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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아버지, 저 행복해요 (154/155)


152화. 아버지, 저 행복해요
2023.08.03.


내가 허탈하게 말하자 카이델 공자는 소리 없이 키득거렸다.

나는 반쯤 울먹이듯 말했다.

“제가 귀족이라면 저와 평생 상종도 안 할 거예요. 제 남편이 아무리 공자님이고, 첫 번째 사자님의 며느리라도요!”

“너무 걱정 말아요. 특이한 것에 끌려 하는 귀족도 많으니까. 그리고 이번에 보니 로바일 백작가는 내 생각보다 더 적이 많더군요. 그들은 이번 사건을 퍽 즐기고 있을 거예요.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거고.”

“말이 쉽죠…….”

“그들에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기만 하면 돼요. 아마 미샤 양도 그런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하는 걸 거예요.”

나는 그를 뚱하게 바라보았다.

“미샤를 퍽 높이 평가하시나 봐요?”

“그녀가 아카데미에서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당신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예요. 로리샤.”

나는 조금 울컥해서 말했다.

“정말요? 미샤가 공부를 해요?”

“아직 공부의 요령을 익혀 가는 단계인 것 같지만, 전처럼 성적이 위태로운 단계는 넘어갔어요. 그녀도 결국은 세 번째 사자의 딸이니까요.”

“다행이다!”

“미샤 양이 그런 귀한 시간을 쪼개 준 거니까 더 권하는 거예요.”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기쁘게 말했다.

“고 계집애가 그렇다면 저도 거절 못 하겠네요. 얘기해 줘서 감사해요. 공자님.”

“고마우면 보답을 해요.”

그의 입과 손은 이미 내 몸 위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아, 침대, 침대에서요!”

나는 버둥거리는 채로 그의 품에 안겨 침대에 던져졌다. 그는 그럴 때는 참 손 빠르게 말도 잘 들었다.

* * *

오랜만에 찾은 로아르 백작 저는 예전보다 평범하게 보였다. 요새처럼 지어진 카이델 공작 저에 익숙해진 탓인 것 같았다.

나는 조금 어색함을 느끼며 응접실로 향했다. 그러자 미샤가 응접실 밖으로 나와 나를 맞이했다.

“로리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마치 친자매를 맞이하는 것 같은 친절한 태도에, 나는 조금 겁을 먹고 말았다.

“왜, 왜 이래? 누구 잘 보일 사람이라도 있어?”

“응? 어머 얘! 너는 오랜만에 보자마자, 무슨 말을 그렇게……. 있지. 있다고!”

미샤는 다급히 속삭이며 눈치를 보았다. 나는 미샤의 시선을 따라 응접실 안을 흘끔 보았다. 열린 문 안에는 영애 셋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하나는 내 아카데미 동기, 하나는 선배, 그리고 저 노란 꽃무늬 드레스 영애는 선배가 데려온 손님이야. 밀드리드 양.”

“그리고?”

“그리고 그녀의 오빠가 잘생겼어! 물론 네 남편님 정도는 아니지만. 네 남편님은 이제 세상 남자의 족보에서 제해 버려야지! 얼마 전에 네가 그렇게 한 것 같은데, 아니니?”

“뭐…….”

“그렇다면 그녀의 오빠는 세상 최고로 잘생겼어. 됐니? 만족해?”

미샤는 저 노란 꽃무늬 드레스 영애의 오빠에게 반해서 내 도움으로 어떻게 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미샤가 워낙 빠르게 말해서 정신이 없었지만, 그중 한 마디가 내 귀에 턱 걸렸다.

나는 미샤를 위협하듯 쏘아보며 속삭였다.

“그는 최고의 남자야. 세상 남자 족보의 꼭대기에 이름을 올려야지, 제하기는 왜 제해?”

“하!”

미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요즘 낯빛까지 달라져 가지고 아주……. 알았다, 알았어. 그 족보 맨 윗줄에 네모 하나 그려서 카이델 공자님 전용칸 따로 만들어 줄게. 됐어?”

나도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미샤가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족보 맨 윗줄에 내 남편을 위한 칸을 따로 만들어 준다니까 갑자기 기분이 확 풀렸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거야?”

“밀드리드 양이 에벌린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거든. 약혼자를 빼앗기고 모욕당하고.”

“세상에.”

그 에벌린 로바일은 그런 짓을 나한테 처음 한 것이 아니었던 거다.

“그래서 이번에 일에 기뻐하고 있어. 그러니 가서 그녀를 좀 더 기쁘게 해 줘 봐.”

“미샤. 너 정말…….”

하지만 미샤는 내 말을 끊고 내 등을 응접실로 밀어 넣었다.

“어서! 밀드리드 양이 기다리잖아!”

