심

상치 않아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몇몇  무사들이 청룡당에서 짐을 날랐

다. 소천은 짐 나르는 광경을 지켜 보았다. 귀한 것이나 값비싼 것은 없지

만 수련 시절부터 쓰던 물건들이라 정이 들었다. 그래서 호법전(護法殿)에 

새로이 가구들을 들여놓는  것을 마다하고 쓰던  가구들을 옮기는 것이다. 

그때 한 무사가 총총히 달려왔다. 

  "총호법님! 장주님께서 대전(大殿)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천은 가볍게 고개를 끄떡이고는 청룡대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백명이 한꺼번에 들어와도 넉넉할 것  같은 거대함과 사람을 압도하는 

웅장함을 자아내는 대전의 정중앙에 백포를  걸친 중년인이 온화한 미소를 

띄고 앉아 있었다. 중단전(中丹田)까지 내려온  수염은 곧고 힘이 넘쳤다. 

단지 그가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위의 공기가 멈추어 있는 듯했다. 그

가 바로 청룡장의 신임장주라 할 수 있는 단우백(單于柏)이었다. 

  "어서 오게 사제. 구룡채 일은 수고가 많았네."

  "다행히 맡은바 소임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소천이 포권을 취하는 동안 단우백의 왼쪽에  앉아 있는 세 명이 실눈을 

뜨며 실쭉였다. 소천은 그들을 보며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오른쪽에 앉아 

있던 두 명이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아는체 해왔다.

  "총호법님으로의 승진을 축하 드립니다."

  "허허허 소당주께서 영전을 하셨군요"

  "별 말씀을..."

  소천은 가벼워 보이지 않게 정중히 예를 취했다.

  이 둘은 이번에 새로이 주작당주가 된 구겸창 홍균과 인의당주인 반월도

(半月刀) 반승(潘承)으로 소천과는 구면이었다. 

  인의당은 청룡장에서 영입한 고수들 중에서 호법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곤

란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인의당 고수들의 실력이 빈약

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호법은 장주의 명을 받들어야 하지만 인의당의 고수들은 굳이 그럴 필요

가 없었으니, 단우백이 호법으로 영입하려던 고수들도 인의당에 몸을 담는 

경우가 많았다. 두 당주들과의 인사가 오간뒤에  단우백은 소천을 좌측 삼

인에게 소개 시켰다. 

  "인사 드리게. 새로 호법으로 오신 분을이시네."

  소천은 좌측의 삼인을 보고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소천입니다."

  소천의 인사에 세명은 어정쩡한 표정으로 예를 갖추었다. 단우백은 좌측

의 삼인을 보고 입을 열었다.

  "이번에 총호법이 된 소천 사제요."

  그 말에 삼인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이들은 단우백의 초빙으로 청룡장

의 호법으로 들어온 강호 명숙(名宿)들이었다.  이들의 명성이나 실력으로 

볼 때, 저 앞에 있는  청년에게 쉽게 고개를 숙일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직속상관인 총호법이라 할지라도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 의사를 반영이라도  하듯 그들 중 가운데에  있던 자가 가장 

성질이 급한지 벌떡 일어났다.

  "장주! 소 소협이 장주의 사제임은 알겠지만 총호법이라는 것은 너무 한 

거 아니오? 우리는 총호법의 명을 받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정말이지 우

리의 체면을 너무 무시한 것이오."

  나머지 두 호법도  병장기들을 만지작거리며 단우백과  소천을 바라보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단우백은 허허  웃으며 수염만 쓰다듬었고, 구겸창 

홍균이 피식 웃은 반면 반승이 능청스레 입을 열었다.

  "본 장은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승진을 할  수가 있소이다. 쌍수곤룡

(雙手棍龍) 오익상(吳翼狀), 오대협의  정의감은 천하가  알아주는 것이니 

총호법과 몇 초 겨루어 뛰어난 실력을 입증하신다면 장주님께서 섭섭히 대

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기다렸다는 듯 오익상은 '휙!' 소리나게 소천 앞에 내려섰다. 어느새 그

의 손에는 두 개의 곤이 잡혀 있었다. 보통 곤보다 크게 짧은 것으로 일반

인의 허리께까지 올라오는 정도였다. 오익상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웃었

다.

  "한 번 겨루어 봅시다."

