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거꾸로 가도 좋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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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화. 거꾸로 가도 좋아(1)
2023.08.04.
외전1. 거꾸로 가도 좋아
타가르 황제와 비밀 접견을 위해 파견된 스마일란 특사는 샨라 공주의 외숙부였다.
특사는 그레이언 황태자의 결혼 절차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를 매듭지은 후 황태자궁을 방문했다. 샨라 공주와 로카르드도 함께 자리했다.
샨라 공주는 특사가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소리쳤다.
[삼촌! 황태자가 저를 구박해요!]
그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스마일란어를 알았기 때문에, 모두 얼굴이 동시에 굳어 버렸다.
물론 가장 당황한 사람은 그레이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특사는 껄껄 웃으며 물었다.
[곧 남편이 되실 황태자께서 공주님을 어찌 구박하셨습니까?]
[나더러 맨날 조용히 하래요. 되게 기분 나빠요!]
그레이언은 얼굴을 뻘겋게 붉히면서 말했다.
[구박이라니, 그대의 반말 투가 적절하지 않음을 지적했을 뿐이잖소. 공주!]
하지만 샨라 공주는 그레이언을 깨끗이 무시하는 것으로 상황을 제 것으로 만들었다.
[예법, 예법, 예법! 타가르의 황태자께서는 되게 쪼잔하시다고요. 온갖 걸 트집 잡아요. 외숙부, 저 정말 힘들어요!]
특사는 그레이언에게 사죄하듯 머리를 숙였다.
[부디 어여쁜 눈으로 보아 주십시오, 황태자 전하. 스마일란이 숭상하는 자유분방함의 축복이 저희 공주께는 조금 더 많이 내려졌습니다.]
그레이언은 특사가 자신을 오해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긴장이 풀려 한숨을 쉬었다.
샨라의 평소 행동거지를 잘 아는 자가 사신으로 오지 않았다면, 커다란 갈등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레이언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뭐, 괜찮소. 이런 게 가끔 귀여운 것도 내 죄라면 죄니까…….”
그 말에 로카르드가 웃음을 꾹 참는 동안, 샨라는 씩씩거렸다. 외숙이 자신을 달래는 대신 그레이언을 다독여 배신감을 느껴서였다.
그레이언은 그녀가 또 무슨 돌발적인 말을 하기 전에 그녀의 어깨를 팔로 두르고 다독였다. 그러자 샨라의 얼굴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특사는 그 모습에 미소를 띠며 허리를 폈다.
그는 모두를 배려하여 제국어로 말했다.
“왕비 전하께 공주님께서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신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
“돌아가는 그대의 뱃길에 안전을 기원하겠소.”
그레이언이 말하자 특사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 몸이 늙어 노상에서 먹고 자는 일이 조금 버거워……. 스마일란까지 뱃길이 가깝지 않아…….”
스마일란인들은 말을 길게 끄는 법이 없었다. 저 망설이는 듯한 태도는 그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신호였다.
샨라는 그레이언에게 커다랗게 말했다.
[외숙이 기왕 제국에 왔으니 좀 놀다 가고 싶대! 이제 늙어서 또 언제 제국에 와서 놀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그레이언, 어떻게 할 거야?]
모두는 동시에 특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특사가 당연히 당혹한 듯 웃으며 샨라 공주의 말을 부정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머리를 살짝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로카르드가 재빨리 말했다.
“지금 제브론 호텔이 비어 있습니다. 황태자 전하.”
그러자 샨라가 놀란 사슴처럼 목을 쭉 빼고 말했다.
[제브론? 나도 갈래, 황태자.]
그레이언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그곳은 멀어. 그대는 나와 결혼식 준비를 해야지.]
[아아……. 아깝다.]
그레이언은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샨라가 아깝다고 한 대상이 제브론 호텔에 못 간 것인지, 그와의 결혼인지. 하지만 지금 그것을 따질 수는 없었다.
로카르드가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특사는 제브론까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
그레이언은 빙긋 웃고 있는 로카르드를 쏘아보았다.
‘저 새끼가 아주!’
그레이언은 눈밑을 바르르 떨었으나 반대할 수가 없었다.
예비 아내의 외숙을 푸대접할 수도 없고, 황가의 비공개 호텔에 외국인을 혼자 보낼 수도 없었다.
로카르드 저놈은 이 상황을 이용해 눈치 좋게 제 아내와 놀러 갈 기회를 잡아챈 것이다. 제브론 해변은 로리샤가 좋아하는 곳이니까.
가증스러운 놈. 원래 가증스러웠지만 결혼하고 나서 열 배 더 가증스러워진 놈.
그레이언은 그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로카르드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로카르드. 내 처외숙을 아름다운 휴양지에 모실 수 있게 되어 기뻐. 그런데 아카데미에는 지장이 없겠나?”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 지장이 크겠습니다만……, 저에게는 황태자 전하를 모시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저 말만 번드르르한 새끼.
그레이언은 문득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끼고 샨라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레이언을 빤히 보며 웃고 있었다. 특사를 제브론 호텔에 보내 주어 기쁘다는 표정이었다.