* * *

미샤와의 티 파티는 생각만큼 끔찍하지 않았다. 두 아카데미 생도 영애들은 퍽 차분하고 영민했고, 밀드리드는 다정하고 유쾌한 성격이었다.

나는 이번 사건을 나와 카이델 공자가 처음부터 알고 선수를 쳤다는 부분은 쏙 빼고, 카이델 공자가 영웅적인 능력으로 나를 찾아낸 것으로 각색하여 말해 주었다.

그 납치범이 나를 어떻게 위협했고, 로바일 백작 부인의 언행이 어떠했는지 흉내 내자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다.

티 파티가 끝나갈 무렵 밀드리드가 말했다.

“이쯤에서 고백해야 할 것 같아요. 카이델 부인.”

“말씀하세요. 저는 어지간한 비난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답니다.”

그러자 미샤가 끄덕거리며 마치 어떤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듯이 끼어들었다.

“정말이에요. 로리샤는 타가르에서 제일가는 두께의 얼굴을 가졌답니다.”

“미샤!”

밀드리드는 웃으며 말했다.

“소문 속의 여인과 오늘 만난 부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어요. 카이델 부인, 그동안 당신을 오해했던 점 용서하세요.”

“저를 한번 만나셨을 뿐이잖아요. 오해를 다 풀었다고 하기에는 성급하실지도 몰라요.”

“그런가요?”

“그러니 오해를 충분히 푸실 때까지 다시 뵐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사실 그렇게 말할 때 나는 심장이 다 두근거렸다. 사람에게 다가가는 건 언제나 두려운 일이었고, 나는 그걸 자주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밀드리드는 내 말에 크게 웃었다.

“제 복수를 대신해 주신 은인과의 시간이라면, 저 또한 거절할 이유가 없죠.”

우리는 퍽 화기애애하게 헤어졌다.

미샤는 그들을 배웅한 다음 내 예전 방으로 돌아가는 나를 쫓아오기까지 했다.

“다음에는 밀드리드 양의 집에서 만나기로 했어. 그분의 얼굴도 볼 수 있을 거야!”

내가 그의 이름이 뭐냐고 묻기도 전에, 미샤는 기대에 부푼 듯이 웃으며 제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미샤의 여전한 모습이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미샤도 이제 진짜 행복으로 다가가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 * *

백작님은 밤에 귀가하자마자 내 방으로 찾아왔다. 백작님의 숨은 조금 거칠어져 있었다.

설마 내가 온 게 반가워서 달려온 걸까.

그는 나를 꼼꼼히 살펴보다 빙긋이 웃었다.

“예뻐졌구나. 로리샤.”

“그, 그래요?”

나는 저절로 얼굴이 달아올랐고, 백작님은 기분 좋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미샤 등쌀에 온 게지? 이 아비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작님이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는 걸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작님……. 삐지셨어요?”

그러자 백작님의 어깨가 놀란 듯 살짝 움찔해서, 나는 괜히 시선을 떨어트려야 했다.

“부정하지는 않으마.”

“죄송해요. 아시겠지만 그동안 좀 바빠서…….”

“알고 있다. 너는 그동안 엄청난 일들을 해 왔으니.”

백작님의 대답은 단조로웠지만, 나는 그가 그동안 내가 겪은 일들을 다 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왈칵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백작님을 원망하고도 싶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면, 나는 지금쯤 톨만 약재상에서 대장 노릇을 하고 있을 텐데. 매질당하거나 죽을 고생은 하나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카이델 공자와도 만나지 못하고 미샤와 화해하거나 밀리오라 후작 부인과 친해질 수도 없었겠지…….

하지만 이 모든 사건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보면, 백작님의 결단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위험한 모험이었다.

나는 목이 잠긴 채 물었다.

“왜 그러셨어요?”

“…….”

백작님은 무표정했지만 어쩐지 나는 그가 조금 웃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걸 보자 미친 듯이 화가 나는 기분이 들어 나는 호흡을 참았다.

문득, 결혼식에서 내 손을 잡고 제단으로 이끌던 백작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마치 새끼 새에게 첫 비행을 가르치려 둥지 밖으로 등을 떠미는 듯한 손길도.

‘이제 저기로 갈 시간이다. 로리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설마.

“설마……. 백작님은 처음부터 예상하셨어요? 모든 일이 이렇게 될 줄…….”

아니다. 아무리 백작님이라도 미래를 그런 식으로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백작님의 차분한 눈매에 걸린 웃음은 내 가정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행복하니, 로리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내 뺨을 타고 눈물이 도르르 굴러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틈엔가 내 등에 돋아난 작은 날개가 느껴졌다.

“네. 아버지. 저 행복해요.”

백작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나는 둥둥둥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그를 보고 싶었다.

내 남편을.

<작작 좀 들이대시죠>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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