  그는 반경어(半敬語)를 쓰고  있었지만 묻어 나오는  목소리에는 깔보는 

듯한 기색이 짙게 깔려 있었다. 소천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런 상황

을 대사형이 유도 했기 때문이다. 소천은  아무 말 없이 일권을 내갈겼다. 

오익상은 대수롭지 않게 보고 코웃음을 치며  곤을 휘둘렀다. 하지만 소천

의 일권은 그 곤세를 너무도 간단히  뚫고 날아들었다. 퍼억! 오익상의 신

영이 그대로 날아올라 단우백에게 로 향했다. 단우백은 미소 띤 얼굴 그대

로 소매를 휘둘러 오익상의 큰 덩치를 살짝 쳤다. 그러자 오익상은 다시금 

방향을 바꿔 자신의 의자로  날아가 사뿐히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소천은 

오익상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양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익상은 얼굴이 벌개져 있었다. 그는 대뜸  이것은 사술이라고 반박 하

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기미를 보이기도 전에  입을 다물어야 했

다. 구겸창 홍균의 담담한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분 총호법께서는  석년 광혈이마(狂血二魔)를  포양호에서 잠재우신 

분이십니다."

  그 말에 삼인의 눈이 일제히 커졌다.  광혈이마라면 포양호를 무대로 온

갖 악행을 도맡아서 해오던 인물들이었다. 어찌나 포악한지 자신들의 영역

에서 나쁜 짓을 하는 놈이 있다면 찾아가  죽여 버릴 정도였다.  자신들의 

즐거움을 방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수십년간 광혈이마는  포양호 일대를 

지배해 왔지만 무공이 높아 인근에서는 제거할  고수가 없었다. 강호의 초

고수가 모습을 드러내거나 관부의  정병이 대거 출병하면  너른 호에 꼭꼭 

숨어 한동안 쥐죽은 듯이 지냈다. 

  포양호를 지나가는 청룡장의 화물선이 털린  사건이 일어났다. 광혈이마

가 흉수로 지목되었고, 청룡장에서 즉각  대응하여 그들을 소멸시켰다. 이 

사건은 강호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다만 누가 그들을 주살했는지만은 

알려지지 않았다. 강호는 철저히 힘에  지배되는 사회였다. 삼인의 호법은 

소천이 광혈이마를 죽인 고수라는데 저으기 놀랐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소천의 가벼운 말에 반승은 껄껄 웃으며 이야기를 하였다. 

  "흑산도(黑山島)의 흑산삼마(黑山三魔)도 총호법님의 검 아래 패하여 도

주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어디 운만으로 되는 일입니까."

  반승은 세 호법의 기를  철저히 죽여놓으려는 듯  소천의 무용담을 늘어 

놓았다. 흑산삼마라는 말에 두 호법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다시 주저앉

았다. 한결같이 놀라움이 가득 담긴 얼굴들이었다.

  

   단우백은 뒷짐을 지고 걷고 소천은 옆에서 따랐다.

  "이사제가 불만이 많다고 들었네."

  "사부님께서 돌아오시면 다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우백은 고개를 끄떡였다. 

  "사제도 내가 장주가 된 것이 불만인가."

  "이사형을 거두실 수만 있다면 저는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사제는 늘 자신을 논외로 두는군"

  그후 둘은 말 없이 잠시 더 걸었다. 바람을 따라 떠돌던 몇 개의 낙엽이 

이들의 발등을 스쳐 지나갔다.

  "지금 장은 매우 어려운 상태이네."

  "사형께서 조금만 야망을 버리시면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창고

에는 금은과 양식, 무기가 가득하고 연무장에는 정예무사들이 넘쳐나고 있

습니다. 게다가 사형의 주위에는 고수들이 즐비하고 절강(浙江) 일대와 장

강(長江) 하구의 민심이 우리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위에 널린 거

미줄 같은 정보망과 조직망이 모두 사형의  일언에 움직입니다. 사형은 강

호를 움직이는 거인 중 한 명이십니다. 사형, 이  정도에서 만족 할 수 없

겠습니까?"

  단우백은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러고 싶네. 하지만 세상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네. 며칠 전 풍

청방(風晴幇)이 멸문(滅門)당했네."

  소천은 흠칫했다. 풍청방은 무창(武昌)에서 가장  강성한 문파였다.  하

나의 문파를 세우기도 어렵지만 그것을 멸문시키는 일은 더욱 어려운 법이

었다. 당금 강호에서 단기간에 문파를 멸문시킬  만큼 강력한 세력은 오직 

한 곳 뿐이었다.