[착해.]
“하아…….”
그레이언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고, 특사는 눈치껏 물러났다. 로카르드는 즐겁게 물러났다.
* * *
“출장에 따라가자고요? 이 주 넘게 걸리는 곳으로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카이델 공자는 내 양팔을 쓱 문지르며 유혹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저런 얼굴을 하면 나는 어지간한 일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두려웠다.
“이 악녀가 공자님의 공무에까지 따라다니면……. 제 악명이 공자님에게까지 따라붙는 건 싫어요. 공자님이 공사 구분마저 흐려지셨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요.”
“제 이성은 이미 흐려진 것 같은데…….”
카이델 공자는 내 가슴의 여밈 끈을 끄트머리에서 손끝으로 꼬아 대다가 슬슬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끈을 중간에서 꼭 붙든 채 그를 쏘아보았다.
“일이잖아요!”
“황태자 전하께서도 허락하셨어요.”
나는 그가 내 여밈 끈을 붙잡은 팔을 은근히 쓸어내리다가 그의 손목을 딱 붙잡았다. 그러자 그가 뜨끔하며 손을 빼려고 했다.
“지금 등 뒤에서 손가락 꼬고 있었죠?”
“허, 허락받았어요. 무언…… 이기는 했지만.”
하지만 나는 마음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저렇게 가고 싶은지.
늘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내가 거절할까 봐 저렇게 어설픈 거짓말까지 하는 것이 좀 귀엽기도 했다.
“저는 가서 방 안에만 콕 박혀 있을게요. 공자님이 일하시는 동안에 방해되지 않게요.”
“훗.”
카이델 공자의 반응은 여전히 찜찜했지만, 나는 더 따지지 않기로 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거쳐 온 일을 생각하면 이 정도 휴식은 진작에 주어져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이델 공자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그는 심지어 공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돌아온 다음 날에도 태연하게 황궁에 나오지 않았던가.
피로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걸핏하면 죽을 뻔하느라 나 또한 긴장 속에 지내 왔으니 말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카이델 공자는 이미 나를 침대에 누이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그럴 때면 마치 우리 둘 다 아이 때로 돌아가 장난을 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 장난의 내용은 세상 끝까지 어른의 그것이었지만.
그가 내게 엄하게 명령했다.
“나한테 집중해요. 여보.”
“아이, 정말. 그렇게 부르면 부끄럽다니까요!”
“왜, 난 좋은데. 우리 로리샤는 이렇게 해 주면 말을 들을까?”
“아아, 공……!”
* * *
피곤해서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대니, 카이델 공자가 키득거리며 나를 당겨 제 무릎을 베게 했다.
나는 밤새 그를 ‘여보’라고 부르느라 목이 살짝 쉰 것 같았다. 내가 ‘여보’를 그토록 다양한 방식으로 부를 수 있었다니.
내 눈은 그 과정에서 흘린 눈물 때문에 살짝 짓물러 있었다.
그는 내 다양성이 퍽 감동적이었는지, 아침이 되어도 감격한 듯도 하고 엄숙한 듯도 한 얼굴로 말이 없었다.
“하아…….”
아무튼 우리는 그런 상태에서 그의 출장지로 출발했다. 내게 행선지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의 장난의 일부였다.
우리가 수행해야 할 특사를 만났을 때, 특사는 눈이 퀭한 나를 보고 ‘부인의 낯빛이 마치 폭풍우를 견딘 선원과 같소.’라고 했다.
그리고 카이델 공자는 그것을 핑계로 특사가 아닌 내 마차에 홀랑 올라탔다.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말리고 싶어도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그의 무릎을 벤 편안함을 알아 버리고 나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관에 들 때면 우리는 특사와 함께 식사했는데, 그는 내게 몹시 잘해 주었다.
이번에 와서 보니 제국 여인 중에 샨라 공주를 이해하고 친구가 되어 줄 만한 이가 나뿐이더라면서 말이다. 공주가 나를 퍽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마디로 나더러 자기 조카를 잘 돌봐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이어지는 찬사에 조금 민망한 듯 카이델 공자를 바라보면, 그는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만 이렇게 말했다.
‘여보.’
그걸 보고 한두 번은 음식이 목에 걸려 큰일이 날뻔했다. 하지만 사람이란 얼마나 잘 적응하는지, 시간이 지나자 그것도 견딜 만해졌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 때, 나는 우리가 가는 길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마차 창밖을 바라보던 내가 숨을 들이쉬고 말이 없자, 카이델 공자가 내 어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길을 알아보겠어요?”
“우리……, 제브론 해변에 가는 거예요?”
“당신이 좋아할 것 같아서요.”
“공자님!”
나는 몸을 확 돌려 그의 목을 껴안았다. 내 기세에 우리는 마차 좌석에 함께 넘어졌다.
“아이, 예뻐! 내 남편은 예쁜 짓만 해!”
그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윙크했을 때, 나는 고맙고 들뜬 마음에 단어를 정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여보는!”
“아아, 로리샤. 자극하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