  단우백은 힘이 실린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삼혈맹(三血盟)에 의해서 멸문했네."

  예상과 다르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소천은  가슴이 진탕되었다. 삼혈맹은 

지난 백여 년 간 줄기차게 천하무림을  위협해온 곳이었다. 그들의 실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단지  그들이 멸문시킨 문파에는 삼혈기(三

血旗)라는 깃발을 남겨두어 자신들의 소행임을  알렸다. 때문에 강호 제문

파의 무사들은 삼혈맹을  몹시 두려워했다. 단우백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네."

  "그렇다면 다른 백도 문파와 연합하여  대응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사

형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면 수긍 할 겁니다."

  단우백은 코웃음을 쳤다.

  "누가 우리를 돕는단  말이냐? 풍청방이 멸문당할  때 무당파(武當派)의 

고수들이 근처를 지나고 있었지만 도와주지 않고 지나쳤다. 모두들 삼혈맹

을 두려워하여 그들과 맞서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지켜가야 

하는 것이다."

  소천은 묵묵히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큰  월동문을 지나자 작은 산자락

에 푹 파묻힌 듯한 전각이 보였다. 앞에는 작은 내가 흐르고 그 위를 가로

지르는 팔선교(八仙橋)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길가 좌우로 늘어

선 수양버들은 긴 잎을 흐드러지게 늘어뜨리고 있었다.둘은 팔선교를 지나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서자 수를 놓고 있던  중년 부인과 그 

옆에서 과자를 집어먹고  있던 소녀가 보였다.  단우백의 아내인 백연연과 

하나뿐인 딸인 단우소혜였다.

  "어서 오세요."

  백연연은 단아한 미소로 단우백을 맞았다.

  "잘 갔다 왔느냐?"

  부인이 소천을 향해 다정하게 말하는 사이 쪼르르 달려온 소녀는 소천의 

팔짱을 끼고 흔들었다. 소천이 백연연의 말에 대답할 사이도 없었다.

  "소오빠. 토기인형 사왔어요?"

  "오빠가 뭐냐? 사숙을 보고..."

  단우백이 혀를 차는데도 불구하고 소녀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소천에게서 

금낭을 건네받자 한번 흔들고 환히 웃으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자리에 앉게나."

  단우백이 권하는 자리에 앉던  소천의 시선이 단우백의  초상 밑 검대에 

고정되었다. 검대에 비스듬히 놓여진 한 자루  장검은 일반 장검으로 보석

은 고사하고 어떠한 문장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너무도 평범한 검, 하나 

그 검을 잘 아는 네 명에게 있어서 결코 평범할 수 없었다. 소천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지자 단우백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사부님께서 계시지 않으니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는 것이네."

  "이사형께서 저 검을 보셨습니까?"

  "아직 보지 못했네."

  그때 백연연이 차를  가져오는 바람에 둘의  이야기는 잠시 중단되었다. 

백연연은 소천에게있어 형수 이상의 분이다. 사부님의  손을 잡고 이 청룡

장에 왔을 때 단청운보다 더한 보살핌을 받았기에 소천은 형수님에게서 어

머니와 같은 정을 느꼈다. 백연연은 소천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어유! 이제는 장가갈 때가 다 되었네."

  소천은 머쓱해져 어깨를 으쓱거렸다. 

  "부인은 사제에게 못하는 말이 없소."

  "호호호. 당신은 소천이를 사제로 생각하지만  저는 큰 아들처럼 여긴답

니다."

  그 말에 소천은 잡고 있는 찻잔을 살짝 떨었다. 단우백은 백연연을 향해 

살짝 고갯짓을 했다. 백연연은 아쉬운 듯 떠나기 전 소천의 어깨를 집으며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신부를 얻을때는 그 가문의 기풍도 살펴  봐야 하는 법이다. 미모에 현

혹되지 말고"

  백연연은 그렇게 말 하고는 옆문을 통해서  나갔다. 소천은 찻잔을 내려

놓고 단우백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십니까?"

  "나는 진정한 청룡장주가 되고 싶네."

  단우백은 빛나는 눈으로 소천을 바라보았다. 

  소천은 그 시선을 회피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뒤 소천이 입을 열

었다.

  "이사형은 어찌 하실 겁니까?"

  "비무를 할 작정이네."

  단우백은 의외로 담담히 말 했다. 소천은 고개를 끄떡였다. 대사형은 자

신의 속내를 최소한의 지인들에게까지 숨기지는 않았다. 소천이 호감을 느

끼는 대사형의 큰 장점이었다.

  "물론 비공개로 하시겠지요?"

  "그래야겠지. 그리고 자네에게도 자격이 있네."

  "저는 포기하겠습니다. 일파를 다스린다는 것은 제게 무리입니다." 단우

백은 만족스러운지 씨익 웃었다. 소천은 그런 단우백을 보고 입을 열었다. 

  "사부님의 인준 문제는 어떻게 처리 하실  겁니까? 저희들이 한 번 찾아

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미 이 년 전부터 사람을 풀어놓았네."

  "아 그러셧군요. 비무는 언제 하실 겁니까?"

  "내일이네."

  

  호법원은 새로 지어진 건물에 자리했다. 청룡장은 급격히 발전하고 있었

기에 새로운 건물 수요가 많았고, 나날이 커져가는 힘에 걸맞게 기존의 건

물과 대비되는 큰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소천은 호법원을 둘러보다가 뒤따르는 세 호법을 돌아보았다.

  '쌍수곤룡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한 명은 절명도  풍파라고 했다. 또 한 

명은 진명인데, 별호가……?'

  소천은 맨 우측에 있는 호법의 허리에 달린 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구환도 진명.'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계십니까?"

  쌍수곤룡은 두 개의 곤을 꺼내들고 입을 열었다.

  "소대협! 본인은 아까의 일 수에 승복을 할 수 없소이다. 소대협이 번거

롭지 않다면 다시 한 번 겨루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소천은 고개를 끄떡였다. 

  "이렇게 솔직히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공격하시지요."

  소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쌍수곤룡의  두 숙동곤이 폭풍노도의 기세로 

밀어쳐 왔다. 쌍수곤룡이 강호를 질타 할 수  있게 만든 이십팔 초의 곤법

이 모조리 펼쳐졌다. 

  숙동곤의 거센 기세에  소천은 가랑잎처럼 흐느적거리는  듯 했다. 곤은 

당장이라도 소천의 목숨을 빼앗아 갈 것만  같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쌍수곤룡이 소천을 가지고 놀고  있다 생각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쌍수곤룡의 내심은 초조했다. 십수 초가  흘렀음에도 자신의 곤이 소

천의 옷자락 조차 스치지 못하고 있었다. 

  기세가 위풍당당해 보인다고 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었다. 쌍수곤룡은 초

식이 다 끝나갈 무렵 훌쩍 뒤로 물러났다.

  "허허허, 총호법의 경공은 무림일절로 손색이 없소이다."

  쌍수곤룡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소천도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치

켜세웠다. 이번에는 절명도 풍파가 허리에서 도를 뽑아 들었다. 

  "무기를 뽑으시오."

  소천은 주저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절명도  풍파가 일직선에 가까운 초

식으로 소천의 천중혈을 노리고 날아 왔다. 소천의 몸이 빙그르 돌며 풍파

의 도세를 흘려 보냈다. 이후 절명도의 손목을  쳐 그의 도를 낚아채는 것

은 거의 동시였다.

  "엇!"

  어찌나 빨랐던지 풍파의  놀란 소리가 뒤늦게  터져나왔다. 소천의 손에 

절명도가 들려 있었을 때  그의 검은 이미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소천은 

얼굴이 벌개진 풍파에게 절명도의 손잡이를 내밀었다.  풍파는 더 이상 아

무말 없이 받아 들었다. 

  소천은 구환도 진명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대단한 금나수법입니다. 안계를 넓혔습니다. 총호법님."

  "별 말씀을... 장 내에서 불편한 점이나 개선해야될 사항이 있으시면 언

제든지 저를 찾아 주십시오."

  소천은 그들을 뒤로하고 호법원으로 들어갔다.  호법원은 그의 집무처이

자 거처였다. 이곳에는 시녀와 몇 명과 일반  잡무를 돕는 무사 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수십 명의 무사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는 위

치가 아니었다. 소천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창밖의 산자락에는 벌써 

밤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마운룡은 새벽에 일어난  이후부터 계속 자신의  검을 정성스레 닦았다. 

입술로 가볍게 문 한지와 검신을 오가는  얇은 비단천이 한점 흐트러짐 없

었다. 

  문득 손길이 멈추어졌다. 마운룡은  검을 들어 눈  앞에 가져다 놓았다. 

시리도록 투명한 검면에 그의 얼굴이 반 쪽씩 실렸다.

  '무엇 때문일까? 대사형이 사부님의 지위를 이어 받는 것은 강호의 도리

이다. 헌데 나는 사형이  미덥지 못한 것일까?  모두들 사형을 지지하건만 

왜 그럴까?'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은 결판이 나는 것이다.마운

룡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배어 문 한지를  떼어냈다. 한지에는 침 한 방

울 묻어 있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서자 눈부신 햇살이 그의 눈을 잠시 어

지럽게 하였다. 햇살의 광채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누군가 서 있는 듯한 

흐릿한 환영이 잠시 보이다가 점점 형체가 선명해졌다.

  "사제!" 

  마운룡 앞에 서 있는 인물은 바로 소천이었다. 소천의 얼굴은 햇살을 등

져서인지 어두워 보였다. 소천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가시지요."

  마운룡은 소천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었기에 말 없이 뒤따랐다. 가산

(假山)과 수로를 지나 장원 뒤편 후원에 다다랐다. 숲이라 부를 수 있을만

큼 큰 후원이었다. 그곳 중앙부에 사방 수십  장에 이르는  공터에는 병풍

처럼 나무들이 둘러쳐져 있었다. 

  단우백은 먼저 도착하여 기다렸다. 한쪽에는 서왕이 나무등걸에 올라 앉

아 있었다. 단우백을 본 마운룡의  얼굴이 굳어들었다. 마운룡은 단우백의 

십 장 앞에 섰다. 단우백은 한 손에 장검을 들고 있다가 마운룡을 보자 겸

연쩍은 얼굴을 했다.

  "사제. 이 대결로 이후 서로 의를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세."

  "나도 사형과 피가름까지 하고 싶지 않았소.  사형은 야망이 너무 크오. 

그로인해 언젠가는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것이오.  사형이 장주가 되는 것을 

꺼려하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오."

  "알고 있네."

  그것으로 서로에게 할말은 끝난 듯 했다. 마운룡이 먼저 검을 뽑자 단우

백도 검을 뽑았다. 둘의 검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서로 약간씩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일종의 인사라고 할 수 있는 기수식(起手式) 이었다. 둘은 서로

를 바라만 보았다. 같은 사부 밑에서 수십  년간 함께 무공을 닦아온 사이

였다. 서로의 장단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섣부른 일초는 곧 

패배를 자초하는 길이었다. 

  스스슥! 먼저 단우백이 움직였다. 풀잎 위를 스치듯 날아가는 초상비(草

上飛)였다. 무릎을 구부리지 않고 유령같이 단번에 십여 장을 날아가 일검

을 휘둘렀다. 

  스윽! 마운룡은 단우백의  검풍(劍風)에 오른쪽으로 밀려나는  듯 했다. 

놓치지 않고 단우백의 왼발이 회선을 그리며  마운룡의 어깨를 쳐갔다. 마

운룡은 고개를 숙이며 일권으로 단우백의 복부를 가격해갔다. 서로가 상처

입을 상황이라 둘은 펄쩍 뒤로 물러났다. 

  사사삭! 둘이 원을 그리며 내  달리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날아 올라 허공에서 부딪쳤다. 무수한  불꽃과 격렬한 소리가 터져나

왔다. 

  그들의 움직임과 검로는 너무나  빨라 서왕과 소천이라  해도 알아볼 수 

없었다. 

  둘은 다시 땅에 내려섰다. 단우백의 어깨에 작은 혈선이 보였다. 마운룡

의 허벅지에도 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단우백은  검을 치켜들고 다시 움

직였다. 마운룡은 검을 곧추 세운채 단우백이  날아오는 것을 냉정한 눈으

로 지켜보았다. 

  파악! 둘이 서로 스쳐 지나갔다. 챙! 하나의 검에서 잘려진 조각이 무서

운 속도로 날아갔다. 스각! 그 검날은 나무등걸에 깊이 파고 들어가 그 끝

이 보이지 않았다. 

  마운룡과 단우백은 다시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단우백의 손에 들

린 검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나 마운룡의  손에 들려진 검은 정확히 반토

막이 나 있었다. 마운룡은 우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내가 졌소. 대사형."

  "다행이다."

  단우백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서왕은 잠시  마운룡을 보다가 단우백을 

뒤따라갔다. 

  소천은 묵묵히 그 자리에 선채 패배한  사형을 지켜보았다. 마운룡은 허

탈한 듯 초지 위에 주저 앉았고, 바람이 그의 머리와 어깨에 내려 앉았다. 

소천이 다가가자 마운룡의 숙인 고개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혼자 있고 싶네."

  "알겠습니다. 이사형."

  소천은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는 몸을 돌렸다. 눈부신 햇살은 패배한그의 

주위에도 쏟아지고 있었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길에는 안개가 자욱히 깔렸다. 안개 주위에는 어슴

푸레한 사람들의 그림자가 바삐 움직였다.  총총걸음으로 뛰다시피 다니는 

시녀들의 모습도 보였다. 가장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로 바쁜 아침

이었다. 소천은 안개를  헤치며 산길로 접어들었다.  이곳부터는 인위적인 

것은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울창한 수풀로 무성히 뒤덮힌 소롯길에 

다람쥐 한 마리가 귀를  쫑긋하고 서서 소천을  한번보고는 후다닥 숲으로 

달려갔다. 소천은 피식 웃고는 계속 숲길을 따라  갔다. 산 중턱 즈음, 작

은 차밭과 대나무를 엮어 담장을 만들고, 대나무로 벽을 올려 짚으로 지붕

은 덮은 허름한 집이 보였다. 문은  달지 않았고, 한쪽으로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게끔 터져 있었다. 소천은 담장 밖에서  잠시 기다렸다. 잠시 뒤, 안

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사제인가?"

  "예."

  삐걱. 문이 열리며 마운룡의 수척해진  모습이 드러났다. 머리카락은 반

백으로 변해버렸고 눈가에는  주름이 깊게 자리잡았다.  소천은 저 모습이 

몇 달 전 이곳에 은거한 마사형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보면 볼

수록 마사형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다가왔다.

  "사형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 지셨군요."

  마운룡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런가? 몸이  홀가분해지니 정신이 더욱  또렷해진 모양이군. 

새벽 산책을 나가려던 참인데 같이 가겠는가?"

  "예."

  그들이 길이랄 수도 없는 소롯길을 따라  걷자 새벽 이슬을 잔뜩 머금은 

풀잎들이 둘의 발을 마구 적시며 앙탈을 부려대고 있었다. 

  "예전에 사부님과 저희 사형제들이 같이 걷던 때가 생각 납니다."

  소천의 말에 마운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꾸는 하지 않았다. 소

천도 더이상 아무말 없이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소천은 다시 입을 열

었다.

  "무상의 자리에는 서사형이  앉았습니다. 총령  자리는 폐지되었습니다. 

대사형이 마사형을 장로에 봉한다고 하셨습니다."

  마운룡은 그말에 별반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산이 아름답지 않나?"

  어느새 산 정상에 올라서 있었다. 아래로  장원의 정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아침 안개가 자욱히 끼어있어 큰  건물의 형체들은 흐릿했으나 안

개 속에서 뚝딱거리는 망치질 소리는 선명히 산을 울리고 있었다.  

  "고수들이 계속 영입되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인원이 불어나 새 건

물도 많이 늘었습니다. 예전 같지 않습니다."

  마운룡은 뒷짐을 지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부님께서는 늘 이곳에서 하늘을 바라보시곤  했지. 예전에는 그 의미

를 알지 못했는데 요즘은 알 것 같네 그려."

  "대사형은 사형이 돌아와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람이 좋지 않나? 사제."

  소천은 입을 다물고 산아래 풍경에 시선을 주었다.

  해는 어느새 높이 떠올라 있었고 안개들은  점점 햇살 속에 스러지고 있

었다. 소천은 사형을 만난 뒤 처음으로 자신의 말을 꺼냈다.

  "사형께서 떠나실 때는 꼭 연락을  주십시오. 사형마저 사부님처럼 홀연

히 떠나신다면 가슴이 아플 겁니다."

  "오고 감이 다 인연이지."

  그 어떤 말로도 다시 사형을 움직이게 할 수 없음을 알게된 소천은 가볍

게 읍을 하고는 산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 돌아본 마운룡은 묵묵히 허

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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